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해미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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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댁. 부탁이 있는데 거울 열개만 사다줄래?”
권첨지댁의 말에 해미댁은 속으로 돼지년이... 라고 중얼거렸다.
목에 걸려있는 유리구슬 목걸이가 역겹다.
“돈이 없는데...”
“여기 은화 열개. 거울 하나에 한 냥이야.”
“그럼...”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요? 라고 말하려다가 평소 타성대로 말을 멈추었다.
그저 속으로 돼지년이... 라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종교활동은 안 가려고요?”
“이번에 중요한 집안 행사가 있어서 말이야. 그럼 부탁해.”
권첨지댁은 은화를 남기고 해미댁의 어깨를 두드린 후 떠났다.
확 들고 날라버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쌀 40석에 집을 버리고 도망자가 되기엔 인생이 너무 아깝다.
인생......
주일이 되자 해미댁은 가족과 함께 반나절 거리에 있는 태안교단에서 종교활동을 한 후 교단 옆에 있는 광해상회에 들렀다.
“거울 열개 주세요.”
당당히 은화 열개를 내놓는 해미댁.
은의 무게가 묵직하다.
이게 부자의 기분인가.
상점 직원은 은화를 받아 양팔 저울에 올리고, 물에 넣어 위조여부를 확인한 후 고개를 숙였다.
“맞습니다. 거울 열개 드리겠습니다.”
창고에서 나무틀에 보관된 거울을 가져온 직원이 조심해서 상품을 넘겼다.
“확인해보시고 이상 없으면 가져가세요.”
네모난 유리에 얼굴이 비춰진다.
동경이나 청동거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또렷한 내 얼굴이 들어가 있다.
얼굴의 작은 모공과 솜털까지 비춰지는 신묘한 물건.
광해상회에서 새로 내놓은 귀물이다.
거울 속에 비친 예쁜 내 모습에 감동하던 해미댁은 남편이 옆구리를 찌르자 정신을 차렸다.
네모난 거울 테두리에 홈이 파진 나무틀이 고정되어 있다.
뒷면은 얇은 나무판이 붙어 있고 손잡이도 인체공학적으로 곱게 갈린 나무다.
열개의 거울에 깨진 부분이 없는 것을 확인 한 해미댁은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네요.”
“그럼 인수해 가시죠. 사장님.”
“네? 사장님?”
“예. 되팔 물건을 가져가는 모든 분은 사장님입니다. 깨지거나 금이 가면 반품 안 되니 주의하시고요.”
사장님. 어감이 좋다. 왠지 대단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든다.
“인수하죠.”
해미댁은 턱을 치켜들면서 세련되게 말했다.
“이름과 인수 확인증을 써 주시죠.”
소작농일 땐 평생가도 못 모을 은화 열개를 순식간에 썼다.
남의 돈이지만.
해미댁이 귀부인의 감성에 젖을 때 남편은 거울 열개가 흔들리지 않게 보자기로 단단히 동여맸다.
광해상회 태안지점을 나서자 행사장엔 여전히 사람이 많이 있었다.
7일마다 열리는 종교행사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기에 자연스레 7일장이 열린다.
동면중인 개구리떼를 잡아온 사람, 땔감을 지고 온 사람, 곶감을 들고 온 사람, 얼린 조기를 들고 온 사람.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져온 물건을 팔고, 필요한 물건을 찾아 협상한다.
그들을 보던 해미댁은 문득 말했다.
“찬희 아빠. 거울 하나만 줘 봐요.”
“깨지면 어쩌려고 그랴?”
“잠깐 줘 봐요. 얼굴에 뭐 묻었단 말이에요.”
“묻긴 뭐가 묻어. 똑같구먼.”
“진짜. 당신. 당신은 여자를 몰러!”
“맞아 아빤 여자를 몰러!”
손잡고 있는 일곱 살 딸이 엄마를 도왔다.
해미댁이 한번 삐지면 오래 가는 걸 아는 찬희 아빠는 한숨을 내쉬며 보따리를 풀었다.
거울을 하나 꺼내자 해미댁은 활짝 웃으며 받아들었다.
“어머. 얼굴에 기미 봐. 피부가 왜 이리 상했대. 속상해 죽겠어. 진짜.”
목소리는 크지만 이건 혼잣말이다.
연극 무대에서 독백을 읊듯 해미댁 혼자 소리치자 주위의 시선이 몰렸다.
“꺄아아. 해미댁! 그거 동경이지?”
“에휴. 안산댁. 동경 아니고 거울. 은으로 만든 유리거울.”
안산댁이 소리 지르자 온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들었다.
“이게 은거울이란 거여?”
“세상에. 참말로 고운 거 봐유.”
“신이 쓰는 귀물이라던디.”
