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씨뿌리기
순도 100% 픽션입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폭음이 들려올 무렵 쇼군의 막사에 다다랐다.
이미 소식이 전해졌기에 오고슈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쇼군의 가신과 영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열심히 떠들던 그들은 카게카츠가 도착하자 조용해졌다.
“나오에의 전령이오. 급히 전하라 하였소.”
전령이 건네받자 쇼군은 전령에게 읽으라 시켰다.
“신 나오에 카네츠구 아뢰오. 이 전략은 애초부터 패배한 전략이었소. 과거 이순신이 열세척의 함선으로 아군 100여척을 물리친 것은 물론 적장이 강했던 것도 있지만, 애초에 함선 자체가 달랐기 때문이오. 판옥선은 높고 단단한데, 그 배에 기어올라 백병전을 펼치기 어렵고, 도선을 위해 바싹 붙어봤자, 적의 화포에 몰살당하니 승리는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이오.
지금 판옥선 수백 척이 공격해왔소. 적은 복수심에 불타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는데 야마토의 상황은 어떻소? 대형선박 건조를 금지시키고, 화약 생산을 금지시키면서 당시 도도가 이끌던 때보다 오히려 약해져 있소.
이런데 어찌 이기겠소.
차라리 육상에서 적을 막고, 수군은 동래로 쳐들어갔다면 적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을 것이오. 무겁고 큰 대신 속도가 느리니 적이 퇴각한다면 우리 수군은 멀리 돌아 피해 없이 귀환할 수 있었을 것이오. 허나 이 좁은 만 안에서 결사항전을 부르짖고, 기동력을 묶어놨소. 이래놓고 나에게 총군사를 맡기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소.
지금 비에 화약이 젖는 틈을 타 적이 공격해 오고 있소. 그나마 있는 화포와 조총마저 쓸 수 없게 되었고, 만에서 빠져나갈 길도 막혀 있소. 아국의 모든 함선은 파괴될 것이오.
마지막 충정으로 백병전을 유도하겠소. 에도강을 오를 수 있는 소선들은 퇴각하고, 퇴각이 불가능한 대형선들은 일제히 돌진해 적에게 최대한 피해를 입히겠소.
그리 하여도 승리하지 못하게 될 것이오.
이제 야마토는 모든 수군을 잃었으니 향후 몇 년 간 바다위의 그들을 막아내지 못 할 것이오. 희망적이게도 육상군은 충분히 강하니 이겨낼 수 있다고 믿소. 그렇지만, 이번 해전처럼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오. 나는 먼저 떠나니 부디 은거중인 사나다 마사유키를 불러 그에게 전군을 맡기고, 똥싸개를 군략에 참견하지 못하게 하시오. 그래야만 오늘처럼 비참한 패배를 겪는 일은 없을 것이오.”
나오에가 죽음을 각오하고 전한 서신은 과거 우에스기 가와 도쿠가와 가의 전쟁을 일으킨 서신 ‘나오에장’보다 강했다.
마지막에 나온 똥싸개는 오고슈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말함이고, 결국 모든 패배의 원인이 그에게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전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서신 읽기를 마치자 막사는 침묵에 잠겼다.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마저도 아버지의 눈치를 봤다.
한참 후 이에야스가 느리게 말했다.
“나오에가 저렇게까지 말했다면 해전은 패배가 확실하겠군. 수병이 전멸했다는 가정 하에 육상에서 적을 물리칠 전략을 짜 보시오.”
침묵에 잠긴 막사를 둘러본 이에야스는 마지막으로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한참 바라보다가 막사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참모들이 육상에서 막을 방도를 떠들기 시작했다.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잠시 자리를 지키다가 자신의 부대가 있는 곳으로 떠났다.
동이 트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전령이 도착해 수군의 전멸을 알렸다.
에도강 하구 부근에 온갖 깃발이 나부낀다.
백명 천명 단위로 이리저리 뭉쳐있는 병사들.
모현성은 일본군의 진형을 보며 물었다.
“몇 만이나 될까?”
“대략 13만.”
“묘하게 구체적인데?”
“전쟁 경험이 많으니까. 적의 수를 빨리 헤아리는 것도 기술이다.”
광해의 대답에 모현성이 인상을 찌푸리며 적진을 둘러봤다.
“13만이라. 침공 한 달 만에 저만큼이나 모을 수 있구나. 형. 저것들 몰살시킬 수 있어?”
“몰살이라......”
에도평야에 끝없이 포진한 일본군을 보며 광해가 고민했다.
“마법진을 하루정도 준비해 마법을 쉴 새 없이 난사하고 적이 도망가지 않고 계속 달려들면 가능하겠다. 음. 아니군. 마력이 부족하겠군.”
“마력이 부족해? 적을 죽이면 마력이 늘지 않아?”
