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 천년제국2
순도 100% 픽션입니다
키 큰 정인홍과 키 작은 이원익이 나란히 서 있으니 개그 프로그램의 콤비 같다.
정인홍의 나이가 더 많음에도 볼살이 붉고 눈이 부리부리해 오히려 더 젊어보였다.
“잠시 진정들 하시오.”
“광해님께서 당장 떠나신다는 게 아니오.”
노인네 둘은 광해가 떠난다는 말에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대중들을 가라앉히느라 긴 시간을 소비했다.
그럼에도 진정이 안 돼서 광해가 단상에 올랐다.
“니들 다 죽을 때까지 안 떠나니 걱정들 하지 마라.”
이쯤에서 주워들을 말을 꺼내본다.
“인간의 평생이 신에게는 찰나일지니 내가 곧 떠난다는 말은 너희의 손자가 태어나고 죽을만한 시간 후에 간다는 뜻이다. 그러니 진정해라.”
이정도면 되겠지.
광해는 쿨하게 선언하고 단상에서 내려왔다.
다행히 광해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군중들의 소동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영감 둘이 눈인사를 올린 후 말을 했다.
“오늘 모인 이유는 당장 내일의 문제 때문이 아니오.”
“백년 후, 천년 후의 제국이 여전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오.”
“무릇 집을 지을 때 주춧돌부터 먼저 단단히 쌓아야 높고 화려한 지붕을 얹을 수 있는 법이니.”
“제국의 근간이 될 기본 개념을 말할테니 잘 듣고 생각해보고 고칠 것이 있다면 더욱 논의해 완벽하게 만들어 봅시다.”
노인 둘이 잠시 마주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정인홍이 먼저 말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누구의 것인가.”
“옛 이론에 따르면 국왕은 하늘이 점지해주는 것이며 하늘의 뜻을 받든 왕과 신하가 백성들을 제멋대로 통치하는 것이오.”
“이를 두고 광해님께선 이리 말하셨지. 개떡 같은 소리 집어치우라고.”
정인홍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상소리나 나오자 일부 군중이 실소를 터트렸다.
“당시 조선의 왕이셨던 광해님은 양반의 난으로 몰려온 양반들에게 말했소. 나의 권력은 어디서 오는가? 성리학자들이 정해주는 것으로 왕이라 할 수 있는가?”
“아니라 하셨지요. 왕의 권력은 백성의 지지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셨소.”
“백성이 믿고 따르기 때문에 왕이 되었고, 신의 힘을 나라를 위해 쓰기에 백성이 따르는 것이라 하셨소.”
“즉, 백성의 지지를 받는 이가 황제이며 지지를 잃은 이는 황제가 아니오.”
“그렇다면 국가는 누구의 것인가? 지지를 잃은 황제 대신 다른 자가 황위에 오르면 그의 것이 되는가?”
“광해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소. 제국은 거기 사는 모두의 것이라고.”
이건 대한민국 헌법에서 따왔다.
국가는 국민의 것이다.
물론 지켜지지 않는 법칙이지만, 말 자체는 옳다.
모현성에게 개념을 전달받은 학자들은 국민주권을 광해의 말로 포장했다.
그래야 받아들이는 게 가장 빠르니까.
“여러분은 쉽게 공감하기 힘들 것이오.”
“난 고작 옹기 빚는 옹기쟁인데. 난 고작 집 짓는 건축쟁인데. 이런 생각을 하겠지만 그런 여러분이 모여서 제국을 만드는 것이오.”
“이 거대한 제국. 이토록 큰 제국을 만드는 데 광해님의 힘이 절대적으로 중요했겠지만, 광해님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오.”
정인홍이 팔을 뻗어 올려 하늘의 지도를 가리키며 말을 하자 이원익이 웃으며 받았다.
“솔직히 광해님은 시키기만 하셨지. 정작 일은 밑의 신하들이 다했소.”
