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내가 아는 사람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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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세자시절 내 딸을 빼앗아 갔소. 그때 이미 폭군의 기질이 있었단 말이오! 게다가 자신의 사병을 이끌고 와서는 노비들을 제압하고 남자를 강간했소. 지금에야 이상성욕을 감추고 있지만, 조선 전역을 장악하고 나면 참지 않을 것이오. 그 자는 죄를 뒤집어 씌워서 양반가 처녀들을 죽이고 남자들은 강간할 거요!”
얼굴은 기억 안 나지만 대충 누군지 알 것 같다.
이초란의 애비.
자살하지 않고 여기 와서 스스로 소문내고 있었군.
저러면 가문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 않나.
스스로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다니.
자살당할 죄군.
광해는 고개를 숙이고 큰 소리로 물었다.
“대체 누가 당했단 말이오. 본인이오?”
“어? 으응? 있소. 내 친한 친우 얘기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던 대중의 반 정도가 안타깝게 사내를 쳐다봤다.
자기 얘기구나.
반 정도는 더러운 걸 봤다고 질색하는 얼굴.
“어쨌든 그자를 그냥 두면 여자는 다 죽이고 남자는 강간당할 것이오. 우린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자를 막아야 하오.”
“옳소. 막읍시다.”
“이건 죄가 아니오. 상국의 뜻에 따르는 것이오.”
“상국의 병사가 한 달 안에 온다 하오. 그 때를 맞춰 가야 하지 않겠소?”
“소식이 들어왔소! 전주의 양반들이 상경을 시작했다 합니다.”
“우리도 갑시다. 늦어선 안 되오.”
“내 아들이 서경에서 소식을 전해왔소. 북쪽에서도 대규모 무리가 모였다 하오. 그들도 한성으로 간다 하오.”
“갑시다!”
와아~
갑자기 출발하는 양반들을 보고 광해는 깜짝 놀랐다.
이렇게 갑자기?
미친놈들인가.
군중심리에 휩싸여 갑자기 출발하는 양반들의 행태에 놀랄 때 시종 둘이 다가왔다.
“나으리 저희는 어찌 합니까?”
“음. 가야지.”
“예. 말을 준비하겠습니다.”
광해는 말에 올라 양반들의 행렬에 섞였다.
어디사는 누구시오? 아. 나는 어디요. 요즘 어떠시오. 죽겠소. 허허허. 다 잘되겠지요.
말에 탄 양반들이 호기롭게 웃으며 인사한다.
저마다 노비가 끌고 있고, 평민 한둘씩 따르고 있다.
그들을 보며 광해는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세 유럽이냐. 보급도 없이 그냥 전쟁을 출발했다더니 조선도 그러네. 이거 결말이 국민방위군처럼 될 것 같은데.’
6.25전쟁 1.4후퇴 때 북한에 땅을 내주면 그 땅의 젊은이들이 전부 북한군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남한은 전국의 청년을 전부 징집해 68만 명을 모았다.
일단 모았는데 이후 제대로 된 계획도 없었고 예산도 부족했다.
징집된 병사들은 1월 추위 속에 칼바람을 맞으며 경남까지 걸어야 했고, 밥도 못 먹었고, 전투복이나 침구를 보급 받지 못해 노상에서 볏짚을 덮고 자야 했다.
결국 국민방위군은 징집된 지 100일 만에 27만 명이 얼어 죽거나 굶어죽거나 병 걸려 죽고, 나머지 대부분 동상 등으로 폐인이 되었다.
참고로 6.25전쟁 내내 총에 맞아 사망한 남한군은 14만 명이다.
국민방위군의 결말을 답습하는 양반들은 상주에서 계획 없이 출발해 하루 만에 문경에 다다랐다.
곳곳에 십여 가구씩 분산된 산촌 고을.
양반들은 가문의 이름을 대고 방을 빌렸고, 밥을 지어 먹었다.
농민들은 보상받기 막막하지만, 뺏길 수밖에 없었다.
