보카수스 평원 회전
첫 회전의 뒷수습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세틴은 노스롭의 군영에 공격을 감행했다. 공격 방법은 불화살이었다. 1만 5천 가량 되는 궁병들을 총동원하여 방패병을 앞세우고 군영에 근접한 뒤 일제히 불화살을 몇 차례 날렸음에도 노스롭 군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기병대라도 달려 나와 반격을 하리라고 예상하고 그에 대한 대비까지 하고 있었지만, 군영 곳곳에 불이 붙어 난리를 치는 와중에도 군영을 굳게 닫고 화살로 대응할 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세틴의 사령부에서 모처럼 지휘관 회의가 소집되었다. 호아니가 먼저 전황을 개괄적으로 설명했다.
“현재 노스롭 군은 4만이 채 남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노스롭 본대가 2만 5천 가량, 여타 영주군이 1만에서 1만 5천 사이입니다. 저들이 군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더 이상의 피해 없이 게스트 강을 건너 퇴각하고자 함으로 보입니다.
노스롭이 다시 한 번 전면전을 펼쳐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첫 회전에서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하고 밀려서 충격을 받은 것도 있지만 영주들이 거의 협조를 해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노스롭 군영에서 내분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징후가 여럿 발견됩니다.
노스롭은 아마도 강이 얼어붙을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할 것입니다. 전력이 압도적으로 열세인 가운데 퇴각하려면 도강작전은 꿈도 꿀 수 없습니다.
걸어서 얼어붙은 게스트 강을 건너 거의 동해안까지 뻗어 있는 게스트린 산맥의 관문에서 결전을 치르려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어디에서 어떻게 결전을 치를지에 대한 작전을 수립해야 합니다.
첫째, 지금의 기세를 몰아 현재의 군영을 공략한다.
둘째, 후퇴하는 노스롭 군을 괴멸시킨다.
셋째, 게스트린 산맥 관문에서 결전을 치른다.
참고로 게스트린 산맥이 그리 높은 산들은 아니지만 산을 배경으로 설치된 관문을 뚫기는 성곽을 공략하기보다 일반적으로 더 어렵습니다.
다만, 게스트린 산맥에 오를 수 있는 곳들이 다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에 공략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늘 회의의 주제는 이중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입니다.”
사령부 참모로 있는 가우디 론이 먼저 발언권을 얻었다.
“우리가 아무리 지공을 한다지만 일부러 후퇴하는 것을 방치했다가 굳이 관문에서 어려운 전투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 군의 기세와 전력차라면 현재 군영에 총공세를 퍼붓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늘 신중론을 펼치는 보병대장 하푼 페드로가 반대하고 나섰다.
“당장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없어요. 막상 우리가 군영을 총공격한다면 도망칠 곳도 없는 적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거요.
양군의 피해가 지난 번 회전보다 몇 배는 날 수밖에 없지요. 나는 저들이 후퇴하기를 기다렸다가 도강 직전에 공세를 집중하는 것을 중심으로 작전계획을 짜는 편이 낫다고 보오.”
고진이 말했다.
“지금 정찰대에서 보카수스 영주성 주변과 게스트강까지는 대략적인 상황과 지형 파악이 끝낸 상태입니다. 정확히 언제쯤 강이 얼어 붙을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한 달 이상이 지나야 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곧바로 사람이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강이 얼어붙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노스롭이 후퇴를 감행할 시점이 다가오면 우리가 알아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작전을 선택한다면 그 이전에 게스트린 산맥 부근까지 정찰 범위를 넓혀서 충분히 상황을 파악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보강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기본적으로는 하푼 장군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새롭게 정보 참모가 되어 회의에 참석한 세키 하푼이 발언권을 얻었다.
“저는 최후의 전면전을 펼치기 전에 노스롭 직할이 아닌 영주들을 전선에서 이탈시키고 노스롭을 고립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포로가 된 병사들 삼분의 이 이상이 영주들의 병사였습니다. 애초에 전투 의지도 별로 없고 억지로 전장에 끌려 나온 편에 가까웠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노스롭군이 전면 후퇴할 시점에 화력을 집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군영 공격과 관문 전투를 배제할 이유는 없습니다.
단번에 박살을 내려고 할 필요는 없지만 군영에 다양한 압박을 가해야 하고, 경우에 따라 우리 군이 일부 우회해서 관문을 선점하는 작전을 펼칠 수도 있습니다.
몇 차례의 불화살 공격이 실제로 큰 타격을 주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습니다. 불화살은 살상 목적이 아니라 인명 피해는 별로 없었을 테고, 불화살로 화재를 일으키기도 어렵습니다.
불이 났다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수습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적 군영 내에서는 심리적 동요가 매우 컸습니다.
당장은 목책의 일부분을 무너트린다거나 해서 다양하게 압박을 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미리 영주들이 도망칠 명분을 만들 수 있으면 대성공입니다.”
세틴이 회의를 정리하는 발언을 했다.
“다음 전투를 치르고 나면 노스롭 반도의 거의 삼분의 일 가까이를 장악하게 되는 셈입니다.
미리 말씀 드리자면 노스롭 총독에는 바드랑 숄츠 보급대장님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보급대장께서는 민정 참모와 함께 점령지역을 어떻게 통치할지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기본 방침은 우리가 남서부 영지에서 시행한 방식과 동일합니다.
