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역사가 쌓아올린 높이
순도 100% 픽션입니다
소유키는 광해의 침전 앞에서 놀고 있었다.
나무 그늘에서 고양이들을 안고 구르다가 침전 앞에 빛의 문이 생겨나자 벌떡 일어났다.
광해가 예서와 함께 나타났다.
“즈나~”
소유키가 달려가 안겼다.
예서는 깜짝 놀랐다.
이런 적극적인 여자는 처음 봤다.
“더우니까 떨어져라.”
8월 무더위에 달라붙기는.
광해는 소유키를 슬쩍 밀어냈다.
“즈나. 에헤헤. 즈나. 즈나.”
밀어내도 방실방실 웃으며 붙어 좋아하는 소유키.
“어허. 가만있어. 앉아. 예서야 너는 어머니 오래 못 봤지? 가봐라. 가는 김에 이항복 불러오고.”
“예. 전하.”
예서를 보내고 대청에 앉았다.
무산에 있다가 한성에 오니 푹푹 찐다.
“에헤헤.”
소유키는 옆에 붙어서 방실방실 웃고 있다.
말도 잘 안 통하는 조선에 왔는데 광해마저 열흘 가까이 사라졌으니 불안하기도 했겠지.
광해는 고양이 쓰다듬듯 소유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주상 전하 부르셨습니까?”
주독에 찌든 이항복이 왔다.
“사신 상대하고 있었나?”
“허허. 그렇습죠.”
끊임없이 오는 명나라 사신.
상국이라며 꼬투리를 잡아 돈을 뜯고, 예와 절을 따지며 돈을 뜯는다.
그들을 접대하며 조선의 정책을 감추고 지난 날 사신이 변을 당한 걸 감추는 것이 이항복의 역할.
특유의 유머와 친화력으로 사신을 구워삼고 약간의 재물, 광해님의 은혜 등을 주며 친우로 만들어 돌려보낸다.
“그간 고생했네.”
광해는 마법진을 그려 이항복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쏴아아아.
쌓인 피로가 풀리고 주독이 사라진다.
“헛. 감사합니다. 전하.”
“고생했어. 이제 접대 안 해도 돼.”
“그렇습니까? 잘 풀렸습니까?”
“아니. 이귀와 몇몇 양반이 조선을 탈출했네. 막아도 의미가 없어.”
“아.”
이귀와 동문수학한 이항복이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됐어. 자네 탓하는 게 아니야.”
“전쟁을 대비해야겠군요. 비변사 회의를 열겠습니다.”
“그래. 일단은 내가 시선을 끌어볼 생각인데 실패할 수도 있으니 대비 정도는 해 놔.”
“시선을 끌다니요?”
“있어. 생각대로 되면 전쟁이 늦춰질 거고, 명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금방 수습할거야. 우선 준비 정도는 해둬.”
“예. 전하.”
이항복이 떠나가자 소유키가 다시 달려든다.
“즈나. 광핸님. 햇님. 에헤헤.”
“덥다니까. 좀 떨어져.”
“흥. 땀 한 방울 안 흘리면서. 너무하시옵소서.”
문법이 많이 부족하군.
잠시 후 예서가 돌아왔다.
“넌 쉬라고 했더니 왜 왔느냐.”
“모친께 인사올리고 왔습니다. 환궁했으니 주상을 모셔야 합니다.”
무산에 다녀왔더니 집안에 여우가 들어와 있다.
무려 주상께 달려가 안기는 여우.
예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도 광해의 곁에 앉아 헤실헤실 웃고 있다.
저래도 되나? 예와 법도는?
아. 주상께서 그런 거 싫어하시지. 유학도 깨트리셨지.
난 주상께서 싫어하는 바를 지키고 있었던 건가.
난 바보였구나.
예서는 광해의 반대편 옆에 조심히 앉았다.
“너까지 왜 이래. 덥게.”
“옛. 죄송합니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너도 좀 떨어져.”
“아이. 즈나아.”
오히려 앵기는 소유키.
말을 듣지 않는데도 광해는 딱히 짜증을 내지 않는다.
예서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예서는 다시 조심히 앉았다.
“이것들이 정말. 일어나!”
둘 다 안 일어난다.
소유키는 종잡을 수 없지만 예서까지 이러는 건 신선하다.
예서가 왜 이러는지는 알겠고.
광해는 둘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마력 때문에 딱히 덥지도 않고.
몸속의 마력은 대략 540만.
많다.
“가서 박내관에게 신석 가져오라 해라.”
“예. 전하.”
명을 받은 예서가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여전히 왕의 곁에 앉아있는 소유키를 슬쩍 째려보고 나갔다.
신석.
신의 돌.
