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학살자의 심정
순도 100% 픽션입니다
황하에 폭우가 쏟아진다.
그에 맞춰 둑을 무너뜨린다.
명나라에 대혼란이 와서 감히 원정을 꿈꾸지 못하게 만든다.
간단한 작전이다.
그런데 기분이 안 좋다.
몸속에 가득 찼던 마력이 빠져나간다.
누군가의 소망,
살고 싶은, 행복 하고 싶은, 죽기 싫은 소망들이 광해로 인해 깨지면서 마력을 빼앗아간다.
광해는 딱히 선인이 아니다.
아프리카에 대규모 기아가 발생해 아기들이 굶어죽어도 그런가보다 하고 말 뿐 전 재산을 털어 돕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수많은 국가를 정복하며 이보다 많은 죽음을 일으키기도 했다.
전쟁에 억지로 징집되었더라도 칼 들고 저항했으면 죽이는 걸 원칙으로 삼았다.
그랬었는데.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을 줄은 몰랐다.
차라리 몰랐으면.
선량한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영혼에 스크래치를 낸다.
그들의 보편적 소망이 저주가 되어 광해의 마력을 빼앗아간다.
마력이 뭉텅뭉텅 사라질 때마다 억울한 죽음이 원귀가 되어 광해의 마력을 갉아먹는다.
그때마다 광해는 자신이 죽인 누군가를 느낀다.
“시발.”
끝내 몸속의 마력이 제로가 되었고 향상된 신체가 일반인의 몸으로 바뀌었다.
살짝 건강한 보통사람의 몸.
덥다.
가만히 있어도 팔월말의 더위에 땀이 난다.
나로 인해 죽은 이의 원귀가 힘을 빼앗는다.
광해는 침전에서 거동하지 않고 이틀을 보냈다.
“모현성.”
-어. 형. 끝냈어? 제대로 됐지? 마력은 어때? 마이너스야?
모현성과 통신을 했다.
마법진을 그리고, 마정석에 연결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현재 마이너스 500만. 이 마력을 다 채워야 마력을 모을 수 있다.”
-호오. 채무 같은 거구나. 원래 마력도 꽤 있었을 텐데 그게 다 사라지고, 마이너스까지 떨어졌네. 그럼 얼마나 죽은 거야?
“몰라. 중간중간 악인이 죽어서 들어온 마력이 바로 빠져나가서 알 수 없어.”
-어쨌든 대혼란이 온건 맞겠네. 좋아 중국 개박살.
“그보다 말이야. 전에 네가 말했지. 기둥을 세우라고. 이번에 기준 하나를 세웠다. 날 향하는 칼날은 치운다. 징집되었더라도 조선을 공격하면 망설이지 않고 죽인다. 하지만! 지금처럼 아무 잘못도 없는 이들을 의도를 갖고 대량학살 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절대로.”
-...... 형은 그저 둑을 무너뜨린 것 뿐이야.
“아니야. 죽인 게 맞아. 뺏기는 마력이 말해준다. 나로 인해 죽었기에 마력을 뺏기고 있어.”
-목소리가 좀 음울한데?
“기분이 꿀꿀하다. 취하고 싶은데 술 취했을 때 암살당할까봐 술도 못 마시고 있다.”
-형.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마. 형은 그저 둑을 무너뜨렸고, 명나라에 혼란을 준 것 뿐이야. 다른 학살자들, 광주시민을 학살한 이구만 전대통령이나 히틀러, 인니 공산주의 학살, 중국의 학살, 소련의 우크라이나 학살 등등등 수많은 학살자와는 달라. 그 놈들은 자기 권력을 강화하려고 그냥 죽였고 형은 조선을 지키기 위해 그랬어.
“같다. 내 기둥을 건드리지 마라. 명령이다.”
-후우. 예. 전하. 저도 좋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효율을... 아니야. 미안. 기준은 이해했고, 반드시 지킬게. 그럼 흙가마솥을 멈추자. 염초는 많이 만들었고 비료는 당장 쓸 게 아니니. 지금 충전된 마정석은 무산에 집중시킬게.
“그럴 필요는 없을 걸. 매일 마력이 들어오고, 내가 범죄자 처벌하며 마력을 벌면 한 달이면 채워질 텐데.”
광해의 말에 모현성이 한참 만에 대답했다.
-...... 형. 이 작전의 모티브는 중일전쟁에서 따왔어. 일본군에 거침없이 발리던 장개석이가 일본군의 전진을 막으려고 황하를 무너뜨렸어. 인류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수공이었지.
“갑자기 뭔 소리냐?”
