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오성과 한음2
순도 100% 픽션입니다
광해가 왕위에 오르고 얼마 후 세 대신과 대화하던 날.
이원익에겐 영의정 자리를 맡겼다.
그리고 이항복과 이덕형은 명나라 사신사로 보냈다.
책봉을 받아내기 위한 사신.
영의정까지 지낸 두 대신이 동시에 사신으로 가는 것은 많이 넘친다.
“가서 놀다 와. 책봉은 핑계고 시간만 끌어. 뇌물을 주지 않으면 명에서 책봉을 질질 끌 테니까 뇌물 주지 말고 기다려.”
“저희 둘을 보내서 놀다 오라는 뜻입니까? 저희를 내치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사옵니까?”
“아니. 앞으로 바빠질 테니까 마지막 휴식이다 생각하고 쉬라는 뜻이야. 물론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하겠지? 조선의 소식이 명 조정에 알려지지 않게 막아줘. 자네들이 북경에 있으면 조선에서 출발한 소식들이 자네들을 거치지 않겠는가.”
남인과 서인의 영수가 북경에 있으니 조선을 떠난 이들은 일단 이들을 먼저 찾겠지.
“거기서 대국의 허와 실을 분석해봐. 그들이 얼마나 썩었는지 빈틈은 어딘지. 아 그리고 상국의 소수민족을 조사해줘. 없어졌다고 알려진 거란 묘족 장족 등을 비롯해 산서, 감숙, 사천 등 구주의 주요 호족도 조사하고. 아. 감자고구마옥수수 종자도 구하고. 그리고......”
쉬다오라던 광해는 수백 가지 숙제를 안겨주었다.
500원 던져주며 빵하고 우유하고 차하고 집 사오고 남은 돈 거슬러 오라는 식.
둘이 계산해보니 이건 조선에 있을 때보다 할일이 더 많았다.
그래도 지시를 받자 오히려 기뻤다.
숙제의 내용을 보건데 자신들을 내치는 게 아니라 중히 쓰려는 게 아닌가.
명에 와서 인삼을 팔아 마련한 재물로 숙제를 하나씩 했다.
잊혀진 소수민족에 관한 서적을 모았고, 감자 등의 종자를 구했다.
그렇게 하나씩 처리하며 조선에서 온 소식이 명나라 조정에 알려지는 걸 막았다.
재물이 떨어져 진짜 놀아야 할 때쯤 조선에서 선물이 왔다.
광해님의 은혜. 페니실린이다.
허준이 정리해준 용법이 함께 왔다.
<......이상과 같은 병에 효과가 있다.
제조비용은 한 알에 쌀 한석이니 그 이상의 가격에 알아서 팔거라.
오늘이 내 인생 마지막 휴가다 생각하고 열심히 놀도록.>
설명만 들으면 만병통치약이다.
믿기 힘들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아프다는 사람을 찾아가서 알약 하나씩 줘 봤다.
효과는 굉장했다.
고관들이 앞 다투어 약을 찾더니 결국엔 한 알 당 쌀 열석에 팔리고 있다.
알약이 뇌물처럼 되고 있다.
어떻게든 약을 사기 위해 서로 앞 다투어 편의를 봐주고 있다.
덕분에 명나라에서 꺼림칙해 하는 소수민족에 대한 서적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고구마와 감자, 사탕수수 등의 종자도 잔뜩 구했다.
거기에 조선에 퍼지지 않은 토마토며, 호박, 고추 등의 씨앗도 얻었다.
이 약 하나면 불가능한 게 없다.
알약을 팔고 온 이항복이 저녁을 뭐 먹을지 말하다가 이덕형한테 혼나고 있을 때 김류가 달려왔다.
“스승님. 스승님.”
“왜? 엉덩이에 불이라도 났느냐?”
“아니. 왕이 왔다.”
김류를 밀치며 광해가 등장했다.
“헛. 주상전하를 뵙습니다.”
두 대신이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그래. 잘 지내는 것 같네. 우선 그 유명한 북경요리 좀 먹어보자. 제일 맛있는 걸로 한상 깔라 해라.”
“탁월한 생각이십니다.”
이항복은 기뻐하며 김류에게 지시했다.
이덕형은 이항복이 두 명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광해는 통오리를 뜯으며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헛. 어쩌자고 죽이셨습니까?”
“나 아니래두. 신이 그런 거야. 신이.”
광해는 뻔뻔하게 발뺌했다.
