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대악성과 대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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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미움 받던 오리새끼는 아름다운 학이 되었답니다. 흑흑흑. 너무 다행이다.”
예서가 글을 읽다가 펑펑 울었다.
“왜 우냐? 뭐가 그렇게 슬픈데?”
“슬픈 게 아니오라 너무 기뻐서. 흑흑. 너무 잘 되어서. 너무 다행이어서. 흑흑.”
“에휴. 고작 동화에 감정이입 하지 마라. 괜히 노비시절 떠올려가지고는”
광해는 수도꼭지를 튼 듯 펑펑 울고 있는 예서를 한심하게 보다가 모현성을 봤다.
옆에 앉은 모현성은 무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이봐 표절작가. 학다리랑 오리발이랑 너무 다르지 않냐?”
“조선에 백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돈 한 푼 버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건 왜 쓰냐? 안 귀찮냐? 게다가 표절이라서 마음 편할 것도 아니고.”
“에휴. 칼로 정복한 나라는 10년 가고 조약으로 할양받은 나라는 100년 가고 문화로 정복한 나라는 만년 가는 법이야. 문화를 키워야 해. 대문호 모현성의 집필활동은 끝나지 않는다.”
“... 음. 문화라.”
“형도 문화의 힘은 알잖아. 아. 형 세종문화거리 안 가봤지? 오늘 가자.”
“아. 귀찮아. 이불속에서 귤이나 까먹을래.”
“형. 거의 한달 째 방에만 있었잖아. 이렇게 추운 날 한 번씩 방문해서 순시도 해주고 그래야지. 예서야. 광해님 한성 순시하신단다. 준비시켜라.”
“예.”
실랑이 끝에 졌다.
너무 놀아서 심심하기도 했고.
그래도 모현성에게 끌려 다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네.
광해는 괜히 심술이 나 어가에 올랐다.
가마꾼이 들고 주위로 호위병과 내시, 궁녀들이 따른다.
“난 외출 안하려고 했는데 모현성 때문에 가는 거다. 니들 고생하는 거 쟤 때문이다.”
이 잡것들이 왕이 말하는데 아무도 대답을 안 하네.
어가는 창덕궁 서쪽으로 갔다.
육조거리를 지나 의정부 대로에서 북상하자 멀리 경복궁 터가 보인다.
임란 때 불탄 후 잔해를 치웠더니 주춧돌만 남은 공터였다.
그곳이 바뀌어 있었다.
“짜잔. 여기서부터 세종문화거리입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세종문화회관.”
모현성은 어가 옆에 붙어 관광가이드처럼 말했다.
얘는 이런 거 참 좋아한단 말이지.
뭔가 만들고 자랑하는 거.
“다음은 음악의 거리. 첫 번째는 거문고관.”
네 칸짜리 건물 하나가 덩그러니 있다.
“궁중악단의 거문고 악사들이 여기에 있어. 원하는 이들에게 매일 무료로 가르치지. 대신 악기를 만들고 연주하는 건 자기 돈으로 해야 하고. 1년에 한번 대회를 열어 큰 상금을 줄 거야. 상금을 원하는 자는 알아서 노력하겠지. 바뀐 거라면 예전 도제식으로 노예로 부려먹으며 찔끔찔끔 가르치던 걸 무료로 펑펑 가르치게 만든 것 뿐.”
뒤로 가야금, 해금, 아쟁 등 전통악기마다 집이 하나씩 생겼다.
매년 다른 날짜에 대회가 예고되어 있고, 금화 하나가 상금으로 걸렸다.
음악에 관심이 있고, 재능이 있는 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연마해 악사가 될 것이다.
“이쪽은 기타관, 바이올린 관, 피아노관.”
“바이올린도 만들 수 있냐?”
“아니. 서양 포로 중에 아는 놈이 있더라고. 피아노는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건물만 만들었고. 다른 악기들도 전부 하나씩 만들 거야. 전 세계 모든 악기가 이곳에서 연주되고 꿈의 오케스트라가 만들어지겠지. 이것이 바로 대악성 모현성의 원대한 꿈이야. 크캭캭칵.”
“어. 네. 그러세요. 볼 거 다 봤으니 돌아가자.”
“아냐. 아직 아니야.”
음악거리를 지나 안쪽으로 가자 나무에 둘러싸인 조용한 거리가 나왔다.
“문학거리야. 한시 건물, 한글 시 건물, 단편 소설 건물, 장편 소설 건물 등이 있어.”
“글은 각자 알아서 쓰는 거 아니냐?”
“쓰기보단 접수받고 발표하는 곳이야. 문학은 매달 수상자를 뽑거든. 상금도 크니 엄청난 작품이 출품되고 있어. 그리고 출간된 작품을 읽어서 최신 트렌드를 알 수도 있고.”
“매달 수상이라...”
모현성의 설명에 광해는 어가에서 내려 건물로 다가갔다.
건물 입구엔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위에서부터 1회, 2회, 3회수상작이 적혀있었다.
