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섬왕 윤선도
순도 100% 픽션입니다
행렬은 한성을 관통해 정궁인 창덕궁에 도착했다.
“여기가 창덕궁이구나.”
왕이 된 후 처음 와보는 조선의 정궁.
집에 들어가려는데.
“아이고. 전하. 광해님! 왜 이리 늦게 오셨습니까?”
허균이 달려 나와 호들갑을 떤다.
“뭣이.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미치다니요.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빨리 좀 오십시오.”
허균의 소망을 확인한 광해는 벌을 주는 대신 조용히 따라갔다.
왕궁 의각에 누워 와병 중인 환자.
이매창이다.
이 시대 여자라면 할머니가 될 수 있는 30대 중반 나이.
바싹 마르고 수척한 게 오랫동안 병을 앓은 듯 했다.
둥근 얼굴에 낮은 코, 작은 눈. 마른 몸매.
이 시대 기준으로도 미녀는 아니다.
“진짜 사랑이구나.”
“예?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서 치료해주십시오. 광해님의 은혜로도 약간 호전될 뿐 일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
암이니까.
광해는 간단히 병을 고쳐줬다.
“병은 고쳤지만 오래 못 먹어서 활력이 없다. 몇 달 간 잘 정양한다면 전보다 건강히 털고 일어날 것이다.”
“와! 역시 광해님! 믿었습니다. 주상전하 천세! 아니 만세! 최고! 멋지십니다!”
마력 10만이 흘러들어왔다.
“에휴. 경박한 놈. 역시 넌 글로 말해야 해.”
“그래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너 이거 빚진 거다.”
“에이. 우리 사이에 무슨 빚이랄 게 있겠습니까? 저야 광해님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손가락입죠.”
갑자기 허균의 캐릭터가 바뀐 것 같다. 이매창을 치료해준 게 그리 좋았을까.
“보고부터 해봐라. 편전으로 가자.”
“예. 예? 매창을 두고 갑니까? 아무것도 준비 못했습니다. 제가 내일 따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오늘까지만 쉬겠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가 뭐 이래.
영의정 정인홍 등 기존 대신들은 여전히 관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조정의 권력은 한성판윤 허균에게 완벽히 넘어왔다.
왕과 독대해 미래 사업 전반을 지시받은 상태이며 허균의 손을 통해 백관이 사회 각 분야에서 움직인다.
의정부 대신들은 손을 놓고 구경하는 중.
아니 광해소망교 교리를 비롯한 신지식을 따라가는데도 모자랄 지경이다.
조정을 장악한 허균과 나들이를 나왔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정자에 앉아 술을 마시며 넉 달간 조정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다.
“백관의 사업에 막히는 부분은 없습니다. 노역수들이 일부 비협조적이라 진행은 계획보다 느리지만 얼추 맞추고 있습니다.”
“조정은?”
“다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교리서를 익히고 있습니다. 성리학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은 있지만, 논리를 세우려는 정도입니다. 성리학은 이미 끝났습니다.”
“완벽하네?”
“이항복 대감이 고생하는 듯 합니다. 대국에서 조사대를 보내 조사하고 있지만, 여진족 약탈대의 습격으로 주장했습니다. 못 믿고 조사하고는 있지만, 그들에게 협력할 양반들은 노역형으로 잡혀 있고 제대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이 대감이 매일 술을 퍼먹이고, 여자를 안겨주고, 광해님의 은혜를 안겨줘서 무마하고 있습니다.”
“이항복이 고생하고 있군.”
“예. 대국에서는 뇌물을 노리고 4차 5차 조사대를 계속 파견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사건 무마로 드는 뇌물에 조선의 기둥뿌리가 뽑힐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외 주상께서 지시하신 바는 모두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허균이라면 경박한 성격 때문에 자잘한 실수를 많이 할 것 같았는데 수많은 사업을 제대로 챙겼다.
“에이. 그건 아니죠. 허대감이 잊고 있어서 제가 챙긴 게 얼만데.”
감히 왕과 한성판윤의 대화에 끼어드는 젊은이.
윤선도다.
“야. 내가 잊고 있던 게 아니라, 네놈이 미리 말한 거잖아.”
“에이. 당일 아침까지도 전혀 준비하지 않으셨으면서.”
“이놈아. 하려고 했어. 말하기 좋아하는 네가 미리 나선 것 뿐이지.”
윤선도가 입을 나불대며 챙겨준 듯하다.
경박한 허균에게 말하기 좋아하는 윤선도를 붙인 게 호재일지도.
“전하. 윤선도 또한 많이 배웠으니 이제 사업 하나를 맡겨볼까 합니다. 농축산업 사장에 앉혀도 되겠습니까?”
“어. 안 돼. 딱 봐도 네 종사관으로 딱이네.”