“귀찮다. 하기 싫어. 니가 해. 내가 영의정으로 일하면서 대칸께 가장 많이들은 말이오.”
이 노인네들이 만담까지 짜 왔네.
둘의 노력 덕에 웃는 백성들이 더 많아졌다.
“나라에 광해님이 없다면 제국을 만들 수 없었겠지만, 여러분이 없었어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오.”
“여러분이 내는 세금으로 배를 만들고, 화포와 화약을 만들고 군량을 준비해 병사들을 먹여 살리오. 여러분의 행동 하나하나가 제국을 만든 것이오.”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시오. 황제는 제국민의 하나로 자신의 일을 할 뿐, 농사짓는 여러분이나 소 키우는 여러분과 똑같은 백성이오.”
국민주권을 설명했다.
받아들이는데 오래 걸리겠지만, 오늘 뿐 아니라 학교와 종교집회에서 계속 설명될 개념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인가? 황제의 것도 아닌 백성 모두의 국가는 왜 날 힘들게 하고 왜 내 돈을 뺏어가는 건가? 고민해 본적 없소?”
“해준 것도 없으면서!”
다시 한 번 터진 만담에 더 많은 이들이 웃는다.
오래 준비한 연설답게 귀 기울이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국가는 개인의 삶을 위해 존재하오. 여러분 각자의 삶이 최대한 나아지도록 돕는 게 국가의 역할이오.”
“개인은 이기적이오. 최대한 잘 살고자 노력하지. 나도 그렇고 과거 왕들도 그랬고, 과거의 천민 또한 그랬소.”
“이건 바뀔 수 없소. 모두가 최선을 다할 뿐.”
“그 마찰을 국가가 중재하오. 개인의 삶이 최대한 나아지도록 국가는 돈을 걷어 돕는 역할이오.”
“모든 국가의 주인이 돈을 내 만들어가는 게 국가란 뜻이오.”
“그렇다면 국가의 개념을 정리해봅시다.”
“개인이 할 수 없는 일. 그걸 국가가 해 주오. 꼭 필요하지만, 개인에게 맡겨선 이루어지지 않는 걸 하는 게 국가이며 그 명분으로 세금을 걷는 것이오.”
“예를 들어 군대.”
“개인에게 맡기면 강한 군대가 존재할 수 없소. 그리되면 외적의 침략으로 다 죽을 것이오.”
“경찰.”
“아무도 범죄자를 잡으러 다니지 않는다면 범죄자천지가 될 것이오. 그렇다고 개개인이 모두 범죄자를 잡으러 다닌다면 소는 누가 키우겠소?”
저 대사 왠지 모현성이 써준 것 같군.
옆을 슬쩍 보니 모현성이 실실 쪼개고 있다.
“철도 건설과 교량 건설.”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십시일반 돈을 모아 만든다 해도 전국민이 다 같이 돈을 낼 수 없으니 누군가 불만이 생길 것이오.”
“하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그 편의를 상상할 수 없이 크오. 그러니 국가가 만드는 것이오.”
“의학.”
“의술을 개인에게 맡기면 도제수련으로 인한 노예가 생기게 될 것이오. 최대한 많은 이가 정확한 의술을 배워 많은 이를 도와야 하는데 수십 년씩 수발들게 하면서 노예로 써먹을 뿐이오.”
의대 4년, 박사과정 2년.
그 후엔 인턴 1년, 레지 4년, 펠로우 3년.
현대 의학의 현 주소다.
무려 14년간 대학교수의 노예생활을 한다.
인턴을 의도적으로 괴롭히고, 레지던트를 잠도 안 재우고 1년 내내 굴리는 식으로 감옥의 수형수보다 못한 시간을 보내게 만든다.
이런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관습을 기리기리 보전해 노예근성과 체념, 본전생각을 심어 줘 다음 기수를 괴롭히도록 만든다.