마정석을 이렇게 부른다.
무산에 백여 개가 있고, 전국 흙가마솥에 삼백 개가 돌아간다.
비료와 염초를 만들다가 마력이 다 떨어진 신석은 궁으로 수거되어 광해가 충전한다.
잃어버리면 다시 찾을 수 없는 귀물이기에 수백명의 안보군 호위대가 수송하는 특급 귀중품이다.
박내관의 인사를 받고 궁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 들었다.
그 후 신석을 모조리 충전했다.
“마력이 많이 남네. 어디 쓸데없나?”
광해가 중얼거리자 소유키가 소리쳤다.
“아스크림. 아스킴 드시옵서 전하.”
“아이스크림이라. 그래. 소유키 네가 가서 전처럼 재료 준비해 기계와 함께 가져오라 전해라.”
“예. 즈나.”
소유키가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달려갔다.
예서는 그 모습에 질투를 느꼈다.
자신이 궁을 비운 사이 새로운 여자와 둘만의 비밀이 생긴듯한 모습.
예서가 소유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는것을 본 광해가 웃었다.
“질투나냐?”
“아니 아니옵. 네. 질투 나는 거 같습니다.”
아니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꾸는 예서.
광해에게 솔직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슬쩍 웃고 마는 광해.
여자들의 투기는 황제시절부터 많이 겪었다.
자신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기계가 가동되고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졌다.
예서는 놀라운 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고, 소유키는 마시듯 흡입하고 더 달라고 보챘다.
그러면서도 광해에게 바싹 붙어 아웅다웅하는 둘.
둘에게 미안하다.
“너희 나 너무 좋아하지 마라.”
“예 무슨 말씀이옵니까?”
예서의 물음에 광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리 훌륭한 인간이 아니란 거지.”
“광해의 말에 예서가 바로 답했다.
“아닙니다. 주상께선 더없이 훌륭하십니다. 훌륭하시니 신께서도 사랑하신 것이겠지요.”
“맞습니다. 즈나는 제 은인이며 생명이십니다.”
예서의 마음은 알았지만, 소유키도 이런 생각인 건 몰랐다.
일본 평민의 삶이 지옥이라더니 거기서 빼내어 준 것 만으로 이렇게 감사하는 건가.
“난 딱히 좋은 사람이... 아니 됐다. 내일 여행을 떠나자 준비해라.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마.”
마력이 남아돈다. 이 마력은 사라질 마력. 막 써버리자.
“예. 인원과 일정을 알려주실 수 있사옵니까?”
“너희만. 마음의 준비만 하면 된다.”
“예. 알겠습니다.”
다음날 광해는 하루 종일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분위기에 예서도 소유키도 조용히 곁에서 자리만 지켰다.
저녁수라를 들고 광해는 마법진을 그렸다.
여자 둘을 안고 마법진을 통과한 곳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웃. 차가.”
“전하. 비가 옵니다.”
여행을 간다는 생각에 들떴던 두 여인이 물벼락 맞은 것처럼 굳었다.
아니 실제로 물벼락을 맞았다.
“안다. 젖는 걸 피할 수 없으니 그냥 맞아라.”
하루 종일 침묵했던 광해가 처음 내뱉는 말이다.
광해는 그 말만 하고는 주위를 둘러봐 언덕 위로 올라갔다.
긴 언덕 너머는 바다처럼 넓은 강이 있었다.
흙탕물이 넘실대며 흐르는 강.
둑 위에 올라 주위를 둘러본 광해는 서있는 자리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청덕궁의 침전.
왔던 곳으로 복귀하는 마법진이다.
“웃. 누구냐?”
멀리서 창을 든 병사 둘이 중국어로 소리치며 다가왔다.
광해는 오른손을 뻗었다.
풋풋.
풍덩.
병사 둘을 철사로 찌르고 감싸 강으로 던졌다.
둘은 흙탕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광해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마법진을 그리며 말했다.
“문명이 쌓아올린 역사의 깊이는 농경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기원전 수천년부터 농경지의 구획을 정리하며 수학을 발달시킨 이집트. 이모작 삼모작으로 단위면적 당 최대 수학량을 거둔 베트남. 이양법을 배우자마자 삽시간에 전국에 적용시킨 일본. 모두 훌륭한 문명이다.
그에 반해 가축을 이용해 밭을 가는 심경법도 모르고, 인분을 화학발효시켜 비료를 만드는 시비법도 몰랐던 유럽은 극히 얇디얇은 역사를 갖고 있지. 그저 신분제를 통해 착취와 약탈, 학살만을 해온 놈들이 운 좋게 산업혁명을 얻어 백인 우월주의를 선언한 꼬라지는 정말.”
