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연좌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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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은을 받고 싶다 - 9796
살고 싶다 - 4122
“괜찮으냐?”
광해는 목에 칼을 찬 원추희를 보며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왜 송구한데? 죄 지었어?”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연좌제.
억울하게 연좌제에 얽혀 죽은 이가 얼마나 많을까.
자신과 전혀 상관없이 친척이 죄를 지어서 따라 죽으면 얼마나 억울할까.
연좌제로 잡혀왔는데 죽을죄를 지었다니. 허. 참.
뒤에 서 있는 예서가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예서는 저 심정을 알겠지.
“참 좆같네. 이초란.”
“예. 전하.”
“어떻게 할까?”
“주상께서는 법 위의 존재이옵니다. 뜻대로 하옵소서.”
“하아. 시발. 그런데 왜 잡아놨어?”
애초에 모르는 척 넘어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잖아.
내 뜻을 시행하는 것처럼 잡아가뒀으니 이제 와서 풀어주기도 힘들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이초란은 죄송한 듯 고개를 숙였다.
“묻는 말에나 대답해라. 왜 잡아놨냐고?”
광해의 질문에 이초란이 고개를 들고 광해와 눈을 마주쳤다.
그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승은을 입었다 한들 후궁에 들지 못한 궁녀이오며 혼약하지 않은 처녀이옵니다. 연좌제를 거스를 그 어떤 명분도 없었습니다. 법대로 평등하게 행하였사옵니다.”
그래. 저 원칙주의. 저게 훌륭해서 승진시키고 일을 맡겼는데.
“추희를 풀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추희만 풀어주셔도 됩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무서우면 원유창만 죽이고 나머지 모두 풀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얼마 전 판결을 번복하시고 모든 연좌제를 없애십시오.”
그걸 몰라서 물은 게 아니다.
이초란도 아는지 확인하려고 물었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까?”
“지금껏 연좌제를 당한 모든 이들에게 각자의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노역중인 백만 양반 중 죄 없이 연좌를 치르던 이들이 불만을 품을 것이옵니다. 이후 법집행에 신뢰를 잃을 테고, 충성심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옵니다. 조선의 만백성은 법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눈치 채게 될 것입니다. 도자기가 깨지면 다시 붙여도 예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알면서! 알면서 왜!”
“주상 전하를 믿었사옵니다.”
똑같이 처벌하리라 믿고 원추희를 잡아 가뒀단다.
저 올곧은 믿음이 골치 아프다.
“젠장......”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바라보는 추희를 쳐다볼 수 없었다.
의금부 천장의 얼룩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추희 널 놔주는 건 쉽다...만. 지금껏 내게 죽고 인생이 무너진 이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다. ...... 미안하다.”
광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의금부 감옥을 빠져나갔다.
보름 후 비리를 저지른 원유창과 구족의 사형이 예정대로 집행되었다.
“주상 전하. 올해는 휴가를 떠나지 않으셨나이다.”
“휴가?”
예서가 웬일로 먼저 제안을 꺼냈다.
광해가 거의 한 달째 침전에만 있으니 걱정되는 듯 했다.
구름이와 그 형제격인 호랑이 셋은 얼추 갓 태어난 송아지만큼 커졌다.
구름이와 비호, 맹호, 꽃순이.
덩치는 커졌으나 얼굴은 아직 천진난만한 고양이 상이고, 털가죽은 솜털처럼 부드럽다.
광해는 그중 가장 얌전한 꽃순이를 베고 녀석들에게 테이밍 마법을 걸며 놀았다.
“예. 묘향산이 그리 경치가 좋다 들었는데 방문해 보심이 어떠실런지요. 해주의 광해소금 2호점이 드디어 장사를 시작한다하니 가는 길에 들르셔도 되겠고요.”
“내가 걱정되느냐?”
“... 예. 전하. 슬프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옵니다.”
한 달째 여자를 안지 않은 게 조정의 문무백관에게 알려져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 내 스스로 결정한 일이지. 그만 일어나자.”
성대한 행렬이 준비되었다.
말 열여섯 마리가 끄는 거대한 마차에 예서와 소유키, 구름이형제를 태웠다.