“죽길 바라는 소망이 달려 있으면 죽이자마자 소망이 들어오지. 하지만 악인의 숫자보다 선인의 숫자가 더 많아. 죽지 않길 바라는 가족의 소망이 내 마력을 빼앗아 가는 게 더 많아. 저들 대부분은 평소엔 농사를 짓는 징집병일 테니까.”
“에이. 그게 뭐야. 악인만 죽이는 슈퍼히어로 같잖아.”
“슈퍼히어로. 음. 내게 딱 어울리는군.”
“개뿔. 어쨌든. 그럼 조선 육군을 전부 끌고 오면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광해는 우치나 원정을 떠올렸다.
직접 가르친 수호군이 시마즈가 정예에게 밀리던 모습.
가장 효율적인 무기술을 가르쳤음에도 긴 전쟁경험을 갖고 있는 무사에겐 오히려 밀렸다.
“10만을 몽땅 끌고 와도 이기기 힘들겠군. 내가 선두에서 이끌며 적의 지휘관만 저격하면 아슬아슬하게 이기겠다. 적은 저게 다가 아니지?”
“어. 소식이 알려져서 에도 인근의 영주들이 급하게 모은 병사들일거야. 시간을 주며 세배 정도 뽑아낼 수 있겠지.”
“그럼 못 이겨. 나 혼자 살아남고 내 병사들은 전멸되겠군. 확실히 강하네 일본.”
“그렇지. 세계 2위라니까.”
광해는 육지에 포진한 일본군을 바라봤다.
오사카해전과 에도만대첩으로 칠만 명 이상이 죽었음에도 바글바글하다.
사기는 안 좋아 보이지만, 정렬이 흩어지지 않는 게 충분히 정예병으로 보인다.
저런 병력이 세 배 더 나올 수 있다니.
“명나라가 후금군 6만 명에게 멸망당했거든. 뭐 여러가지 요소로 명 스스로 거꾸러진 면이 있지만, 저들이 후금 기병보다 강해.”
“운만 따라줬으면 쟤들이 명나라를 먹을 수도 있었다는 거네.”
“그렇지. 임진왜란도 충무공이 없었으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고. 그럼 역사가 달라졌겠지.”
“기승전충무공이냐.”
“당연하지. 갑자기 툭 튀어나와 왕의 시기와 간신 원균의 견제 속에도 오직 적을 쳐부수는데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돌아가신 충무공. 당신은 대체...”
주절거리는 모현성을 옆에 두고 일본군을 지켜본 광해가 돌아섰다.
당장 적을 쳐부술 수 없다.
정공법으론 피해가 너무 크다.
나포한 적함의 기초적인 수리가 끝난 후 조선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선군이 움직이자 잔뜩 긴장한 일본군이 부산해졌다.
적을 코 앞에 두고 조선군은 배를 서쪽으로 저어 에도만을 빠져나갔다.
함대는 에도만을 떠나 서쪽으로 항해했다.
6일 만에 도착한 곳은 오사카 앞바다.
보름 전 육상포격까지 행했던 오사카는 아직 포화의 상처가 가시지 않았다.
잔재를 치우던 백성들과 소규모 부대는 조선군이 나타나자 부리나케 도망쳤다.
하루를 정선하자 대마도에서 출발한 남이홍의 수송대가 도착했다.
수송선은 화약과 화포를 보급한 후 지난 해전에서 잡은 포로를 육지에 내렸다.
포로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이는 나오에 카네츠구.
그가 포로 대표가 되었다.
“살려주겠다고? 이 포로를 전부?”
“그래. 살기 싫으냐? 싫으면 포로 전부 죽일까?”
그렇게 말한 다면 살고 싶긴 한데.
“진짜 아무 조건 없이 풀어주겠다고?”
“그래. 쌀만 축내고 써먹을 데도 없으니 살려 주마. 왜? 싫으냐? 전부 죽일까? 식량이 부족해서 포로 유지를 못해서 풀어주는 건데 그걸 왜 못 믿어? 그리고 공짜는 아니다. 너희 몸값은 받아낼 거다.”
듣고 보니 그럴싸하긴 한데.
“그래도 말이 안 되잖아. 몸값을 받고 풀어주는 게 아니라 풀어준 후 몸값을 요구하다니. 노예로 쓰고나 노병으로 써도 충분할 텐데 쌀이 아까워서 풀어주다니 이상하잖아.”
전국시대 3대 군사 중 하나인 나오에 카네츠구는 생명의 은인 앞에서도 한껏 이성적인 태도를 취했다.
광해는 짜증을 냈다.
“이 새끼 뭐야. 마치 죽여 달라는 태도네. 죽일까.”
죽음을 각오하고 도쿠가와에게 서신으로 욕설을 시원하게 날린 나오에 카네츠구.
