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벤 항구의 재회
세틴은 우살리드의 병사들이 자기들 방식대로 우살리드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모든 병사들이 먹고 씻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다.
일기에 따르자면 우살리드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일대 영웅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었다.
백작이라 하지만 북동부에서도 변방에 속하는 작은 영지, 장자이긴 했어도 정실 부인이 아닌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신분으로 백작위를 물려받기까지 그가 겪은 일들과 삶은 치열하기만 했다.
세틴은 우살리드에 비하면 자신은 온실 속의 화초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특히 레인저 부대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수도 없이 사선을 넘고, 안팎의 적들로부터 온갖 질시와 모함을 당했으며, 심지어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들도 적지 않았다.
더없이 재미있는 대목은 샬롬 부인과의 관계였다.
우살리드는 샬롬을 좋아하기는커녕 말을 섞는 것조차 힘겨워 하는 사이였다.
샬롬도 사람들 앞에서만 문제없는 부부로 보일 것을 요구했을 뿐, 우살리드에게 남편으로서 모든 의무를 다하라는 요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모그란데와 손을 잡고 세틴과 적대하기로 한 결정은 사실 우살리드 자신의 결단이었다.
우살리드에게는 세상을 굽어보고 싶은 야심이 있었고, 결코 그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세틴을 만난 이후 약간의 망설임은 있었으나, 그는 세틴을 넘어야 할 산으로 여겼을 뿐,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세틴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그의 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우살리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샬롬이 나서서 세틴을 이겨내야 한다고 설친 사실은 분명 있었으나, 우살리드가 그에 좌우되어 그런 결정은 내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는 우살리드가 세틴마저 교묘하게 속여넘긴 셈이었다.
그렇다고 대세가 크게 달라질 것이 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밖에도 우살리드의 말처럼 북동부인들의 사고방식, 습성 등을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도움이 되는 일기였다.
세틴이 페리앙에 도착해 보니 이미 총독 푸스킨이 도착해서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푸스킨과 힘튼, 세키는 그 사이에 벌써 오랫 동안 손발을 맞춰온 사람들처럼 친숙하고 허물없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힘튼 페리앙이 사교적이기도 하고 무언가 북동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었다.
푸스킨은 제국군 병력이 많이 주둔해 있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며 2 천 정도의 병력만 남겨줄 것을 요구했다.
세틴도 북동부에서 다시 군사를 일으켜 조정에 대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에는 힘이 있는대로 빠져있다고 판단했기에, 푸스킨의 말대로 2 천의 병력만을 남기고 주요 장수는 남기지 않기로 했다.
북동부로 진격했던 제국군 4 만 5 천은 거의 그대로 다시 세벤 항구로 행로를 잡았다.
세벤에서 처리해야 할 일도 몇 가지 있었고, 세벤 항을 굳건한 군사 기지로 자리매김한 후에야 황도로 돌아갈 생각을 세틴은 하고 있었다.
세틴이 세벤 항으로 향하고 있는 도중에 황도로부터 뜻밖의 황명이 전해졌다.
황태자가 세틴에게 직접 보낸 서한으로 황제의 직인을 써서 황명임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황명의 내용이 다소 황당했다.
모그란데와 우살리드를 무찌른 일을 형식적으로 치하한 후, 급하게 황도로 돌아올 필요는 없으니, 그대로 남부로 진격해서 갈리온 후작과 결전을 벌이든 담판을 짓든 결착을 보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서한을 읽은 세틴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차마 부하들에게 내용을 공개하기조차 민망한 황당한 황명이었다.
서한을 부하들에게 그대로 보여준다면, 아마도 상당수가 그대로 황도로 진격해서 황태자를 끌어내리자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세틴은 이 어리석고 배포도 없고 그럴 듯한 꾀도 낼 줄 모르는 외삼촌이 한심하기도 하고 한편 가엽기도 했다.
그래도 명색이 황명이니 답을 하기는 해야 했다.
세틴은 제국군이 남부로 진격할 명분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명분에 대해 조정에서 의논한 내용이 무엇인지 물었으며, 갈리온에 대한 처우에 대해 결정된 사항이 있는지를 물었다.
싸운다면 싸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담판을 짓는다면 무엇에 대해 어떻게 담판을 지으라는 것인지를 물었다.
싸우라면 싸울 것이고, 담판을 지으라면 담판을 지을 것이되 그렇게 하려면 사적인 서한이 아니라 정식으로 조정의 명령서를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받은 서한은 내용이 공개되면 황실과 황태자의 체면만 구기게 되니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세틴이 답장에 대해 설명을 해주니, 오디어스의 사자는 자신은 서한의 내용조차 알지 못했다며, 말도 안되는 헛걸음을 하게 한 황태자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세틴은 원래 받은 서한을 답장과 함께 돌려보냈다.
당장이라도 세틴이 황도로 돌아와 자신을 내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오디어스가 나름대로 수를 낸다고 낸 것이 그 서한일 터였다.
어떻게든 갈리온과 세틴을 대적시켜서 자신이 황도를 더욱 확고하게 장악할 시간이라도 벌어보려는 생각이었다.
황제의 이름만 빌리면 누구라도 자신의 말을 따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틴의 시름이 깊어졌다.
