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비정한 살인
순도 100% 픽션입니다
각자의 앞에 작은 상과 다과가 나오고 모현성이 서류를 꺼냈다.
“네가 올린 제안서가 특이해서 나까지 올랐는데 말이야.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안서를 보낸 거지?”
모현성은 들고 있던 서류를 광해에게 전해줬다.
대충 봤는데 일본에 기업을 세우고 싶으니 투자해 달라는 흔한 제안서다.
이까짓 거를 내가 봐야 하나.
“저는 광해상점이 처음 오사카에 생겼을 때 거기서 일했습니다. 야마토 은행이 생겼을 때 상품 판매원으로 3년간 일했고, 대명 은행에서도 1년간 일했습니다.”
“잠깐. 대명 은행? 일본인이 들어갈 수 없었을 텐데?”
“4년간 조선어를 완벽히 익혔고, 덕분에 조선인으로 섞여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나주가 고향인척 했습니다.”
처벌받을 죄를 저질렀음에도 나오에는 숨김없이 말했다.
현명한 나오에의 판단대로 황제와 왕은 자잘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일하면서 조선의 아니 칸국의 특이한 점령방식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칸국은 원한을 사지 않고자 합니다. 처음엔 도쿠가와와 도요토미 서로가 원한을 갖도록 유도했고 이후 야마토 은행을 통해 이권을 뽑아내면서 그 피해에 따른 원한을 천황에게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시다시피 천황 일족이 백성들에게 맞아죽게 되었죠.”
“흐음.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군. 죽일까?”
모현성의 농담 같은 진담에도 나오에는 느긋했다.
“현재 혼슈의 원한은 모두 십영주에게 쏠리고 있습니다. 정작 대부분의 이권을 챙기고 있는 칸국은 광해소망교가 퍼지면서 오히려 사랑받고 있죠. 칸국 입장에서는 현재의 구도가 꾸준히 이어지길 바랄 것입니다.”
“어. 맞아.”
“그렇지만 이대로 가다간 잇키가... 그러니까 민중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혼슈의 반란은 강도가 강합니다. 특유의 공동체문화로 인해 웬만한 수탈엔 이 악물고 참지만 일단 일어나면 구성원 모두 죽기 전까지 가라앉지 않습니다. 그건 칸국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일본 속담에 튀어나온 못은 망치로 때려 박으라는 말이 있다.
한반도 경북처럼 국토 대다수가 작은 분지지역인 일본인들은 불편한 교통편으로 인해 고립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덕분에 강력한 공동체, 단체문화가 강하게 나타나고 외부인에 대한 배척과 내부에서 개성 강한 이를 따돌리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기에 작은 세계의 지도자만 구워삶으면 수확물의 9할을 강탈하는 강한 수탈도 버티지만, 가끔 선을 넘을 경우 작은 세계 전체가 하나 되어 봉기하며 단결력 강하고 이탈이 적은 무시무시한 적으로 돌변하게 된다.
“잇키가 일어나도 십영주가 처리할거야.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그들이 패하면 주변 영주를 모아 재점령 하면 되고.”
모현성의 말에 나오에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칸국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반란을 진압하고 새로운 영주를 세우는 데 재물이 들어가죠. 차라리 제물로 바칠 법인을 만드는 게 이득입니다.”
“호오. 제물이라.”
“예. 야마토 은행이라는 법인이 사망해 모든 원한을 떠안고 사라진 것처럼 다음으로 죽일 제물을 만들고, 그게 죽으면 또 새로운 법인을 만드는 겁니다. 어차피 법으로 꾸며진 법인 따위 종이 한 장 가격이면 만듭니다.”
나오에는 야마토 은행이 망하는 순간 깨달았다.
법인이 영원할 필요는 없고, 때로는 죽는 게 이득일 때도 있다고.
법인.
법으로 만든 인간.
얼마든지 죽여도 되고 때로는 살인이 이득이 되기도 하는 법적 인간.
“좋다. 우리도 다음단계로 넘어갈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그걸 왜 너에게 맡겨야 하지? 그냥 아무나 세워도 되는데.”
“법인을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겠습니다. 지분 전체를 광해님께서 가지므로 기업의 이득을 전부 광해님이 가져가지만 기업공개를 하지 않으므로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추가로 지금보다 더 뽑아내겠습니다.”
뭔 소린지 몰라서 가만히 앉아 딴생각을 하던 광해는 갑자기 자기 이름이 나오자 움찔했는데, 모현성은 그런 형을 한심하게 보다가 나오에를 바라봤다.
