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카수스 평원 회전의 서막
세틴은 추수를 마친 노스롭이 적당한 거리에 군영을 완전히 갖출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노스롭이 세틴에게 개전을 통보한 날짜는 아침에는 들판에 무서리가 내리고 간혹 매서운 북풍이 불어오는 11월 중순이었다.
양쪽 모두 엄청난 대군이라고는 하나, 총포도 없고 마법도 없는 전투의 양상은 극히 단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전열에 여러 겹으로 방패병을 앞세워 활이나 투창 같은 원거리 공격에 대비하고 후면에 궁병과 보병을 두텁게 배치하는 진형은 서로 다를 게 없었다.
전투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상투적인 방식으로 시작되었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서로의 진형을 향해 서서히 진군하다 일정 거리에 도달하자 노스롭군이 먼저 방패막을 이중 삼중으로 구축하고 활을 쏘기 시작했고, 세틴군도 이에 대응하여 방패진과 화살 공격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몇 차례 하늘을 새까맣게 물들이는 화살비가 오갔고, 양쪽 모두 방패를 들지 않은 궁병들부터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진형에 변화를 일으킨 쪽은 세틴이었다. 세틴의 명에 따라 오클린의 군기가 좌우로 두 번 왕복하자 궁병들이 후방으로 일제히 물러나고, 삼각 방패와 튼튼한 갑옷으로 무장한 보병대가 방패병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는데 그 수가 오천 정도였다.
이들이 바로 세틴이 전 병력을 통틀어 고르고 고른 정예 중보병이었다. 이들은 방패병 뒤쪽의 보병들이 대부분 창을 들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삼각 방패와 검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들이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방어하는데 주력하면서 서서히 진군을 시작하자, 진형의 양 측면에 배치되어 있던 기병대가 노스롭 진형을 중앙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세틴군이 새롭게 개발한 소수 정예 중심의 전술이 첫 선을 보인 전투였다. 노스롭의 기병대도 마찬가지로 진형의 양측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세틴군 기병대의 갑작스러운 돌진에 즉각 대응하지 못했다.
세틴군의 기병대에 맞대응을 해야 할지 아니면 이를 우회하여 자신들도 세틴군에게 돌진공격을 가해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삼천여 기병대의 돌진과 그 뒤를 받치는 정예 보병대의 집중 공격에 노스롭 군의 진형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중앙을 돌파한 세틴의 기병대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우측으로 선회하며 후진의 보병과 궁병들을 휩쓸자 노스롭 군은 혼란에 빠졌다.
가까스로 병사들을 수습한 노스롭 장수들이 기병대의 뒤를 따라온 보병대를 포위해서 전황을 만회하고자 함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하지만 거의 완벽하게 포위를 당한 상황에서도 정예 보병대는 동요하는 기색도 없이 치열하게 버티고 있었다.
병사들의 무장과 전투력의 격차가 워낙 큰 데다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들의 무력과 지휘력이 탁월해서 노스롭군은 포위를 하고도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내는 전투를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잠시 지속되자 정예 보병을 포위했던 노스롭군은 도리어 다가온 세틴군의 본대에 의해 반원형으로 포위되는 신세가 되고 앞뒤로 적을 맞아 싸우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노스롭 군의 희생자가 급격히 늘어가는 가운데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병사들이 속출하는 국면이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전투 양상에 당황한 노스롭은 급히 퇴각 명령을 내렸다.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노스롭군은 사상자가 적지 않았고, 도망치다가 사로잡히는 병사들도 부지기수였다.
세틴은 기병대에게 수 차례 추격 명령을 내렸을 뿐, 집요하게 따라 붙어 일거에 노스롭 군을 무너뜨리려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부상당한 노스롭 병사들을 수습하여 치료를 받도록 해주고 포로를 잡아들이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덕분에 노스롭은 자신의 군영까지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다. 서둘러 군영의 수비와 경계를 강화하도록 조치를 했으나, 세틴군이 노스롭의 군영까지 다가와 위협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보카우스 평원에서 벌어진 일차 전투는 세틴군의 대승이었다. 세틴군에서도 사상자가 나오기는 했으나 미미한 수준이었고, 노스롭군은 사망 육백여 명, 부상자 삼천여 명, 포로로 잡힌 자는 칠천여 명이었다.
노스롭군의 사분의 일 내지 오분의 일이 한 번의 전투로 사라진 셈이었다. 도망쳐서 노스롭군에 다시 합류하지 않은 병사들도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했으나 그 수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노스롭은 다시 전면전을 벌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고 군영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평원에서 대등하게 진형을 갖추고 싸우기보다는 목책이라도 갖추고 있는 군영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편이 유리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세틴은 노스롭에게 전투를 재촉하지도 않고 군영에 근접해서 도발을 하지도 않았다. 단지 군영을 매일 조금씩 전진시킬 뿐이었다.
세틴은 부상자들을 피아 구분없이 충실하게 치료해주도록 했고, 포로들에게도 자신의 병사들과 똑같이 식사를 제공했다. 비록 잠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한 막사에 많은 수를 집어넣기는 했어도 적어도 한 데서 잠을 재우지는 않았다.
세틴이 자신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지는 않으리라 느낀 병사들은 노스롭군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편안하고 걱정할 게 없는 처지가 되었다.
비록 포로로 잡혀있기는 하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었으니 자신들에 대한 조사에도 순순히 응하는 편이었다.
