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유구국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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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가 이끄는 부대가 먼저 출발했다.
“준비됐나?”
“예. 그런데 정말 가능하......”
“가능하다. 가자. 유구국으로.”
“예. 출항하겠습니다.”
왕이 가자는데 가야지.
이준형은 불안감을 감추며 배를 띄웠다.
바닥이 뾰족한 침저선은 물살을 가른다.
돛을 펴면 바람의 힘을 배 전체가 받는다. 그러면 스케이트를 타듯 물살을 가르며 바람을 거슬러 정면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평저선은 바닥이 평평하다. 바람의 힘을 받긴 하지만 물살을 가르는 힘이 약하다.
오히려 해류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바다위에 동동 떠있는 널빤지가 물결에 제멋대로 흔들리는 것과 같다.
이런 배로 유구국까지 가는 건 위험하다.
갈 데로 가라하면 어디론가 가겠지만, 그 목적지가 어딘지 모른다.
게다가 바닥이 평평하면 물에 잠기는 부분이 적어진다.
선체가 높아 풍랑에 뒤집어지기 십상이다.
아직 겨울이지만 재수 없게 선단을 통째로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광해가 합류했다.
원하는 곳으로 배를 보내려면 광해의 능력이 필요하다.
광해는 선체에 서서 팔짱을 끼고 정면을 바라봤다.
바람을 읽고 해류를 읽어야 한다.
완전 역풍이 불면 마법으로 바람을 조종해야 한다.
덕분에 밑에 것들은 죽을 맛이다.
왕이 팔짱을 끼고 서서 진로를 보고 있는데 쉬는 건 상상도 못한다.
“위도.”
“예? 예... 그것이.”
“방위각은?”
“네?”
“에이 쓸모없는 놈. 키를 돌려라. 좌로 세 바퀴. 노병. 우현만 노 젓게 해. 음... 됐다. 노병 쉬고. 삼각돛 접고 사각돛 펴라.”
함영석과 몇 가지 대화를 해보고 광해보다 능력이 떨어진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경험을 강탈한 광해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항해사다.
“에휴. 이런 녀석들 데리고, 무슨 전쟁을 한다고. 내가 이러려고 왕 됐나 싶네. 똑바로 안하나? 하기 싫으냐? 바람 바꼈잖아. 지금 뭐해야 해?”
“예? 잘못 들었습니다?”
대략 정신이 혼미해진 함영석은 제대로 대답도 못했다.
“이게 빠져가지고. 사각돛 조정해야지. 2번 3번 줄을 5번 6번 기둥으로 옮겨라.”
“예? 예.”
광해는 심심해서 갈구는 거지만, 함영석은 혼백이 승천할 지경이었다.
다만 생각 없이 갈군 광해 덕에 함영석의 항해능력은 쑥쑥 컸다.
이 시대의 항해술과 미래의 항해술, 그리고 광해가 경험한 세계의 항해술까지 함영석의 뇌리에 때려 박고 있다.
광해의 활약 덕에 함대는 겨우 6일 만에 유구국에 도착했다.
지도를 펴고, 일본과 대만을 찾아보자. 그 사이에 작은 섬들이 점점이 줄 서 있다. 이곳이 유구국이다.
오래전 삼국시대를 맞이해 서로 싸우기도 했으며, 벌써 통일된 지 수 백년이 지났다.
작은 나라지만 대부분 국가가 실패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룩했고, 해외원정을 떠나 아마미 군도를 정복하기도 했다.
중국, 일본, 동남아 등과 활발한 중계무역을 했고, 백여 년 전부터 서양 상인들과도 교류했다.
조선에 보낸 서신에 신, 혹은 아우라는 표현을 써서 스스로를 낮추며 조공을 보내기도 했지만 조선의 성리학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명나라와의 관계는 매우 가까워 대대로 명나라에 책봉을 받고 조공무역으로 큰 수익을 올렸다.
이런 유구한 역사를 가진 유구국은 일본 사쓰마 번에 복속되었다가 일본 제국 시절 조선이 합병될 무렵 합병되어 오키나와 현이 된다.
일본은 합병 이후에 조선에 했던 것처럼 문화 말살정책으로 유구국의 언어와 문화를 없애는데 주력했다.
특히 2차 대전 말미에 잔인한 역사가 일어난다.
패전을 직감한 일본은 항복하되 명예로운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유구국 모든 민간인을 징집해 총을 안겨 주었고 간호대와 위안부로 썼다.
귀축영미.
당시 일본이 선동한 선전문으로 미군이 점령하면 모두 강간 살해당할 거란 뜻이다.
겁에 질린 유구인들은 극렬히 저항했고, 일본군의 선동에 따라 아내와 딸을 살해하는 등 계백 같은 짓을 했다.