이런 괴롭힘은 현대에 법으로 규정된 범죄다.
의학은 대체 불가능한 영역이기에 구타와 기수로 기강을 잡는 이런 17세기식 불합리한 도제 시스템을 현대에도 당당히 이어나간다.
범죄자새끼들.
“또한 의학을 개인에게 맡길 수 없는 이유는 개인은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오.”
“어머니가 아프다면...... 딸이 아프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전 재산을 바칠 것이오. 그게 사람의 마음이니. 그리고 의사 본인은 전 재산을 거리낌 없이 받아갈 것이오. 그게 사람의 본성이니 이건 욕할 수 없지.”
“그를 방지하지 위해 모든 의학 전문가는 국가에서 키우고 국가에서 관리하오. 실수는 인정하되 태만과 자질부족은 쫓겨나오. 대신 의사가 되어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이는 최대한 많이 뽑고, 열심히 학습하고 치료한다면 평생 먹고 살 걱정 없게 대우하겠소.”
현대 의학은 해낼 수 없는 제안이다.
외국의 의학 약학과 얽혀 있기에 한국만 시행할 수 없고, 내부의 썩은 돌이 협회를 차지하고 있는 한 도제 시스템은 영원할 것이다.
국가에서 최대한 의사를 양성하고 모든 의사를 준공무원으로 키우며 태만과 능력부족을 잘라낸다면 현대의 노예의사들이 겪는 고통과 의사부족으로 국민이 겪는 고통은 없어질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타국의 사신들에게 제안하겠소. 의술은 국경이 없으며 타국의 백성일지라도 생명은 똑같이 소중하오.”
웅성웅성.
“이건 광해님의 뜻, 광해님께 힘을 주신 신의 뜻이오. 우린 우리가 알아내고 검증한 모든 의술을 조건 없이 베풀겠소.”
“영특한 사람을 뽑아 한성으로 보내시오. 와서 의술을 배워 고국으로 돌아가 아픈 이를 치료하시오.”
술렁술렁.
“자질 부족이나 태만으로 쫓겨나는 이는 있어도 국적이나 언어, 피부색으로 인해 차별받거나 못 배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오.”
“우리의 것을 배우고 각자의 나라에서 의술을 널리 전파해 가르친 후 칸 제국보다 좋은 의술을 개발한다면 우리와 주변국에 조건 없이 전수해 주시오. 이것이 유일한 조건이오.”
“이것은 신의 뜻이오.”
와아아아~
대칸 가까이 앉아있던 사신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저마다 자기네 언어로 소리치는데 대충 뭐 고맙다는 그런 말이다.
의술은 돈과 분리되어야 한다.
의학도는 돈 걱정 없이 살아야 하지만, 돈 벌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숭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의학은 공익사업이다.
시장자본주의에 맡길 수 없는 의학이야말로 전기나 수돗물처럼 국가에서 관리해야하는 공기업이 되어야 한다.
담배인삼공사 따위 민간에 풀고 의학을 공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할일은 이 모든 것의 세세한 법을 정하고 관리하는 것이오.”
“법을 만드는 것은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오.”
“법을 제정해 사회에 미칠 영향과 부작용까지 미리 유추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오.”
그 어려운 걸 현대에는 코미디언이 한다.
선거로 뽑히기만 하면 코미디언이 법을 만들고, 수백조 예산을 집행한다.
모현성이 항상 하던 말인데, 왜 국회의원을 선거로 뽑지?
모현성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왜’를 한 번 씩 붙여본 것 같다.
“그래서 가장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고 있소. 가장 현명한 이만 뽑혀 제국의 법을 만들고 수정해 나갈 것이오.”
“하지만 이 자리는 가장 썩기 쉬운 자리요.”
“내가 법을 만져봐서 알겠는데 법에서 단어 한글자만 고쳐도 금 수만냥의 가치가 왔다 갔다 하오.”