“지금보다 더? 지금도 생산량의 칠할 가까이 뺏고 있는데.”
“더 뺏어야 합니다. 고용자에겐 팔할. 나머지에겐 구할 이상을 뺏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원한이 줄어듭니다.”
“원한이 줄어?”
“지금 모두에게 똑같이 뺏으니 모든 이가 똑같이 영주에게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용자에게 팔할을 뺏고 나머지에게 더 뺏는다면 상대적으로 잘 살게 된 고용자들은 우리를 찬양할 것이며 나머지들은 덜 뺏기는 고용자들을 증오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면 잇키가 일어나더라도 서로 죽이게 됩니다.”
더 빼앗는데 오히려 찬양하는 이가 나올 거란다.
광해가 사기꾼의 말도 안 되는 궤변에 한 소리 하려는데 모현성이 급발진했다.
“오오. 너 혹시 2회차냐? 두유노우 소라아오이?”
“예?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를 수도 있나. 그럼 혹시 프랑스 가봤니? 그러니까 불란서 말이야.”
“안 가봤습니다. 어딘지도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의문의 1패.
“그래. 그럼 순수한 니 생각이라는 거네. 역시 전국시대 3대 군사다워.”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버는 거를 전부 광해님께 드리면 니한테 남는 게 없잖아. 월급 짜게 줄 건데 뒷돈 챙기려고? 아니면 딴생각을 품고 있나? 독립하려고?”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사장인 걸로 만족합니다. 수십만 일꾼을 손가락 하나로 부리고 인사 받고 벌벌 떨게 만들 힘을 즐길 수 있다면야 돈 따위야 무슨 상관입니까.”
이것도 참신하군.
돈많은 재벌보단 박봉의 권력가 국회의원이 낫다는 견해인가.
나오에가 느낀 바로는 기업이 영원할 필요는 없고, 꼭 이득을 보지 않아도 된다.
버는 것 없이 사장으로서 그저 군림하는 자체로도 얻는 즐거움이 많았다.
모현성도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좋다. 계획서 받아들일 테니 그대로 해봐.”
“감사합니다.”
“대신 헛짓거리하면 죽는다.”
모현성의 협박에도 나오에는 방긋 웃었다.
“제대로 수탈하겠습니다. 저 이외의 다른 적임자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중국 호북성 무한 인근.
시체 만여 구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병사의 시체가 반이고 민간인의 시체가 반이다.
젊은 여자들을 사나운 병사들이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고 아이와 노인들은 한쪽에 뭉쳐있다.
“너희는 호북 장족의 더러운 핏줄이라서 죽였다. 우리 하남 한족만이 중국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왜 죽였는지 친절한 설명을 해준 병사들이 아이와 노인들을 도망치게 만들었고, 그들이 증오로 가득한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이덕형의 종사관 허목은 벌판의 끔찍한 참상을 보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부대의 장에게 다가갔다.
“장군...... 전투도 끝났는데 강간을 막으심이......”
벌판 한켠에 앉아 있던 우에스기 카게카츠는 눈쌀을 찌푸렸다.
“저 병사들은 가족과 떨어져 몇 년째 전장을 구르고 있다. 그들에게 이런 작은 즐거움마저 뺏는다면 나조차 통제할 수 없다.”
“그래도 이건 너무합니다. 군자는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나이어린 허목의 강론에 카케카츠는 고개를 저었다.
“내 아버지는 형과 아비를 은퇴시키고 군주가 되었다. 나 역시 형을 죽이고 군주가 되었지. 자비라는 걸 중히 했다면 난 이미 죽어 없어졌을 것이다.”
“크흠. 그래도 이건 너무 비인간적입니다. 장군.”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난 분명 무한 군벌의 적을 토벌하란 의뢰를 받음과 동시에 호북인들이 한족에 대해 뼛속깊이 원한을 새기게 만들라 명령받았다. 그래서 민간인 남자까지 몰살시켰고. 저 여자들을 강간하고 풀어주면 뼛속깊이 원한이 생기지 않겠느냐? 네 알량한 호의는 들어줄 수 없다. 전쟁은 장난이 아니다.”
“......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장군. 다음 명령을 드리겠습니다. 하북성으로 가서 한족을 가장해 성 두개를 무너뜨리고 증오를 퍼트리라는 명령입니다. 배편과 보급은 전부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노부시게.”
