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역동하는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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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서야. 너 후궁 할래? 숙의부터 시작해야 하나?”
“예? 하오나 전. 괜찮습니다.”
예서의 겸손에 광해의 인상이 구겨졌다.
“아아. 난 거짓말쟁이가 싫은데. 떡하니 소망이 보이는데 겸손하겠답시고 사양해서 같은 말 다시 되묻고 그러는 거 너무 싫은데. 나한테 솔직한 건 모현성 그 정신 나간 관종밖에 없어. 아. 난 행복할 수 없어.”
광해의 투정 같은 짜증에 예서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게 아닙니다. 제가 후궁이 되면 전하를 도울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전 전하를 돕고 싶은데 후궁이 되면 내원에 머물러야 해서.”
“뭔 소리야? 그냥 일하면 되지.”
“예엣? 그러면 조정의 법도가.”
“내가 조정의 법도 무서워하는 거 같아? 그냥 후궁 하면서 시키는 일 하면 되는 거지.”
광해의 말에 예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 전하의 후궁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 그래라. 후궁이 되었으니 소망 같은 거 없느냐?”
광해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서는 광해가 원하는 대답을 알 것 같았다.
“궁에 정상궁이라는 궁녀가 있습니다. 그 궁녀를 제게 붙여주십시오.”
“그 소망 이루어질 지어다.”
정상궁. 이제 죽었다.
예서의 웃음에 사악함이 묻었다.
이운룡. 46세.
무과에 급제한 그는 관직생활의 시작을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했다.
녹둔도에서 첫 관직생활을 한 그는 패전의 멍에를 쓴 이순신과 함께 파직되어 백의종군했고, 다음해 신전부락 전투를 통해 함께 복권했다.
임란 발발 때 옥포 만호로 근무하다가 싸워보지도 않고 도주하려던 원균을 말렸고,(원균은 듣지 않고 도주했다) 박살난 수군을 수습해 이순신에게 합류했다.
이후 이순신이 가장 신뢰하는 부장이자 선봉장으로 공적을 세웠다.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파직되어 백의종군 할 때 함께 파직된 덕분에 원균이 죽은 칠천량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고, 이후로는 육전에 참가해 전쟁의 끝까지 활약했다.
불과 18명뿐인 임진왜란 선무공신에 올랐으며, 현재 살아남아 있는 이들 중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이다.
강직하고 뇌물이 안 통하는 성격과, 살아있는 영웅을 싫어하는 국왕의 성품이 맞물려 끝없이 탄핵당하고 꾸준히 파직당하지만, 결국 필요에 의해 다시 불려 와도 불만 없이 묵묵히 나라를 지키는 참 군인이다.
모현성의 인명록에 적혀있는 최중요 인물이다.
충무공의 부하였던 무의공 이순신은 재물을 밝히고 뇌물을 즐겨 받으니 전군을 맡길 순 없고, 이운룡을 장차 총대장으로 쓸 생각이다.
충무공의 원수를 갚는다 - 840095
소망도 담백하다.
장군들과의 대화에서 이운룡은 정충신처럼 미리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연회에서 들은 광해의 계획보다 자세하고 긴 계획을 들었다.
왕의 뜻에 동의한 이운룡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로 갔다.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무의공 이순신과 경상우수사가 된 권준이 함께 했다.
충무공의 부장들이 다 모인 것이다.
이운룡은 한산도에 도착하자마자 전국에 파발을 날렸다.
“전시대비 비상훈련?”
“전국기동훈련?”
“모든 전쟁 물자를 갖추고 기동훈련을 준비하라?”
“비상보급훈련?”
진도군 남도포 만호 이준형은 명령서를 받고는 부랴부랴 물자를 갖췄다.
성실히 통제해 왔다고 생각했으나 노병은 부족하고 화약은 일부 젖어있었다.
부랴부랴 노병을 뽑고 화약을 말려봤지만,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 부족한대로 물자와 사람을 싣고 명령서에 따라 이동했다.
다섯 척의 판옥선은 전시체제 물자를 싣고 강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지정된 물자를 싣는 데 물자라는 게 전부 목화솜이었다.
