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거인 대담
순도 100% 픽션입니다
물론 광해는 역사적 의의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역사적 견해도 필요 없다.
조선을 침공한 도요토미.
조선 침공을 반대하고 화친에 힘쓴 도쿠가와.
그게 무슨 상관인데.
조선의 피해를 줄이고 일본 침공을 편하게 하려면 2인자 도요토미와 손 잡는 게 낫다.
이게 지금껏 이어온 대전략의 핵심이다.
“조선은 지금 이 순간부터 야마토 본토에 무제한 약탈을 할 것이다. 단 조선인 포로를 해방했으니 오사카번은 1년간 약탈하지 않겠다.”
조선왕의 관대한 선언에 히데요리를 쓴 웃음을 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당장 에도번 전군에 포위당해 몰살당할 참인데.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장 전화에 휩싸여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오사카성의 방어력은 천하제일이라던데 아닌가?”
“그래도 두 배 넘는 적에게 어찌 버티겠습니까? 포위만 이어가더라도 식량이 없어 고사할 것입니다.”
“오사카에 아국이 판매하는 화포가 남았다던데.”
“예. 200문 가량 남아있습니다. 적에게 약탈당할 위기기에 우선 오사카성으로 옮겨 안전히 보관중입니다.”
보관은 개뿔.
써먹으려고 가져간 거지.
“그래. 그거 사용하고, 화약도 보충해주마. 버텨라. 1년간 버티면 적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1년입니까?”
“그래. 식량은 있지?”
“1년 정도는 버틸 수 있습니다.”
“내가 한 달 이내에 에도성을 무너뜨려주마. 네가 버틸수록 에도번의 체면은 바닥을 기게 될 것이다. 이후 네가 하는 바에 따라 천하의 주인이 결정되겠지.”
천하의 주인.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히데요리가 단 꿈에 젖을 때 광해가 말했다.
“히로시마. 아카야마. 모두 에도번에 충성하는 강성 영주지. 일부러 친 도요토미 영지는 피했고 에도 쪽 영지를 약탈했다. 앞으로도 에도 쪽 영주를 골라 약탈해주지.”
감사.
압도적 감사.
이렇게 해 준다면 적군이 약해지고 아군이 강해진다.
강대한 에도번을 꺾을 힘이 생긴다.
“이러하면 무엇을 해줄 셈이냐?”
말 잘해야 한다.
히데요리는 뒤에 서 있는 오노 하루나가와 눈으로 대화를 나누고 대답했다.
“에도와 그에 따르는 영지를 드리겠습니다.”
일단 주고 뺏는다.
육상에서 조선이 지킬 수 있을 리 만무하지.
“필요 없어.”
“예?”
“안전비용을 내라. 약탈당하기 싫으면 해안가에 쌀을 쌓아 놔라. 윤성준.”
“예. 전하.”
“나머지 협상을 마무리 해.”
“예.”
일본방면 총 책임자 윤성준이 테이블에 나섰다.
친 도요토미 영주의 분류와 그들이 약탈당하지 않을 값, 접선장소, 비용 등 세심한 협상이 이어졌다.
조선인 포로와 쌀을 내놓으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도쿠가와 계열로 구분된 영지는 해당되지 않는다.
장시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광해는 오랜만에 육지에서 소유키와 하루를 보냈다.
“출항하라. 너구리 잡으러 가자.”
“전군 출항!”
조선군은 동쪽으로 항해를 시작했다.
남명 조식은 항상 경의검이라는 칼을 패용하고 다녔다.
칼 찬 선비라 불릴 만큼 현실의 잘못된 점을 과감히 비판했고, 과단한 정책을 제안했다.
조식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사건으로 단성소라는 상소를 들 수 있는데 조식은 왕에게 올리는 상소에 ‘왕은 선왕의 유일한 아들, 성렬대비(문정왕후)는 궁 안의 과부.’ 라는 표현을 썼다.
외아들이라서 왕이 되었고, 과부 대왕대비가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뜻이다.
윤원형의 전횡에 허수아비로 사는 걸 비판하고 대비를 비꼬는 말이다.
독재자에 굽히지 않고, 아전 개혁 등 과감한 정책을 제안하던 조식에게 많은 선비가 몰렸고, 곧 남명학파가 크게 일어났다.
칼 찬 선비 조식의 실천적인 성품은 임진왜란 때 빛을 봤는데, 지방에서 스스로 백성을 모아 일어선 의병장 대다수가 남명학파다.
그 중에서도 정인홍은 남명조식에게 경의검을 물려받은 수제자다.
스승의 학문과 뜻을 이어나갈 의무가 있는 적통제자.
열심히 했다.
쥐 같은 서인들을 물리쳤고, 너구리같은 류성룡도 숙청했다.