“예. 장군.”
얼마 전 죽은 사나다 마사유키를 대신해 군사의 자리에 오른 노부시게가 대답했다.
“내일 출발할 수 있게 준비하라.”
“예. 장군.”
명령이 끝나고 우에스기 카게카츠가 자신에게 바쳐진 미녀를 품으려 할 때 허목이 한마디 더 했다.
“그리고 새로운 명령서가 도착했습니다. 우에스기군은 다국적 용병으로 칸국인이되 칸국의 소속이 아닌 용병집단이 될 거라 했습니다.”
“우릴 버린다는 뜻인가?”
“그 말도 적혀 있습니다. 절대 아니며 그저 한두명 잡혔을 때 문제될 일을 없애기 위한 말장난이라 합니다. 그저 서류상 절차일 뿐입니다.”
“그래. 별거 아니군.”
허목과 우에스기의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칸국 한성.
나오에가 창덕궁 편전을 나가려는데 모현성이 불렀다.
“이봐. 네 조치로 인해 너의 민족이 큰 고통을 받을 텐데 괜찮냐? 딴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모현성의 질문에 나오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에스기 가문을 전국 3대영주로 키우기 위해 정말 많은 사업을 했습니다. 그 중 가장 효과있던 사업은 인신매매였습니다. 민족? 그게 뭡니까?”
모든 대답이 되었다.
나오에가 나가자 모현성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광해를 봤다.
“뭔 소린지 하나도 이해되지 않지?”
“설명 할 필요 없어.”
지금껏 하는 것에 굳이 한 단계 섞는 이유가 궁금하긴 하지만 니 놈 잘난 척 듣기 싫다.
“내가 왜 프랑스를 아냐고 물었냐면......”
“필요 없대도. 니가 알아서 해라.”
광해가 거듭 말하자 모현성은 설명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았다.
“어...... 알아서 할께. 형은 돌아갈 거야? 할일도 없으니 가야지. 설마 유리황궁에 몇 달 머무르면서 궁녀들하고 놀려는 건 아니겠지? 하렘에 빠져 산다고 욕먹을 걸?”
“음......”
개새끼.
이런 식으로 복수하기 있냐?
“대칸이시어~ 서칸 왕비 이초란이 방문했습니다~”
편전 밖에서 새로 뽑은 내시가 말했다.
새로 뽑은 내시는 내시부 관원으로 성기능이 정상 작동하는 일반인이다.
오랜만에 본 이초란이 반갑다.
“잘 지냈느냐?”
“아버님을 뵙습니다.”
양녀로 받아들인 걸 잠시 잊고 있었다가 이초란이 말하고 나서 기억이 떠올랐다.
“아아. 그래. 사위 놈은 잘 해주더냐? 괴롭히거나 하진 않아? 혼내줄까?”
모현성을 옆에 두고 모현성 뒷담화를 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남산에 제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한 범죄자가 쌓여 있습니다. 한번 방문하여 살펴주심을 간곡히 청하옵니다.”
이초란은 서칸왕 모현성의 비가 된 후에도 판사직을 놓지 않았다.
왕비 겸 재판부 판사장을 겸하고 있다.
이초란이 새로운 할 일을 만들어 주자 광해의 표정에 활기가 돋았다.
이초란 효녀다.
“흐음. 동칸으로 가려 했으나 어쩔 수 없이 남아야겠네. 얼른 끝내고 가야겠군. 얼른.”
범죄 수사가 얼마나 걸릴 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때까지 유리황궁에 머무르며 범죄자를 소탕해야겠다.
어쩔 수 없이.
“바쁘신 일이 있으시다면 돌아가셔도 무방합니다. 용의자들을 좀 더 잡아두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으니 후에 한가해진 후 해결하셔도 됩니다.”
이초란 네 이년.
불효가 무엇인지 아느냐!
“됐다. 온 김에 해치우고 가자. 앞장서라.”
뒤에서 낄낄대는 모현성을 무시한 광해는 이초란과 함께 남산으로 갔다.
용의자에게 묻은 소망을 보고 진짜 범인을 찾는 일.
광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칸국에 미스테리 범죄는 없다.
광해의 활약 덕에 백성은 맘 놓고 살며 범죄자는 죄 지을 생각조차 포기하게 된다.
보람찬 하루 일을 끝마친 광해는 저녁에 유리황궁으로 퇴근했다.
- 작가의말
왜 프랑스인지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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