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상대가 요구하기 전에 스스로 노비문서를 작성해 자기를 노비로 만들어 주인으로 모시는게 한반도의 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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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으으.”
“끄으으.”
신음소리가 가득하고 악취가 자욱하다.
움집이 모인 인디언 마을 공터엔 환자가 가득했다.
“전염병인가?”
“예. 부족민의 절반 정도가 걸렸습니다.”
“처치는?”
“의원 넷이 파견되었습니다. 씻기고 광해님의 은혜를 먹입니다. 설사가 심하기에 계속 씻기고 옷을 갈아입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태가 위중한 이들부터 설탕물을 먹이고 있습니다.”
이게 한계다.
광해 없이 이 이상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사망률은?”
“대충 열에 둘 셋은 죽습니다. 송구하옵니다. 대칸.”
“어. 니들 실수 아니야. 중환자부터 데려와라.”
환자가 하나씩 광해 앞으로 실려 온다.
그들에겐 자기가 낫길 바라는 소망과 환자가 낫길 바라는 가족, 친우의 소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들은.
광해가 치료한 조선인들과 똑같다.
한명씩 치료해주고 감사인사를 들었다.
울면서 가족과 껴안고 광해의 발에 입을 맞추려하며 고마움을 표시한다.
아직 인디언을 죽이지 않아서 뭐라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는 전부 이해된다.
비슷한 일을 해본 예서는 벌써 환자 쪽에 가서 빨래감을 삶고 있고, 소유키는 옆에 붙어서 어설프게 도우려 한다.
기특한 녀석들.
“통역을 불러와라.”
“예. 대칸.”
환자들 사이에 있던 통역이 왔다.
무려 셋이다.
“이쪽은 노량진어학원 서반아동을 수료한 지성자입니다. 이쪽은 멕시코에서 고용한 통역이고, 이쪽은 이 인근 언어와 아즈텍 언어를 아는 통역입니다.”
한국어-스페인어-아즈텍어-캘리포니아어 순으로 통역해야 한다.
게다가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이 모두 같은 말을 쓰는 것도 아니다.
부족마다 말이 다 다르다.
“뵙게 되어 무궁한 영광이옵니다. 대칸.”
“제대로 통역은 되냐?”
“...그...... 열 마디 중 두 마디 정도만 전달됩니다. 말을 전하고 몸짓과 행동으로 보여서 최대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 부족민들에게 할 말이 있으니 모두 모아봐라.”
“알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지성자는 곁에 있는 아즈텍-스페인어 통역에게 말했다.
“나 성자지가 명하노니 모두 모아라.”
스페인어를 아는 광해가 듣기에 이렇게 들렸다.
“어이. 성자. 이리와 봐라.”
“예.”
빡!
광해는 발바닥으로 지성자의 앞가슴을 차 버렸다.
갑자기 날아간 충격에 혼란스러워하던 지성자는 광해가 손가락으로 까딱하자 달려와 똑바로 섰다.
“죄송합니다!”
“왜 맞았는지 아냐?”
“그...... 너무 고압적으로 말한 것 같습니다.”
빡!
“왜 맞았냐?”
두뇌풀가동!
“......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고치겠습니다.”
에휴.
“왜 자기 이름을 성자지라고 했지?”
“그게... 서반아에선 성이 이름 뒤에 오는 게 문화라 배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그들 문화인데 왜 너까지 따르는 거지?”
“그래야 한다고 배워서... 죄송합니다!”
“네 아비 이름이 뭐지?”
부모까지 욕먹게 생겼다.
지성자는 바싹 긴장했다.
“충주 지씨 원호 라 합니다.”
“그래. 저기 서쪽 어느 나라 중엔 이름 형식이 ‘자기이름’ ‘아비이름’아들 이라 붙이는 나라가 있다. 그럼 너는 그 나라에 가면 ‘성자원호아들’ 이라고 자기소개를 할 거냐?”