추수를 끝내고 겨울나기를 해야 할 식량을 빼앗기고 엄동설한에 창고 따위에서 자야 했다.
문경에 도착할 때 쯤 광해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밀주? 가까이 있었나?”
“예. 암호를 보고 달려왔습니다. 마침 대구를 정리하고 있었지요. 저들은 누구입니까?”
“탈주 아전들. 몸종으로 쓰고 있다.”
밀주가 멀찍이서 구경하는 아전들을 묻자 광해는 밀주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말했다.
“내 양반들의 허와 실을 볼 테니, 따르면서 몸종이나 해라.”
“저... 전하. 지금이 세력을 넓힐 기회인데. 양반들이 다 빠져나간 지금 전국을 장악해야...”
“시끄러. 내 몸종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지.”
여행 다니는 기분으로 유람하고 있지만, 귀찮은 건 질색이다.
밀주는 잡일 처리를 시키는데 딱이다.
밀주는 부하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려 보낸 후 본인과 심복 셋을 데리고 일행에 합류했다.
광해에게 험상궂은 일행 넷이 합류하자 아전들은 즉각 찌부러졌다.
밀주가 데리고 다니던 심복들은 당연한 듯 아전들을 부려 먹었다.
“지방 장악은 어떻게 됐지?”
“삼만 명 이상 사는 큰 고을엔 전부 뿌리를 내렸습니다.”
“호오. 빠르네.”
“개성, 평양 등 큰 고을부터 장악하니 나머지는 쉽게 넘어오죠. 관과 충돌이 일어나면 마패가 효과를 보고, 지방으로 내려간 염초꾼과 근거리의 백관과 협력해서 대부분 전투 없이 장악했습니다.”
“잘하네. 아. 염초꾼들은 어떻게 하고 있지?”
“양반들이 봉기하면서 다들 숨었습니다. 저희가 은신처를 제공했죠. 흙가마솥 영업은 완전히 멈췄습니다.”
“흠. 지금 비료를 만들어 뿌려야 할 텐데.”
“한성에서 먼 쪽부터 백관이 상경하면 금방 생산을 재개할 것입니다.”
“그래. 어려운 건 없지?”
“가평에 큰 마적단이 있습니다. 그 외 서너 개의 마적단이 있는데 희생이 클 까봐 건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적단?”
“예. 전원 기마를 타고 다니며 약탈을 해대는 놈들이죠.”
“마적단이라...... 그건 좀 미뤄. 나중에 잔당 정리할 때 같이 치자고.”
“예. 전ㅎ.. 나리.”
광해는 밀주와 대화하며 양반들의 뒤를 따랐다.
문경까지는 곳곳에 마을이 있어서 분산해서 들어간 양반들이 민폐를 끼칠 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문제는 산맥을 넘을 때 발생했다.
“뭐? 밥이 없어?”
“국밥집에 국밥이 없다니!”
조령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주요 길목이다.
보부상이나 양반들이 많이 지나는 곳으로 곳곳에 주막이 있다.
다만 일시에 이만여 명을 먹일 힘은 없다.
천여 명이 식사를 하는 것으로 주막의 모든 식량이 사라졌다.
나머지는 굶어야 했다.
자는 것도 문제다.
천여 명만 지붕이 있는 곳에서 잘 수 있었다.
당연히 명망 높은 명가의 양반들만 따뜻하게 잤고 나머지는 11월 말 찬바람을 맞으며 노숙해야 했다.
“사냥 해 와.”
“방 구해 와.”
“씻을 물은?”
밀주의 수하 셋이 열심히 뛰었다.
낙엽이 진 황량한 산을 헤치고 꿩과 토끼를 사냥해왔고, 뒷돈을 줘서 잠자리를 마련했다.
그래도 슬슬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돌아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도망가려는 밀주가 꼴 보기 싫다.
“하다가 중지곳하면 아니한만 못하다. 이렇게 된 이상 정릉행궁까지 간다.”
산맥을 넘는 이틀간 대부분이 굶었으며 오백 명 이상이 얼어 죽었다.
