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살리드의 선택
제국군은 페리앙에서 단 하루 머물고 하랑가 고원 방면으로 떠나갔다.
북동부와 하랑가 고원의 접경은 꽤나 넓은 편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하랑가 고원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하나였다.
전체적으로 북동부와 하랑가 고원의 고도 차이가 꽤 큰데, 북동부 방면에서 볼 때, 하랑가 고원은 그들의 동쪽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었다.
하랑가 고원에서 땅덩이가 뚝 떨어져 나간 것처럼 절벽을 이루고 있었고, 거의 전지역이 기어서라도 오르기 힘들 만큼 험악한 지형이었다.
그러다 보니 하랑가 고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전혀 없을 것처럼 보였는데, 신의 조화인지 칼로 쪼갠 것처럼 갈라진 틈 사이로 고원에 오를 수 있는 길이 하나 나 있었다.
하랑가에 오르는 길은 길도 반듯하고 마차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순탄했다.
그렇다고 해도 하랑가 고원에 오가는 이들이 워낙 적었고, 북부에서처럼 희귀한 약재나 사막에서만 나는 동물들을 구하려는 사냥꾼, 약초꾼들이나 간혹 드나들곤 했었다.
북동부 사람들이 ‘지옥으로 통하는 길’, 줄여서 지옥길이라고 이름붙인 이 통로가 시작되는 근처에 제국군이 군영을 설치했다.
하랑가 절벽은 워낙 높기도 하고 가팔라서 그 주변은 햇볕이 드는 시간이 적고, 물도 귀해서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세틴이 설치한 군영은 인적이 드문 허허벌판이나 다름없었다.
세틴은 본진에 많은 병력을 주둔시키지 않았고, 대부분은 주변 지역을 장악하고, 기존의 지배 세력들을 정리하는 일을 파견한 상태였다.
세틴의 본진에는 채 1 만도 되지 않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틴은 주변 영지들을 정리하는 일에 베른과 울브린을 투입했고, 자신이 직접 하랑가 방면을 정찰하는 일을 지휘하고 있었다.
돌아오고 있을 우살리드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통해서 북동부로 들어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나, 세틴은 우살리드가 반드시 지옥길로 올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세틴이 바네사와 오랫 만에 식사 후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이 외진 곳에 이제 바네사와 나 둘 뿐이군.
나와 가까운 사람들은 전부 제국 각지에 나가서 나름대로 활약을 펼치고 있고, 꼭 필요한 일이고 가장 적합한 일이라서 파견을 보냈지만 왠지 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야.
바네사는 괜찮아 ?”
바네사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요.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네요.
여기엔 나 말고 아무도 없어요.
소가주님처럼 가까운 사람들을 쫓아 보내듯이 여기 저기 떠나보내는 걸 쉽게 하는 사람도 드물 거에요.
저는 그게 일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당사자들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는 배려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프라움을 함께 떠나왔던 사람들, 황도에서 알게 된 사람들, 노스롭을 토벌하면서 만났던 사람들, 지금 소가주님 곁에는 아무도 없지만, 제국에서 한 가닥 하는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네요.
이 몇 년 되지 않는 사이에 소가주님이 해내신 일도 대단하지만, 그 모든 사람들이 제각기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야말로 소가주님 말고는 이 세상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부분은 ‘내가 해냈다’, ‘내가 이루어낸 일이다’고 주장하고 뽐내기 바쁠 뿐이죠.
소가주님이 ‘나를 따르기만 하면 언젠가 너도 한 자리 할 수 있을 거다’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늘 사람을 살피고 가늠하여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주고, 가장 자신있고 활기차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느라 고심하시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소가주님께서 믿고 맡겨주니 다들 열심이죠.
거창하게 충성 맹세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으로 따르고 있답니다.
저는 그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이라고 믿습니다.
누구도 소가주님을 대적할 순 없다고 확신을 가진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세틴이 오랫 만에 속이 시원하도록 웃었다.
“하하하, 바네사가 그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다 하다니 놀라운 일이군.
고집 세고 대쪽같은 시녀장께서 그러니 왠지 안 어울려.”
바네사의 표정은 진지했다.
“소가주님 말씀처럼 이 외지고 황량한 곳에서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없는 현실을 자각하고 보니 저도 생각이 많았답니다.
저는 누구 못지 않게 충실한 시녀장으로 사는 것이 유일한 신조였고, 지금도 죽을 때까지 소가주님을 모시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그동안 많은 일을 겪다 보니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어요.
제 생각에 천년 제국은 이미 소가주님의 세상입니다.
소가주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변화하겠지요.
황제가 되고자 하면 될 것이요, 다른 누군가를 제위에 올리고자 하면 그 또한 뜻대로 될 것입니다.
저의 눈에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다를까요 ?
앞으로 정국에 변화가 있다면 바로 소가주님의 의향과 태도가 결정적인 방향타가 될 것입니다.
사람 좋고 인심 좋은 호호공자가 그토록 큰 포부와 도량을 가진 분이라는 걸 브라스트에서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소가주님들 향해 들러붙는 자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물론 저도 그들 중에서 옥석을 가리기 위해 있는 힘을 최대한 보탤 생각입니다.”
