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끓는 반격
놀란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은 사령관께서 거듭 강조하셨기에 저도 제일 신경을 많이 쓰고는 있습니다.
다만, 총독에 따라 의견 조율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총독들도 사람인지라 나름대로 욕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요.
어쩌면 조만간 저 혼자 힘으로는 제어가 힘든 상황들이 생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요.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대목인데 충분히 그럴 법합니다.
총독들이 군상 체계를 통해서 불어나는 수익에 대해 눈독을 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당장은 어렵지만 조만간 총독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아서 서로 만족할 수 있는 선을 마련해 봐야겠습니다.
놀란 경께만 맡겨 둘 문제가 아님을 분명하게 알았으니 제가 대책을 마련해 보겠습니다.”
놀란이 할 말이 많았는데 무슨 얘기부터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사령관께서 꼭 아셔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각 지역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군상 체계를 구축하고 관리하고 있는 지역들은 귀족들 대부분이 이미 반역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힘이 많이 빠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타 지역과의 교역과 상업이 크게 일어나자, 주민들이 너도나도 농사는 뒷전이고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으니, 이러다간 제국의 근간이 무너질 거라며 은연중에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자들 중에는 이를 빌미로 잃어버린 자신의 지위과 권한을 되찾을 기회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미 그런 취지로 황도에 줄을 대고, 황태자와도 접촉하는 자들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할 만큼 커버린 사령관님을 견제하기 위한 명분으로 삼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호아니 군사께도 따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황도에 계신 군사께서 알고 대처를 하셔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세틴은 미처 생각이 닿지 못한 문제였으나, 놀란의 얘기를 듣자 곧바로 상당히 중요한 문제임을 알아차렸다.
세틴이 추진하고 있는 개혁은 대다수 백성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크게 변화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귀족들의 반발은 당연했다.
그런 변화의 와중에 귀족들이 아무런 힘도 써보자 않고 그냥 시대의 뒤안길로 물러서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놀란 경께서 그 문제를 사소한 일로 여기지 않고 중시한다고 하니 무척 다행입니다.
제가 듣기에도 향후 정국에서 폭풍의 핵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문제입니다.
그들로서는 각 지역에서 반발하는 행동을 해봐야 잔뜩 큰 기대에 부풀어 있는 백성들의 반발만 더 키울 뿐이니, 황도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갈등을 이용해보려는 시도를 할 법도 합니다.
귀족들이라 해도 다 같지는 않을 터이니 놀란 경께서 사안별로 잘 대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놀란이 말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지금 지역별 총독들의 권세가 워낙 막강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니, 노골적으로 반발하는 귀족은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군상 체계에서 한 자리 꿰어 차거나, 자신들이 끼어들 만한 사업이 있을까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더 많지요.
반발하는 귀족들의 동태도 모두 그런 자들이 제게 귀띔해준 겁니다.
사실 모든 근심의 근원은 황도에 있지요.
이제 황도로 귀환하실 텐데 혹시라도 불의의 공격을 당하시기라도 할까 염려되어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아직까지 각 지역에서는 총독과 군상 체계에 대해 노골적인 반대를 표명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니까요.”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은 놀란이 또 다른 화제를 꺼내려 하는 것은 세틴이 가벼운 손짓으로 제지하고 상카를 바라 보았다.
“우리 투너미 전투의 영웅께서도 할 말이 많으실 듯합니다.
이제 상카 자작이 되셨다지요 ?
축하드립니다.”
언제나처럼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상카가 벌떡 일어서서 세틴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감사합니다.
제가 이번에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저스틴 장군은 백작위를 받았고, 토머스 경도 자작위에 올랐습니다.
황태자를 비롯한 황실과 조정에서는 우리 별동대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었고, 제국군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걸 굳이 말리면서 황도에 주저 앉혔습니다.
주제넘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황태자께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은가 보았습니다.
별동대 모두에게 연일 호화로운 연회를 베풀어 주었고, 저스틴 장군의 부대를 제국군과는 별개로 취급하려는 의도를 간간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렇지만 저스틴 장군이나 토머스 경이 그런 수작에 흔들릴 사람은 전혀 아니지만 말입니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도 거의 도망치다시피 해서 빠져 나온 셈입니다.”
세틴이 쓴웃음을 지었다.
“황태자가 원래 그런 사람입니다.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데 본인만 그걸 모르고 무슨 결정적인 책모라도 있는 것처럼 설쳐대지요.
그 양반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파 옵니다.
내게는 황도로 돌아오지 말고 갈리온에게 쳐들어가서 결전을 벌이든 담판을 짓든 하고 오라는 황당한 편지를 황명이라고 내려 보냈지 뭡니까.
어쨌든 세 사람과 별동대를 그렇게 환대해주고 작위까지 준 것은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지요.
내가 작위를 중히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저스틴, 토머스, 그리고 상카 경이 앞으로 능력과 포부에 맞는 일은 제대로 하려면 작위도 유용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상카 경이 굳이 몸을 빼서 여기까지 온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겁니까 ?”
상카가 품에서 두툼한 서류 두 개를 꺼내 세틴에게 건넸다.
“두 서류철은 호아니 군사와 시오미 마법연구소장께서 사령관님께 보내는 보고서와 편지이고, 저스틴 장군께서 보낸 편지도 있습니다.
다른 안건도 있습니다만, 그건 나중에 따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놀란도 황도의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은지 상카의 얘기를 귀담아 듣는 모습이었으나, 상카가 일단 한 발 빼자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사령관께서 궁금해 하실 다른 사안입니다.