마차가 창덕궁 돈화문을 나서자 광해는 예서에게 물었다.
“노량진은 완성되었느냐?”
“예. 계획된 동은 전부 지었고 사람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 한번 가보자꾸나.”
예정에 어긋난 일이지만 왕이 원하는데 해야지.
이동경로와 식사위치, 숙소까지 전부 계획한 밑에 것들은 고생하겠지만, 알게 뭐야.
일행은 마포로 이동해 한강을 건넜다.
강 건너 언덕 지형에 위치한 노량진.
노량진에는 예전에 없던 거대한 건물이 스무채 이상 지어져 있었다.
“그래. 제대로 만들어졌군.”
광해가 마차에서 내려 구름이와 호랑이들을 데리고 걷자 오가던 사람들이 절을 하며 인사한다.
“광해님~ 만수무강하소서.”
“광해님 건강하셔서 기뻐요.”
예에 어긋나도 벌주지 않는다.
게다가 이곳은 광해소망교에서 충성심이 깊다고 인정한 이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건물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치나 동.
여진 동.
규슈 동.
곰섬 동.
구름표범섬 동.
조선의 새 영토가 되었거나 이미 복속한 지역별로 동 이름이 붙었다.
그 외에도 포도아 동, 서반아 동, 광동어 동, 북경어 동, 몽골 동 등 앞으로 진출할 지역의 이름이 붙어 있다.
우치나 동에는 유구국의 귀족가 자제들 오십명이 와서 생활하고 있다.
다른 동에도 각 지역민을 초빙해 최소한 한 둘 이라도 기거하고 있다.
풍족한 식량과 편안한 잠자리를 공급받으며 조선 병사와 함께라면 어디든 다닐 수 있고, 능력만 된다면 결혼도 할 수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해당 국가의 문화를 알리고 언어를 교육하는 일.
특히 언어교육이 가장 중요한 임무다.
광동어학원, 북경어학원, 서반아어학원 등 각 동마다 조선인에게 언어를 가르치며 교제를 만들고 있다.
“학원거리. 그래 노량진엔 역시 학원가가 들어서야지.”
왜 노량진이냐고 묻거들랑 모현성에게 따져라.
모현성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노량진엔 학원가라고 외쳤으니.
수많은 청년들이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다들 각 언어를 공부하는 이들.
나중에 이들이 세계와 통역하는 일을 하게 될 것이다.
특히 서반아어학원에 학생이 많다.
현재 유럽에서 스페인어를 할 줄 알면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귀족과 대화가 가능하니 스페인어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청년들을 노린 식당가가 줄지어 서 있다.
여러 나라에서 선생을 초빙했기에 그들이 먹던 향토음식이 노량진에서 전수되고 개량 발전되는 중이다.
“역시 노량진 거리음식이 맛있지. 점심참은 저기서 먹자꾸나. 하나씩 내오라 해라.”
“예. 전하.”
특별히 대단한 음식은 없지만, 수라간에서 내놓지 않는 새로운 음식들이 입을 즐겁게 한다.
‘약간씩 어긋나지만, 크게 보면 제대로 가고 있어. 조선은 발전하고 있다고.’
추희에게 미안하지만 조선은 강해지고 있다.
광해는 애써 꿀꿀한 심정을 달랬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온 판옥선을 탔다.
배는 하루 만에 해주에 내렸다.
광해 소금 2호점.
남포, 해주, 군산, 무안 등 해변을 따라 순차적으로 기업 광해소금이 건설되었는데 거기 딸린 인원만 해도 삼천 명이다.
뭐 그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한가 했는데.
“엄청나군.”
“예. 엄청납니다.”
광해가 감탄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논처럼 생긴 염전이 백개 정도 건설되어 있다.
해안가에 밀물시의 물 높이보다 약간 낮게 땅을 파 염전을 만든다.
단순히 땅만 파서 되는 게 아니라 염전 바닥에 기와를 타일처럼 촘촘히 깔아야 한다.
그렇게 만든 소금밭에 바닷물을 가둬 말리면 천일염이 된다.
여기까지는 기존에 소금을 만드는 것과 비숫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소금은 비릿하고 매우 맛이 없기 때문에 항아리에 넣고 물을 부어 녹인 후 침전물을 걸러내고 불을 때 끓인다.
