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자
저스틴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법도에 따르면 오디어스를 비롯한 황자들은 물론이고, 그 아래 세대, 즉 황자들의 아들들도 모두 황도를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신황제가 특별히 배려를 해서 영지를 하사하거나 하지 않는 한, 그들은 모두 스스로 자신들이 살아갈 곳을 찾아야 했다.
지방에 친한 친척이 있거나 처가가 있으면 거기에 빌붙어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마는 것이었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황자, 황손들은 자신들이 가진 재산을 정리해서 어떻게든 살아갈 방도를 찾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원래 황제가 살아있을 때,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자손들이 살아갈 방도를 미리 마련해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그야말로 아무런 준비 없이 하루 아침에 황도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황자, 황손들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황제로부터 미리 작위를 받거나 하지 않은 이상, 황도에서 나가야 하는 황가의 형제들은 원칙상 신분이 평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는 황제가 살아 있을 때, 작위나 영지를 주는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황실의 자손으로 인정을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이 새로운 황제는 이들 황실의 자손들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저스틴이었다.
저스틴의 장인인 오디어스를 제외하면 저스틴과 가까운 사이라 할 만한 황실의 자손도 없었다.
황도에 살고 있는 황실 자손이 많은 만큼 그들은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집단행동이라도 벌이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그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졌다.
저스틴을 황제로 지목한 장본인이자 그의 장인이기도 한 오디어스가 제일 먼저 선황제의 장례가 끝나는 즉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황도를 떠나겠다고 선언을 해버린 것이었다.
오디어스가 순순히 법도에 따라 황도를 떠나겠다는데 그렇게 못하겠노라 버틸 수 있는 황자, 황손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황제의 장례식은 뒷전이고, 살아갈 길을 찾느라 부산을 떨어야 했다.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저스틴은 자신은 후궁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을 해버렸다.
이는 황궁을 어떻게 재정비하고 내관들을 어떻게 충당할 것인지를 의논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후궁들의 처소가 황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가 후궁을 두지 않는다면 사실상 황제 부부와 그의 자녀들이 기거할 장소는 현재 황제의 처소 하나 만 해도 충분할 정도였다.
저스틴은 황궁의 대부분을 현재 황궁 밖에 나가 있는 각 부처가 일상 업무를 수행하는 장소로 변경할 것을 요구했다.
지금까지는 황궁이 황제가 기거하는 장소였다면, 앞으로는 제국의 모든 행정 업무를 총괄하고 집행하는 최고의 행정기관으로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 것이었다.
황궁 밖의 황도에서는 수많은 황실 자손들이 떠나게 되자, 그들이 살던 집이 모조리 매물로 나왔고, 이는 황도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좋은 집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황실의 자손들이 황도에 좋은 인연을 맺은 사람이 어찌 없을까마는 세상 인심은 하루 아침에 변한다는 말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어느새 황도에서는 황실 자손들이 떠나는 것을 열렬히 환영하고 즐거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장례가 끝나기 전에 조정의 면모를 일신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어 조정의 모든 관료들이 저스틴의 말 한 마디,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새로운 사람들을 들이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다.
오디어스를 싸고 돌면서 그의 손발 노릇을 하던 내무대신을 비롯한 세력들이 일차적인 물갈이 대상이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황궁에 살던 황비들과 내관들을 비롯한 모든 자들이 멀리 유배를 떠나고, 황태자였던 오디어스와 황자들, 그 자손들까지 모두 황도에서 쫓겨나는 상황이니, 행여 자신들에게도 불똥이나 튀지 않을까 몸을 사렸을 뿐, 조정에서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보려는 시도를 하는 자들도 별로 없었다.
저스틴과 호아니, 세틴이 며칠 동안 의논한 결과, 새로운 조정은 지방에 행정, 군사, 교육, 세 분야에 관리를 파견하기로 했던 데에 맞추어 세 명의 수석 대신을 중심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각각 수석 내무 대신, 수석 군기 대신, 수석 문학 대신을 임명하고, 그들 아래 각각 3 개의 부서를 두어 대신이 관할하게 한다는 구성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신정책을 발표하는 날, 새로운 조직 구성과 세 명의 수석 대신, 아홉 명의 대신까지 동시에 발표할 계획이었다.
장례와 함께 새로운 조각, 새로운 정책을 준비하느라 모두가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밥도 제 때 챙겨먹지 못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던 세틴에게 뜻밖의 인물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왔다.
모그란데의 참모인 셔플린이었다.
그가 무슨 일로 세틴을 찾아 왔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으나, 아무리 바빠도 잠시라도 만나보기는 해야 할 사람이었다.
필시 모그란데와 연관된 일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큰 키에 제법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였단 셔플린의 행색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셔플린은 세틴을 보자마자 제자리에 넙죽 엎드려 최상의 예를 표했다.