군영 공격은 가우디 장군이 가장 큰 의욕을 보이시니 오랜만에 배커 장군과 함께 친위대, 선봉대 위주로 정예 병사들을 선발하여 공략부대를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고진 장군은 조만간 저와 함께 직접 게스트 강 건너편까지 정찰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해 주세요. 저도 한 번 미리 돌아보고 싶습니다.
조만간 노스롭 직할군을 제외한 병사들을 모두 석방합니다. 그들을 우리의 전력으로 바꾸기도 쉽지 않고 먹어대는 식량도 적지 않습니다. 그들이 다시 군영으로 돌아가든 고향으로 돌아가든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상으로 회의 마칩니다.”
그날밤 세틴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티리아가 홀로 세틴의 군영까지 온 것이었다. 브라스틴에서 헤어진 후 소식조차 듣지 못했던 세틴이 티리아를 반갑게 맞이했다.
“티리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요 ?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 말랐네요.”
티리아가 세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나서 말했다.
“다시 뵙게 되어 무척 반갑습니다. 저간의 사정으로 다 말하자면 오늘 밤을 세워도 부족할 것입니다. 일단은 시오미의 심부름을 온 셈입니다. 전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티리아가 품에서 장신구처럼 보이는 마도구를 꺼내 세틴에게 건냈다.
“시오미의 음성이 담긴 마도구입니다. 급하시더라도 나중에 혼자서 들어보세요. 시오미가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작동법은 나중에 알려 드리지요.”
마도구를 받아든 세틴일 그것을 한참 동안 살펴보다 티리아에게 눈길을 돌렸다.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옴비두스에게 관직을 받지는 못한 모양이군요.”
티리아가 자못 분개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6백작령에서 우리가 그림자에게 공격받은 일을 기억하시지요 ? 세밀한 내막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옴비두스가 나와 시오미를 모그란데에게 팔아먹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어요.
모그란데가 나를 죽이고 시오미를 잡아가려고 벌인 일은 확실합니다. 저는 사실상 그때 옴비두스에게 버림받은 거지요. 명색이 승상이 되었지만 관직은커녕 내가 보이면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일 겁니다.”
“그렇군요. 옴비두스는 과연 상상을 초월하는 자입니다. 지금은 옴비두스가 시오미를 괴롭히지는 않습니까 ?”
티리아가 대답했다.
“옴비두스가 승상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실권은 별로 없습니다. 섭정이라는 옥상옥이 있으니 오히려 찬밥 신세지요.
제가 보기에 모그란데는 옴비두스를 그다지 믿지도 않고 여전히 이용해먹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옴비두스도 마찬가지 입장이겠지만요. 조정에서는 시오미의 눈치를 보는 자들이 더 많습니다. 시오미가 여차하면 불에 구워버릴 것처럼 매섭게 굴거든요. 하하하.”
“시오미의 그런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네요. 만만한 성깔이 아닌 줄이야 알고 있지만......”
“공자님, 아니 이제는 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
“지금은 노스롭 토벌군을 이끌고 있으니 보통은 장군으로 부릅니다.”
“장군님이 지금 시오미의 달라진 모습을 상상하기 힘든 것도 당연합니다. 실제로 예전과는 완전 딴판이거든요. 신체적으로 성숙한 거야 그렇다 해도, 저도 범접하기 어렵다 느낄 정도로 카리스마가 넘쳐 흐릅니다.”
세틴이 시오미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며 막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군요. 시오미가 마도구 말고 따로 전하는 말은 없나요 ?”
티리아가 말했다.
“시오미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 직접 마도구를 들어보시고 다시 해도 될 것입니다. 시오미가 현재 황도와 제국 전반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해드리라 했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사안들은 따로 정리까지 해주었어요.”
세틴은 얼른 마도구를 들어보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었다. 티리아의 말 자체에서도 시오미의 마음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 얘기는 제가 누구보다 신뢰하는 우리 군사와 함께 듣도록 할게요. 우리에게는 한 마디로 빼놓지 않고 기록으로 남겨야 할 중요한 내용이니까요,”
세틴이 사람을 시켜 호아니를 호출했다. 잠시후 도착한 호아니는 얘기를 듣자마자 티리아와 인사도 대충 나누고, 티리아가 풀어놓는 황도의 제국 상황에 대한 얘기에 빠져들었다.
티리아가 전해준 황도와 제국의 상황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모그란데가 그리 녹녹치 않은 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가 내린 전국 영주 소환령은 결과적으로 대실패였다. 유력한 대영주 중에서 모그란데의 발밑으로 들어간 자는 전무하다시피 했고, 황실에 대해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았어도 사실상 독자세력임을 천명한 귀족들이 속출했다.
그 중에서도 크게 부각되고 있는 세력은 갈리온 후작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 남부의 귀족 연합과 북동부 산악지방에서 시작하여 여러 영지들을 병합하며 황도로 진군하고 있는 우살리드 백작의 세력이었다.
갈리온은 오랜 세월 제국 남부 귀족들의 수장으로 인정받고 조정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자로 모그란데가 황실과 조정을 장악하자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 세력을 규합하고 모그란데와 일전을 불사할 태세였다.
우살리드는 최근에 떠오르는 신성으로 광대한 북부 산맥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레인저부대를 운영하며 세력을 키운 자였다. 가죽을 비롯한 몬스터 부산물에서 나오는 재력을 바탕으로 극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살리드는 모그란데의 소환령을 기점으로 주변의 영지들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여 황도 방향으로 진군해오고 있었다. 섭정에 대해 분명한 도전의 의사를 밝히거나 하지는 않았고 당장 황도로 쳐들어가지는 않았으나, 모그란데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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