이때부터 이준형은 무언가 요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전군훈련이라더니 한산도에 도착하니 판옥선은 십 여척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외지 배들이고 경상좌수영 소속은 전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명령서에 따라 사열을 준비했다.
얼마 후 이운룡이 부관을 잔뜩 끌고 나와 점검을 했다.
“화포알 71개 비는군.”
“그...... 그게 무쇠를 신청했으나 내려주지 않아서.”
“노병이 부족하다. 다섯 척의 판옥선에서 열아홉 명이나 부족하다. 이래서 전쟁을 치를 수 있겠느냐?”
“어쭈. 화약이 젖었군. 그걸 억지로 말려서 뭉쳤어. 이건 못 쓴다. 차라리 버리는 게 낫지 이걸 들고 나갔다가 전투 중에 화포가 안날아가면 어쩔 셈이냐?”
“식량 100일치를 실으랬더니 50일치도 안되겠군. 이것만 먹고 100일 버틸 수 있느냐?”
“예비노가 부족하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노가 부러지면 전부 죽는다. 정신 나갔냐?”
“하기 싫으냐? 하기 싫어?”
“본 통제사는 귀관들에게 실망했다.”
이준형은 대략 정신이 혼미해졌다.
단순한 사열이 아니었다.
전쟁영웅 이운룡은 본인이 직접 화약을 만지고 맛보며 꼼꼼히 점검했다.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벌은 다음 훈련 성과를 보고 결정하겠다. 지금부터라도 전시체제라는 것을 깨닫고 행동하길 바란다. 만호 이준형은 긴급보급훈련을 시행하라. 각 함에서 부선장 급 세 명씩 한산도에 남겨라. 나머지는 한산도에서 지정된 물자를 싣고 9일 이내에 녹둔도로 가서 지정된 전시 물자를 내리고, 그곳에서 지정된 물자를 싣고, 20일 이내에 복귀한다. 이상!”
“옛. 장군.”
한산도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막바지에 하급무관으로 임명되었던 이준형은 전시분위기를 느끼고 바싹 긴장해 대답했다.
“형님. 제...... 제가 남아야 합니까?”
“그래. 부함장급이면 너 아니냐. 사고치지 말거라.”
이준형은 자신의 처남 함영석과 똑똑한 부하들을 남겼다.
사열을 위해 꺼내두었던 쇠붙이와 화약 등은 지정된 창고에 넣고, 창고에서 추가로 목화솜을 실었다. 그리고 곧장 녹둔도로 출발했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이다.
9일 만에 한산도에서 두만강까지.
해상교통이 육상교통보다 빠르다지만, 무리한 일정이었다.
게다가 몰고 가는 것은 길이 30m의 무식하게 큰 범선.
바람의 힘도 빌리기 힘든 판옥선이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 가까이 지났다. 그 당시의 용사들은 거의 다 은퇴했다.
지금 배에 탄 이들은 대부분 새로 뽑힌 이들이다.
당연히 미숙하다.
판옥선마다 40명의 노병과 40명의 포병, 20명의 갑판병이 타고 있지만, 다들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초짜들이다.
돛을 관리하는 함영석이 내렸기에 이준형이 직접 돛을 펼쳤지만 제대로 바람을 받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노병들이 쉴 새 없이 노를 젓다가 퍼지자 이준형이 소리쳤다.
“포병들. 교대하라.”
“예? 저희는 포병입니다. 저희가 노를 저으면 비상 상황에 대비를......”
“시끄럽다. 화약도 안 실었는데 포병은 개뿔. 당장 교대하라.”
‘다음 훈련의 결과를 보고 처벌을 결정하겠다.’
이운룡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날짜를 맞추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포병과 갑판병까지 교대로 노를 저어야 했다.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끊임없이 판옥선을 만났다. 수시간에 한번 꼴로 북에서 남으로 이동하는 판옥선이 보였다.
“경상좌수영 소속...... 경상우수영 소속...... 어라. 강원수군인가?”
시간이 없어서 깃발로 간단한 인사만 하며 지나쳤는데, 조선팔도 수군을 다 보는 것 같았다.
선박마다 홀수가 깊게 잠겨 있는 것이 무거운 물자를 잔뜩 실은 느낌이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것 같았다.
거수로 인사를 하며 지나치는데 저쪽 배들에 서 있는 선장들의 얼굴이 시커멓다.
