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삶의 의미2
순도 100% 픽션입니다
사람의 소망을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진심은 알지 못했었다.
무려 10년 가까이 곁에 두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두 여자의 진심을 이제야 좀 이해한 것 같다.
사실 제대로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
사람의 진심은 알기 어렵다.
아마 평생을 함께 지내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은 알지 못할 것이다.
배에선 할 일이 없다.
바다를 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며칠만 지나면 지겨움의 연속이다.
식사할 때 갑판에 올라 바다를 잠시 보는 것 외엔 거의 선실에만 있었다.
예서를 부르고 소유키를 부르고 나중엔 그냥 같이 불렀다.
황제가 시키면 억지로 할 테고, 그런 관계가 싫어 되도록 참았는데 내심을 알고 나니 그냥 둘 다 불렀다.
황제라서 부른 게 아니라 둘 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알게 되었으니.
광해는 더 좋고.
배는 한 달여를 달려 북미 서해안과 만났다.
육분의를 써가며 조절했는데도 위도상 북쪽으로 2도가량 치우쳐 도착했기에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이틀을 내려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는 해안선을 따라 남북으로 해안산맥이 형성되어 있는데 샌프란시스코엔 해안산맥이 구멍나 바다가 대륙 안으로 들어가 있다.
입구가 좁은 호리병에 물이 담긴 것처럼 바다가 육지 깊숙이 들어온 모양새다.
철선은 미래의 샌프란시스코를 지나 육지 속 바다로 들어갔고, 배가 갈 수 있는 끝, 수위선 만까지 가자 칸국이 건설한 최초의 주거지가 나왔다.
샌프란시스코와 새크라멘토의 중간에 있는 평야지대로 항구와 창고, 주거지가 건설되어 있다.
고을 이름은 첫발마을.
동칸국의 상징이자 최초가 될 마을이다.
9년 3월 광해가 동칸국에 첫 발을 디뎠다.
동방개척단이 출발한 지 20개월 지났는데 벌써 항구와 마을이 완성된 것이다.
작은 배로 옮겨 타 육지로 가자 소식을 들은 관료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대칸을 뵙습니다.”
최명길이 인사를 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2년 만에 만난 최명길은 조금 살이 붙어 있었다.
“편한가보네? 위에서 쪼지 않으니 할 만하지?”
“허허. 고작 이만 명을 관리하는 것이니 일이 줄긴 했습니다. 그런데 어인일로.”
4천 명씩 이동한 개척단이 이제 이만명으로 늘었다.
기반을 다지고 기반을 이어받아 확장할 일꾼이 계속 추가된다.
서칸과 동칸 사이엔 화물선을 통한 서신왕래만 가능하다.
그래서 소식이 전해지는 데 6개월이 걸린다.
최명길은 왕의 방문을 아예 듣지 못했기에 놀라 물었다.
“모현성이 나 노는 거 보기 싫다고 보냈다. 대륙횡단 철도를 만들라더군.”
“아. 철공들이 고생하고 있긴 합니다만 황제께서 직접 나설 일은 아닌듯 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건방진 모현성 놈.”
즐겁게 뒷담화를 하며 자연스레 최명길 뒤에 있는 사내에게 시선이 갔다.
아버지 김장생의 명예를 회복한다 - 624118
오랜만에 보는 강력한 소망이다.
광해의 시선이 뒤로 향하자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김장생?”
“...의 아들 김집입니다.”
김집은 감격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소신을 알아봐주셔서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김집이라 하옵니다.”
...... 알아봐 준거 아닌데.
“양반의 난에 연루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성실한 태도로 계속 감형을 받았습니다. 사년 전 아전시험에 통과해 노역수 상태로 일처리를 훌륭히 해냈고, 지금은 제 종사관으로 쓰고 있습니다.”
최명길이 소개를 해줬지만 광해는 딴소리를 했다.
“김장생의 명예라......”
이놈에게 삶의 의미는 아버지의 명예인가.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라고 소리치던 만화주인공이 떠오른다.
광해의 말에 김집이 눈을 반짝였다.