“그럼 조선 양반의 사신은?”
“천진에서 기다리다가 죽였다. 하급 관료 몇 놈 밖에 없었어. 여기 서신.”
광해는 천자께 바치는 서신을 두 대신에게 건네주었다.
둘이 읽는 동안 그 표정을 자세히 살폈다.
상국에 죄를 짓느니 성상을 끌어내리겠다.
조선의 신하 이전에 대명제국의 신하다.
현대인의 시각에선 매국노 그 자체인 성리학.
할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다.
그나마 유명한 둘을 쓰고 싶은데 이들 또한 성리학자다.
이게 문제다.
광해가 가만히 응시하자 서신을 다 읽은 이항복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사죄드립니다. 전하.”
“자네가 왜?”
“필체로 보아하니 밀서를 보낸 이는 김장생입니다. 같은 스승 아래서 수학한 동문의 죄를 사죄드립니다.”
“왜? 구해주려고? 그 놈은 독버섯이야. 서신은 읽어봤겠지? 매국노야. 명나라를 위해 조선을 팔아먹는 매국노.”
이항복이 긴 한숨을 내뱉었다.
“조선에서 수학하고 성장했습니다. 주자를 읽으며 한획 한획 따라했습죠. 상국의 구원병이 왜군을 물리치는 것을 보았고 감격했습니다. 그랬기에 소신 또한 김장생과 똑같은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난데없이 고해성사?
광해는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주상의 명으로 상국에 왔고 행태를 보았습니다. 주자의 성리학이 비난받고 양명학이 융성하는 걸 봤습니다.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되더군요. 조선에선 주자의 중용장구가 틀렸다고 말 한마디 했던 사림의 학사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 당하는데 명에선 주자 자체가 송나라를 멸망시킨 원흉으로 뽑히덥니다. 하면 성리학자들은 상국을 따라 양명학을 배워야 할지, 아니면 주자를 적대하는 상국을 사문난적으로 몰아 매장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는데 둘 다 아닙니다. 상국도 모시고 주자도 모시는 그런 이상한 행태를 보입니다.”
어쩌라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정치. 백성을 쥐어짜고 은결을 만들어 착복하고 역을 조작해 사원을 짓고. 조선의 양반은 부패했습니다. 고쳐야지요. 헌데 상국에 와보니 정도가 달랐습니다. 만력제는 삼십 년째 아무것도 안하고 그 신하들은 재산을 챙기느라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명의 백성이 불쌍할 지경입니다. 너무 심하게 쥐어짭니다. 바른말을 하는 이는 죽이고 황제도 관심이 없으니 부정부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에선 상국을 우러르고 천자를 우러렀는데 와서 보니 천자는 보이지 않고 관료들은 전부 도둑놈입니다. 유영경보다 심한 간신만 가득합니다.”
심경의 변화가 온 건가.
이항복이 이덕형과 시선을 한번 마주친 후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조선의 신하가 되겠습니다. 독립 하죠. 와서 보니까 명나라 별거 아닙니다. 툭 치면 와르를 무너질 것입니다.”
광해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둘 다 같은 생각인가?”
이덕형이 대답했다.
“예. 전하. 조선의 충신으로 조선의 백성만을 생각하며 행동하겠습니다.”
광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을 제대로 써보려고 명나라에 파견시켜 푹 삭혔지. 자네들이 유명한 성리학자라서 쓰려하는 걸까? 아니야. 내게 성리학은 아무 의미 없어. 내게 성리학이란, 자신과 자손의 무능을 감추고 대대손손 백성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족쇄로밖에 안 보여. 즉, 자네들의 성리학적 학식은 내게 아무 의미 없네.
다만 40대 젊은 나이에 영의정이 되어 훌륭히 국정을 이끈 능력. 그리고 백성을 구하기 위해 노도처럼 밀려오는 왜군 앞에 홀로 서서 꾸짖는 담대함을 원했지. 몇 년 삭혀야 할 줄 알았는데 잘 삭았네. 잘 삭았어.”
광해는 기분이 좋아졌다.
유능한 신하를 얻는 건 힘들다.
특히 이 둘은 성리학에 찌들어서 도저히 못 써먹을 줄 알았는데 북경에 처박아 놨더니 애국심이 살아났다.
광해는 둘을 보며 마지막 시험을 했다.