물을 끓여 소금만 남게 되면 이제야 먹을 만한 소금이 나오는데 이를 자염이라 한다.
천일염은 물을 끓이는 대신 창고에 보관한다.
창고에 소금을 모아두면 간수가 빠지는데 2년 정도 묵혀야 그나마 먹을 만한 소금이 된다.
염전 건설은 염전보다 보관창고를 만드는 품이 백배 많이 들어간다.
소금을 모아 기와를 얹은 창고에 쌓아두는 일.
각 창고마다 생산 월이 적혀있고, 거대한 창고 하나당 한 달 치의 소금이 쌓여 있다.
일 년 반 동안 묵혀둔 광해소금이 첫 출하를 시작했다.
“가격은?”
“기존 소금가격의 반입니다. 모두가 광해님의 은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가격이 그것밖에 안 돼? 더 낮출 순 없는 거야?”
현대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소금 값이 말도 안 되게 비싸다.
반값이라 해도 너무 비싸다.
밍숭맹숭한 음식 맛에 질린 광해는 소금이 많이 보급되길 원했다.
광해의 의문에 예서가 머리를 쥐어짜 대답했다.
“모현성 공의 말로는 염전 비용과 보관비용을 계산하면 더 낮출 수 없다 했습니다. 차후 민간업자에게 맡길 계획인데 이보다 가격을 낮추면 누구도 버티지 못할 거라 했습니다. 몇 년 안에 소금광산을 얻을 수 있으니 그때가 되면 가격이 크게 떨어진다 했습니다.”
아 소금광산. 들어봤다.
모현성의 말로는 현대에도 전 세계에서 소비하는 소금의 절반 이상이 광산에서 캐낸 소금이라 했지.
상식이 파괴되는 것을 느꼈지만, 갓 말린 천일염을 먹어본 광해는 동의하게 되었다.
2년씩 묵혀야 겨우 먹을 만한 소금이 나오니 그 창고비용이 엄청나다.
수천 년간 묵힌 광산 소금은 캐내기만 하면 되니 오히려 더 싸고 맛도 좋겠지.
그때가 되면 광산 소금은 고가에 팔리고 천일염은 저질의 저가 소금이 되어 보급될 테고.
경제를 억지로 조종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순리대로 합당한 가격을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된다.
소금을 내려주시는~
광해님께 소망하세요~
해주를 사랑하시는~
광해님께 소망하세요~
“와아아~”
“주상 전하 천세!”
“광해님~”
왕의 방문소식을 미리 알렸기에 종교행사에 인근의 백성들이 모두 모였다.
소금 출하소식도 알렸기에 전국의 상단과 보부상들도 잔뜩 모여 있다.
종교행사를 마치고 상인들을 모았다.
“적당히 남겨먹어 적당히. 세금 잘 내고.”
“심려를 끼쳐드릴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주상 전하.”
개성근처를 주름잡는 송상의 대표가 나서서 말했다.
“부자가 되지 말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너무 과한 폭리를 취하면 내가 직접 상단까지 만들 거니까 알아서 해 먹으라고.”
“알겠습니다. 전하.”
광해가 직접 상단을 만들면 다 굶어죽는다.
광해의 엄포에 상인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정도 말했으면 알아서 자제하겠지.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묘향산으로 출발하자꾸나.”
“예. 전하. 모시겠습니다.”
소유키가 한발 나서는데 예서가 약간 빨랐다.
예서는 소유키를 슬쩍 돌아보며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전하. 한성에서 파발마가 도착했습니다.”
“그래. 가져와봐라.”
싸하다.
예서는 불길함을 느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의 전서구가 왔습니다. 오사카가 위험하다고 합니다.”
예서의 미소에 금이 갔다.
- 작가의말
처음 구상할 때 연좌제로 죽는 인물은 추희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떠올릴법한 최중요캐릭을 날리려 했죠
당시 모현성도 죽이고 입부도 죽이고 또...
그랬다가는 분개한 댓글죽창에 찔려 제가 죽을까봐 신캐릭을 넣었습니다
정붙지 않도록 살짝만 등장시키고 묘사도 없이 날렸습니다
그러니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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