4년 1월 제 1회 한글 시 수상작 별 헤는 밤 - 모현성
4년 2월 제 2회 한글 시 수상작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 모현성
4년 3월 제 3회 한글 시 수상작 내가 만일 - 모현성
너 이 새끼...
옆에 건물을 보니 단편 소설도 미운오리새끼를 포함해 전부 모현성이었다.
“너 가난해? 상금 먹으려고 만든 거냐? 표절한 주제에 양심도 없네.”
“에이. 아직 수준이 낮아서 내가 탄 거지. 미래 작법을 전수하다보면 이제 재능 있는 문학이 나올 거야. 그리고 독식하지 못했어. 장편 하나 뺏겼어.”
“어? 표절했는데도 졌다고?”
“허균한테. 홍길동전에 졌어.”
“그게 벌써 나오네. 원본하고 같냐?”
“좀 달라졌어. 초반은 비슷한데 후반부는 형이 만드는 나라처럼 돼. 대충 홍보용 기관지 느낌 나긴 하는데 재밌더라.”
“그래. 한번 봐 볼까나.”
“책은 형 방에 예전에 가져다놨지. 이제 가자.”
왔던 길을 돌아 나오니 경복궁 입구가 금방이다.
그런데 어가가 창덕궁으로 가지 않고 세종문화회관으로 들어간다.
“여긴 왜?”
“뮤지컬 하나가 완성되었지. 형 나올 때 연락 넣었으니까 지금쯤 준비 되었을 거야. 들어가자.”
“자도 되냐? 내가 뮤지컬이랑 오페라 딱 두 번 봤었는데 두 번 다 잤거든.”
“...... 자시든가.”
세종문화회관은 소리의 분산을 이용해 어느 좌석이든 모든 음을 최적으로 들을 수 있고 어쩌고 한 설계를 했다는 모현성의 말을 들으며 특석에 앉았다.
기타와 드럼, 거문고와 가야금, 단소와 해금 등 다양한 악기가 무대 뒤쪽에 배치되어 있고 배우들이 앞쪽에 서서 광해에게 인사를 올렸다.
“전국의 놀이패들이야. 거의 다 아전들인데 죄 지은 놈 자르고 나니 남는 게 몇 없었지. 다 모아놓고 계속 연습 시켰어.”
관심 없다.
뭐 판소리나 탈출 같은 거 하겠지.
“주리예! 창문을 열어 다오!”
딴딴딴 딴!
“안 돼요 노민호. 우린 이뤄질 수 없어요.”
딴딴딴 딴!
미친.
“로미오와 줄리엣 더하기 베토벤의 운명이냐?”
“어. 적절하지? 참고로 노민호와 주리예는 장편 1회 수상작이야 크크크.”
“표절의 끝은 어디냐 대체. 아니 그보다 저건 이미 나온 거 아니야? 아직 안 태어났냐?”
“베토벤은 아직이고, 셰익스피어는 지금 런던에 살아 숨 쉬고 있지.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미 발표되어 상연중이고.”
“그럼 표절 걸리잖아.”
“어떻게 항의 하겠어? 지구 반대편인데.”
“그래도 결국 알려지면 니 명성이 땅에 처박는 거 아니냐?”
“그렇군. 이렇게 된 이상 영국을 멸망시킨다. 분서갱유!”
“...... 개또라이 새끼. 마음대로 해라.”
봄이 되자 광해의 평화가 끝났다.
“전투?”
“예. 남방 사령관 개떡이의 보고에 따르면 마카오에서 명나라 군 이만 오천 명을 주살했다 합니다.”
허균의 보고에 모현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뜬금없이 명나라와. 지금쯤이면 수마트라나 보르네오에 있어야 하는데.”
“보고서에 따르면 삼 개월 전에 발생했고, 당시 전투 결과를 전서구 열 마리에 적어 보냈다 합니다. 비둘기는 다 죽고, 수송선을 통한 서신만 온 듯 합니다.”
전서구 열 마리쯤 뿌리면 그 중 하나는 도착하는데 그러기엔 마카오가 너무 멀었나보다.
잡아먹혔거나 중간에 정붙이고 살면 어찌하지 못한다.
통신 능력의 한계로 삼개월전 벌어진 마카오 전투를 3월 말에야 알게 되었다.
개떡이의 서신을 자세히 본 모현성이 감탄했다.
“이걸 어떻게 이겼지? 단순 수치화하면 조선군이나 광동군이나 전력은 같은데. 교환비가 24 대 1이었네. 미친.”
“그러네. 개떡이 얘 충무공 급 명장인가. 모현성. 이 놈 혹시 역사적 인물이냐?”
“어. 음. 글쎄. 이 정도 능력이면 두 차례 호란 때 활약했을 텐데. 평민이라 아무소리 못하고 죽었을지도.”
신분제의 한계로 평민 개떡이는 그냥 죽었거나 호란 전에 병으로 죽었을지도.
“그나저나 큰일이군.”
“이 정도면 명에서 가만있지 않을 텐데.”
광해와 모현성이 걱정할 때 추가로 소식이 왔다.