아이슬란드 축구선수 길피 시그루드손의 이름은 길피고 아버지 이름은 시그루드다. 뒤에 손 이라는 아들명사가 붙는 게 이들 문화다.
이것까지 따라할 텐가.
두뇌풀가동!
“그...... 지씨 성을 버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저기 남쪽엔 사람을 잡아먹는 부족이 있었다. 식량이 부족해 먹는 게 아니라 꽃전쟁이라는 축제를 통해 먹힐 자 만 명을 선택하고 그 만 명을 도살해 다 같이 잡아먹는 종교행사를 한다. 네가 거기가면 사람을 먹을 테냐?”
“그래선 안 됩니다.”
“그치. 조선의... 칸국의 이름은 보통 성과 합쳐 세글자다. 부모가, 혹은 작명가가 이름을 지을 때 성과 이름이 붙었을 때의 뜻과 조화, 어감까지 생각해가며 이름을 짓는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모가 내려준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느냐? 서구권에선 성이 뒤에 붙어서? 그건 그들 문화일 뿐이지 우리가 따를 필요 없는 문화다.”
“알겠습니다.”
지성자 뿐만 아니라 주변의 칸국 의원과 관료들도 함께 대답했다.
“송나라가 생겼을 때 고려는 배편으로 사신을 보내 신하가 되길 자처했다. 송나라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거야. 요나라에 정신없이 발리고 있는데 조선이란 곳에서 스스로 노비문서를 작성해 자기를 노비로 만들어 송나라를 주인으로 모시니, 이건 도대체 뭐하는 놈인가 했겠지.
우리 조상은 정말 미친놈들이었지. 송나라에 받은 것 하나 없고 협박 받은 것도 없으면서 스스로 나라를 들어다 바쳐 요나라를 자극해 침략을 받았지. 조선 또한 명나라에 찍소리 못하고 나라를 바쳤고. 조선이 오랑캐라 무시하던 남월은 명과 싸워 버텼는데 말이다. 우리 조상 참 추하지 않느냐?”
“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대주의. 강대국에 기대는 것. 거절하면 만백성이 죽게 될 경우 어쩔 수 없이 사대할 수는 있지. 허나 조선의 사대주의는 너무 추했다. 싸우지도 않고 그저 자국을 스스로 낮추며 새로 생긴 큰 나라에 국가를 노비로 바쳤다.
그런 본성에 네 이름소개에서 나오는 구나. 넌 지성자다. 그 이름은 네 부모나 할애비가 지어줬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네 이름을 타국에 맞추느냐? 타국의 문화를 존중하는 건 좋다. 하지만 타국의 모든 문화를 따른다면 네가 어찌 칸국인이겠느냐. 그 나라 백성이지. 타국 문화는 이해하는 걸로 족하다. 이해하되 칸국의 문화를 따르거라.”
“알겠습니다.”
“그래.”
인자하게 설명한 광해는 자신의 사려 깊음에 만족하며 살짝 물러나줬다.
유럽이 요구하기도 전에 자신의 정체성인 성과 이름을 바꿔치기 하고 상대 문화를 존중했다 자위하면서 유럽인의 이름을 한국에서 부를 땐 이름 성 순서로 부른다.
같은 논리를 따른다면 한국에선 한국 문화를 존중해 유럽인도 성 이름 순으로 불러야 옳지 않은가.
상대가 요구하기 전에 미리 발가벗고 똥꼬를 빨아주는 자발적 사대주의.
british museum을 대영박물관이라 번역하는 강아지식 사대주의.
버린다.
다시 여러 단계의 통역이 이어졌고 지성자가 대칸께 보고했다.
“얼룩바위 부족의 추장 커다란 얼룩바위가 병이 나은지 얼마 되지 않아 내일 모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옵니다.”
빡.
지성자는 또 맞았다.
“모르겠지?”