고작 석 달 사이에 민간인이 최소 15만 명이 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미국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의 저항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를 다음 프로젝트에 이용했다.
도쿄를 점령하려면 도쿄시민 전원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일본의 의도대로 ‘최후의 한명까지 분전을.’ 이란 구호를 미국은 열심히 언론에 알렸고, 전쟁은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원자 폭탄.
오키나와 민간인의 처절한 저항이 없었다면 원자폭탄을 사용한 일은 굉장히 큰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키나와 민간인의 저항 덕에 무조건 항복을 외치고 말았다.
2차 대전 이후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식민지들이 독립을 했다.
하지만 유구국은 독립하지 못했다.
당시 공산주의가 퍼지고 있던 유구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에치슨 라인에 포함되면서 미군의 주요 군사거점이 된다.
일본은 미군 주둔지로 오키나와를 넘겨줬고 이후 미군의 창녀공급처가 되어버렸다.
유구국은 슬픈 역사 속에 독립하지 못한 채 여전히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남아 역사와 언어가 지워지고 차별받고 있다.
이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아야겠다.
유구국 역사에 잘못 끼워진 첫 단추.
사쓰마 번 병사 3000명에게 함락당하는 역사.
그게 지금이다.
6일간 남하한 광해의 함대는 아마미 군도를 만났다.
해안가 마을 몇은 불타있었고, 쪽배하나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일본군이 점령하고 지나친 듯 했다.
광해는 멀리서 관찰한 후 상륙하지 않고 서남향으로 지나쳤다.
아마미 군도에 있는 도쿠노 섬에서 군함을 발견했다.
작은 항구에 정박해 있는 열 척의 군함.
닻이 내려져있고, 모든 돛이 둘둘 말려 있는 모습이 장기 정박 중인 듯 했다.
광해는 망설이지 않고 기습했다.
이준형이 이끄는 함대는 판옥선 8척과 대마도에서 나포한 수송선 20척.
수군병력 천명과 육상병력 천명이 전부다.
그나마도 인원을 바득바득 낑겨 실은 상태다.
“아깝지만 가라앉혀야겠군. 포격 훈련 삼아 좌우 1회 발포하라. 100보 거리까지 접근한 후 전열을 갖춰라.”
판옥선 여덟 척이 접근한 후 옆 부분으로 돌아섰다.
적진에선 그제야 조선군을 봤는지 돛을 풀고 닻을 올리며 움직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 적다.
대부분 육지에 상륙해 있는 듯했다.
콰콰콰쾅.
좌현 일제포격 후 판옥선이 일제히 돌아서서 우현 포격을 실시했다.
백보거리에서 아무런 방해 없이 쐈지만 명중률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출렁이는 바다위에서의 포격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빛살처럼 날아간 주먹만한 쇳덩이의 절반은 배에 구멍을 숭숭 냈다.
나무로 만든 배는 금방 가라앉지 않는다. 옆으로 기울며 천천히 쓰러지는 군함들.
어떻게든 배를 살려보려던 수병은 결국 배를 포기하고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곳에서 기다리는 조선의 수송선들.
조선군은 일본군 포로 쉰 명을 잡았다.
인도적 차원에서 구한 건 아니다.
적의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포로를 고문해 필요한 정보를 뽑아낸 후 포로들을 바다에 풀어줬다.
육지가 가까우니 알아서 헤엄쳐 가겠지.
섬에는 뒤늦게 달려온 보병 600명이 부랴부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군함과 섬 사이를 오갈 작은 쪽배 몇 척이 전부이기에 바다엔 나오지도 못하고 우왕좌왕 하 고 있다.
광해는 그들을 쓱 본 후 출발을 지시했다.
“남서쪽으로 출발해라.”
“예? 저들은 안 잡으십니까?”
“배도 없는데 지들이 어쩌겠어. 태울 공간도 없으니 그냥 버리자. 돌아오는 길에 주워가자고.”
“아. 알겠습니다.”
출항한 배는 다음날 아침 우치나 섬, 현대엔 오키나와로 불리는 섬에 도착했다.
이제부턴 조심해야 한다.
작은 정찰선을 선두로 세우고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천천히 남하했다.
섬의 크기는 제주도의 2/3. 섬 자체는 남북으로 좁고 길다.
섬 서부를 멀리서 보며 내려간 함대는 저녁 무렵 섬의 남서쪽 나하 항에서 80척의 적 함대를 발견했다.
바다 위 섬나라 유구국은 지금껏 외침을 거의 받지 않았다.
이제껏 그들이 받은 공격은 일본 왜구의 약탈뿐이었다.