“자부께선 비록 잘못된 생각으로 조선의 개혁을 반대하고 명에 충성해서 양반의 난을 주도했습니다. 하오나 자부께서 수학하신 학식과 세상의 이치는 진짜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학문이 옳다는 것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얜 지금 뭔소리를 하는 거지?
광해는 김장생이 누군지 몰라 혼잣말을 한 건데.
그래도 덕분에 김장생이 대충 누구인지는 기억났다.
얼마 전 처형당한 이귀와 함께 반란을 주도하던 서인 거물.
김집의 인생은 아버지에게 바쳐졌군.
사람마다 인생의 목표는 다른 거니까.
쓸데없는 목표라고 말하진 않는다.
성리학이 현실성 없는 좋은 말씀의 나열이라고 해도 거기 집중해서 얻을 삶의 만족도는 개인에게 달려 있으니까.
광해가 침묵하자 눈치를 보던 김집이 뒤쪽에 있던 아이 둘을 당겼다.
광해의 시선이 가자 김집이 소개했다.
“이쪽은 제 제자들입니다. 송준기, 송시열이라 합니다.”
“송시열?”
들어봤다.
곁에서 최명길이 첨언했다.
“들어보셨군요. 엄청난 수재들입니다. 책을 한번 보면 전부 외우고 거기에 응용까지 완벽합니다. 열 살도 안 되었는데 지금 당장 사법고시를 보라 해도 붙을 인재들입니다. 그저 스승 밑에서 수학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아이들입니다. 제 일도 많이 도와주고 있고요.”
천재겠지.
정확히 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알못 광해가 들어본 정도면 엄청나게 유명한 아이겠지.
그런 아이들에게 김집이라는 온고지신성리학자가 붙어 있다는 게 아쉽지만......
똑똑하다면 김집 같은 것 아래에 있어도 송곳처럼 뚫고 나오겠지.
입신양명, 하나의 진리를 알고 싶다.
보편적인 소망을 읽은 후 최명길을 봤다.
“상황을 설명해봐라.”
“이곳 해안가에 첫발 마을을 건설했습니다. 항구와 창고, 마을을 건설했고, 인구는 만 명입니다. 동북쪽으로 백 큰보 거리에 두 번째 거점 두발마을을 건설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최명길이 설명하는데 너무 멀다.
“백 큰보? 너무 멀지 않나?”
“철광산이 그쪽 산맥 아래에 있습니다. 인근에서 석회석 광산도 찾아 채굴하고 있습니다.”
철광산 때문에 거기 지을 수밖에 없었구나.
“방어는?”
“두 마을 사이에 도로를 만들고 있고, 사천 병력이 순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평원에 농경지를 조성했으며 감자 고구마 위주지만, 올해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합니다.”
첫발, 두발 마을 사이는 새크라멘토가 있는 지역이다.
본래는 대륙횡단 열차의 종착지가 될 곳이 이제는 농경지로 바뀌었다.
“이 년 만에 자급자족이라니. 대단한 성과군.”
“감사합니다.”
최명길이 여유 있게 웃으며 칭찬을 받아들였다.
캘리포니아는 해안산맥과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 있는 넓은 평야의 크기는 한반도와 비슷하다.
이 지역을 전부 개간하면 사천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물이 부족하다.
그나마 샌프란시스코 쪽 북부 평야는 물이 좀 있어서 농경이 가능하지만 엘에이 쪽 남부는 대규모 수로공사를 하기 전엔 농경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가 첫 정착지로 좋은 거고.
“대칸. 거처는 어디에 잡으실 것인지요.”
“두발마을에. 철로 깔러 왔으니 거기 머물러야지.”
“알겠습니다. 준비시키겠습니다. 처음엔 좀 미흡하더라도 아무쪼록 자비를.”
“됐어. 내가 그런 거 따지지 않는 거 알잖아.”
“예. 그럼 바로 이동하실 겁니까? 아니면 황후궁에 들르실 겁니까?”
“황후? 아......”
잊고 살았다.
반년 전 아들과 함께 동칸에 온 대칸국의 황후.
“오늘은 거기 머물러야지. 그런데 내 아들은 일 잘하나?”
