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예서
순도 100% 픽션입니다
왕께서 여행을 떠나셨다.
예서는 따라가고 싶었지만, 궁에 남아서 일을 해야 했다.
이원익을 포함한 중신들이 광해의 지시를 제대로 하는 지 기록해야 했고, 박내관이 궁을 잘 관리하는지 감시해야 했고, 이초란과 채유진 등 한성에 남은 백관들이 맡은 일을 잘 하나 확인해야 했고, 한성단주가 교세를 확장하는 걸 긴밀히 기록해야 했다.
감시, 확인, 기록.
할 게 너무 많다.
“예서 이년! 빨리 오지 못해!”
후우.
정상궁. 쟨 진짜 바본가?
“아직 빨래를 마치지 못했구나. 게을러 빠져가지고.”
왕께서 지시한 일 하고 있었는데요?
“노비주제에 어쩌다 주상 전하의 눈에 들었다고 기고만장해 가지고는.”
참 단순한 인간이다. 왜 괴롭히는 지까지 친절히 알려주고.
“내가 특별히 널 뽑지 않았다면 넌 궁에 들어오지도 못했어.”
니가 뽑은 게 아니잖아. 다섯 살에 궁에서 허드렛일 할 무수리로 끌려온 건데.
“승은을 그렇게 많이 입었는데 회임하지 않는 걸 보니 얘 어디 고장난거 아니야?”
저 놈의 유치한 질투.
이러다 덜컥 회임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셔?
거기까지 생각할 수 없으니까 감히 왕에게 총애 받는 승은상궁을 괴롭히는 거겠지만.
“당장 따라와. 할 일이 태산이다.”
주상께서 맡기신 일이 남았는데.
예서는 말하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은 공식적으로 정상궁의 지시를 받는 새끼무수리다.
함부로 왕의 이름을 팔아서 누가 되어선 안 된다.
그저 오늘도 밤새 일할 따름이다.
한숨을 쉬며 정상궁을 따라가려는데 왕의 침전에서 빛이 번쩍였다.
“주상 전하!”
예법에 어긋났다.
너무 반가워서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광해는 평소의 시크한 표정 그대로 침전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드러누웠다.
“여~”
찬 방바닥에 그대로 눕는 주상.
예서는 광해에게 달려갔다.
“전하. 요를 깔아 드리겠습니다.”
“8월에 뭔 요야. 그냥 누울래. 움직이기 싫어. 방전되어 버렸어. 너무 열심히 일했어.”
너무 열심히 일한 사람치고 안색이 매우 좋았다.
술 냄새도 풀풀 나고.
예서는 광해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글싱글 웃었다.
“그래. 그런 태도가 좀 낫네. 궁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봐라.”
“아앗. 예.”
뒤늦게 예법에 어긋남을 깨달은 예서는 잽싸게 물러나 그간 정리한 것을 가져왔다.
왕께 내밀었지만, 광해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읽어줘.”
“예. 전하.”
예서는 하나하나 읽으며 한 달간 한성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광해는 멍하니 드러누워 보고를 들었다.
“적당히 잘 하고 있었네. 명령서 적을 준비해라.”
“예. 전하.”
광해는 전달할 명령을 불러줬다.
예서는 한참 받아 적은 후 물었다.
“그럼 비변사 회의에는 참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 너무 힘들었어. 방전되었어. 보름동안 꼼짝도 못할 것 같아.”
세상에 얼마나 힘들었기에.
예서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눈으로 광해를 바라봤다.
천장을 보고 있던 광해가 예서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예서는 잽싸게 눈을 깔았다.
“힘들었지...... 정말.”
죽은 사람은 묻고 죽은 말은 먹는다.
죽은 군마가 삼천마리. 탄 부분 걷어내고 적당히 손질하니 말고기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무산에선 일주일동안 축제가 벌어졌다.
구워먹고, 삶아먹고, 훈제해먹고.
담가놓은 술이 부족해 병사들은 첫날밖에 못 마셨지만, 왕과 지휘부는 내내 마셨다.
자주 올 수 없으니 사기를 올려줘야 한다.
마시며 이야기하고 소망을 해소해주고.
귀순한 유민과 대화하고 소망을 듣고 해소해주고 마시고.
철공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강철 제련법을 알려주고 마시고.
광해는 무산에 여름휴가를 간 것이다.
놀아야 한다.
언덕위에서 마시고, 두만강에 발 담그고 마시고.
너무 달려서 힘들다.
“넌 힘든 거 없었느냐?”
“예. 전혀 힘든 일 없었습니다.”
예서는 즉각 대답했다.
광해는 그 모습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답정너인가.
광해의 반응에 예서는 자기가 뭘 잘못 했나 고민했다.
고맙게도 광해가 정답을 알려줬다.
“내가 소망을 볼 수 있는 거 알지?”
“예. 전하.”