“누군가 자신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어 달라며 나라를 살법한 돈을 찔러주게 될 것이며, 누군가 자신에게 불리한 법을 고쳐달라며 3000궁녀를 안겨 줄 수도 있소.”
“그러하기에 지금껏 없던 감사원을 만들고자 하오.”
“감사원은 마을마다 한명씩 선거로 뽑히오.”
“각 마을에서 자원하는 누구나 후보가 될 수 있고, 투표를 통해 뽑히면 감사단원이 되는 것이오.”
“감사원은 거액의 월봉을 받으며 대신 아무 일도 할 수 없소.”
“감사원은 감시, 관찰만 하오.”
“국가의 입법부를 감시 관찰하고, 사법부를 감시 관찰하며, 국가의 모든 사업을 감시, 관찰하오.”
“대개의 경우 국가를 무너뜨리는 건 관료의 부패 때문이오.”
“백성이 선거로 뽑은 감사대원은 관료의 모든 행동을 감시 관찰하되 침묵의 임무가 있소. 보고 들은것은 평생 비밀로 해야 하며 실수로라도 술 마시고 발설하면 사형 당하오.”
“대신 부정 부패를 발견하면 만백성과 국가, 변호사에게 신고해, 그 관료에게 죄를 물고 벌금의 반을 받게 되오. 감사단원이 받은 상금은 자신에게 투표한 지지자들에게 나눠줄 수 있소.”
“열심히 감시 관찰해 관료의 부정부패를 잡아 돈을 벌고, 자신을 뽑아준 지지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재차 뽑힐 수 있게 되겠지.”
국회의원은 시험으로 뽑아야 한다.
가장 어렵고 복잡한 일이니까.
대신 감사원을 선거로 뽑아야 한다.
한통속이 아니고, 때가 타지 않고 이권이 얽히지 않은 제 3자가 국정감사를 해야 부정부패를 덮는 일이 없어진다.
“1년 후 첫 감사원을 뽑겠소. 이는 국가의 천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사업이오.”
“무작정 감사단원이 되려하지 마시오. 부정부패를 보고도 눈감아주거나 아예 알아보지 못할 경우 훗날 비리가 밝혀진 후 함께 처벌받게 될 것이오.”
“다만...... 국가를 위해 진정 중요한 일을 하고 싶은 의로운 이가 나서주길 바라오.”
“감사원에 뽑히면 광해님도 계속 볼 수 있소. 안방까진 못 가도 대놓고 따라다니는 게 허용되니 말이오.”
“대신 광해님께서 밤일 하실 땐 접근하지 마시오. 맞을 거요.”
“아프게 맞을 걸.”
노인네들의 만담에 백성들은 좋다고 웃는데 광해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그 감사의 대상에 나도 포함된 거냐?”
광해가 옆을 노려보며 귓속말하자 모현성이 당당하게 턱을 쳐들었다.
“당연하지. 황제도 똑같은 백성이고 국가 관료잖아.”
“아오 시발.”
“누구나 감시당하는 건 싫어해. 그걸 참을 만큼 숭고한 뜻을 가진 이가 국가를 운영해야지. 대신 돈 좀 많이 주고.”
......
됐다. 뭐.
어차피 모현성이 벌린 일 때문에 세계를 날아다니는데 지들이 어떻게 쫓아다니겠어.
잘은 몰라도 지금도 계속 발생하는 부패와 비리는 좀 줄겠네.
- 작가의말
미래이야기가 나왔습니다아아
사실 여길 쓰고 싶어서 이 긴 글을 쓴 것이죠
물론 제 생각이며 제안일 뿐 정답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한번쯤'왜'를 고민해봤으면 좋겠네요
정말 중요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는 국회의원을 '왜' 선거로 뽑는거죠?
국회의원은 가장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천재의 영역같은데.
대신 감시인을 선거로 뽑아야 맞지 않나요... 라고 혼자 생각하며 글을 시작했어요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