오디어스는 세틴이 아무리 지켜주고 싶어도 지켜주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황태자를 바꿀 수도 없고, 바꾸고자 해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제발 스스로 무덤을 파는 허튼 수작만이라도 부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만약에 오디어스가 힘으로 세틴을 찍어누르려는 시도를 한다면 세틴도 더 이상 지켜주기 힘든 상황이 될 것이었다.
황도로 돌아가 어떻게 처신을 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한숨이 깊어지던 세틴이 세벤 항구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과 완다가 수로를 통해 도착해 있었고, 저스틴과 토머스만 황도에 남고 별동대로 갔던 상카도 세벤에 와 있었다.
가장 오랫 만에 만나는 놀란과는 서로 포옹을 할 정도로 서로 반가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하하하, 놀란 경, 정말 오랜만입니다.
어려운 일을 맡겨 놓고 제대로 지원도 해주지 못해 늘 걱정했는데, 많이 말랐네요.
소식을 전해 들어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나 봅니다.
이제부터라도 식사도 제대로 챙겨 드시고, 잠도 충분히 자면서 하세요.
그러다 놀란 경이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정말 큰일 아닙니까 ?”
놀란이 겸연쩍게 웃었다.
“나보다 진짜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완다 장군이야말로 열 사람 이상의 몫을 해내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수하들을 야단치는 목소리가 얼마나 쩌렁쩌렁 한 지 저도 가끔 몸이 움츠려들곤 합니다.”
완다가 세틴에게 씩씩하게 군례를 올렸다.
“그래 완다도 고생 많았지 ?”
완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재밌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일에 치여 살지만,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들이 변해가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세상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마시는 공기조차 변하는 것 같아요.”
놀란이 덧붙였다.
“이제는 각지의 총독들이 장사꾼이 다 되었습니다.
근엄했던 장군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모를 만큼요.
상인들과 백성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며 총독을 찾고 있지요.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주변에서 큰 돈을 만지는 사람들이 생겨나니 너도 나도 군상 체계에 참여할 여지를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니 총독들도 반쯤은 장사꾼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거지요.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 중심을 딱 잡아주는 사람이 바로 완다 장군입니다.
이제 너도 나도 ‘완다식 장부 기입법’을 구하느라 난리입니다.
완다 장군이 정한 원칙과 방식에 맞지 않는 서류는 가차없이 퇴짜를 맞기 때문이지요.
완다 장군이 책까지 써서 돌렸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정착되려면 멀었습니다.
사실 나도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완다 장군의 강의를 수십 시간은 들었을 겁니다.
제일 큰 문제는 완다 장군이 보통 사람들의 계산력, 사고력, 기억력에 대해 전혀 이해를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매일 야단치는 소리, 구박하는 소리를 끊이질 않아요.”
완다가 놀란의 말을 끊었다.
“그럼 어쩌라구요 ?
사람이 똑같은 소릴 열 번도 넘게 들어서 이해를 못한다는 게 말이 되요 ?
덧셈, 뺄샘도 제대로 못해서 서류 하나를 갖고 하루 종일 낑낑대는 건 말이 되구요 ?”
놀란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내가 말 실수를 했네요.
완다 장군이 옳습니다.
우리가 바보 천치인 걸 탓해야지 완다 장군을 비난할 수는 없지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사실 천재인 완다가 보통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일종의 고질이었다.
어쩌면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일지도 몰랐다.
세틴이 말머리를 돌렸다.
“오호, 완다가 복식 부기법을 가지고 책까지 썼어 ?
나도 한 번 보고 싶은데 ?”
완다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이건 내가 창작한 게 아니라 세틴 사령관님이 내게 알려주신 거다라고 사람들에게 여러 번 얘기를 했는데, 다들 완다식 장부 기입법이라고 이름까지 붙였더라구요.
제가 지금의 군상 체계에 맞게 몇 가지를 덧붙여서 회계 장부 쓰는 법을 정해 주었는데 그게 살이 붙고 붙어서 이제 아예 책으로까지 나왔어요.”
세틴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나야 기본적인 개념을 알려준 것 뿐이니 완다식 기입법이 맞지.
그래서 많이 정착은 되었고 ?”
완다가 대답했다.
“아직 멀었어요.
이것들이 머리가 나빠서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빼돌릴 구멍을 만드느라 일부러 모르는 척 대충 넘어가려는 거에요.
내가 정한 원칙에 맞춰서 장부 기입만 제대로 해도 도둑질을 할 여지가 많이 없어지니까요.
그러니 내가 매일같이 소리를 질러대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제는 정기적으로 시험을 치러서 탈락한 사람은 직위를 맡지 못하게 하려고 생각중이에요.”
세틴이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그간 이룬 성과에 대해서는 간간히 보고를 접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당분간은 총독부 자체의 수익을 최소한으로 하고 상인과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커질 수 있도록 하는 원칙을 고수하도록 하세요.
수군 육성과 항로 개척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건 알고 있지만, 그에 필요한 비용 외에는 총독부에 축적되는 수익은 크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은 총독부에 수익이 쌓여 봐야 조정에 내야 할 세금만 많아질 뿐입니다.
덕을 보는 백성들이 많아져야 군상 체계가 더 탄력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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