광해는 둘에게 말하고 있지만 둘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여행 간다고 해서 부풀었던 마음이 비를 쫄딱 맞으며 쪼그라들 뿐이다.
“조선 땅의 오래된 저수지도 문명이 축적한 자랑이지. 과거 선조의 피와 땀이 서린 저수지는 후대 영원히 백성들의 농경에 도움을 주며 우리 문명이 이토록 위대한 업적을 남겼음을 알려준다. 저수지는 피라미드나 궁궐보다 아름답고, 귀중한 유물이지.
우리가 그러했듯 중국도 그러했다. 주나라 때부터 치수에 신경을 써서 치수를 관장하는 관리가 실세중의 실세였지. 짱꼴라 어쩌고 하며 욕해도 중국이 쌓아올린 문명은 깊고 깊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다.
하지만 광해의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광해의 목소리는 점점 침울해지고 있다.
“강의 상류는 땅을 깎아 골짜기를 만든다. 상류에서 깎인 땅은 하류에 쌓인다. 큰비가 오면 많은 양의 땅이 깎여 내려오다가 강의 중하류에서 범람한다. 넘쳐흐른 강물이 흙을 배달해 넓은 평야를 만드는 것이다. 헌데 중국은 치수를 너무 잘했다. 폭우가 와도 황하가 넘치지 않으니 상류에서 깎은 땅은 강바닥에 쌓인다. 강바닥이 높아지니 강둑을 더욱 높여 다음 홍수를 막는다. 이를 계속 반복했더니 강둑은 한없이 높아졌고, 강바닥이 주변 땅보다 높아졌다.”
중국 문명이 치수를 포기했다면 천정천이 되는 일은 없었겠지.
그럼 이런 약점이 노출되지도 않았을 테고.
대신 매년 홍수로 많은 이가 죽었으려나.
“이 강은 황하다. 애초부터 흙을 가득 머금은 강이지. 황하는 강바닥이 주변 평야보다 높다. 황하의 높이야말로 중국의 깊고 깊은 문명이 쌓아올린 역사의 높이지. 그리고 나는 오늘 중국 역사의 깊이를 무너뜨리려 한다.”
알아듣던 못 알아듣던 상관없다.
변명처럼 말하고 싶었다.
비에 맞아 홀딱 젖은 두 여인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광해의 눈치를 봤다.
“너희에게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려 데려왔다. 나는 이 둑을 무너뜨릴 거고 그로인해 수십만 명이 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죄를 지은 죄인이 아니라 선량하게 농사짓고, 조선 백성과 똑같이 수탈당하던 이들이 물속에서 숨이 끊어질 것이다. 난 내 손으로 참사를 일으키려 한다.”
이제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나왔다.
광해가 엄청난 숫자의 죄 없는 이를 죽이겠다 선언한 것이다.
둘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귀환 마법진을 완성한 광해는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디그.”
황하 남쪽 둑의 흙이 집채만큼 떠올라 강에 던져진다.
“디그. 디그. 디그.”
큰 비로 찰랑찰랑 넘치던 황하 한쪽에 길이 생겼다.
물이 지키는 규칙은 단 하나.
현재보다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
조그마한 물길이 남쪽으로 꺾여 도랑을 이뤘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콰르르르릉.
도랑 주변의 땅을 계속 퍼냈다.
도랑은 깊어지고 넓어졌다. 도랑으로 흐르던 물은 점점 많아지고, 빨라졌다.
이제 디그로 퍼내는 양보다 더 많은 흙이 강물에 쓸려 사라진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디그.”
본류로 향하는 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주변 땅보다 낮은 남쪽 길을 향해 넘실대는 황하의 물이 폭포수처럼 흐른다.
“디그. 디그......”
콰아앙.
물의 속도가 따르는 규칙은 딱 하나.
높이차가 크면 빨리 흐른다.
강물이 남쪽 둑을 향해 노도와 같이 밀려간다.
바닥을 깎고, 둑의 옆면을 깎으며 점점 강하고 빠르게 흐른다.
“저...... 전하.”
깎이는 둑이 가까워진다.
강물은 남쪽 둑 양쪽을 갉아먹으며 유량을 늘렸다.
둑이 조금씩 사라지고, 강물이 가까워진다.
발 앞까지 강물이 다가왔고 노도와 같은 강물이 서있는 땅 마저 삼킬 것 같다.
“전하.”
창백하게 질린 소유키와 예서가 겁에 질려 광해에게 매달렸다.
터진 둑의 남쪽.
넓은 평원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곳곳에 민가가 있다.
그곳엔 농부가 있을 것이며 노모와 아내, 자식들이 있겠지.
그들은 모두......
“돌아가자.”
게이트를 열고 한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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