왜구를 막기 위해 나하 항에 성벽을 쌓고 포대를 배치했으며 항만 입구 물속에 쇠사슬을 묶어 놨다.
나하항 주변 해안가는 날카로운 산호초 때문에 배가 상륙할 수 없다.
완벽한 방어태세라 여겼지만, 사쓰마 번의 군사들은 섬의 북쪽에 병사들을 상륙시켜 육로로 침입해 나하를 점령했다.
약탈과 방화가 자행되는지 곳곳에 불타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으며 항구도 제압당해 침묵에 빠졌다.
적 함대는 병력 대부분이 상륙했는지 모든 배가 항구 안에서 닻을 내리고 있었다.
척후병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육지 쪽을 보고 있었다.
“밤까지 기다렸다가 전부 나포한다.”
배는 비싸다.
판옥선 한척을 만들려면 산 하나의 소나무를 다 써야 한다.
만드는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
해적 게임에서도 말해준다.
해적질에서 가장 큰 이득은 배에 실린 물건이 아닌 배 자체다.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억지로 자게 했다.
그 후 자정 무렵 조용히 접근했다.
“쉿. 숨도 쉬지마.”
왕을 선두로 노 젓는 병사를 제외한 전원이 적선에 기어 올라갔다.
80척의 군함에 올라서는 동안 적군 누구도 조선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배에 있는 인원은 총 700명 이하. 2000 병력으로 자고 있는 그들을 잡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뒤늦게 깨어난 몇몇이 부질없는 저항을 했지만, 의미 없이 사살당할 뿐이었다.
포로 500명 중 지휘관급 인물을 고문해 적의 위치와 병력을 확인했다.
이 시대 기준으로 꽤 큰 도시인 나하는 약탈과 방화로 참혹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나하에 함대를 세우고 이준형 등 함선 지휘관과 포병을 전부 배에 남겨뒀다.
기습을 받으면 배가 제대로 움직이진 못하더라도 포격으로 버틸 수는 있겠지.
어둠을 틈타 육상병력이 조용히 상륙했다.
상륙한 병력은 광해가 이끄는 창병 500명과 조총병 500명. 그리고 방패병이 되어줄 노병 500명이다.
500명의 창병은 백관을 수행했던 수호군이다.
당연히 요동창식에 능숙하고, 찰갑으로 기본적인 무장을 해 뒀다.
그들 뒤로는 경상도군 출신인 조총병들. 당연히 미덥지 못하다.
그 뒤의 방패병들은......
나하의 민간인들은 모두 도망쳤고, 남겨진 민간인은 죽은 시체나 강간당하고 있는 포로뿐이었다.
“백 명씩 나눈다. 조용히 수색하며 집집마다 자고 있는 병사들을 죽여라.”
간삼을 비롯한 수호군 주축들이 조를 나눠 나하를 수색하며 지나쳤다.
여기저기 집을 불태우며 약탈한 술과 음식을 먹는 사쓰마 번 군사들.
사쓰마 번의 원정군 자체가 다양한 지휘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일부 해적도 포함된 집단이기에 제대로 된 통제나 경계가 되지 않았다.
광해의 직속인 수호군이 조총병과 방패병을 이끌고 그들을 덮쳤다.
“누구냐? 나는 이치키 이에마사다. 정체를 밝...”
스캇.
개 중 복장이 화려한 지휘관들은 광해가 나서서 죽였다.
100명 단위의 조선군은 조용히 수색해 불빛 아래 놀고 있는 병사들과 약탈한 집에서 자고 있는 일본군을 하나씩 침묵시켰다.
늦은 밤까지 떠들썩하던 나하가 깊은 잠에 빠졌다.
아침 무렵 도시의 끝에서 다시 모인 조선군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잠을 잔 후 점심나절에 슈리로 출발했다.
저녁 무렵이 되자 멀리서 폭음이 들리고 곳곳에 화재가 보였다.
광해는 지도와 주변 산세를 보고는 슈리성 곁에 있는 절로 향했다.
절간 곳곳에서 일본군에 의한 학살과 미약한 저항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호군만 따라와라 나머지는 넓게 포위해 탈출하는 적을 사살하라.”
말을 마친 광해는 사슬갑옷의 후드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촤르르륵.
장갑의 철사가 염동력을 따라 꿈틀거린다.
“나는 조선의 국왕 광해다. 친애하는 아우 유구국의 중산왕을 구하러 몸소 왔느니라!”
광해가 죽인 일본군 중엔 통역으로 데려온 이도 있었다.
자연스레 유구어를 익혔다.
광해는 유구어로 소리쳤다.
당장 믿지는 못하겠지만 적이 아니라는 것은 알겠지.
촤라락. 푝. 푝.
철사가 살아있는 듯 꿈틀대며 왜구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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