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오성과 한음
순도 100% 픽션입니다
“포로를 돌려받길 원한다.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지?”
광해는 조용히 누르하치를 바라봤다.
표정의 변화는 없지만, 눈빛에 숨겨진 당당함이 조금 누그러졌다.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되었다.
“백두산을 기준으로 서쪽. 압록강 북쪽은 귀국의 영역으로 인정해줄게. 대신 두만강 북쪽은 야인여진의 땅이야. 조선은 지금껏 행해온 학살에 대한 사죄로 야인여진을 지원할거야. 그들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지원해서 두만강 북쪽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돕겠네. 포로의 세배. 3900명의 야인여진과 그 가족을 무산으로 보내줘. 그럼 포로들을 풀어주겠네.”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땅.
하지만 감자가 출동한다면 어떨까?
북방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유일한 곡식인 감자가 내년부터 보급될 것이다.
누르하치는 광해의 제안에 심장이 철렁했다.
지금 조선의 왕은 여진족의 땅으로 북방진출을 선포한 것이다.
선전포고는 아니지만, 선전포고보다 무서운 말이었다.
그렇다고 막을 방법이 없다.
조선 땅엔 병력화 할 수 있는 장정이 300만 있는데 비해 여진족은 다 합쳐봐야 10만이 안 된다.
아직은 힘을 더 길러야 한다.
“알겠네. 야인여진에게 의중을 물어 지원자 순으로 3900가구를 뽑아 보내겠네.”
전투력이 약한 노인 가족 위주로 보내는 게 그나마 할 수 있는 복수의 전부다.
그들이 조선의 식량을 최대한 먹어치워 조금이라도 조선의 국력이 약해지길 바라는 게 최선이다.
“그들이 오면 포로를 해방하겠네. 문서화할까?”
“그러지.”
누르하치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광해가 선물을 줬다.
“포로 문제는 이걸로 됐고. 오늘 북경에서 온 사신이 신의 벌을 받아 죽었더군.”
응. 신이 한 거야. 내가 한 거 아니야.
“그... 그래.”
광해의 능력을 잘 모르는 누르하치는 질린 듯이 말했다.
사람이 천천히 떠오르더니 슈우웅 떨어지는 기적.
진짜 신이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었다.
“참 걱정이야. 신이 한 건데 명에서는 왠지 조선에게 책임을 물을 것 같거든. 요동의 병사들이 조선을 치지 않을까 걱정이야.”
누르하치는 갑자기 자신에게 넋두리를 해대는 광해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요동의 병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책임지라며 마구 학살하면 맞서 싸워야 할 텐데. 보급을 끊지 않는 한 계속 시달림 당할 것 같고.”
누르하치를 슥 보며 말을 하는 광해.
누르하치는 광해의 말 뜻을 이해했다.
“무슨 말인가. 나는 대명제국의 용호장군이다.”
“허어. 그러면 명군이 조선을 칠 때 함께 할 건가?”
“요청을 받으면.”
이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데 누르하치는 당당히 말했다.
광해는 내심 쉽지 않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순망치한. 이거 맞나. 명이 조선을 정복한다고 만주족에 떨어지는 건 없을 듯한데. 오히려 남는 명나라의 병사들이 흑룡강으로 진출할 것 같은데. 차라리 이건 어떤가. 조선과 명의 사이가 벌어졌으니 누군가가 요동을 점령하면 조선 입장에선 명과 직접 맞닿지 않으니 오히려 좋아지지 않을까? 그리하면 요동을 점령한 누군가를 조선에서 지원하게 될 것도 같고.”
동맹제의.
누르하치는 눈을 부릅떴다.
누르하치는 현재 해서여진 예허부를 제외한 여진족 전체를 통일했다.
원 역사에서도 이 전력으로 후금국을 세워 명나라와 전쟁을 시작했다.
즉, 누르하치는 지금 독립선언을 해도 될 전력을 갖췄다.
“조선이 임란에 휩싸였을 때 구원병을 보내주겠다 하던 만주족 아니었나? 우리 사이 나쁘지 않았잖아.”
광해는 누르하치를 살살 꼬득였다.
“쉽지 않겠지. 부족의 미래가 달린 일이니. 돌아가서 잘 생각해 봐. 따로 서신을 보낼 필요는 없고, 서신을 받는다 해서 내가 믿을 리도 없지. 상황 봐서 알아서 판단해. 명에서 조선을 공격해 올 때 어떤 도적단이 보급을 끊는다면 조선은 아마 그 이름 모를 도적단을 열심히 지원할 것 같아. 너무 고마워서 말이야.”
당장 동맹은 불가능하다.