“이게 다 국왕 탓이다.”
“간악한 국왕 때문에 양반들이 얼어 죽었다.”
여기저기에서 곡소리가 들려왔고, 국왕에 대한 저주의 말이 퍼졌다.
충주에 도착하자 춥고 배고픈 양반들은 반쯤 폭도가 되었다.
애초에 군기도 없는 단순 집단이다.
저마다 넓게 퍼져서 양반의 이름으로 약탈을 했다.
갓 추수한 평민들의 창고가 털렸다.
“네놈들은 대의도 없느냐?”
“무식한 놈들! 술과 밥을 내와라!”
“썩 나가라. 이 집은 우리가 쓴다.”
태어나 처음 굶어본 양반들은 굶어죽는 공포감에 과하게 약탈했고 잔인하게 징발했다.
충주 이천 수원까지 가는 길에 약탈이 이어졌고, 삼남지방 양반이 전부 모인 수원부는 메뚜기 떼를 만난 듯이 탈탈 털렸다.
가문의 이름으로 보상하겠다며 안방을 뺏고, 아전들이 사랑방을 차지했다.
백성들은 12월 추위 속에 창고나 축사에서 자야 했다.
겨울을 나야 할 곡식을 뺏기고, 담가둔 술을 뺏긴다.
힘을 가진 자를 견제할 관아가 마비되자 술 취한 양반의 구타나 강간도 이어진다.
특히 도주했던 양반과 아전의 행패가 심했다.
“이곳은 내 집이다!”
“네놈들이 우리가문을 고발했느냐?”
“내 땅! 내 땅의 수확물을 가져와라!”
“내 아버지가 네놈들 때문에 죽었다.”
국왕의 힘이 사라진 곳에 다시 나타난 부패한 양반과 아전은 그간 도망자였던 것을 보상받으려 과하게 약탈하고 죽였다.
이는 수원 뿐 아니라 경기지역 전체에서 일어났다.
양반들에게 직접 죄를 지은 삼만 명을 미리 뺐지만, 양반들은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라도 죽였다.
부모의 복수를 해야 가문에 할 말이 있기에.
백성의 불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게 보인다.
밀주의 부하들이 물어오는 소식을 들으며 느릿한 양반들의 행렬을 함께하던 광해는 수원에서 모현성에게 통신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한성에서 삼만 명이 함흥에 도착했어. 재분배는 아직 시작 못했고.
“그들과 기병들을 철원으로 보내라. 분위기 봐서 양주까지 내려도 되겠어.”
-응? 양반들에게 반년 맡기려는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는데. 이 새끼들 너무 병신이야. 거쳐온 지역의 평민들이 전부 욕하고 있고, 그게 전국 공통일 것 같아. 이 새끼들한테 반년 맡겼다간 나라가 백 년 후퇴할 것 같아.”
-크크큭. 그렇지. 유리병을 깨긴 쉽지만 붙이긴 어렵지. 이승만 같은 놈이 1년만 나라를 맡으면 21세기 한국도 조선시대로 후퇴할거야.
“한성 단주보고 경기지역 민란을 일으키라고 해. 정충신에게 한성 인근에 숨어 있다가 도주를 막게 하고.”
-라져. 댓.
1년 12월.
왕이 지시한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두 달 안에 파주에 모일 것.
그 말대로 대부분의 양반이 모였다.
파주에 모인 북부 양반들 2만 명.
수원에 모인 남부 양반들 6만 명.
산속으로 숨었던 아전이나 양반들이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와 숫자는 계속 불고 있었다.
왕은 한 달 전에 사라졌다.
광해를 지지하는 이들 삼만 명은 보름 전에 사라졌고, 궁의 내시와 궁녀까지 싹 데려갔다.
대비전의 인원 극소수만 남았을 뿐이다.
게임은 끝났다.
한성에 들어가 새 왕을 옹립하고 상국의 책봉을 받으면 된다.
모여든 양반들은 단꿈을 꾸게 되었다.
양반들은 수원에서 전진하지 않고 당파싸움을 했다.