“소망이 보이면 속마음도 어느 정도 보여. 그런데 속마음을 속인 말을 들으면 한숨이 나와. 넌 똑똑하니까 내 성격쯤은 파악했을 거 아니냐. 난 솔직하게 말하는 이가 좋다.”
예서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에휴. 됐다. 가서 박내관하고 이원익 불러와라.”
“예. 전하.”
예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전을 나섰다.
일주일.
광해는 일주일동안 침전에서 아무것도 안했다.
열심히 일한 날 위한 휴가.
용광로 만들고 전쟁도 치렀으니 쉬어줘야지.
너무 게으름을 피워서 게으름 피우는 게 귀찮아진 광해가 드디어 몸을 일으켰다.
“예서야. 허균 일정표. 오늘 어디지?”
“광주이옵니다. 백관 8명과 동시에 광주를 조사합니다.”
“그래.”
광해는 아공간에서 모현성의 위성지도를 꺼내 한참 보더니 한참동안 마법진을 그렸다.
마법진을 발동하자 빛의 문이 생겨났다.
“이리 와봐라.”
광해는 예서를 불러 껴안았다.
“아앗. 저 전하. 남사스럽게 아침부터.”
“어금니 꽉 깨물어라.”
광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예서를 안은 채 게이트로 들어갔다.
“예? 꺄아아악.”
게이트 너머는 하늘이었다.
공중에 도착한 둘은 강의 10m 상공에 나타났다.
풍덩.
“흐어. 흐어. 어푸르르르.”
“하하하.”
한성의 현재위치와 모현성이 있던 무산의 위치를 대입하면 광주의 대략적인 좌표를 알 수 있다.
광해는 안전하게 강 상공에 게이트를 열었다.
강기슭으로 나온 둘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광해는 간단하게 마법으로 물을 말렸다.
“자. 가자.”
“......예. 전하.”
한마디 쏘아붙이고 싶었던 예서는 결국 조용히 따랐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허균이 공손히 예를 올렸다.
매일 전수조사를 하고 노숙을 밥 먹듯 한 허균은 고작 네 달 만에 10년 이상 늙어버렸다.
“그래. 고생이 많구나.”
“아닙. 아닙니다. 크흑.”
우는 척 하며 고개 돌리는 허균.
웃기려고 연기 하는 거지?
“계속 고생하고.”
허균의 뒤엔 청년 하나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광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소신 해남 윤씨에 선자 도자 쓰고 있습니다. 뵙게 되어 삼생의 영광이옵니다.”
아 그놈이구나. 아갈파이터 윤선도.
“어. 그래.”
“하온데. 어찌하여 홀로 오셨사옵니까. 위사 없이 이 먼 곳까지 오시면 종묘사직의 안위가......”
“입 열면 죽여 버리겠어.”
“헙.”
상대하지 말아야겠다.
광해는 허균과 나란히 걸으며 진행사항을 들었다.
“확실히 도움은 됩니다. 도움은. 똑똑하고 빠릿하고. 자기 집 재산 박살내는데도 열성이었고. 조사할 때 효율적 동선을 잡아서 전보다 배는 빨라졌습니다. 가르치길 좋아해서 밤마다 병사들에게 이런저런 것을 가르쳤기에 병사들의 조사도 빨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상하게 두 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게 아갈파이터란 종족의 특성이지.
“크크크크. 잘 가르쳐서 써먹어봐.”
“에휴.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쉬는 날이지? 백관들에게 전파해라.”
허균에게 미리 준비한 서찰을 건네줬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철을 펴본 허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시작해라.”
“예.”
허균의 지시에 그에 딸린 700명의 병사가 흩어져 전진했다.
전주와 나주의 앞글자를 따서 전라도라 부른다.
현재의 광주목은 나주 인구의 반도 안 되는 삼만 명이 모여 사는 중급 도시다.
그래도 한명 한명 만나 조사하려면 매우 많은 숫자다.
백관 8명이 각자 7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광주목을 넓게 포위했다.
양반들의 반발은 이미 예정된 바.
삼만 인구가 잘못 뭉치면 700명의 병사도 위험할 수 있다.
이렇게 큰 도시를 조사할 땐 백관들이 뭉쳐가며 조사해야 했다.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는 백관의 백 갈래 길.
이 복잡한 경로를 짠 최명길은 진짜 인정해 줘야한다.
광해는 예서를 데리고 광주를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나름 큰 도시이기에 이런저런 노점상도 있었다.
역시 전라도 음식은 노점상도 맛있다.
“여기서 태어났지?”
“예? 예. 하오나 태어나자마자 떠나서 기억이 없습니다.”
“흠. 그렇겠지.”
고향에 돌아온 예서의 표정은 슬퍼보였다.
광해는 길게 이야기하지 않고 관아로 갔다.
느닷없는 왕의 행차에 관아는 당연히 난리가 났다.
광해는 거하게 대접을 받으며 광주관아에 머물렀다.
저녁이 되자 탐문조사를 마친 백관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모두 오래간만이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잘 되고 있지?”