그 주위에 있는 갑판병들은 아주 파김치가 되어 있고.
‘아뿔사. 저들도 똑같은 명령을 받았구나.’
이준형은 부하들을 더욱 다그쳐 속도를 높였다.
그렇게 기동훈련을 한지 8일째. 한계에 다다르도록 속도를 높여 녹둔도에 도착했다.
강가엔 병사들이 서서 깃발로 유도하고 있었다.
깃발병의 유도에 따라 나루터에 접안했다.
“어디소속입니까?”
나루터에 있던 군관 하나가 소리쳐 물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종9품 무관이었다.
“전라좌수영 남도포 만호 이준형이다.”
군관은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한 장을 뽑아들었다.
“목화솜 수송 맞습니까?”
“그렇다.”
“모두 내려 주십시오.”
병사들이 목화솜을 내리자 대기하고 있던 수레에 실었다.
기마 수백기가 수레를 끌고 곧장 출발했다.
“저기 뗏목에 있는 철괴를 싣고 한산도로 수송하시면 됩니다. 여기 수송명령서입니다. 전시물자니 소중히 다루십시오. 그리고 이건 아산포구로 갈 물자입니다.”
목화솜을 전부 내리고 빈자리에 길쭉한 쇠기둥 천개를 실었다.
무산 제철소에서 뽑아낸 강철을 두만강 뗏목에 실어 하류까지 수송한 것이다.
병사 스물이 달라붙어야 겨우 들어 올리는 쇠기둥을 높은 판옥선에 나눠 싣자 배가 푸욱 가라앉았다.
“기억하십시오. 한산도에 들렀다가 아산으로 가야 합니다. 안 그러시면 경을 치실 겁니다.”
배웅하는 군관 놈이 얄미운 소리를 했다.
남하하는 길.
이번엔 전라좌수영 뿐 만 아니라 충청수군과 경기 수군까지 봤다. 그들 역시 두만강을 향해 북상하다가 반가워했지만, 이준형은 손 흔들 힘조차 없었다.
바람이 역풍이라 돛의 힘을 받지 못한다.
무거운 쇠기둥을 잔뜩 실어서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
날짜를 맞추려면 해류를 가로질러 남하해야 했다.
북상할 때 봤던 선장들의 얼굴이 시커맸던 게 이해가 되었다.
정신없이 내달려 한산도에 들렀고, 아산에 도착했다.
얼굴 시커먼 사내가 나와 있었다.
“남도포군?”
“그렇소.”
“우리가 받을 게 있다던데.”
이준형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아산에 배정된 물자를 내렸다.
훈제한 말고기 5톤.
고기가 귀한 이 시대에 엄청난 물량이다.
“크흐흑. 주상께서 우릴 잊은 게 아니었군. 아니었어.”
모현성은 군마 삼천 마리가 죽은 무산에서 남아도는 고기를 보낸 것뿐이지만, 아산에서 땅을 파고 있던 최기석은 감격했다.
광해는 최기석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우리가 실을 것은?”
“저거. 확실히 무게 확인하고 실으슈.”
“뭐길......래? 헉!”
최기석이 내미는 종이를 본 이준형이 숨을 멈췄다.
유황 이만근.
백미 이만석과 바꿀 양이다.
“당신 배 가라앉기라도 하면 고을 하나가 사라지는 거야. 조심해.”
추레한 사내가 겁을 줬지만, 만호 이준형은 아무 말도 못했다.
조심조심 배를 몰아 한산도로 갔다.
일정이 늦어져서 불호령을 들었다.
“물자를 싣고 녹둔도로 가라.”
곧장 이어진 명령.
이번엔 마초와 백미를 가득 싣고 두만강으로 갔다.
수레를 끄는 기마가 물자를 가져갔고, 전처럼 쇠기둥을 실었다.
이번 목적지는 무려 한성부 마포.
한 달이 걸려 마포까지 가니 가을이 되었다.
이후로도 정신없이 수송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간다.
전쟁 준비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게 뭔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게 있다.
이건 전쟁물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수군이 할 일이 아니라 세운선이 할 일 같기도 하고.
잘은 모르겠지만
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 작가의말
군바리들 노는 꼴은 절대 못 봐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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