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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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앙!
광해는 땅으로 떨어지며 거지하나를 밟았고, 주위를 둘러본 후 이덕형에게 달려갔다.
“막아라.”
촤르륵.
네개의 철사가 염동력에 춤을 췄다.
뱀처럼 꿈틀거리며 적에게 달려가 심장과 머리에 작은 구멍을 뚫고 돌아온다.
“사술! 사술을 쓰는구나! 죽여라! 돌을 던져라!”
탁.
타닥.
거지들은 의외로 날렵해서 철사를 피하거나 막는 일이 잦았다.
한명을 해치우려면 두개 이상의 철사를 쏘아내야 한다.
속도가 나지 않는다.
짜증이 올라온 광해는 마력을 아끼길 포기했다.
오른 손을 머리위로 올려 네 개의 철사를 헬기 프로펠러처럼 돌렸다.
휘이이이잉.
캬가가가각.
광해가 달리는 속도 그대로 모든 것이 갈려나간다.
광해와 이덕형 사이에 있는 거지들은 예초기에 잘린 잡초마냥 허리가 동강나 죽었다.
삽시간에 백여 명을 죽이고 이덕형의 곁에 선 광해는 주위를 둘러봤다.
거지의 숫자는 대략 칠백 명.
압도적 무력을 봤음에도 도망치지 않고 대열을 갖추고 있다.
‘뭐야. 이 자식들은. 개방 그런 건가? 이거 무협지야?’
조선군은 대부분 제압당해 몽둥이에 맞아 쓰러져 있고, 몇몇 저항하는 이들도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빨리 구해야 하는데 광역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
왼손으로 철사를 돌려 방어하며 오른손으로 복잡한 마법진을 그렸다.
“잠들어라.”
왕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지리라.
공격마법보다 열배나 마력을 잡아먹는 마법이 발휘되었다.
광해를 중심으로 반경 300m 안의 모든 생명체가 잠들었다.
새소리 하나 없는 적막한 산야에서 이덕형의 배에 박힌 나무토막을 뽑고 치료했다.
조선인 중 치료할 수 있는 이들을 하나씩 치료했지만, 이미 절반가량은 죽어 있었다.
깨어난 호위병과 이덕형의 제자들이 잠든 거지들을 하나씩 처리했다.
나이가 많거나 신분이 높아 보이는 십여명만 남기고 전원 죽였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우선 경과부터 말해봐라.”
절하며 사죄하는 이덕형에게 일의 경과를 물었다.
“항주를 시작으로 명나라 관리와 함께 북상했습니다. 운하를 따라 북상하면서 쌀을 나눠주는 등 구호활동을 하였고, 중간 중간 관리의 눈을 피해 지방 유력자를 만나 협약을 맺었습니다. 그때부터 거지들이 보였으나 대개 부자집 근처에 거지가 있는 법이기에 무시했지만 생각해보면 북상하면서 점점 따라오는 거지들이 많아졌습니다.”
“즉, 딱히 충돌은 없었단 말이군. 재산이 많아 보이니 패거리를 모아 습격했거나 진의를 알고 막으려 했거나 둘 중 하나군.”
“처음 습격했을 때 재산을 놓고 가겠다 했으나 필요 없다고 거절하고는 항복하라 했습니다.”
이덕형은 싸움의 경과를 자세히 말했다.
좌우로 산이 솟은 산길에서 앞뒤로 포위, 돌진을 유도한 후 뒤에 통나무 함정을 준비했고 그 뒤에 포진한 거지들.
단순한 거지가 아니다.
이중함정을 팔 정도로 잘 훈련된 병사들의 군사작전이다.
“재산을 노린 게 아니라면 최악이군. 심문할 터이니 기록할 준비를 해라.”
광해는 거지 중 이덕형이 우두머리라 지목한 이를 깨웠다.
고문해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다.
복잡한 마법진을 그려 거지의 머리에 마력을 쏟아 부었다.
자백 마법.
후유증으로 뇌가 녹아 죽겠지만, 거기까지 알바 없다.
멍한 눈을 뜬 거지를 보며 광해가 말했다.
“이름.”
“장산위.”
“나이.”
“쉰일곱.”
“소속과 직책.”
“개방 오장로.”
‘뭐야 진짜 개방이었어? 그거 무협지에만 있는 거 아니야?’
광해는 내가 있는 이곳이 대체역사인지, 평행세계 무협지인지, 고민하다가 한참 후에 질문을 이어갔다.
“습격한 이유는?”
“조선의 첩자가 오랑캐들을 규합하려 한다는 첩보를 받았다. 또한 조선국이 상국의 은혜를 저버리고 안남처럼 저항하려 한다는 소식도 얻었다. 조사 결과 북상중인 조선 첩자들의 매국행위를 확인했고, 습격해 신병을 확보하려 했다.”
개방 오장로 장산위는 눈이 풀리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질문엔 또렷이 대답했다.