“아이고. 주상전하. 광해님 제발. 제가 잘 때마다 이명이 들립니다. 이놈의 잔소리 때문에.”
잔소리에 질려버린 허균은 윤선도 때문에 괴로워 보이지만 내 일 아니니 상관없다.
효율만 생각해야지.
“감사합니다. 전하. 제가 허대감 옆에 붙어서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아이고. 이놈아. 이제 너도 네 이름을 떨칠 때가 오지 않았느냐.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느냐?”
“대감마님.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허 대감께서 제대로 일하시도록 돕는 것입니다.”
둘이 아옹다옹하는 것을 안주삼아 술을 마셨다.
“간삼아. 와서 앉아라. 고생했으니 한잔해라.”
왕의 근접호위는 이제 수호군으로 채워졌다.
이제는 금군 별장으로 승진해 뒤에 시립해 있던 간삼은 곧장 다가와 잔을 받았다.
꼬장꼬장한 성리학자가 보면 목을 치라고 난리칠 일이겠지만.
광해의 성격을 아는 간삼은 빈말 없이 술을 받았다.
임경업도 한잔 주고 호위들도 한잔씩 주고.
6월 바람이 적당히 따스하다.
매미도 풀벌레도 아직 없어서 세상엔 새소리만 가득하다.
허균과 윤선도의 만담을 들으며 술잔을 채운다.
야트마한 언덕은 여기저기 공사가 진행되는 한성 전경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마포 나루에 배들이 오가며 사람과 물산을 싣고 내리는 게 보인다.
“처음 왔을 때보단 역동적이군.”
초가집 지붕을 보며 조선 참 한심하다고 느꼈었는데.
“아. 광해님.”
허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뭐?”
“이번 관속 시험에 전국 장원을 한 아이가 있습니다. 소개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 아이를 제 종사관으로 뽑고 싶습니다.”
“아. 대감. 제가 대감의 영원한 종사관이래두요.”
윤선도가 끼어 든다.
1차 경고.
“윤선도. 니 차례 아니면 닥치고 있어라. 내가 소개받을 만한 인재인가?”
“예. 시험 발표 석 달 만에 장원을 차지한 수재는 알아두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데려왔나?”
“예. 심지원. 나와 봐라.”
허균이 부르자 멀리 나인들과 가마꾼 사이에 있던 아이가 달려 나왔다.
아이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청송 심씨에......”
“몇 살?”
“방년 열다섯 살입니다. 전하.”
“기특하지 않습니까? 틀리라고 낸 문제도 전부 맞춰버린 수재입니다. 솔직히 백관 속에서 함께 공부했다면 최명길 못지않은 인재가 되었을 겁니다.”
곁에서 허균이 추임새를 넣었다.
광해는 허균의 호들갑에 품에 손을 넣었다.
모현성의 인물평가.
심지원.
열다섯 살에 장원할 정도라면 혹시 했는데 역시나 있다.
영의정. 소심. 우유부단. 인재를 잘 봄. 윤후, 허목, 송시열 등을 키워 예송논쟁 주인공들을 무대에 세운 캐스팅 디렉터.
‘이게 호평인지... 악평인지...’
소심하고 우유부단 하지만 영의정씩이나 했으면 역시나 특출난 재능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그 어려운 시험에 전국 수석을 차지한 거겠지.
저기 적힌 이름에 여기서 나불대는 윤선도를 포함하면 예송논쟁의 주역들이 다 모이는 건가.
“니 종사관으로 써라.”
“감사합니다. 전하. 그렇다면 윤선도 이놈은 농축산업 사장으로 앉혀서......”
“아이고 대감님. 또 저한테 왜 그러십니까? 지는 징말 서운한기라.”
다시 시작된 허균과 윤선도의 만담.
둘의 만담을 악기삼아 술을 드는데 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뒤를 힐끗힐끗 보는 심지원. 심지원을 노려보고 있는 임경업.
둘의 나이도 비슷해 보인다.
“둘이 서로 아느냐?”
황제는 솔직하다.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면 된다.
“예. 같은 학당에 다녔습니다.”
심지원이 대답했고.
“자신을 구해준 주상 전하와 저를 버렸습니다.”
임경업이 씩씩댔다.
“응? 무슨 말이냐?”
“기억 안 나십니까? 학당에서 이 자가 괴롭힘을 당할 때 주상께서 구해주셨습니다. 괴롭히던 자들을 찔러 죽이고는 주상의 지시인 것처럼 떠넘겼죠.”
“그런 일이 있었나? 기억 안 나는데.”
