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나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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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위에서 만나는 모든 것은 적이다.
일단 멀리서 배를 보면 싸우기 싫더라도 전투 준비를 해야 한다.
상대가 해적선이든 아니든 똑같다.
모든 무역선은 언제든 해적선으로 돌변할 수 있고, 모든 선원은 애초에 범죄자다.
적대국인 네덜란드와 스페인의 관계가 아니어도 똑같다.
같은 이베리아 연합인 포르투갈과 스페인 함선끼리도 마주치면 일단 전투준비를 한다.
언제 적으로 돌변해 싸움이 일어날지 모른다.
심지어 같은 국가 소속이어도 방심하고 술을 얻어먹다간 약탈당하고 수장된다.
최대한 칼을 갈아 쉽게 죽지 않겠다는 기세를 보여야 약탈당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여러 나라 함선들이 연합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언제 배신할지 모를 상황에서 국왕의 지시도 아닌, 일개 상인이 국가 간 연합을 이뤄낸 것은 기적에 가깝다.
그 어려운 일을 포르투갈 상인 루이스 페르난도가 해냈다.
스페인과 뜻을 모으고 포르투갈 인도 사령부에 서신을 보내 갤리온 세척을 받아냈다.
거기에 스페인의 마닐라 갤리온 세척도 왔다.
여기에 네덜란드 무장상선 네척도 포함시켰다.
갤리온 여섯 척, 삼국의 무장상선 열두 척. 동남아시아 항로에서 활약하는 유럽 삼국의 거의 모든 상선이다.
여기에 유구국의 내응 약속까지 받아냈다.
유구국의 재상 쟈나 리잔은 조선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 없었다.
유구국 입장에서 조선은 은인, 그 이상이다.
나라가 멸망하려는 순간 난데없이 나타나서 구원해주고.
쓸데없는 땅에 사탕수수 농장을 지어 비싼 설탕 일부를 유구국왕에게 주었고.
농장 노동자에게 임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줘서 유구국 세금이 늘어나게 했고.
광해상회를 열어 귀한 물건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쌀값을 폭등시켜 유구국을 부자로 만들어주었다.
왜?
왜 저런 짓을 할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벌써 1년.
이제 좀 지쳐간다.
조선은 사실 그냥 퍼주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닐까.
지친 쟈나가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엄마 나 밥 먹고 싶어.”
“기다려. 아빠가 고동하고 갯강구 주워올 거야.”
“그거 싫어. 나 밥.”
“쌀은 비싸서 안 돼. 기다려.”
꽤 큰 집에서 나는 소리다.
무심결에 그 소리를 듣던 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쌀은 비싸지. 예년보다 다섯 배나 비싸졌지. 헛!”
알았다.
조선의 속셈이 이거였구나!
쟈나는 왕궁으로 달려갔다.
“쌀 수출을 멈추라고?”
“예. 당장 쌀의 유출을 막아야 합니다. 아니 막는 건 둘째 치고, 당장 사와야 합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슈네이 왕이 인상을 썼다.
쟈나 리잔은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조선에 땅을 내줬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조, 피와 같은 잡곡을 생산하던 땅이었습니다.”
“그게 뭐? 대신 일꾼들에게 조선 면포를 세금으로 걷잖아. 예전보다 세배 이상 걷히는데.”
“대신 그만큼 식량이 줄었습니다. 설탕을 키우게 된 그 땅은 본래 곡식을 기르던 땅이었습니다. 밥이 될 수 없는 설탕과 면포를 얻은 대신에 우치나 전체의 곡식 생산량이 줄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쌀을 팔았습니다. 시세보다 네 배 다섯 배 비싸게 부르기에 비축분을 전부 팔았고, 백성들의 쌀을 전부 걷어 팔았습니다. 나라 전체에 쌀이 없습니다. 이제.”
쟈나 리잔의 외침에 슈네이 왕은 피식 웃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대신 금과 은을 얻었잖아. 우리 교역선이 한두 척인가? 식량이 부족하면 가서 사오면 되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만 쌀값이 오른 게 아닙니다. 안남, 루손 전부 올랐습니다. 어디 가서 사온단 말입니까? 황금? 비단이며 모피 따위를 사느라 거의 다 쓰지 않았습니까. 지금 가진 황금으로는 우리가 팔아치운 쌀의 절반도 못 삽니다.”
“이봐 쟈나. 자네가 똑똑한 건 알고 있어. 그래도 생각이 너무 부정적으로 흐르는군. 쌀이 부족하면 생선을 먹으면 되잖아. 우리에겐 넓은 바다가 있고, 그 많던 해적은 조선이 치워줬어. 고민할 게 뭐 있나?”
숨이 턱 막힌다.
바보는 설명해줘도 이해를 못하니 이치를 설명해줘도 설득할 수가 없다.