마지막 말은 귓속말이었다.
최명길이 미소 지었다.
“예. 비록 오자마자 들키긴 했으나 성실히 일하십니다. 아무도 일을 시키진 못하지만 스스로 일을 찾아 매일 일합니다. 일부러 특권을 부리기 힘든 도로 공사에 붙어서 단순히 돌 옮기는 작업을 반복합니다.”
들킨 건 못났지만 들켰는데도 인부들과 똑같이 일하는 건 훌륭하군.
황태자가 함께 일하는 걸 안 다른 인부들은 죽어라 일할 테고.
최명길과 말을 하며 황후전으로 갔다.
간삼과 임경업 등 호위들은 황후전 주위 경계부대와 섞였고 광해는 예서 소유키와 맹수들을 데리고 황후전에 들어갔다.
“이리오너라.”
광해의 농담 같은 말에 황후가 나와 이죽거렸다.
“여긴 어인일이십니까?”
“내 황후가 잘 있나 보러 왔네.”
잊고 살았지만, 이건 선의의 거짓말이다.
상대의 기분까지 생각한 착한 거짓말.
“황후를 보러 오신 분께서 여인들을 줄줄이 달고 오십니까?”
툴툴대면서도 싫지는 않은지 반긴다.
후궁들이 궁녀들에게 자기 방을 배정받고 개냥이화 된 맹수들이 앞마당을 강아지처럼 뛰어다닌다.
야트마한 언덕 위에 지어진 저택은 경관이 좋았다.
남쪽에 항구와 바다가 보이고 사람들이 꾸준히 움직이며 무언가 만든다.
3월이지만 초여름 같은 날씨.
“여기 생활은 어떻소?”
“편합니다. 겨울엔 얼음이 얼지 않고 여름엔 땀이 나지 않고. 1년 내내 살기 좋습니다.”
그게 캘리포니아 날씨지.
서울과 위도가 비슷하지만 겨울이 따뜻하고 여름이 시원한 대륙서안의 특징.
“의무도 없고, 책무도 없습니다. 이주해온 기술자들은 열심히 일하고 하루하루 바뀌는 게 보기 좋습니다.”
황후로써 책무를 벗고, 꼬장꼬장한 성리학자의 족쇄도 없다.
황후는 진정 만족한 듯 말했다.
아들이 황제가 된다 - 581341
단순하지만 강한 소망.
황후 인생의 의미는 아들이 잘 되는 것이다.
그녀의 소망에 광해는 없었다.
이게 다 내가 잘못해서지.
“음...... 황후. 둘째 낳는 건 어떻겠소?”
미안해서 말했다.
광해는 땡기지 않지만 억지로 남을 위해 봉사해 주기로 했다.
“에에엑. 갑자기 무슨 망발이옵니까?”
황후는 자다 깼는데 입에서 바퀴벌레 반마리가 나온 표정으로 질색했다.
진짜 싫은가보다.
“망말이오.”
대화가 끊겼다.
바람이 적당히 서늘하다.
한성엔 아직 얼음이 얼어 있는데 여긴 참 좋구나.
하지만 농경에는 안 좋은 날씨다.
여름에 덥다는 것은 알곡이 무르익는다는 뜻이다.
여름에 더위가 덜할수록 식량 생산량이 줄어든다.
겨울에 얼음이 얼면 겨울동안 내린 비와 눈이 지표면에 갇혀 있다가 봄에 물이 되어 흐른다.
이 물이 새해농사의 마중물이 된다.
겨울에 비가 많이 내리는 캘리포니아는 겨울비가 얼지 않고 의미 없이 바다로 흘러가버린다.
겨울비는 버리고 여름비는 적으니 농사지을 때 물 부족을 겪게 되고.
그리고 물은 액체가 고체로 바뀔 때 부피가 늘어나는 매우 특이한 성질을 갖고 있다.
물이 얼면서 다져진 땅을 벌리고 그 얼음이 녹으면 식물의 뿌리가 뻗어나갈 공간을 만들어 준다.
겨울이 없으면 농사가 더 힘들다.