두뇌풀가동!
“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왜 맞았는지도 모르면서 죄송하기는.
“넌 서반아 문명을 존중해 지성자란 이름을 성자지라고 네 마음대로 바꾸는 등신 같은 짓을 했다. 그리고 이곳 동칸 원주민의 문화를 무시해 그들의 이름을 네 마음대로 바꾸는 더 병신 같은 짓을 했지. 네 이름자의 독해는 어찌 되느냐?”
이제야 이해했는지 지성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는... 연못 지, 이룰 성, 재물 자를 씁니다.”
“그럼 네 생각대로라면 넌 저들에게 재물을 이루는 연못 이라 소개해야겠구나, 아니면 연못을 팔 재물 이라고 소개하거나.”
“죄송합니다.”
“됐다. 잘못인 줄 모르고 썼겠지. 서반아 포로 놈들이 교묘하게 자기 문화가 우월하다 지껄여 네가 세뇌된 걸 수도 있고. 그래도 여기서 일할 자격은 없구나.”
너 해고.
“철선이 돌아갈 때 함께 돌아가라. 내가 말한 말의 뜻을 조정에 정하고 노량진 학원 전체에 전해 서반아놈이 교묘하게 심고 있는 문화우월주의를 말살하라.”
“알겠습니다. 고쳐놓겠습니다.”
해고당해 시무룩해진 지성자가 돌아가고 광해는 인디언들을 봤다.
그들과 조선의 연락을 담당해 높다 여겨지던 지성자가 얻어맞는 모습에 다들 겁을 먹고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의 소망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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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소망이 있다.
그리고 다양한 소망은 조선인의 다양함과 비슷하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개 비슷하다.
이것이 통계학의 의의.
신석기 문명에 갇혀 살던 인디언이지만, 이들은 똑같이 숨 쉬는 사람이고 서로 섹스하면 인간이 태어나는 같은 종이다.
조선인과 같은 인종이고 같은 민족이고 같은 생명이다.
그들을 둘러보며 원한이 덕지덕지 붙은 범죄자를 찾았다.
구름표범섬에서 했던 것처럼 양떼를 괴롭히며 살던 늑대를 번개로 때려죽였다.
언어를 배웠다.
마법진을 그려 목소리를 키우고 입을 열었다.
“나는 칸국의 대칸 광해다. 니들이 사는 이곳보다 천배 넓은 영토를 다스리는 세계의 황제다.”
시작은 거창하게.
“어떻게 포장해도 똑같겠지. 나는 이 땅을 칸국의 동칸지역으로 만들기 위해 정복하러 왔다.”
칸국은 정복자다.
신석기 시대에 갇힌 원주민을 교화한다는 의미는 없다.
땅이 탐나 침략해온 침략자일 뿐이다.
아시아인이 힘을 합쳐 서구세력을 몰아내자던 일본제국은 조선의 침략자다.
성리학자와 세도가에게 빼앗기는 세금보다 일본에 내는 세금이 줄었다한들 일본은 외세의 침략자다.
광해가 뭘 하더라도 칸국은 인디언에게 침략자다.
“나는 식량을 줄 것이며 너희의 자식이 굶어죽는 일이 없도록 만들 것이다. 돌밖에 쓰지 못하는 너희에게 다양한 도구를 줄 것이며 위대한 지식을 가르칠 것이며 따뜻한 신앙을 안겨줄 것이다. 그래도 불만은 생기겠지”
그들의 땅에 자리 잡은 칸국은 식량을 주고 일을 시키고 있다.
그들은 선택해야 한다.
칸국의 법과 말을 익혀 칸국인이 되거나.
칸국인이 되길 거부해 전쟁을 하거나.
칸국에게 땅을 빼앗겨 멀리 도망가거나.
칸국은 침략자다.