“의주에서 외무판서 이항복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압록강 방어진을 돌보며 북경, 요양, 창춘과 복잡한 외교작업과 정보수집을 하던 이항복이 급보를 전해왔다.
“북경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목적지는 조선으로 보인다 합니다. 요동군과 여진족도 심상찮다 합니다.”
하아.
최대한 늦추려 했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그렇다고 개떡이를 욕할 수 없는 게 광동군이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와 전투가 벌어졌다.
오히려 대승을 거둔 걸 칭찬해야지 거기서 전멸 당해줄 순 없다.
“형. 일단 최대한 늦추자.”
“이쯤 되면 어떻게든 밀고 올 텐데.”
“그래도 늦출수록 유리해.”
“방법은?”
“이제 만력제는 쓸모없지.”
무능해서 살려뒀지만, 조선을 공격하겠다 마음먹었으니 죽여서 혼란을 일으키는 게 낫다.
“그래. 알았다.”
“너로 정했다. 가랏 진우몬~”
따악.
패배한 광동군을 수습한 문양첨은 광주 일대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그런 정성이 무색하게 마카오를 점령한 적도는 본토를 침범하지 않고 배를 타고 모두 떠났다.
단 한명도 남기지 않았고, 모든 포로를 알몸으로 방치한 채 시원하게 사라져버렸다.
문양첨은 군권을 인계한 후 전투 경과서를 적고, 포로가 되었던 병사들의 증언과 적장이 보냈던 서신 등을 취합한 후 스스로 사지를 묶고 칼을 찬 채 북경으로 떠났다.
죄인이 감히 말을 타고 갈 수 없다.
죄인의 복장으로 죽으러 상경하는 문양첨 곁에는 똑같이 사지가 묶인 루이스 페르난도가 있었다.
수레와 배로 2개월 만에 도착한 문양첨은 곧장 황제를 알현했다.
워낙 중한 일이기에 정무에서 손을 뗀 만력제마저도 중극전에 나와 보고를 받았다.
“...... 그러니까 영길리라는 오랑캐가 공격해왔다는 말이로군?”
“그러하옵니다. 소신이 받은 서신도 그러하고 잡혔다 풀려난 포로의 말로도 적들은 영길리 군이며 고국으로 돌아간다 했다 하옵니다.”
“구문제독. 영길리가 어디지?”
지목받은 구문제독이 침을 꿀떡 삼키며 나와 어설픈 지도를 펼쳤다.
“멀고 먼 서방에 있는 미개한 놈들이옵니다. 이곳 포도아 북쪽에 있는 나라로써 오가는데 1년이 걸립니다. 알려진 국력으로는 포도아의 반절이라 합니다.”
만력제는 따분한 표정으로 문양첨을 봤다.
“그런 나약한 놈들이 광동군을 몰살시켰군. 광동군이 그렇게 약한가?”
“아니옵니다. 남월과의 전장에 네 번 투입되어 전부 승리한 정병이옵니다. 소신이 무능하여 명예로운 광동군을 잃었사옵니다. 죽여주시옵소서. 다만, 천조의 앞날을 위해 의심 가는 바를 보고 드리옵니다. 적도는 스스로 영길리라 칭했지만, 그들의 생김새는 포도아와 달리 한족과 매우 비슷했사옵니다. 또한 포도아 상인의 말로는 그들이 조선군이며 왜국과 유구국을 점령했고 천조의 동남 해안까지 점령했다 하옵니다.”
“조선이 왜국과 유구국을 점령했다고? 게다가 아국을 침범해? 그 말을 믿으라는 게냐?”
만력제가 코웃음을 치자 편전이 조용해졌지만 잠시 후 동창 창공이 조용히 나섰다.
“조선군이 해안을 침범해 해적들을 규합함은 사실이옵니다. 주산군도를 침범한 후 남으로 이동하며 해적질을 했고, 시기상 광동군과 부딪칠 무렵 광동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옵니다.”
“그런 중한 일을 어찌 보고하지 않았느냐?”
몇 번이나 보고했는데요! 라고 말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는 동창 창공.
스스로의 태업을 아는 만력제는 잠시 후 머릿속을 정리했다.
“적은 스스로를 영길리라 칭하지만, 인종이 다르다. 마카오에 있는 천조의 신하 포도아 상인과 동창의 정보에 의하면 적은 조선군일 가능성이 있다. 이거지?”
“예. 폐하.”
기회를 틈타 관료들이 용감히 나섰다.
“조선의 국왕이 신을 사칭하여 중원을 흔들고 있습니다. 소수민족의 반란을 유도하는 정황을 여러 차례 포착했사옵니다.”
“조선과 여진족의 왕래가 빈번하며 손을 잡은 증거가 있사오며 여진 동쪽 지역에 조선이 진출했습니다.”
“제후국인 유구를 조선이 점령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옵니다.”
“제방이 무너진 것도 조선의 짓이옵니다.”
진작 알고 있었지만 죽을까봐 보고하지 못한 사실들을 토로하고 증거 없는 홍수마저도 조선의 탓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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