한성에 들어가 왕을 세우면 반란이 된다.
수원에서 왕을 내세워 들어가면 혁명이 된다.
명분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자신들이 반정공신으로 기록되길 원치 않았다.
조정에 있던 기자헌, 정구, 이항복, 이덕형 등이 수원으로 내려왔으며 재야에 있던 이산해, 김장생 등이 튀어나왔다.
“인성군을 옹립합시다.”
“인성군이 왕에게 적극 협력한 것을 몰랐소? 차라리 흥안군이 낫소.”
“너무 어리지 않소?”
“학식은 배우면 되오. 우리가 잘 가르치면 훌륭한 상이 될 수 있소.”
“차라리 총명하기로 소문난 능창군이 낫지 않소? 국왕에게 아비가 능지처참 당했으니 같은 곳을 볼 것이오.”
“아니오. 항렬이 멀어지지 않소. 인성군이 가장 현명하오.”
당파별로 왕족과의 교감이 이루어졌다.
저마다 댓가를 약속한 왕족을 미느라 한성 진격은 미뤄졌다.
“여. 오랜만이군.”
광해는 야심한 시간 이항복의 거처를 찾았다.
그곳엔 이이첨과 이덕형이 함께 있었다.
“주상 전하. 놀랐습니다. 반란군에 섞여 있다니. 이건 계획에 없지 않았습니까?”
“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 심심해서 잠입했어. 보고 있으면 참 재밌어.”
“그래도 들통 나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이항복이 걱정하자 광해가 코웃음을 쳤다.
“신의 가호를 받았다. 이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날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지 않는 왕.
광해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신료들은 안도감을 느꼈다.
적이라면 무섭겠지만 자신이 모시는 이가 강하다는 것이니.
“정승들은?”
“이원익 대감과 정인홍 대감은 차마 참여할 수 없다 합니다. 마지막 금군 위사들과 함께 편전을 지키겠다 합니다. 언제까지 지켜보실 생각입니까?”
“글쎄. 보고 있자니 재밌어서 계속 보고 싶은데. 경들이 보기에도 우습지?”
“허허. 가마솥 안에 함께 있을 땐 몰랐는데 밖에서 보자니 이토록 부끄러울 수가 없습니다. 비를 걱정하는 농민이 천배 현명한 존재입니다.”
“정치라는 게 그렇지 뭐. 이이첨. 자네도 그런가?”
“한숨만 나옵니다. 성리학 덕목을 모두 내던진 무뢰배만 있습니다.”
이이첨은 아직 성리학 교리에 잡혀있군.
“셋 다 지켜보기만 해. 기병도 대기 중이니 언제든 제압할 수 있어. 보고 있다가 나라에 심하게 해를 끼친다 싶으면 그때 시작할 거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다가 괜히 휘말려서 죽지 말고. 후에 정리과정에서 억울하게 죽는 이가 나올 수도 있으니 죽이면 안 될 이를 적어 둬. 그렇다고 사감을 넣진 말고.”
“예. 전하.”
“조심하고.”
“옥체보존하소서 전하.”
수원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광해는 몸에 마지막 마법진을 그렸다.
신체능력 향상.
더 이상 마법진을 그릴 공간은 없다.
이제 광해는 물리마법사다.
이미 반정을 성공한 듯 당파싸움을 하는 양반들에게 방문객이 찾아왔다.
“내가 왕이 되겠소. 내가 왕이 되면 광해군이 행한 모든 악법을 철폐하고 성리학적 세계를 다시 구축하겠소.”
열두 살의 왕족, 능양군이었다.
- 작가의말
남한군이 죽인 북한군보다 남한군이 죽인 남한 사람이 더 많고,
북한군이 죽인 남한군보다 북한군이 죽인 북한 사람이 더 많았던...
그땐 그런 시절이었죠
자국 국민을 죽일 수록 공적이 인정되어 출세하는...
그래서 둘 다 싫습니다
예전에 런 비난으로 빨갱이소리 들어서 사족을 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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