“권씨집 소작농하면서 돈은 어찌 모았대.”
“해미댁 축하해.”
“나도 좀 줘봐. 얼굴한번 비춰보게.”
너도나도 손을 내밀자 해미댁이 단호하게 말했다.
“깨지면 쌀 네 석.”
아낙들의 손이 굳는다.
“살짝만 떨궈도 깨진다며?”
“세상에나. 이걸 어찌 쓴대유. 손 떨려서 들지도 못하겠구먼.”
“용감하기도 하지.”
해미댁은 미소 지으며 거울의 손잡이를 돌려 아낙들의 얼굴을 한 번씩 비춰줬다.
거울이 돌아갈 때마다 고개를 쭉 빼며 자기 얼굴을 찾는 아낙들이 웃기다.
“이게 그만. 자 여보.”
해미댁은 곁에 앉아서 에휴 집에 좀 가자 하는 표정의 남편에게 거울을 내밀고 놨다.
우아하게.
쨍그랑.
“어?”
턱을 들고 아낙들에게 대범한 모습으로 거울을 내민 해미댁은 남편이 거울을 잡기도 전에 손을 놨다.
우아하게.
수십조각으로 깨진 거울이 바닥에 흐트러졌다.
“꺄아악.”
“어떻게!”
“쌀 네 석이 날아갔다아~”
“참말이유? 진짜?”
“자기 땅 받았다 해도 쌀 네 석이나 갖고 있으려나.”
“에구 저 비싼 걸 어쩐대유.”
쯧쯧 혀를 차는 말이 쏟아질 때 해미댁은 돌처럼 굳어 땅을 봤다.
조각난 유리조각들이 해미댁의 사색이 된 얼굴을 조각조각 비추고 있었다.
인생......
“그만 일어나.”
“어떻게 그만 일어나요? 거울이 깨졌는데.”
“그래도 일어나. 찬희 밥은 먹여야 할 거 아녀. 따라와.”
울고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해미댁과 엄마 따라 덩달아 운 찬희를 일으켜 세운 남편은 유리조각을 모아 들고 광해상회로 갔다.
“반품 말씀이십니까? 아시겠지만,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러지 마시고. 사자마자 망가진 거면 당연히 보상을 해야지. 지게장수도 고장 나면 고쳐주는 게 인심인데.”
“딱하지만, 지도 월봉 쌀 여섯 말 받는 처지구만유. 지한테 말해봤자 아무것도 안 돼유. 차라리 관아에 송사를 넣으시는 게. 벌써 몇 번의 송사가 들어갔다 들었슈.”
안타까워하는 점원의 말에 찬희 아범은 더 이상 우기지 못 했다.
왕이 운영하는 상회에 왕이 만든 물건을 보상하라 하다니.
광해님이 아무리 선량하시다 하여도 자칫하면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다.
“이거 수리는 안 되는 거유?”
“지가 알기론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유. 만들기가 워낙 어렵기도 하고 아예 처음부터 만드는 게 나을 게유.”
“아니 대체 어떻게 만들기에 이렇게 비싼 건데? 사실 말도 안 되게 비싸잖아. 만드는 법 좀 말해봐. 내가 처음부터 만들어서 고치지.”
남의 돈으로 심부름 할 땐 생각하지 않다가 이제야 든 합리적 의심.
찬희 아범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점원은 한숨을 쉬었다.
“유리 기술은 공개하라 했으니 말씀드리지유. 거대한 내화벽돌 고로에 주석을 녹입니다. 액체가 된 주석에 녹인 유리액체를 살살 부으면 가벼운 유리가 떠올라유. 떠오른 유리를 살살 펴 천천히 식히면 주석과 맞닿은 부분이 완전 평면이 되유. 이 유리가 살짝 굳고 아직 뜨거울 때 떠내서 평평한 면을 녹은 은에 살짝 묻히면 그쪽 면에 은을 바른 유리가 만들어지지유. 이제 완전히 식혀서 은 뒷면에 물고기 부레로 만든 아교와 송진 등을 바르고 나무판을 붙이면 거울이 완성되유. 이래도 쌀 네 석이 비싸 보여유?”
“......”
말로만 들어도 정신이 아뜩해진다.
액체 주석과 액체 유리와 액체 은을 다루는 일이었다니.
이것이 신의 기술인가.
해안가의 거대한 유리 공장에 검은 연기가 쉬지 않고 올라가더니 이런 비밀이 숨어있었다.
문득 아내의 허영에 울화가 치밀어 돌아보니 겨우 멈췄던 해미댁이 또 펑펑 울고 있다.
엄마가 울자 함께 우는 일곱 살 딸 찬희.
“에휴. 내가 못난 탓이지. 돌아가자. 여편네야.”
인생......