드디어 북인이 정권을 잡고 조선을 이끌었다.
그런데 세상이 변했다.
스르릉.
일흔네 살 정인홍이 경의검을 빼 들었다.
매일 손질하고 기름칠한 검.
검에 비치는 얼굴이 참으로 늙어 보인다.
검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던 정인홍은 검을 패용하고 집을 나섰다.
성균관.
유생을 교육하는 성리학의 미래이자 성지.
그곳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 금 을 안 내 면 전 재 산 을 몰 수 한 다.”
열 살 근처 아이 사백여명이 바닥에 앉아 있다.
아이들은 소리 내어 말하면서 모래에 한 글자씩 썼다.
유학의 성지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었다.
아이들 앞에 서 있는 선생 이원익이 다음 문장을 적었다.
“세 금 안 낸 자 를 신 고 하 면 몰 수 한 재 산 의 반 을 받 는 다.”
“세 금 안 낸 자 를 신 고 하 면 몰 수 한 재 산 의 반 을 받 는 다.”
선생이 읽으며 적으면 아이들이 따라 읽으며 모래 위에 글자를 적는다.
한글 수업 같은데 내용이 무시무시하다.
저건 또 무슨 정책인가.
성리학적 마을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엄청난 정책이 아이들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눈이 마주친 이원익이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아이들을 가르친다.
저 여유가 싫다.
윤원형의 전횡이나 사회의 폐단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그저 성리학의 이론에만 파고들던 이황.
자신의 서자를 족보에 올려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리던 파격.
사회 개혁에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던 너구리같은 성격.
낮퇴계 밤퇴계가 다르다고 소문날 만큼 색을 즐기던 이중적인 모습까지.
조식과 이황은 동갑에, 가까운 지역에, 둘 다 성리학의 거두였지만, 평생 단 한 번도 만나지 않고 서신으로만 싸우던 사이였다.
그 인연은 정인홍이 이어받아 ‘퇴계집’에서 죽은 이황이 스승 조식을 비판하자 북인과 남인의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졌고 류성룡이 실각했다.
그 결과 정인홍과 이원익의 사이도 매우 좋지 않다.
스승이 동갑인 이황을 싫어했듯 정인홍도 이원익이 싫다.
이런 점을 이원익도 알고 있기에 내심 놀란 이원익은 수업을 빨리 끝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숙제는 뭐라고?”
“집에 가서 엄마 아빠한테 설명해주기.”
열 살 넘은 아이들이건만 평민, 노비의 자식까지 모았기에 예의가 없었다.
세상이 어찌될라고.
이원익은 아이들의 예의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래. 밥 맛있게 먹고 내일 보자.”
“와아아. 선생님 고맙습니다아아아.”
아이들이 소리치며 일어나 파리 떼처럼 흩어졌다.
‘선생님?’
먼저 태어난 사람? 스승의 권위가......
잠시 아이들을 보고 있자 키 작은 거인이 다가왔다.
“오랜만에 뵙소이다. 영상 대감.”
“그렇소. 대사성 영감.”
“대사성은 무슨...... 선생이라 불러주시오.”
“어찌하여 선생이오. 스승이 아니라. 허허. 거참.”
“주상께서 말씀하셨지요. 우주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먼저 태어나 주워들은 거 떠드는 것 가지고 제자의 생각과 자유까지 빼앗는 거 너무하지 않냐고. 제자에게 진정한 진리를 가르쳐줘야만 스승이라 불리고 봉양 받은 자격이 있다더이다.”
“......”
정인홍이 생각에 잠기자 이원익이 미소를 지었다.
“내 다음 수업도 없는데 차나 한잔 하시겠소?”
“아앗.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곁에서 동자가 끼어들면서 정인홍의 사색이 깨졌다.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가 인사했다.
“평안하셨는지요. 대감 마님.”
“대감 마님.”
인사하는 아이는 세자 산남대군이고, 그 반걸음 뒤에서 능창군과 능양군이 같이 고개를 숙였다.
“허허.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수업을 들으시는군요.”
“예. 오전에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한성부에서 아전 일을 합니다.”
기특하다.
어린 나이에 수업하고 민생을 살피다니.
조선의 앞날이 밝... 광해군도 세자 때 이랬는데.
정인홍이 또 상념에 잠기자 산남대군은 다도를 준비하러 갔고, 이원익은 정인홍을 정자로 이끌었다.
갑자기 방문한 영의정이 말없이 있자 이원익이 입을 열었다.
“영상 대감은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오셨소.”
바쁘냐고?
한가하다.
이름만 영의정이지 하는 일이 없다.
대부분의 일은 한성판윤 허균이 하고 있고, 그 부하들이 일사분란하게 진행한다.