세틴은 포로들의 이름, 나이,소속, 지위, 경력, 출신 등을 꼼꼼하게 조사하여 기록하도록 했고, 지속적인 면담을 통해 그들이 알고 있는 노스롭군의 정황을 세밀하게 끄집어냈다.
첫 전투에서 예상보다 수월하게 큰 승리를 거두고도 서둘러 노스롭을 공략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첫 번째 회전에서 나타난 노스롭의 전력이 너무 형편없었다. 전술도 지휘체계도, 지휘관들의 대응능력과 무력도 세틴군과 비교하기 힘든 수준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전투였다.
세틴이 생각하기에 가장 좋은 그림은 노스롭 반도의 영주들이 합심해서 노스롭을 처단하거나 잡아다 바치는 것이었으나, 마냥 그것을 기대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장은 적극적으로 그런 공작을 펼칠 만큼 정보나 인맥이 구축된 상황도 아니었다.
첫 번째 회전을 치르고 며칠 후 세틴과 호아니가 마주 앉았다. 포로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노스롭의 상황을 점검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한 자리였다.
호아니가 포로들에 대한 보고를 마치자 세틴이 말했다.
“내가 직접 노스롭 군영에 침투해서 암살이라도 해버리는 편이 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호아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꿈에라도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장군께서 그런 모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말이 군영이지 오만이 넘는 군세입니다.
군영 내부는 작은 도시만큼이나 광대하고 복잡합니다. 설사 장군께서 쥐도 새도 모르게 노스롭을 처치할 능력이 되신다 해도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세틴이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저도 답답해서 해본 소리입니다. 포로로 잡힌 자들 중에 기사급 이상은 내가 잠깐이라도 모두 만나보았는데, 대부분이 반도의 5대 영주 소속이더군요.
기사라고는 하지만 전투 경험도 거의 없고 무력도 우리 중보병의 상급 병사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노스롭과 그의 가신에 속하는 군소영주들을 제외하면 반도의 대영주들 대부분이 군사적 역량 자체가 보잘 것 없는 수준이라 짐작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힘을 모은다 한들 노스롭에게 반기를 들 엄무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호아니가 말했다.
“저도 반도의 영주들이 스스로 노스롭을 잡아다 바치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번 회전에 모든 영주들이 각자 깃발을 들고 참가한 것도 그렇고, 시간이 지난다 해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들이 기회를 보아 노스롭군에서 이탈하기라도 하면 다행입니다.”
세틴이 물었다.
“5대 영주들과는 아직 연락선이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
호아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노스롭 군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까지는 쉽지 않습니다. 워낙 후미지고 고립된 지역이라 기존의 인맥 자체도 희박하고 새로 구축하기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우리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압박을 해나가다 보면 저쪽 내부에서 필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느긋하게 기다려 보시지요. 그보다 하나 제안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
“참모부를 별도의 부대로 창설하는 문제입니다. 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장군님의 시녀들이 맡고 있는 일도 좀 더 공식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업무능력이 탁월하기는 하나 갈수록 힘에 부칠 것입니다. 꽤 많은 조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존 참모 업무와 행정 업무, 정보, 통신 업무를 통합해서 관리할 참모부대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사적으로 저를 돕고 있는 친우들에게도 공식적인 직위를 주고, 장교와 병사들 중에서 적합한 능력을 가진 자들을 보강해야 합니다. 아울러 정보와 통신 업무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면 좋겠지요.”
세틴이 흔쾌히 응했다.
“왜 진작에 그 생각을 못했나 싶네요. 당장이라도 추진합시다.”
호아니가 약간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은 저 자신이 직위를 탐하는 것으로 비춰질까 우려한 면도 있고, 이미 상당히 많은 업무를 걸머지고 있는 시녀들의 위상에 대해 언급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습니다.
난다와 완다는 성격도 좋고 업무 처리 능력이 탁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만, 군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려면 장군님의 시녀라는 꼬리표를 떼어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세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브라스트에서 시녀는 단순한 몸종이 아닙니다.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예비 신부로서의 의미가 있지요.
그래서 ‘너는 이제부터 내 시녀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게 되면 자칫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난다와 완다는 따로 제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시녀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고 군사께서 생각하신대로 추진하세요.”
그날 밤 늦게 세틴이 난다와 완다를 호출했다.
“너희들에게 이제까지 하고 있는 일에 걸맞는 군직을 부여할 생각이야. 그와 관련해서 서로 허심탄회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
난다가 말했다.
“군직이라면 우리가 이제 장군이 된다는 건가요 ?”
세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5급 장군의 지위와 행정부장의 직급을 줄 생각이야. 하지만 나의 시녀라는 지위는 아무래도 겸하기에 명분이 서지 않아.
내 마음이 온통 시오미에게 가 있다는 사실은 너희들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아울러 나는 너희들을 내 첩으로 삼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하지만 내 입으로 이제 시녀는 그만 두라고 말하기는 힘든 것도 사실이지. 그래서 너희들의 생각은 어떤지 알고 싶어.”
완다가 말했다.
“결혼을 한다면 장군님보다 나은 사람을 생각하기 힘들죠. 저나 난다나 장군님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장군께서 저희를 언제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시오미에게 준 마음을 지키려는 모습이 더 좋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아직 결혼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지금 하는 일이 재밌어요. 저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난다가 덧붙였다.
“사실 장군님의 시녀이기 때문에 함부로 추근대는 남자가 없어서 좋긴 해요.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저도 시녀보다는 장군이 훨씬 좋은데요.”
Comment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