바로 남부와 동부왕국의 동향에 관한 것이지요.
사실 이곳보다는 수시로 이곳 저곳 돌아다니는 제가 아무래도 주워들은 것이 많겠지요.
먼저 남부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아시다시피 제가 어려서부터 수시로 남부에 들락거리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고, 그들 중에는 제법 말이 통하는 친구들도 여럿 있습니다.
이번에 우리 군상 체계가 정비되고 수운을 위한 배도 많이 건조했으며, 해상 안전을 위한 해군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면서 남부와도 교류가 전에 비할 수 없이 활발해졌습니다.
제가 주로 만나는 남부의 귀족이나 상인들에 따르면 갈리온은 이미 남부에서 그리 큰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부 해안에 접한 지역들에서는 그런 현상이 뚜렷하지요.
해안의 항구도시들이 남부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결코 낮지 않습니다.
항구도시를 다스리고 있는 귀족들 중에는 우리의 군상 체계에 올라 타고 싶어 하는 자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갈리온이 조정에 반해 군사를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귀족들이 얼마나 될까 싶습니다.
얼마 전에 전해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갈리온 후작이 최근 어떻게든 세틴 사령관께 선을 대려고 안달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만간 무슨 연락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놀란의 얘기를 주의깊게 듣고 있던 세틴이 물었다.
“혹시 설파라는 자를 알고 있나요 ?
내가 황도에 있을 때 갈리온의 밀사로 나를 찾은 적이 있는 자입니다.”
놀란이 주저없이 말했다.
“설파는 남부에서는 꽤나 명망이 있습니다.
갈리온의 심복 중에 심복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질적으로 갈리온의 모든 행보가 그의 머리에서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항구도시의 귀족들을 설득하러 다니는 그를 먼발치에서 본 적도 있는데, 그만큼 설파는 갈리온을 위해 동분서주, 모든 일을 챙기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세틴이 설파와의 조우를 되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그를 다시 만나게 되겠군요.
미리 남부의 사정을 그만큼이나마 알게 되어 무척 다행입니다.
어떻게든 남부가 조용히 정리만 된다면 일단 제국은 안정을 찾는 셈입니다.
그건 그렇고 동부왕국은 ?”
놀란이 너무 말을 많이 해서 목이 타는지 물을 들이켰으나 왠지 부족하다는 표정이었다.
세틴이 말했다.
“이거 내가 눈치가 없었네요.
이렇게 오랫 만에 만난 자리이니 술 한 잔을 곁들여도 좋으련만, 내가 술을 즐기지 않으니 미처 생각을 못했습니다.
잠시 쉬었다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나서 못다 한 얘기를 이어가 봅시다.”
연회 자리가 준비되는 동안 오랫 만에 만난 난다와 완다는 쉴 새 없이 얘기를 주고 받고 있었고, 세틴은 상카와 별도의 밀실에서 만났다.
상카가 말했다.
“황태자를 둘러 싸고 사령관님을 견제하려는 사람들이 상당한 세를 형성했다는 사실을 호아니 군사께서 꼭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로 조정에서 오랜 관료 생활을 해왔던 자들이고, 그들의 생리가 쉽게 변하지 않는 만큼 만만치 않은 세력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사령관님이 황도에 입성하는 순간, 황태자는 결코 자리를 지킬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며, 어떻게든 황태자를 설득해서 사령관님이 황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입니다.
황태자는 지금 저스틴 장군을 자기 밑으로 끌어들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래서 군사께서 낸 안을 제가 전해드리려 합니다.
이 내용은 보고서에는 없습니다.
군사께서는 제국군의 본대를 세벤 항구에 그대로 주둔하게 하고, 사령관께서는 소수의 병력 만을 데리고 귀경하실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황태자는 어떻게든 사령관님을 황도에 들이지 않기 위해 대립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랍니다.
어차피 현재 제국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 바로 동부왕국군이 된 이상, 세벤 항구에 제국군의 본대를 당분간 머물게 하는 것도 좋을 거라 하셨습니다.”
세틴이 말했다.
“흠..... 그렇군요.
어쩌면 황태자께서 저스틴 형을 포섭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힘들게 돌아오셨는데 아무래도 상카 경이 다시 황도로 가주셔야겠습니다.
군사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충분히 이해를 했으니, 그런 기조로 일을 추진하셔도 좋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 꼭 지켜야만 할 사항들에 대해 군사를 비롯해서 제국군에 속한 분들과 근위대장에게 전해 주셔야겠습니다.
첫째, 세틴의 황위 계승이라는 말이 절대 나와서는 안됩니다.
우리 내부 뿐만 아니라 밖에서라도 그런 말이 나오거나, 그를 빌미로 선을 대오는 자들이 있다면 철두철미 차단해야 합니다.
둘째, 황태자를 끼고 도는 자들과 직접 맞서는 일을 최대한 삼가야 합니다.
만약 불가피하게 그런 일이 있다면, 누구도 직접 나서지 말고 1, 2 황자님께 도움을 청하라 하십시오.
많은 부분을 1, 2 황자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실 겁니다.
셋째, 섣불리 세를 불리지 말고, 특히 세틴의 밑으로 들어오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자일수록 경계해야 합니다.
굳이 적대할 필요는 없겠으나, 모든 것을 사령관이 귀경한 이후로 미루라 하십시오.
그들의 거취와 관련해서는 어떤 확답이나 언질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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