쟈나 리잔은 터덜터덜 걷으며 주점에 갔다.
대낮부터 취하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스페인 상단주와 포르투갈 상단주의 대화를 들었다.
‘공격하려고? 광해상단을?’
맞아.
공격해야 한다.
그냥 두면 다 죽는다.
전부 굶어죽기 전에 조선을 물리쳐야 한다.
“이보게들. 그거 함께 합세.”
루이스 페르난도는 기절할 듯 놀랐다.
자신들의 언어를 들을 리 없다고 편히 말한 게 문제였다.
하지만 듣다보니 좋은 일이었다.
유구국의 최고관료가 함께 하다니.
셋은 자세한 대화를 나누었고 흩어졌다.
3년 9월 22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삼국연합 대함대가 나하를 덮쳤다.
항구 안에는 타국 함선이 없다고 희희낙락하는 영국 상선 두 척만 있었다.
갤리온의 포격으로 가볍게 돛대를 부러뜨리고 입항했다.
쥐 같은 영국인부터 죽인 후 쟈나 리잔의 유구국 부대가 합류했고, 4국 연합군은 광해 상회와 공장을 포위했다.
그때 마침 다가오던 이괄의 이가 상단.
“적선. 조선 상선입니다.”
해상의 모든 함선은 조선 상선을 추격했고, 육상 병력은 광해상회를 들이쳤다.
격렬한 전투도 없었다.
조총을 든 조선군 백여 명은 사살되었고, 몇 안 되는 관리인들은 그 자리에서 포박되었다.
루이스 페르난도는 벽돌로 지어진 공장으로 달려갔다.
밀폐된 건물 안엔 거대한 쇠 통 여러 개가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잘게 찢어진 사탕수수 조각이 가득 차 있었다.
“?”
이게 ‘광해님의 은혜’ 원료?
설마?
루이스와 똑같은 마음으로 달려온 총독들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뭔가?”
붙잡은 조선 관리인에게 복잡한 통역을 걸쳐 물어봤다.
“상품입니다. 거기서 난 상품을 팝니다.”
“상품! 이게 광해님의 은혜인가?”
“아닙니다. 고기맛가루 라는 향신료입니다. 1근에 쌀 1석과 교환하라 하였습니다.”
관리인은 살기위해 열심히 대답했다.
어차피 비밀유지 조항 같은 건 없었다.
광해가 MSG 독점을 포기했기에 상품으로 판매할 계획이었다.
관리인의 설명에 따라 갈색 가루를 긁어모으는 것을 확인하고 맛도 봤다.
짭짤하면서 깊은 맛이 나고, 약간 단 맛도 난다.
소금 없이 짭짤한 맛을 내는 게 후추보다 몇 배 비싸게 팔릴 것 같다.
하지만.
“이게 아니잖아! 그 많던 호위병은 다 어디 갔어?”
“이게 기밀 독점 상품이었는데 얼마 전에 풀려서 판매가 허가되었습니다. 기밀 보호도 등급이 낮아져서 호위병도 전부 빠졌습니다.”
관리인은 살기 위해 열심히 설명했다.
두 총독의 시선이 루이스 페르난도에게 향했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갈라버린 루이스는 사색이 되었다.
나하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광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승전의 기쁨을 누리고 있던 영주들은 분위기상 입을 다물었고, 눈치를 보던 윤성준이 조심해서 그들을 전부 내보냈다.
광해는 아공간에서 수첩을 꺼냈다.
1600년, 영국 동인도 회사 설립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설립
다행히 아직 초반이다.
현재 해상 최강국인 스페인은 필리핀 마닐라까지만 진출하고 있다.
지구를 정복했다는 망상으로 시작된 두국가의 역사적인 지구분할(지구의 반은 스페인꺼, 나머지 반은 포르투갈꺼)에 따라 스페인은 멕시코와 필리핀을 잇는 항로만 유지할 뿐, 동남아시아에는 진출하지 않고 있다.
덕분에 아시아 지역에 전력은 거의 없다.
한편 포르투갈은 아시아에 전력을 쏟고 있지만, 새로운 경쟁자인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적질에 시달려 상선을 꾸준히 잃고 있다.
동남아시아 전체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은 선원을 전부 합쳐도 3천명 미만. 무장 갤리온은 인도사령부에 다섯 척 뿐이고, 활동하는 상선은 전부 합쳐도 스무척 미만이다.
영국의 동인도 회사는 1년에 2~3척이 왕복하는 규모고, 네덜란드는 1년에 10척이 왕복하는 규모다.
후엔 무섭지만, 아직은 고작 이정도 규모다.
모현성을 처음 소환했을 때 딱 좋은 시대라고 했던 게 괜한 말이 아니었다.
수첩을 살피며 적의 전력을 헤아린 광해는 코웃음 쳤다.