“세자는... 황태자는 계속 이 일을 합니까.”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황후가 조심스레 물었다.
“앞으로 나라가 계속 바뀔 거요. 황태자가 백년 이상 살지 못하는 한 황제가 되긴 힘들겠지만 적당한 자리를 줄 생각이오. 황태자 스스로 증명한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게 되겠지.”
“감사합니다. 대칸.”
부부지만 부부가 아니다.
그녀의 삶의 의미는 모두 황태자에게 맞춰져 있다.
광해 잘못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저 그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길 바랄 뿐이다.
다음날 지루한 항해가 끝나서 신난 표범을 타고 길을 나섰다.
왕과 후궁들과 호위병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했다.
바닥을 다지고 진흙을 구운 벽돌을 촘촘히 깐다.
첫발 마을과 두발 마을 사이에 도로가 만들어졌다.
도로 주변엔 감자와 고구마를 심을 준비가 한창이다.
미대륙에서 유럽으로 건너가 아시아를 통해 칸국에 도달한 감자 고구마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이놈들은 매우 훌륭한 작물이다.
딱히 논을 조성하지 않고 풀만 걷어내고 심어도 잘 자란다.
지력을 많이 먹지 않아 연속으로 심어도 흉작이 일지 않고, 되려 너무 비옥한 땅에 심으면 영양 저장에 욕심을 버려서 고구마가 작아지는 성질까지 있다.
대충 풀만 걷어내고 대충 심으면 대충 수확할 수 있는 축복받은 작물.
쟁기로 갈고 고랑이랑을 만드는 걸 보며 삼십큰보 쯤 가자 벽돌 까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충 치하하고 지나치자 흙을 다져 흙길을 만드는 현장을 만났다.
아들 산남태자과 능양군, 능창군, 추지음, 장형체 등이 노역을 하고 있었다.
일반 백성과 똑같이 면 옷을 입고 똑같이 흙을 뒤집어 바위를 빼내며 일한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으니 능양군이 조금 툴툴대며 대충하는 것 같지만 작업에 방해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잘 하고 있군.”
“훌륭하십니다. 태자의 몸으로 백성과 함께 일하시다니요. 대칸께서 세자시절 천연두를 물리치고 고름을 짜내던 신화와도 닮았습니다.”
간삼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때 얘와 만났었구나.
직접 고름을 짜진 않았는데.
“대칸께서 제 어머니도 고쳐주셨습니다. 크흑. 지금도 그 겨울날을 생각하면 사내대장부의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임경업도 그때 만났고.
“추억팔이는 됐다. 가자.”
다가가니 분분히 인사를 올린다.
내 백성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남의 백성들은 엎드려 일어날 줄 몰랐다.
“원주민들?”
“예. 저희 의도를 설명하고 노임을 줘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200여 인디언이 함께 일하고 있었다.
“겁먹은 것 같은데? 니들이 괴롭히는 거 아니냐?”
“높은 분이 오면 고개만 숙이라 알려줬는데 이해를 못한 것 같습니다. 전혀 차별 없이 똑같이 일시키고 똑같은 노임을 받고 있습니다. 일을 대충하는 이도 벌주는 대신 돌려보내 뿐입니다.”
첫발 마을부터 안내역으로 따라온 관료가 억울해했다.
“옷은 왜 저렇게 허름해?”
“저희는 만난 기념으로 모든 원주민에게 의복 한 벌씩을 선물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이 그걸 입는 대신 팔아서 식량을 사더군요. 억지로 강제할 수도 없고......”
“알겠다.”
그 정도면 할 도리는 다 한 거겠지......
광해는 엎드린 원주민들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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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병이 고쳐지길 - 576
딸이 낫길 - 4064
장가가고 싶다 - 8199
어머니가 낫길 - 674
갑작스레 높은 분을 만나 엎드려 떨고 있는 인디언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전염병이 돌고 있구나?”
“예. 의원을 보내고 광해님의 은혜를 뿌리고 있으나 쉽게 잡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을로 가자.”
태자와 할 말이 많았는데 미뤄졌다.
광해는 인디언 마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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