일보, 일티, 일미 라는 도량형이 새로 제정되고 발표하기 무섭게 전국에 포고된다.
내시부에선 고자가 아닌 일반인도 뽑는다는 시험공고가 발표되고, 궁녀의 혼약을 허하며 혼약 후에도 궁에서 일할 수 있음이 발표된다.
놀라운 파격이 계속 이어지고, 매주 종교활동을 통해서 전해 듣고 있다.
종교 활동에서 전해 들어야 하다니.
허균을 잡아다 따졌더니 국왕의 궤짝을 보여준다.
날짜별로 발표할 일과 의미들.
파격적인 정책들이지만, 분명 국가가 강해지도록 하는 정책이다.
그래서 씁쓸하다.
“오리 대감. 우린 잘못 산 것이오?”
“......”
정인홍의 안타까운 물음에 이원익은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다그닥. 다그닥.
왕족 아이들이 다기를 가져왔다.
자기병에 뜨거운 물을 붓고, 덖은 홍차 잎을 넣어 우린다.
우러난 적갈색 차를 한잔씩 따러 두 거신의 앞에 놓는다.
산남대군이 하는 짓을 보고 있을 때 이원익이 입을 열었다.
“주상께서 말씀하시길 시작부터 잘못 꿰었다고 하더이다. 정도전은 하나 더하기 하나의 답도 모르는 머저리라며. 허허허. 정도전은 조선의 새로운 체계를 마련하면서 백성이 내야 하는 세금을 정했는데, 그 정책대로 세금을 모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덕분에 조정 관료는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급료만 받아야 했고, 군사력을 줄여야 했고, 육방관속은 무료로 일해야 했습니다. 즉, 정도전의 유교식 청렴주의가 필연적으로 부정부패를 불러일으켰다 합니다.”
이원익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오자 산남대군 등 아이들도 곁에서 조용히 경청했다.
정인홍은 조선의 시작부터 잘못되었다는 말이 나오자 고개를 저었다.
“결국 유학이 잘못되었다는 뜻이군요.”
“그럼에도 유교가 가장 낫다 합니다.”
“응?”
“주상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현재 세계 여러나라를 지배하는 이념들, 카톨릭, 무슬림, 불교, 카스트 등 수많은 체계가 있는데 그 중에선 유교가 가장 낫다 평하시더군요.”
“세계의 이념들이라......”
그런 건 또 언제 공부하셨대.
나도 공부 할 수 있었을까 잠시 생각하던 정인홍이 고개를 흔들었다.
불경을 읽는 것 마저 탄핵의 대상이 되던 세상에서 다른 이념을 공부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급료가 적으니 부정부패가 뒤따랐으나 청렴과 애민을 열심히 주입받았기에 유학자의 부패는 도를 넘지 않았다고. 잘한 건 아니지만, 타국에서 백성을 쥐어짜는 것보단 덜 쥐어짠다고 칭찬하더이다.”
덜 쥐어짜서 칭찬받았다.
정인홍이 씁쓸하게 웃었다.
“주상께선 새로운 체계를 민본주의 정치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었죠. 유교와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상 왈 유교는 왕의 똥구멍 빠는데 전력을 받치는 군주주의 정치라고. 그러면서 숙제를 내 주시더이다.”
“숙제?”
“신의 정책을 잘 보고 모든 정책이 나온 후 관통하는 사상을 만들라고.”
“허허. 사상이 정책을 뒤따를 수 있소? 정책이 사상을 따라야지.”
“우린 다시 스승의 이기론으로 논쟁을 이어가겠군요. 쨌든 주상의 뜻은 그러하시오. 신의 정책이 어디까지 나올지 모르니 우선 지켜보라고. 그 후 신세계의 사상을 만들라더이다. 그때가 되면 유교를 다시 살릴 수 있소. 물론 많은 것이 수정된 새로운 유교겠지만.”
이원익의 말에 정인홍이 또 생각에 잠겼다.
정인홍 뿐만 아니라 곁에서 조용히 듣던, 산남대군, 능양군, 능창군의 눈이 반짝였다.
“교리서를 잘 읽어보고 정책과 비교하랍니다. 새 사상의 주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으니.”
엄청난 말을 들었다.
정인홍은 새 사상에 대해 생각하다가 눈앞의 이원익을 바라봤다.
만백성 앞에서 유교의 실패를 선언하고 은퇴한 그는 유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키 작은 거인이 평소보다 커 보였다.
- 작가의말
이황과 조식 중 누가 좋냐고 묻거든 전 조식이 좀 더 좋습니다
현대인의 시선에 성리학은 좀벌레지만, 저 시대의 다양한 사상 중에선 꼴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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