“정신 나간 놈들. 고작 이정도 전력으로 전쟁을 걸어온 거냐.”
광해는 바싹 긴장해있는 연락병을 불렀다.
“피해 입은 이가 상단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멀리서 포격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도주했다 합니다. 적의 함선은 광해함만큼이나 컸고, 포의 사거리는 광해함보다 길었다 합니다. 속도도 월등히 빨라서 상단의 함선이 하나 둘 나포되어 겨우 두 척만 복귀했다 합니다.”
“직접 봐야겠다. 책임자는 한산도에 있느냐?”
“아닙니다. 사태가 심각함을 알고 주상께서 계실 것으로 여겨지는 한성으로 이가 상단의 상단주 이괄을 이송했습니다.”
“이괄...... 또 그놈이네. 이가 상단 상단주라... 알겠다. 한성으로 가야겠군. 윤성준. 제장들을 전부 불러라.”
“예.”
곧 항왜를 포함한 모든 장수들이 모여들었다.
“윤성준. 대전략을 수정하라. 규슈 정복은 봄으로 미루고 야마토 약탈을 주력으로 해. 가을걷이한 식량을 최대한 챙겨서 구름표범섬으로 보내. 영주들 영지부터 획득시키고.”
“알겠습니다. 전하.”
“나하가 공격당했다. 한동안 남방에 신경 써야겠다. 이운룡. 수군을 부탁하네.”
“맡겨주십시오.”
“이수일. 육군을 책임지되 공을 다투지 마. 항왜를 믿고 맡기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최기석. 이제부터 니 시간인 건 알지?”
“예. 전하. 왜구의 모든 은을 뽑아내겠습니다.”
“그래. 나 간다.”
마법진을 그린 광해는 한성으로 이동했다.
가주이자 상단주로써 첫 상행을 직접 나선 이괄은 드디어 우치나에 도착했다.
“상단주. 도착했다.”
“그래? 우우욱.”
이괄은 멀미가 심했다.
“이야. 내 살다 살다 보름 내내 멀미하는 인간은 또 처음보네. 보통 며칠 하고 나면 적응 하는데”
“됐으니까 빨리 육지로. 우우욱.”
“어라? 이상한데?”
“뭐가 말이 우욱?”
“저기 저거 군함 같은데? 어라 광해상회가 공격받는 것 같은데? 어? 설마? 어이 관측병!”
돛대위에 올라 있던 관측병이 소리쳤다.
“공격 받는 거 맞아. 복장으로 보니 최소 세 개 세력이 공격하는데? 유구국 군도 공격중이야. 화포도 많아. 병력은 최소 3천. 어억. 군함이 우릴 봤다. 엄청 커. 6척의 군함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
“이런 시벌. 후퇴. 돌아가.”
선장의 호통에 상단 전체가 뱃머리를 돌렸다.
“뭐야? 돌아간다고? 육지는? 우우욱.”
이괄은 사색이 되었다.
“못 들었어? 조선이 공격받고 있다고. 적은 화포를 잔뜩 갖고 있는 군함이야. 못 이겨!”
이괄이 받은 것은 일본으로부터 노획한 관선이다.
일본 입장에서나 대형선이지, 유럽함선과 비교하면 작고 느린 중형선이다.
나약한 삼나무 선채는 화포에 맞으면 펑펑 터진다.
적들은 화포로 무장하고 있는데 우리에겐 화포가 없다.
자위용으로 배 한 척당 열정의 조총을 구매해 둔 게 다이며 전투할 갑판병도 부족하다.
“후퇴. 무조건 조선으로 달려! 뒤쳐지면 항복하든 바다로 뛰어들든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한산도에서 고용한 선장은 빠른 판단을 내렸다.
임란까지 겪고 얼마 전 전역한 노련한 선장은 나름 옳은 판단을 내렸다.
거대한 돛을 가진 포르투갈, 스페인 선박은 관선보다 크고 무거운데도 바람이 안정된 곳에서는 훨씬 빨랐다.
결국 한척씩 나포되기 시작했다.
“우우욱. 육지가. 우욱. 멀어져간다. 욱.”
한산도에 도착한 이가상단.
생존한 선박은 불과 두 척이다.
보고를 들은 군관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가벼운 상황이 아니군. 너흰 최대한 빨리 배를 끌고 한성으로 가라. 광해님께 보고 드려야 한다.”
“알겠습니다.”
반쯤 시체가 된 이괄 대신 보고를 한 선장은 육로로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육로보다 함선이 빠르고 편하지 암.
“또 배를 타라고? 우우욱. 잠깐만 쉬고...”
“명령이야. 따라야 해. 가자.”
반쯤 시체가 된 이괄은 드디어 도착한 육지에 오르지 못하고 다시 한성으로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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