다만 광해는 누르하치의 가슴속 기둥에 불을 붙여 주었다.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니까.
누르하치와 만주족은 풀려났지만, 명나라 사신들은 흥청에 갇혔다.
조정에선 이 사태를 수습할 방안을 두고 격론이 오고갔다.
물론 광해에겐 남의 이야기다.
이원익에게 맡겨두고 내궁에서 놀았다.
산책을 하다가 잔디밭에 누워 배에 매혹의 마법진을 그렸다.
개다래나무에 환장하듯 고양이들이 달려왔다.
광해는 새끼고양이만 집어 배에 올려두자 나머지는 매혹의 힘을 잃고 흩어졌다.
치유의 오로라.
“저녁에 뭐 먹을까.”
예서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수라간에 가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삼겹살이나 먹을까? 아. 돼지가 없나.”
몰랐는데 돼지는 귀한 생물이다.
방목하면 알아서 자라고 털을 주는 양이나, 농사에 도움이 되는 소 대신 돼지는 먹는 거 말고 쓸 데가 없다.
풀만 줘도 잘 자라는 다른 짐승과 달리 돼지는 사람이 먹는 곡류를 줘야 한다.
그래서 돼지고기는 사치의 상징이며 세상 여러 나라에서 돼지 키우는 것을 금지했다더라.
가톨릭이며 이슬람이며 여러 종교가 돼지고기를 먹는 걸 악으로 지정한 이유가 단순히 돼지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다.
“돼지 농장. 음. 돈 많이 들겠지. 모현성에게 말해야겠다.”
먹고 싶으니까.
시켜야지.
그때 박내관이 달려와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검계의 주인 밀주였다.
광해는 잔디에 누운 채 손님을 받았다.
“주상 전하를.”
“됐고. 왜?”
멀리서 달려왔는지 먼지를 뒤집어쓴 밀주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제가 서경을 장악하다가 이상한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본론만. 예서야. 가서 물 좀 떠다줘라.”
“개성, 해주를 장악한 조직원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해주에서 밀수선 한척이 출발했다고.”
“그게 뭐? 흔한 일이잖아.”
황해도에서 인삼 밀수선이 떠나는 거야 매년 있는 일이다.
밀주가 달려올 만한 일은 아니다.
“저희가 장악한 곳이기에 세금을 받기 위해서 선박을 관리합니다. 하루 종일 보고 있을 수는 없으니 항상 선박을 비워두게 만듭니다. 화물을 싣는데 며칠 걸리니 그 사이 저희가 확인하고 가서 세금을 받죠.”
“니들 영업방식은 알 필요 없고.”
“그런데 부하 말에 따르면 빈 선박에 십여 명이 냅다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합니다.”
“자유를 찾아 밀항하는 거 아니야?”
“뒤늦게 발견하고 해안으로 달려간 부하의 말에 따르면 양반이 몇 명 보였다고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도성에서 상국의 사신 하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
별거 아닌 일인데 연결하고 보니 큰일이 맞다.
사신이 죽었다.
지방 양반들은 은결을 지키기 위해 광해에게 적대한다.
아마도 명나라를 향해 양반이 떠났다.
“잘했다. 훌륭한 일을 했어. 똑똑하구나. 상으로 뭘 줄까?”
“감사합니다. 전하. 소인은 그저 저희 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네 소망은 이루어......”
생각해보니 밀주의 적이 누르하치였네.
지난 주 누르하치와 비밀 동맹을 맺었는데.
“...지려면 좀 오래 걸리지. 우선 금을 좀 내리도록 하지. 배가 떠난 지 얼마나 지났지?”
“사흘. 부하의 말에 따르면 사흘 전에 출발했다고 합니다. 사흘이면 지금쯤 천진 근처까지 갔을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밀주는 예서가 떠다준 물을 한 사발 마시고 떠났다.
광해는 배 위의 고양이를 간지럽히며 생각에 잠겼다.
지방양반.
아마도 양반 전원이 광해를 적대할 것이다.
명나라.
돈을 주고 무마할 수 있다.
다만 간섭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대명률에 따라 역법을 고쳐야 할 것이고, 해금령도 다시 선포해야 할 것이다.
몰래 한다고 해도 명나라 신하인 조선성리학자들이 계속 고자질할 것이다.
“후우. 조선 땅에 명나라 신하들이 가득차 있으니 이거야 원.”
한번 끌려가면 계속 끌려갈 것이다.
어차피 전쟁은 자신 있다.
현재의 명나라는 약하다.
다만 큰 피해 없이 막으려면 전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명과 전쟁이 나면 양반들이 봉기하겠지. 그놈들은 대명제국의 신하니까.”