-일단 들어봐. 황하가 터지면서 개봉을 점령했던 일본군은 멈춰 섰어. 약간의 피해를 받았지. 대신 홍수가 난 중원 지역에서 중국인 40만 명 이상이 익사했고 천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어.
“시발. 내가 죽인 게 그 정도란 말이잖아.”
-아니. 그 정도는 절대 아니야. 그때랑 인구밀도가 다르니까. 어쨌든 그 사건으로 하북으로 흐르던 황하는 남쪽으로 꺾여 회하랑 연결 되었어. 황하와 장강 사이에 흐르는 큰 강이지. 갑자기 회하의 물줄기에 황하가 추가되면서 회하 유역에도 홍수가 낫지.
“야이. 시발 그러면 한차례 더 홍수가 난다는 거잖아.”
-만약에 명나라가 제대로 시스템을 갖춰서 황하의 물줄기 방향을 읽어낸다면 회하 홍수를 막거나 민간인을 대피시키겠지.
“병신이라며. 명나라 등신이라며.”
-청나라 기병 6만에 멸망할 정도로 시스템이 무너진 명나라라면 못 막을 거야. 2차 홍수가 나겠지.
“후우. 그래. 황하 홍수로 천만 가까이 마력을 잃었는데 회하에 추가로 홍수가 나며 또 마력을 잃게 된다는 거지?”
-어쩌면. 그리고 또 하나. 장개석이가 홍수를 일으켜 자국민이 죽었지만, 일단 일본군을 멈추게 했어. 그런데 여전히 전쟁 중이잖아. 홍수로 침수된 넓은 농경지 복구는 꿈도 꾸지 못하지. 황하 물줄기가 남쪽 회하로 연결된 것도 바로잡지 못했지.
“...... 안 좋은 말이면 하지 마라.”
-홍수로 재해를 입은 지역은 다음해 엄청난 흉년을 겪어. 전쟁 중이기에 복구가 불가능했거든. 게다가 하남성에서 하북성으로 흘러가던 황하가 남쪽으로 꺾였어. 황하의 물을 이용하던 산동성, 하남성, 하북성은 당장 어마어마한 물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지.
“야이.”
-이후로 최소한 300만 명이 굶어죽었어. 중일 전쟁을 통틀어 일본군에 의해 죽은 중국인보다 많은 숫자야.
피해 규모가 너무 크니 화도 나지 않는다.
그저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좆병신이네.”
-어. 장개석은 일본군이 제방을 폭파시켰다고 선전했지만 비밀이 지켜지나. 이후 공산당에서 이 일을 집요하게 끄집어냈지. 모택동은 장개석이 제방을 폭파시켜 중국인 400만명이 죽었다고 계속 선전했어. 중국을 거의 차지했던 장개석은 이 사건을 계기로 쪼그라들었고, 공산당은 쉽게 민심을 얻으며 강해졌지. 결국 중국은 공산당 차지가 되었어.
“그래 벌을 받아야지. 사람을 그렇게 죽였으면.”
-에이. 역사라는 게 동화처럼 권선징악을 따르진 않잖아. 장개석은 대만을 세워 늙어 뒈질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권력을 휘둘렀어.
“시발. 됐다. 2차 피해가 있을 거란 말이지?”
-어. 소망집행의 권능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네. 명나라가 잘못해서 죽은 거라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 모르겠다. 권능은 불가해의 영역이라서.”
-어. 아무튼 마음의 준비는 해둬.
“그래. 계속 마력을 뺏길 수도 있다는 말이지? 지금 있는 마정석은 최대한 무산에 배치하마.”
-음. 형. 화이팅.
“닥쳐. 병신아.”
-넵. ... 파이팅.
광해는 모현성과 통화를 마치고 바닥에 드러누웠다.
마정석 다섯 개 정도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무산으로 보내자. 지방에 흩어진 마석도 전부 모아서 무산으로......
곧장 이런 계산을 하는 내 인간성이 우습다.
욱씬.
또 누군가가 죽었다.
살길 바라는 소망이 나로 인해 깨지면서 마력을 빼앗아간다.
더 이상 뺏어갈 마력이 없으니 채무로 남는다.
다른 이의 소망을 들어줘 마력을 얻으면 그때 뺏어갈 채무.
이 마력은 누구에게 가는 거지?
소망집행은 누가 강제하는 거지?
마력은 뭐지?
권능은 누가 준 거지?
답이 없다.
광해는 우울함에 빠진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인간성 따위 잃고 산줄 알았는데.
이 기분은 아주 오래전에 느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그... 이계로 떨어져 한참 고생하다가 처음으로 살인했을 때.
용병으로 전쟁에 참가해 적을 죽였을 때였구나.
생명을 끊는 감촉에 몸서리치다가 얻은 기술과 언어에 감탄하다가 그런 자신이 더러워서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그때.