세틴이 듣기에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지금까지도 세틴의 행보가 정국의 핵으로 작용한 경우는 많았지만, 앞으로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거라는 바네사의 생각이었다.
어려서부터 브라스트 궁에서 벌어지는 온갖 권력 게임을 지켜보고 숱하게 경험한 바네사였기에 세틴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네사가 아주 시의적절하게 꼭 필요한 걸 깨우쳐 주었어.
사실 이제는 제국 내에서 힘으로 나와 겨뤄 보겠다는 생각을 할 사람은 거의 없겠지.
어떻게든 내 편이 되고 나를 이용해보겠다는 사람들이 득실거릴 거라는 얘기지 ?
솔직히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은 없어.
생각할수록 중요한 지적이야.
황태자와 4 황자를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리는군.
어쨌든 우살리드의 일만 마무리가 되고 나면 황도에 가기는 가야 해.
일단, 호아니와 저스틴 형에게 황도에 계속 있으면서 변화를 살펴보도록 해야겠군.
벌써부터 시오미에게도 들러붙는 자들이 꽤 생기고 있다고 들었어.
시오미야 마법 연구에만 몰두할 뿐 정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니 한계가 있겠지만 말이야.”
바네사가 말했다.
“제 짧은 경험으로 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는 자들이라면 황태자와 소가주님의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는 것부터 시작할 거라고 봅니다.
지금 가장 불안한 사람은 황태자 자신일 테니까요.
실제 역사에서도 많이 벌어진 일이지만, ‘세틴이 황도에 들어오는 순간 황태자는 끝이다’는 식으로 말을 지어내 퍼뜨릴 가능성이 높아요.”
세틴은 다시 골치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바네사가 한 말이 십중팔구는 맞다는 걸 세틴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모그란데와 우살리드가 살아 있다고는 해도 제국에 공식적으로 반기를 들었던 모든 세력은 몰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내로는 남부의 갈리온 후작이 유일한 변수로 남아 있고, 동부왕국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제국에 적대적으로 나올지는 아직 가늠할 만한 정보가 부족했다.
세틴은 바네사의 말을 참고 삼아 향후 행보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완전히 말라 비틀어진 거지 행색을 한 우살리드의 일행 천 여 명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세틴이 군영을 설치하고 사흘이 지난 후였다.
세틴은 정찰대의 보고를 통해 우살리드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가 다른 길로 새지는 않는지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우살리드는 세틴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아닌지 모르는지 지옥길을 통해서 거의 무방비 상태로 내려왔다.
지옥길의 초입에 세틴이 단단히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우살리드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예의상 세틴은 직접 나가서 우살리드를 맞았다.
우살리드가 행군을 멈추게 한 후, 세틴을 한참 동안 노려 보고 있었다.
세틴은 우살리드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여기서 이런 꼴로 사령관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소.
싸움에서 진 장수가 무슨 할 말이 있겠소.
나와 내 병사들은 전투에서 진 것은 물론, 하랑가를 다시 지나 오면서 이미 지칠대로 지쳤고, 다시 싸우기는커녕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지경이오.
여기서 나를 기다렸다는 건 끝장을 보겠다는 것이겠구려.
자,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세틴이 안타까운 눈으로 우살리드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만나게 되어 나도 무척 유감입니다.
나는 진심으로 우살리드 장군을 제국을 위해 큰일을 같이 논할 만한 사람으로 생각했고, 같은 마음으로 노력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북동부는 이미 제국군이 대부분을 점령했고, 페리앙도 우리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전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영주들은 모두 황도로 압송된 상태입니다.
샬롬 부인도 예외는 아닙니다.
내가 직접 여기까지 와서 장군을 기다린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제국의 평화와 안정, 보다 풍족한 백성들의 삶을 위해 함께 일해보지 않겠습니까 ?
이 말을 하기 위해 여태까지 기다렸습니다.”
우살리드가 말없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
그의 눈에는 아마도 눈물이 가득 한 것으로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고 서 있던 우살리드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세틴 사령관님,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습니다.
내가 무슨 염치로 다시 백성들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
이런 상황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제가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일행 쪽으로 돌아간 우살리드가 그의 짐을 실은 말 쪽으로 가서 한참 뒤적거리더니 두툼한 책 한 권을 찾아서 들고 왔다.
“이것은 내가 영주로 부임하기 전부터, 철들면서부터 써온 일기입니다.
대부분은 일독의 가치도 없는 잡설에 불과하겠지만, 사령관께서 북동부와 북동부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 꽤 있을 것입니다.
사령관께서 나를 그저 못나디 못난 졸장부로만 기억하지는 말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여기서 이만 이별을 해야겠소.”
우살리드가 세틴을 향해 책을 던져주는가 싶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어 자신을 목을 그어버리는 것이었다.
말리기는커녕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세틴이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쓰러지는 우살리드를 안아 들었으나, 우살리드의 끊어진 경동맥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고, 목이 절반 이상 잘린 상태였다.
세틴의 눈에서도 저절로 눈물이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큰 꿈을 안고 일세를 풍미하던 한 사내의 처참한 말로에 누구라도 슬픔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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