“예. 은결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좀 불안합니다. 죄 지은 아전들과 양반들은 이미 어디론가 숨었습니다.”
“그렇겠지. 지은 죗값의 반만 받아도 구족을 멸해야 할테니.”
안 좋은 소문은 빨리 퍼진다.
벌써 조선 전역이 벌집을 쑤신 듯 웅성거리고 있다.
은결.
119만결이 34만결로 줄어드는 기적.
그 많은 재물을 훔친 자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국왕의 기습조사에 어어 하며 얻어맞던 양반들은 자료를 불태우고 뒤집어씌우며 숨고 있었다.
“광주 관아도 아전 열 중 두셋만 남았습니다. 다 도망갔죠.”
허균이 근심을 표하며 술을 마셨다.
“조심해. 그놈들이 뭉치게 되면 반란을 일으킬 거다.”
그 위험 때문에 백관의 조사대는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기습에는 당할 재간이 없다.
“예. 척후를 열심히 보내며 조심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병사들이 주상께 감화되어서 배신은 없을 듯 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오랜만에 만난 백관들을 위무하느라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신다.
연회가 끝날 무렵 광해는 자신을 보필한 기녀를 봤다.
그녀가 기대감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왕께 끼를 부렸다.
음.
“예서야. 자자.”
뒤에서 공손히 수발을 들던 예서의 표정이 펴졌다.
9월 7일. 일요일.
백관이 전수조사를 멈추고 쉬는 날이다.
대신 광해소망교 종교활동을 한다.
전날 전수조사를 하던 백관은 백성들에게 오늘 종교활동을 전하며 국왕이 참석하니 꼭 나오라는 말을 전했다.
덕분에 삼만여명의 백성이 다 모여들었다.
오천명의 병사들이 통제하여 백성들이 적당히 열을 맞춰 앉았고, 말빨 좋은 백관이 나와 진행했다.
노래하고, 광해님의 말씀을 읽고, 장애가 있는 자와 아픈 자를 불러내 기적을 보여줬다.
없는 팔다리를 재생시켜 주는 것.
이거 하나면 직빵이다.
“우와아아아~”
“주상전하 천세! 천세!”
풍문으로 듣던 믿기 힘든 기적을 직접 목도한 백성들이 광란에 빠졌다.
이제는 익숙해진 광해는 마무리 연설을 했다.
“들었겠지만, 난 소망을 들어줄 힘을 받았다. 열심히 소망하라. 자식 배불리 먹이고 싶다 소망하고, 수탈당하고 싶지 않다고 소망하라. 그 소망은 내가 이루어주겠다.”
“와아아아아아.”
“오늘 마지막 소망을 들어주겠다. 예서야. 나와라.”
“예? 예. 전하.”
뒤에서 지켜보던 예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달려 나왔다.
상장 수여하는 것처럼 예서를 앞에 세워두고 말을 시작했다.
“기축옥사는 말도 안 되는 누명이다. 이미 좌의정 정인홍이 제대로 조사했으며 기축옥사로 피해 입은 가문의 조사도 끝마쳤다. 이곳 광주에 자리 잡은 광산이가는 유일하게 8대 연속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가였다. 헌데 기축옥사에 휘말려 어이없이 몰락했다.”
예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멍하니 광해를 바라봤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눈에선 눈물방울이 또르륵 떨어졌다.
“간악한 정철의 누명을 알아보지 못한 조정의 잘못이다. 당시 난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선왕 선종의 실책을 막지 못한 것을 사죄하겠다. 진도에 숨어 살던 광산이가 일족에게 말하겠다. 미안하다.”
몇 일전 정인홍이 보낸 파발에게 소식을 듣고 진도에서 달려온 광산이가 일족이 단상 아래에서 눈물을 흘리며 손사래 쳤다.
“기축옥사는 정철과 그 일파가 자신의 세력확대를 위해 정적에게 누명을 씌운 사건이다. 이에 그와 관련된 모든 죄를 사하여 줌과 동시에 앞으로 피해 입은 가문에 충분한 보상을 하겠노라. 이상이다.”
“아아아.”
또 나왔군.
너무 고마우면 고맙다는 말도 못하지.
예서는 말도 못하고 눈물만 주륵주륵 흘렸다.
광산 이가의 명예를 회복하고 싶다 - 157877
정철의 간악함을 널리 알린다 - 15449
처음보다 줄어든 예서의 소망이 집행되었다.
“예서야.”
울고 있는 예서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병사의 안내를 받아 관노의 복장을 입은 한 여자가 나왔다.
늙고 고생한 여자.
누군지 모른다.
다만.
예서 자신을 꼭 닮았다.
“아아아.”
두 여자는 하염없이 울면서 자석이 서로 붙듯 다가갔다.
- 작가의말
윤선도는 이후 계속 나오므로 캐릭터가 마음에 안드시더라도 잠시만 고정하여 주옵소서
강아지똥떡님 언제나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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