세틴은 일어나라는 말도 없이 셔플린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가 왜 이런 모습으로 나를 찾게 되었지는 짐작도 못하겠소.
보다시피 지금 내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니 용건을 간단명료하게 말해 보시오.”
셔플린이 엎드린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만 들어서 말했다.
“모그란데와 옴비두스가 또 다시 역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내 비록 오랫동안 모그란데를 따랐던 사람이지만, 더 이상은 지켜볼 수 없어 이렇게 사령관님을 뵙고 이를 알리고자 합니다.”
세틴은 첫 대면에서 셔플린이 그에게 정신지배를 시도했던 때부터 그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모그란데와 옴비두스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듣기는 해야겠으나, 왠지 셔플린을 상대하는 일에 짜증이 벌컥 일었다.
“셔플린, 그런 일이라면 어디서 어떻게 일을 꾸미고 있는지 상세히 고변하면 될 일을 무엇 때문에 그리 뜸을 들이는 거요 ?
우선 내게서 환영한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어 그러는 모양인데, 난 당신이 그보다 더 큰 일을 가지고 온다 해도 그다지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 아닌데 ?”
셔플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차차 다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이제 와서 제가 무슨 댓가나 영화를 바라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이어지는 셔플린의 얘기는 대충 이러했다.
모그란데와 옴비두스가 동부의 귀족들에게도 큰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동부왕국에서 파견나온 자들에게도 크게 꾸중만 듣는 상황이 계속되자, 그들은 동부의 남쪽 모처에 은거하고 있는데, 그들이 데리고 있는 마법사들을 총동원해서라도 황도를 급습하여 다시 장악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밌는 것은 셔플린이 얘기를 하면서도 ‘모처’를 끝내 밝히지 않고, 그들이 데리고 있는 마법사들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실력있는 자들인지에 대해서는 소상히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세틴은 더 이상 얘기를 들어줄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셔플린에 대해 역모에 가담한 핵심 인물로 일단 자수를 한 걸로 인정해 주되 단단히 감금하고 철저히 조사를 하도록 조치를 내렸을 뿐이었다.
셔플린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찾아왔는지는 모르나, 세틴은 그의 말에 크게 무게를 두지 않았다.
아무리 높게 쳐 줘 봐야 결국 소수의 암살자들을 동원해서 일을 벌여보겠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세틴이 호아니를 불러 셔플린이 찾아온 일을 전해 주자, 호아니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새로운 조정에 끼어들 여지나 찾아보려고 벌이는 수작에 불과하다는 판단이었다.
호아니도 역시 셔플린이라는 사람을 극단적으로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정말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
호아니의 새삼스러운 질문에 세틴이 피식 웃었다.
“군사께서는 진작부터 알고 계셨으면서 뭘 그리 정색을 하고 물으십니까 ?
내가 수 천, 수 만의 목숨이 오가는 전쟁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매일매일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정치 놀음에 시달리는 것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뿐입니다.
일은 거창하게 벌일대로 벌여놓고 나 혼자 자유롭게 살겠다고 훌쩍 떠난다는 게 남는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입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래도 모든 일의 부하가 군사께로 집중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는 합니다.
군사에게는 진정으로 미안한 마음 뿐입니다.”
호아니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저는 원래 일을 좋아하고 일이 많으면 며칠 밤을 새우고 밥도 제대로 못먹어도 행복한 사람이니, 그것 때문에 제게 미안해 하실 일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걱정하는 것은 사령관님이 없을 때, 과연 누가 중심을 제대로 잡아줄 수 있을지, 제가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우려할 따름입니다.
솔직히 새로운 황제 폐하를 제가 잘 알지 못합니다.
사령관님께서 잘 해나가실 거라 장담하시니 그런가 보다 하지만, 저는 왠지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세틴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조근조근 말했다.
“앞으로 황제를 대함에 있어 세 가지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첫째, 저스틴 형은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자랐습니다.
그래서 타고난 신분에 의한 차별에 극도로 민감하고, 조금이라도 신분이나 출신을 가지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말에는 예민하게 반응할 겁니다.
그 점을 잘 살피셔야 할 겁니다.
둘째, 그의 주변에 오랫동안 함께 한 무인들이 있습니다.
이제 황제가 된 이상, 그 사람들을 중히 쓰려고 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을 아예 막겠다는 생각은 그리 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거나 감당하기 힘든 자리에 오르는 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군사께서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그 문제로 지나치게 대립각을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셋째, 저스틴 형은 생각보다 여러 방면으로 자질이 뛰어나고, 부족한 것을 배우겠다는 자세가 좋습니다.
군사께서 노골적으로 가르치겠다는 자세만 아니라면 저스틴은 많은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일례로 적당한 구실을 갖추고 예를 다해 책을 한 권 선물한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책을 정독하고 배움을 청할 것입니다.
군사께서 이 세 가지만 늘 염두에 두시고 가꾸시면 그는 누구 못지 않은 황제의 재목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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