“뭐야? 이게! 거울 열 개 가져오라 했잖아!”
찬희 아범이 쌀을 탈탈 털어 권첨지 집으로 가자 예전 주인 마님이 길길이 날뛴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하나는 가져오다가 깨졌습니다. 쌀 네 석 가져 왔시유.”
“이 쌀은 뭐야? 무겁고 거추장스럽게. 차라리 은화로 가져와!”
“아오 샹! 지금도 내가 소작 먹는 줄 아나!”
“뭐시 어쩌고 어째? 내 바깥양반을 불러서...”
“관에서 사람 불러서 일을 시켜도 쌀 한 됫박은 주는데 아무것도 안 주고 일을 시켰지? 내 반드시 송사를 걸 거여. 그래서 반나절 거리에 왔다 갔다 하며 이 잘 깨지는 물건 수송한 비용 반드시 받아낼 거여.”
“뭐? 뭐라... 우리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내 땅에서 소작 먹다가 내 땅 뺏은 놈이 뭐라? 감히! 이 땅 도둑놈들. 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다. 여보~ 이리 와봐 여보~ 아니 어디 갔어? 진짜.”
“아무 일도 안하고 우리 소작농들이 일한 것을 빼앗아 배 채우던 멧돼지들이. 그 토지대금으로 세운선 받아서 전보다 더 돈을 버는 주제에 아직도 자기 땅이라 생각하네. 퉷.”
권첨지댁과 한바탕 하고 돌아온 찬희 아범.
집에 가서 불을 뿜어내려 했는데, 모녀가 함께 울어 눈이 퉁퉁 부어 있다.
그 모습이 왠지 웃겨서 화낼 힘이 빠진다.
“됐어. 해결했으니 그만 울어.”
“여보. 우리 겨울 날 식량은.”
개혁으로 토지 반결을 받았다.
비료도 받아다가 벼 밭에 뿌리고 열심히 농사지으니 쌀 일곱 석을 얻었다.
여기서 세를 내고 나면 쌀 다섯 석.
이것만으로 일 년을 살 수 없으니 고사리며 두릅이며 이런저런 나물과 미꾸라지, 굼벵이 등 먹을 수 있는 걸 최대한 주워 와야 한해를 먹고 산다.
그런데 쌀 네 석을 잃었다.
아직 겨울인데 가을까지 먹을 식량이 전혀 없다.
생각하니 또 헛웃음이 나오네.
“됐네. 이 사람아. 산 입에 거미줄 칠까. 친우들에게 한 됫박씩 얻어다 먹고 나중에 갚으면 돼야. 다들 살림살이 좋아졌으니.”
“미안해유. 여보.”
“됐대두. 가난뱅이한테 시집와서 고생한 당신한테 내가 더 미안하지.”
분위기가 묘해졌다.
퉁퉁 부운 눈으로 눈치를 보던 찬희가 말했다.
“엄마 나 나가? 아니면 또 자는 척 할까?”
“그런 거 아녀! 가만있어!”
흐름이 끊기자 찬희 아범이 거울 조각을 꺼냈다.
“이거 맞춰서 붙이면 팔 수 있지 않을까?”
“에이. 깨진 거울을 누가 산다 그래유?”
“봐봐. 깨졌어도 이렇게 선명하자녀. 잘 붙이면 금간 곳이 거슬려서 그렇지 얼굴 보는 데 문제없겠지.”
“누가 깨진 거울을 들고 다니겠어유! 여자가 왜 거울을 들고 다니려는 지 몰라유? 당신은 여자를 몰라!”
“맞아. 아빠는 여자를 몰라!”
아오. 내가 아들을 낳고야 만다.
“그럼. 조각마다 작은 거울로 만들어 팔면? 솔직히 쌀 네 석짜리 거울 들고 다니기 불안하잖아. 쌀 한 말짜리 작은 거울이면 들고 다니며 자랑할 만하지 않겠어?”
“누가 거울을 자랑하려고 들고 다녀요? 당신 진짜.”
“아빠 진짜.”
아오.
“어쨌든 당신 손재주 좋잖아. 큰 거울은 네모 빤듯해서 오히려 멋이 없었다고. 이런 세모 모양 거울조각에 당신이 나무틀 붙이고 장에 자개 붙이듯 꾸미면 되지 않겠어? 여자의 감각이란 게 있잖아.”
“음.”
“해봐. 당신의 놀라운 손재주를 썩이지 마. 일단 하나 만들어 볼까? 장작더미에서 적당한 나무 골라올게.”
“그렇게 원한다면야. 한 번 해 보쥬.”
남편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듯 손을 뻗는 해미댁.
저 여편네가 진짜.
거울을 누가 깼는데.
이때까지는 찬희 아범도 어멈도 손거울이 대박을 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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