“명의 공격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어. 두세 번은 큰 전투를 치러야 할 거야. 문제는 지방의 양반들이지. 그들이 불만을 갖고 있는 건 알지?”
이덕형이 대답했다.
“예. 명에서 병사를 보내면 각 지방에서 호응할 것입니다. 상국의 뜻대로 조정을 바로잡자는 명분을 내세우겠지만, 본 뜻은 가문이 수탈하던 재산을 지키고 자자손손 수탈을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이덕형의 말은 날카로웠다.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듯 하다.
“그래. 안팎에서 그리하면 나라가 위험해. 그래서 난 내부 정리를 먼저 하려 하네.”
광해는 몇 가지 방안을 설명했다.
이항복과 이덕형은 광해의 계획을 듣고 놀라고 의아해 했다가 결국엔 수긍했다.
“그 방법이 가장 피해가 적습니다.”
“이 말을 해 주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야. 이 일로 자네들의 집안과 외가, 처가, 스승과 제자의 가문들이 모두 엮일 수 있다는 걸 알라는 거야. 그래도 괜찮겠나?”
마지막 시험이다.
둘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
둘의 시선이 몇번 마주쳤다.
둘이 역사적 콤비라더니 눈빛으로 대화하는 스킬을 획득했나.
대화가 끝났는지 이덕형이 대답했다.
“소신이 관료로 일하면서 수백명을 참했습니다.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을 죽인 것이지요. 그 일에 한결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죽을죄를 지은 자를 죽였다?”
“예. 양반들이 난을 일으키고 그 난을 일으킨 이유가 자신들의 사리사욕과 부정부패를 지키기 위함이라면 제가 참한 죄인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죄인인 것이지요. 죽을죄를 지은 자는 죽어야 합니다.”
돌진해오는 왜군에 홀로 들어가 조선의 입장을 전하고 왜장을 꾸짖은 기개가 나타난다.
장난기 넘치는 이항복.
매사에 진지한 이덕형.
정반대의 성격이기에 오히려 잘 맞아서 역사서에 남는 콤비가 된 건가.
“그래. 자네들의 동의를 얻었으니 시작하자.”
“예. 모든 오욕은 저희가 뒤집어쓰겠습니다.”
“알겠네. 자네들은 나와 함께 가자. 제자들에게는 천진에서 배타고 오라고 해. 배 숨겨둔 위치는 알려주지.”
김장생이 보낸 밀정들이 타고 온 배를 숨겨뒀다.
“전하. 아직 옥새를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명 조정에 책봉 주청서와 함께 맡겨놨습니다.”
“버려.”
“예?”
“나의 권위는 명나라의 책봉에서 나오나? 아니면 옥새에서 나오나? 아니다. 조선 국왕의 권위는 조선 백성에게서 나온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오나 제자들은 좀 더 조사를 시키겠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주상께서 지시한 바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남경에 보내 마지막 조사를 하고 오라 하겠습니다.”
“얼마나 위험할지 알고 하는 소리야?”
“사신이 억류된 걸 알게 되면 제자들도 억류 되겠지요. 허나 군사부일체 아닙니까. 군사부일체. 왕과 아비와 스승이 같다니. 허허. 스승이 시킨 일이니 해야지요.”
이항복은 성리학의 족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 같다.
광해는 이덕형을 보며 물었다.
“자네도 같은 생각인가?”
“조선의 소식을 최대한 감추면 세달. 혹은 네달. 저희가 북경에서 사라져도 남경으로 간 제자들에겐 두 달의 시간이 있습니다. 남경에서 최대한 자료를 수집해 온다면 차고 넘칠 시간입니다.”
확실히 신하는 똑똑한 게 좋다. 알아서 효율적인 방법을 제시해준다.
광해는 품에 손을 넣어 페니실린 한 묶음을 꺼냈다.
“광해님의 은혜다. 아놔. 이놈의 이름 바꾸든가 해야지. 어쨌든 제자들에게 줘서 여비로 쓰라 해라.”
“헛. 수천알 되겠습니다. 이 정도면 시간이 단축될 것입니다.”
부정부패가 심할수록 뇌물의 효과가 배가 되지.
광해가 마법진을 그리는 사이 이항복과 이덕형은 제자들에게 뒷일을 지시했다.
그 후 빛의 문을 만들어 놀라는 이항복과 이덕형을 데리고 조선으로 이동했다.
- 작가의말
저는 오성과 한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성리학자 중에서 꽤나 좋아하는 몇 안되는 인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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