“습격해서 개방이 얻는 건 뭔데?”
“오랑캐들이 한족의 강토를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민족주의인가. 이 시대에도 민족주의가 있었나.
“그걸 왜 개방이 하지?”
“개방 개파조사 전유한의 뜻이다.”
“개파조사?”
“전유한 조사는 연경에서 노복 만 명을 거느린 거부였다. 태어나선 하북의 원소를 따랐고, 어릴 땐 위나라 조조를 모셨으며 중년엔 진나라 사마씨를 모셨지.”
저 조조가 그 조조인가. 삼국지의 조조.
갑자기 판타지로 흘러가는 심문에 광해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허나 조사께서 노년이 되자 사마씨가 무너졌고 평화로운 하북땅은 북방 선비족에게 짓밟혔다. 당당한 한족이 어찌 오랑캐에게 세폐를 내며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분개한 조사께서는 모든 가산을 처분하고 스스로 거지가 되어 한족 복원을 위해 싸웠다.
이후 뜻을 함께하는 애국협객지사들이 합류해 만들어진 게 개방이다. 전유한 조사의 뜻을 받들어 오랑캐에게 세폐를 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거지가 되고 처분한 재산으로 오랑캐를 몰아내기 위해 싸웠지.”
“웃기는군. 그래서 효과가 있었나.”
“남부지역은 한족이 차지하고 뺏기길 반복했으나 개방이 일어난 하북은 그 후 천이백 년 간 오랑캐가 지배했다. 송나라가 일어섰을 때마저도 요나라 금나라에 밀려 단 한 번도 수복하지 못했지. 허나 드디어 대명국이 하북을 차지했고, 전유한 조사의 깊은 소망이 천이백 년 만에 이뤄진 것이니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하북을 천 이백년간 오랑캐가 지배했다고?
모현성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긴 하지만 관심 없는 이야기는 흘려듣다보니 기억이 잘 안 난다.
“개방의 목적이 그거라면 명나라가 천하를 통일했음에도 어째서 활동하는 것이지?”
“이 땅엔 오랑캐가 너무 많다. 언제 그들이 일어날지 모른다. 연왕께서 수도를 남경에서 연경으로 옮긴 것도 오랑캐의 성장을 막기 위함이고, 우린 음지에서 오랑캐의 발호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라를 찾았는데 왜 거지생활을 하는 거지?”
“거지 신분이 정보 수집에 용의하다. 경계를 사지도 않고. 의협심이 뛰어난 어린 제자들이 거지생활을 하며 십년간 정보를 모은다. 그리고 지도층 또한 그간 번 모든 것을 베풀고 거지 생활을 한다.”
“나름 똑똑하네. 윗대가리가 거지 생활을 하면 존경하며 따를 놈이 많겠지. 그럼 거지가 아닌 자 중에도 개방이 많겠네?”
“그렇다. 십년간 수련을 거친 후 생업에 종사하다가 승진하면 스스로 거지가 된다.”
대충 개방의 시스템과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모현성이 기획하고 이항복과 이덕형이 이년 전부터 준비한 일에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조직이다.
“개방은 조선을 적대하나?”
“지금껏 말 잘 듣는 노예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조선 왕이라는 자의 행보를 보니 천국에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족의 미래를 위협하는 적은 치운다.”
“그 정보는 어디서 얻었나?”
“이영덕. 이귀.”
‘이귀는 예조판서였던 놈인가. 가물가물하군. 이영덕은 누군지 모르겠고.’
“조선인들을 공격한 이유는?”
“자백을 받아 황제에게 조선의 간악한 술수를 알려 토벌하기 위함이다.”
전쟁의 기운이 여기에서 자라고 있었다.
“너를 죽이면 조선의 실태를 아는 자가 없어지냐?”
“개방의 총소집령이 내려졌다. 방주님과 장로 모두 이 일에 매달리고 있다. 북경에서 대신들에게 조선의 소식을 전하고 있으며 눈과 귀가 조선 팔도에 침투해있다. 모든 정보가 그들을 토벌하는데 쓰일 것......”
장로의 말이 점점 느려지더니 픽하고 쓰러졌다.
강제로 일깨운 뇌가 녹아버렸다.
뇌를 보호하면서 심문하면 시간을 더 끌 수 있지만, 마력소모가 심하다.
짧은 사이 십만에 가까운 마력을 썼으니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포로 중 계급이 높은 이를 깨워 교차검증을 했으나 새로운 정보는 없었다.
모든 심문이 끝나고 포로들을 묻은 후 일어나자 이덕형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큰일입니다. 개방이라니...... 이런 조직이 있는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치 민간에 동창이 하나 더 있는 꼴이군요.”
“그래. 쉽지 않겠어. 현지인 앞잡이는 구했나?”
“예. 각 민족별로 활동하고 있으나 아직 신뢰하기는 힘듭니다.”
“됐어. 그들에게 맡기자. 조선인은 철수한다.”