인간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
식량을 준다 해도 침략자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들 나름의 자긍심이 있을 것이며, 지켜야 할 조상의 혼과 얼이 있을 것이며, 굶주리며 가족단위 부족으로 살던 생활이 칸국의 도움을 받는 삶보다 행복할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너희도 어떤 방식으로든 죽을 것이며 그건 칸국의 기존 백성도 마찬가지다. 다만......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허무하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울타리를 치고 울타리 안을 보호하는 자로써 너희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이다.”
신석기 수준의 부족민은 단순작업에밖에 쓰지 못한다.
면역력도 약해 조선에선 가벼운 감기로 넘어갈 병에도 픽픽 죽어나갈 것이며 엄청난 전염병이 매년 번질 것이며 그때마다 불만이 속출하고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정복하고 싶은 마음, 살인하고 싶은 마음, 여러 여자를 거느리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도 있겠지. 그런 소망은 내가 지켜주지 못한다. 다만 법의 울타리 안에서 나를 믿고 따라라. 그 안에서 너희가 허용된 자유를 누리고 너희 각자 삶의 의미를 찾아라.”
버리는 게 이득일 수도 있다.
이들을 지키는 건 생각보다 힘들 것이다.
그래도.
“너희 스스로에겐 가치가 있다. 서칸국의 백성과 똑같이 동칸국의 백성으로써 생명의 가치가 있고, 위대해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너희 스스로의 가치는 낮게 잡지 말아라.”
이들에게도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으로 전세계를 울릴 드라마의 주인공이 있을 수 있고.
훗날 달나라에 첫발을 디딜 인간이 태어날 수도 있다.
노벨상 수상자가 태어날 가능성이 있고.
누구보다도 사악하거나, 누구보다도 위대한 사람이 자라날 가능성이 있다.
이들 중에 예서 같은 인연을 만날 수도 있고.
최명길 같은 이가 태어날 수 있고.
모현성 같은 놈도 있을 수 있다.
제 3자인 광해가 그들의 삶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들 각자에겐 태어나 살아가는 의미가 존재할 것이다.
“너희를 허무하게 죽일 생각은 없다. 나는 너희 생명의 가치를 존중할 것이며 너희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최소한 이들은 삼백년간 머리가죽에 가격이 붙은 사냥감이 되고, 차별받고, 굶어죽고, 사막 한가운데 갇혀죽어야 할 기생충이 아니다.
멸종당해야 할 세균이 아니다.
“너희 각자의 삶의 의미를 찾거라.”
“예. 대칸.”
신석기 수준의 원시인들이 벌써 대칸이란 단어를 이해하고 감동하고 대답했다.
이들은 섹스하면 혼혈이 태어나는 같은 인간이기에 금방 이해하고 금방 따른다.
한 달간 교육하면 유럽인과 같은 수준이 될 것이고, 삼년간 교육하면 서칸인과 비슷한 수준까지 올라올 것이고,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아 노력할 것이다.
얼마 후 동부에 영국이 정착할 테고 이후 사백년간 인종청소가 이어질 것이다.
광해와 동칸은 침략자지만, 영국을 막는 방패가 될 것이다.
광해는 석유와 평야를 얻기 위해 왔지만, 인디언을 살리는 힐러가 될 것이다.
설명해도 이해하지는 못하겠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에 칸국을 침략자로 보고 불만을 품거나 더 달라고 하거나 꺼지라며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래도 살리고 보존해야 한다.
사람이라면.
- 작가의말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성-이름으로 자기소개 하시나요?
외국인이 이름-성으로 자기소개 하면 한국 문화를 말하면서 어순고치라고 하시나요?
이건 진짜 몰라서 질문드리는데 외교상 공식석상에서 한국어로 발표하나요?
만약 영어로 발표한다면 이건 낳냐-낫냐보다 더더욱 세종대왕님이 피눈물 흘리실 것 같네요......
제목 일부러 길게 써봤는데 제목 길이에 한계가 있다는거 지금 알았으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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