보름 정도 괴로워했던 거 같은데.
그 땐 어떻게 빠져나왔었지?
그냥... 시간을 보내면서 무뎌졌었나.
민간인 수십만 명, 혹은 수백만 명의 사망.
그 여파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모현성은 분명 명나라에 혼란을 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했고, 광해는 별 생각 없이 따랐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시발.”
기분 더럽네.
“난 악마가 아니다.”
마왕의 권능을 받았지만, 권능 덕분에 악의 깊이를 깨닫다니.
차라리 몰랐으면.
“난 사람이다. ...... 시발.”
겪어보기 전에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남아있을 줄 몰랐다.
“후회해서 바뀌지 않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과거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되풀이 하지 않는다. 후회는 한번이면 충분하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면 된다. 이미 저질렀다. 사로잡히지 않는다. ......”
광해는 주문처럼 끊임없이 되뇌었다.
광해는 사람이다.
완벽하지 않다.
실수도 한다.
황제시절부터 저지른 수많은 실책들.
잘못된 판단으로 전멸한 아군.
오만의 대가로 동맹이 깨지고 역공을 받아 무너진 왕궁.
마법병단을 막지 못해 학살당한 연인들.
그 중 하나에라도 사로잡혀 멈춰 섰으면 지금의 광해는 없었을 것이다.
후회할 선택을 저지를 때마다 주문을 외웠다.
딛고 일어선다.
발전한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 반복하지 않는다. ......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미래를 본다. 나아간다......”
며칠을 그렇게 중얼거리며 보냈다.
나름의 속죄다.
예서는 사실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비 오는 어딘가로 가서 둑을 무너뜨렸을 뿐이다.
광해가 수십만 명을 죽인다고 했지만,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만 그때 광해의 침울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그날 이후 광해는 나흘째 침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뭔가 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니 뭘 할 수도 없다.
“광해님께선 식사를 하셨습니까?”
“사흘째 수라를 들이지 않고 계십니다.”
박상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광해님을 뵙고 싶습니다.”
“후궁이 침전에 들 수 없습니다.”
박상전이 입구에서 막는다.
왕의 여자들에겐 각자 자신의 방이 있다.
여자는 왕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베갯머리에서 다음에 불러달라고 하거나 와달라고 송사하지 않으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래야 왕이 원하는 여자에게 찾아갈 때 눈치 보이지 않는다.
즉, 예서가 부름도 없이 침전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예와 법에 어긋난 것이다.
예서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그 예와 법을 만든 성리학은 무너졌습니다. 전 들어가서 주상을 돌봐야겠습니다.”
“주상의 지엄한 엄명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박상전은 피곤한 표정이었다.
광해가 두문불출하고 수라를 거부한 이후 퇴궐하지 않고 침전 입구에서 상주하고 있었다.
나름의 충정이다.
예서는 피곤해 보이는 박상전을 똑바로 봤다.
“박상전께서는 전하의 충신입니다. 소첩 또한 그러합니다.”
박상전은 그저 피곤한 얼굴로 예서를 바라봤다.
“주상께서 일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모내기, 이양법이 퍼지지 못함은 복지부동 때문이라고. 분명 조선을 발전시킬 기술인데 혹시나 흉년이 들 경우 일을 진행한 신료가 뒤집어쓰게 될 테니 반대했다고. 충신이라면 주상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요. 주상껜 위로가 필요합니다.”
박내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들은 책임지기 싫어서 발전을 거부했습니다. 허나 소신은 주상의 명확한 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래도 광해님을 곁에서 오래 모시지 않았습니까? 주상의 성격쯤은 파악하셨어야죠. 소첩이 들어간다고 화내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박상전에게 벌을 주겠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후에 주상께서 한소리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절대 벌 받지 않을 겁니다. 막지 마십시오. 광해님의 성격을 생각해 주십시오.”
예서의 긴 말에 박상전이 고민하다가 옆으로 물러섰다.
“주상의 건강을 보살펴 주시지요.”
“고맙습니다. 대감.”
예서는 문지기를 돌파해 왕에 다다랐다.
침전 안에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듣고 싶지만, 그건 예가 아니다.
“전하. 예서이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다.”
“어.”
쉽게 승낙이 떨어졌다.
예서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광해는 침전 바닥에 큰대자로 누워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작가의말
써놓고 마음에 안들어 열번정도 지웠네요
뒷부분 쓰다 지우고 고치고 그래도 마음에 안들고
아놔 내가 학살자의 심정을 어떻게 알어
이승만이나 이구만과 진솔한 인터뷰를해보고 싶어요
밥이 넘어가십니까 죄책감은 있습니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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