“그들이 재물만 받고 입을 닦을 수도 있습니다.”
“명과의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다. 개방을 모두 죽일 수도 없으니 전쟁은 일어난다 봐야해. 전쟁이 일어나고 명이 약해지면 그들은 알아서 협력할 거다. 협력하는 게 기회라는 걸 알 테니까.”
“주상 전하. 상국을... 상국을 상대로 방심해선 아니되옵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일입니다.”
“알아. 전혀 방심하지 않고 있어. 걱정 마.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지?”
“태원에 방문하고 서쪽으로 진로를 바꿔 한 달 후 정주까지 갑니다.”
“거기까지 동행해주마. 그 후 함께 조선으로 가자.”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포로를 심문하는 사이 중요한 짐들과 거지들이 가진 재산 등을 정리했다.
광해는 마법으로 구덩이를 파 시체를 전부 태워 묻고 태원으로 갔다.
모현성과 통신으로 개방에 대해 말하고 계획을 수정하는 사이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광해와 이덕형은 태원 외곽의 거대한 장원에 들어섰다.
정보원을 통해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기에 일행은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
기기화초가 늘어선 장원엔 6월의 꽃이 만발했고 연녹색 나무들은 아름다운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정원을 지나 화려한 누각에 안내받자 곧 약속된 상대가 나타났다.
“반갑소. 모용세가 가주 모용황이오.”
“반갑습니다. 조선의 좌의정이며 외무참의 이덕형입니다.”
상대가 고개 숙이려는데 이덕형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쪽은 조선의 국왕 광해님이십니다.”
모용황이 굳어버렸다.
광해는 태연히 입을 열었다.
“반갑다. 조선의 국왕 광해다.”
믿을 수 없다.
일국의 국왕이 전갈도 없이 이런 시골까지 방문하다니.
게다가 조성의 국왕이란 자가 산서성 사투리를 하다니.
그럼에도 모용황은 안색을 정비하고 인사를 꺼냈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조선의 국왕이시어.”
생각보다 거만하지 않다.
믿지 못하면서도 일단 믿는 태도 또한 훌륭하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가문을 지킨다 - 470091
단순한 소망이지만 강하다.
이덕형의 자료로 모용씨의 역사와 힘을 아는 광해는 상대의 평가를 좀 더 높여주었다.
“나는 조선의 국왕이며 신내림을 받았다.”
일단 마법 몇 개 보여주고.
“자네. 북경에는 가봤나?”
“예. 몇 번 방문한 적 있습니다.”
“그래. 그럼 내 능력을 보여주기 쉽겠군.”
게이트 마법을 그려 모용황과 함께 북경에 갔다가 돌아왔다.
한 시간 사이에 무려 120만 마력을 써버렸다.
마력소모가 크지만 이 자는 배신해선 안 된다.
조선의 힘, 광해의 힘을 똑똑히 보여줘야 한다.
“이제 믿을 수 있겠지? 이 힘으로 조선에서 이곳까지 순식간에 왔다. 신의 힘 덕에 산서성 사투리도 배웠고.”
“예. 믿습니다. 하오나 회담을 하루만 연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머리가 혼란스러워 실수할까 두렵습니다. 잠시 정리하면서 머리가 맑아진 후 다시 대면할 수 있기를 간청 드립니다.”
모용황의 간청에 광해는 눈을 빛냈다.
상대는 생각보다 더 훌륭한 인물이다.
이런 자가 명나라의 황제였다면 힘들었겠지.
만력제라 다행이다.
“알겠다. 내일 다시 만나자. 예정에 없던 일이니 숙소쯤은 배정해 주겠지?”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광해는 이덕형과 함께 모용세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음식과 술을 마시고 비단침구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어제는 실례했습니다. 전하.”
“괜찮다.”
넓은 술상에서 양고기 산적을 먹으며 말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인사치례가 끝난 후 모용황이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이제...... 조선국에서 이 필부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모용황의 말에 광해는 손짓했고, 조용히 술잔을 들던 이덕형이 묵직한 목소리를 꺼냈다.
“이년간 조사한 게 있습니다. 모용씨의 역사. 춘추전국시대부터 하북성과 산서성의 주인이었던 선비족. 선비족의 왕이 되어 주시오.”
- 작가의말
마... 마공서닷! 역덕들은 탈주하시오!
기본적으로 개방은 김용의 천룡팔부에서 모티브를 따왔습니다
개방이 등장한 이유는 ‘하북을 천 이백년간 오랑캐가 지배했다’ 한 문장으로 정리되겠네요
오랑캐의 지배를 거부하기 위해 거지의 삶을 사는 한족들
개인적으로 항상 무협지에서 개방을 볼 때마다 왜 저 집단은 힘도쎄면서 왜 거지의 삶을 살까? 라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들의 역사적 사실과 결합하면 무협소설보단 역사소설에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집어 넣었습니다
모용세가도 물론 역사적 관점을 살짝 비튼 허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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