돌격선에 올라타 죽으려고 싸웠건만, 기절하고 깨어나니 포로가 되어 있다.
이대로 돌아가면 할복을 명받을 것이다.
“이봐. 내가 누군지 모르나본데, 야마토 최고의 군략가야. 나오에 카네츠구라고 아무 포로나 붙잡고 물어봐라. 이번 전투에서도 10만 대군을 이끌었고. 그런데 그냥 풀어줘?”
은근슬쩍 자기PR을 했다.
투항을 권고한다면 못 이기는 척 승낙해 줘야지.
“10만 대군을 불가능한 전투에 꼬라박아 소멸시킨 놈이지. 그런 새끼 필요 없어. 거기서 병사들을 육지로 도주시키고 배만 잃었으면 높이 평가할 텐데. 너 따위 쓸모없으니까 꺼져라.”
꺼지라니. 죽일 가치도 없단 말인가.
내가 누군데!
꼴보기 싫은 도쿠가와의 힘이나 없애려고 그를 따르는 병력 위주로 돌격선을 편제했고, 반 도쿠가와 파의 병력은 대부분 소선에 실어 살려 보냈는데.
어차피 죽을 거 기분 좋게 죽고, 조선 왕에게 좋은 짓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자신의 평가가 바닥이 될 줄 몰랐다.
‘너 좋은 일 해 준거잖아. 살려줘.’
포로로 잡혀있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긴 한데.
투항권고도 받지 않고 적에게 먼저 투항할 수는 없다.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나오에 카네츠구는 결국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배에서 내렸다.
포로 관리는 전쟁의 영역이 아닌 정치의 영역이다.
이 부분은 이운룡이 아니라 백관 일본방면 책임자로 임명된 윤성준이 관리했다.
잡은 포로를 영지별로 구분했고, 각 영지마다 포로 대표를 뽑아 영주에게 전할 서신을 맡겼다.
“너희 몸값으로 조선은 일정량의 쌀과 조선에서 끌고 온 포로와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한다. 영주에게 조선의 관대한 뜻을 잘 전달하라.”
“예!”
죽다 살아난 포로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윤성준이 할말을 다 전달한 후 광해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섰다.
“조선은 야마토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받았다. 조선의 양민이 학살당했고, 야마토에 끌려와 지금도 고생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은 야마토를 공격했다. 허나 너희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너희도 학살당할 조선인처럼 영주의 명에 끌려와 억지로 싸웠지 않느냐.”
상처를 보듬어주는 자애로운 국왕님.
“부상자들. 나와봐라.”
치료하지 않고 있던 환자들을 불러냈다.
팔다리가 잘린 환자들의 팔다리가 생겨난다.
“우와아아.”
“내 팔이! 팔이 생겼어.”
“앞이 보여. 눈알이 생겼다아.”
삼만여 명의 포로 앞에서 기적이 펼쳐졌다.
광해는 소망이 큰 자들을 얼추 치료해준 후 전도를 시작했다.
“나는 신내림을 받았다. 신을 믿는 백성들의 소망을 들어주라는 명령을 받았고, 힘을 얻었다. 그 힘은 나라를 구분하지 않는구나. 너희를 치료한 것이 그 증거다.”
신의 힘.
그 힘이 자기들에게도 적용된다니.
일본 포로들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신의 백성이 되면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살 땅을 얻게 되고 농사지을 농지를 얻는다. 생산량의 삼할만 신의 나라에 지불하면 안전을 보장받고 다른 어떠한 수탈도 없다. 그리고 너희 소망을 신께서 들어주시지. 이건 조선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듣고 알던 조선이 아니다. 과거의 조선은 훨씬 많은 것을 수탈했지만, 신의 뜻에 따라 수탈을 멈춘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
“신의 백성이 되겠습니다!”
가족이 없는 이들 일부가 성급하게 외쳤다.
광해는 고개를 저었다.
“당장 받아줄 수 없다. 백성들 간의 응어리가 남아있기에 죄를 씻을 시간이 필요하다. 신의 나라에서 쓰는 언어를 알아야 하고 신의 교리를 이해해야 한다. 3년. 3년 후 시험을 보겠다. 신의 교리와 언어를 이해해 시험에 통과하면 신의 백성이 될 수 있다. 그럼 땅과 집을 얻고 수탈도 없을 것이다.”
씨앗을 심었다.
3년 후 아름드리나무가 될 거대한 씨앗이다.
포로들은 조선 국왕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광해소망교 교리서를 무리당 한권씩 받고 해방되었다.
각 영지로 떠나는 그들은 민들레 날개처럼 씨앗을 야마토 전국에 뿌릴 것이다.
- 작가의말
죽으려고 했는데...
살았네?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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