“헌데 은혜도 잊고 주상께서 위험에 처했던, 그 홍여순의 난 때 홀로 도망쳐버렸습니다. 저와 함께 주상을 구하기로 약속해놓고 도망쳤습니다. 전 의리 없는 이 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닙니다. 소인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할 일을 찾아 했을 따름이옵니다. 주상의 크신 은혜를 갚기 위해선 무의미하게 나서는 게 아니라 공부해서 보답하는 게 대도라고 여겼습니다. 절차탁마하여 이렇게 장원을 차지했습니다. 진정 이를 악물고 노력했습니다.”
임경업은 씩씩대는데 심지원은 차분하다.
둘의 성격을 보건데 오해가 있었던 듯 하다.
자세히 알기는 귀찮고.
“둘 다 옳다. 경업이도 옳고, 심지원도 옳다. 그러니 사이좋게 지내라. 싸우지 말고.”
어른의 18번.
애들의 사정 따위 알기 귀찮으니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란 말로 넘겨버린다.
왕명이 떨어졌다.
둘은 할 말이 너무 많은 표정이지만 차마 말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때 감히 나서는 이가 있었으니.
“그건 아닙니다. 전하. 황희도 아니고 참. 불씨를 남겨두면 후에 거대한 화마가 되어 불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오해를 단단히 바로잡고, 순리를 찾아야 합니다.”
윤선도다.
역사적 아갈파이터라더니 감히 왕을 무네.
뒤에서 너도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히죽대는 허균의 표정이 주먹에 힘을 불어넣는다.
2차 경고.
레드카드다.
“너. 농축산업 사장.”
곧장 귀양.
역시 아갈파이터는 멀리할수록 좋다.
“예?”
“가서 일해라. 조선의 농업과 축산을 관장하라.”
“예? 안 됩니다. 소신은 한성판윤 곁에서 성실히 보좌해야만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윤선도는 정말 싫은듯했다.
이렇게 할 말 다하는 성격이니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겠지.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유배지에서 보내며 시조나 지었던 인물.
“허균. 이놈에게 지가 할일이 뭔지 설명했어?”
“못했습니다. 말 꺼내자마자 거품 물고 반대하니 설명할 시간이 없었죠.”
“이 새끼. 농축산업을 우습게 보는구나. 윤선도. 잘 들어라. 네가 할일은 10년 안에 조선의 식량을 두 배로 늘리는 일이다. 조정의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생각해봐라. 10년 후 조선의 식량이 두 배가 된다면 조선은 얼마나 강해지겠느냐? 그 일을 책임진 네놈은 얼마나 칭송받을지. 그런 중요한 일을 아무에게나 맡기겠느냐? 네가 성공하면 넌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남을 것이다.”
광해가 적당히 부추겨주자 윤선도의 표정이 헤실헤실 풀렸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구나.
광해는 쐐기를 박았다.
“조선의 섬은 대략 사천여개. 그 중 사람이 사는 섬은 백여 개뿐이고, 나머지 모든 섬은 무인도다. 그 모든 섬을 네가 관장하게 된다. 넌 섬의 왕이 되는 것이다. 육지의 왕이 나라면 섬의 왕은 너다.”
“서... 섬왕.”
“그래. 섬왕. 섬왕 윤선도. 감히 누가 자신의 이름자 앞에 왕이란 호칭을 붙이겠느냐. 오직 너만이 왕에게 허가받아 왕이란 호를 붙일 수 있게 된다. 섬왕 윤선도. 가라.”
“예. 전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가라고.”
“예!”
윤선도는 갔다.
쟤 어디 가는 거지?
곁에서 허균이 존경의 눈빛을 날리는 게 참 보기 좋다.
세상에 평화가 찾아왔다.
허균의 차분한 보고를 들으며 술을 마신다.
매미가 찾아오기 직전 초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좋다.
멀리 마포에 오가는 이를 보며 술을 마신다.
일본에서 나포한 선박들이 여럿 눈에 띈다.
마포까지 올라와 물자를 내리고 떠나는 선박들.
그 와중에 한강 한가운데에 시선이 갔다.
풍덩.
조그만 쪽배에서 사내 하나가 쌀 가마니 같은 것을 강에 던진다.
쌀가마니가 작은 포말을 일으키고는 물속으로 들어간다.
‘쓰레기 무단투기? 이 시대에? 웬만한 쓰레기는 그냥 태우지 않나? 가마니 짜는 품이 더 들 텐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불멍 하듯 보고 있는데 가라앉는 소용돌이 사이로 붉은 기가 감돌다 사라진다.
피다.
“간삼.”
“예. 전하.”
“저 남자 데려와라. 배도 압수하고.”
“예. 전하.”
간삼은 호위 둘을 데리고 곧장 말에 올라 달렸다.
- 작가의말
윤선도는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재밌어요
인생의 40년 이상을 유배지에서 보낸 뒤가 없는 아갈파이터
현대에 태어났으면 세계최강 기자가 되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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