양방향으로 공격받으면 피해가 크다.
가장 좋은 것은 각개격파.
광해는 바닥에 마법진을 그렸다.
“전하께 아뢰게. 대신들이 의견을 모았다네.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하니 어서 전하께 말해주게.”
영의정 이원익은 내궁입구로 가서 내관에게 말했다.
얼마 후 예서가 난처한 얼굴로 나왔다.
“무슨 일인가? 전하께서 나오시기 싫으시다더냐? 그럼 내가 들어가 방문하겠네.”
“그... 그게 아니옵고. 광해님께선 손을 슥삭슥삭 하시더니 예의 그 빛나는 문을 만들고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커헉.”
이원익은 피를 토하는 심정이 되었다.
왜 내가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지.
주상은 나라가 걱정되지도 않는지.
이원익은 서신 하나를 건넸다.
“주상께서 오시면 전하게. 이번 사태에 대한 해결책일세.”
“알겠습니다.”
이원익은 품속 깊이 손을 넣어 서신을 하나 더 꺼냈다.
“그리고 이것도 전해드리게.”
“이건 무엇입니까?”
“사직서일세.”
“네?”
이원익은 여느 회사원처럼 매일 품고 다니던 사표를 던졌다.
“한음아. 오늘은 뭐 하고 놀까?”
이항복이 기지개를 쭉 펴며 이덕형을 불렀다.
자료를 정리해 기록하던 이덕형이 짜증을 냈다.
“백사 형은 걱정도 안 되오? 조선 꼴이 뒤숭숭한데 빨리 일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은 안하고.”
“이것도 주상의 뜻이잖느냐. 허허.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게야.”
“상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해금령과 역법에 대해 알려진 게 분명합니다.”
이덕형의 말에 이항복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리가 다 막을 수 없었군. 우리 말고 다른 경로를 통하는 자가 있다는 뜻인데. 누굴까.”
“후우. 주상께서 지시한 가장 중요한 일인데 그걸 못 막았으니.”
“됐고. 묘족 쪽은 정리 다 했는감?”
이항복이 말을 돌렸다.
“가진 사료는 정리 끝냈소. 그런데 자료가 많이 부족한데. 한 번 더 남경에 들렀으면 하오만.”
“어렵지 않겠는가? 전에도 그렇게 뇌물을 써서 남경에 갔는데. 이제 우릴 보는 눈이 수상쩍어져서.”
“아무래도 우릴 조선 사신을 사칭하는 자로 보는 듯하오.”
“아니 뇌물을 안 줬다고 접견을 막는 놈들이 누군데 우리를 의심해! 이것들이 정말. 책봉 주청서를 올린 지 6개월이나 지났는데 접견조차 막아놓고서! 그저 대기하라며 여기 묶어둔 놈들이. 못 믿겠으면 옥새라도 돌려주던가. 고국으로 돌아가게.”
“그건 우리 사정이고, 저들 눈에 우린 북경에 놀러온 뜨내기로 보이지 않겠소? 우리는 명나라에 절대 충성하겠다고 말했는데, 조선에서 해금령 철폐와 독자적 역법을 쓴다는 소식이 들려오니 우릴 의심하는 게 당연하겠죠.”
“하긴. 그렇겠지?”
이항복이 히죽 웃었다.
“형님은 성격도 참 태연하시오. 이러다 갑자기 잡혀가 치도곤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냥. 대국에서 다양한 학문을 보고, 다양한 역사를 찾다보니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 것 같아서. 그리고 상황이 재밌기도 하고. 대국의 사정을 살피고 조선에 해코지 하려는 시선을 막아라! 최대한 시간을 끌어라! 캬. 뭔가 비밀 작전을 하는 것 같아서 신나고.”
“에휴. 형님도 참.”
둘이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때, 문 밖에 인기척이 났다.
“스승님. 저 류입니다.”
이항복의 제자 김류였다.
“그래 무슨 일이냐?”
“태사 가문의 노비가 방문했습니다. 광해님의 은혜를 구매하고 싶다고.”
“그래? 접견실에서 기다리라 전해라.”
방문을 나서며 이항복이 돌아봤다.
“돈 좀 생기겠네. 오늘 저녁엔 맛있는 거 먹자.”
“에휴. 형님은 참 태평하시오.”
“인생 마지막 휴가라잖아. 휴가가 끝나가니 최대한 놀아야지. 나 갔다 온다.”
이항복은 약을 팔러 접견실로 나갔다.
- 작가의말
옛날에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더 비쌌대요
어쩐지.
내 입맛이 고급진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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