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포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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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복속하라. 꼭두각시가 되어라. 일가의 재산을 바쳐라.
그런 제안을 상상했던 모용황은 죽음을 각오하고 자리에 섰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 올 경우 이 장원의 전원 옥쇄하기로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여인과 아이들은 지금쯤 정신없이 피난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왕이 되라니?
“선비의 왕?”
“전국시대. 하북을 지배한 선비족. 위진 남북조 시대에도 중원 북부를 지배했으며 수나라와 당나라 또한 선비족 출신이오. 오호십육국 시대에도 중원 북부는 선비족의 국가가 지배했고.
현재 중원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어디오? 개봉? 남경? 아니지. 연경이오. 선비족이 천오백 년 간 다스린 연경이 중원의 가장 중요한 도시이며 가장 발전한 도시요. 당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그... 그걸 어떻게... 아니 그보다 왜 조선이 그걸 돕겠단 말이오.”
“지금의 명나라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오.”
이덕형은 커다란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지도엔 중국 전역이 그려져 있는데 구획별로 굵은 선이 그려지고 다양한 나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장족. 묘족. 위구르. 남월. 회족. 선비.
“신께서 조선의 국왕 광해님께 지시하셨소. 한족의 패악질이 너무 심하다고. 지금 한족은 이 수많은 민족의 땅을 삼키고는 그들의 삶을 희생시키고 있소. 소수민족이라 하여 고문하고 죽이고 강간하고 억지로 일을 시켜 빼앗고 있소.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던 신이 주상전하께 지시를 내리셨소. 민족자결주의.”
“민족자결주의?”
광해는 저 단어를 어디서 대충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별 상관없었다.
모현성이 설계한 거겠지.
“각 민족은 자기 민족의 삶을 자기 민족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이 뜻에 따라 조사해보니 하북과 산서성은 선비족의 땅이오. 모용씨만 해도 중원 북부에 십만 명 넘게 있고, 따르는 선비족을 합치면 백만 명이 넘소. 중원 북부의 주인은 선비족 모용씨요. 조선은 신의 뜻에 따라 민족자결주의를 도울 것이니 하북과 산서성의 주인이 되도록 하시오. 선비족이 중원 전역을 다스린 역사도 있지만, 그건 포기하시오. 타 민족에게도 자결권이 있으니.”
“하지만 명나라는 강하오. 우리 힘으로 어찌 독립할 수 있겠소.”
모용황이 투정을 부렸다.
자신이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 아닌 걸 알자 곧장 이득을 취하려 한다.
심계가 깊고 만만치 않은 상대다.
광해가 오지 않았다면 이덕형은 협상과정에서 크게 고생 할 뻔했다.
모용황의 말에 이덕형은 준비해온 서책 열권을 넘겼다.
“모용씨와 선비족의 위대한 역사를 조사했소. 귀하들도 갖고 있겠지만, 간단하고 쉽게 가르칠 역사서를 만들었소. 선비족의 역사서를 필사해 교육하시오. 한자는 교육이 오래 걸리니 한글로 적었지만, 독음하는데 달포면 충분하오. 선비족 젊은이와 아이들에게 선비족의 위대한 역사와 자긍심을 교육하시오. 명과 충돌하지 말고 조용히 힘을 기르고 교육하시오.
민족자결주의. 그를 위함이오. 선비족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위대한 역사를 깨우친다면 백만 병력은 쉽게 모일 게요. 선비족뿐만 아니오. 지도상의 모든 민족이 각자의 역사를 공부할 것이오. 그 후 일제히 일어서면 소수의 한족은 당해낼 수 없소. 젊은이들이 깨우칠 때까지 조선은 명과 싸워 그들을 약화시키고 눈과 귀를 흐리게 만들겠소. 혹여나 민족학살이 일어난다면 신의 뜻에 따라 광해님이 막아주실 게요.”
그렇다면 안심이다.
조선이 변심하지만 않는다면 승산이 있다.
역사를 교육해 스스로 일어서게 만들라니.
생각도 못해봤는데 효과가 있을 듯하다.
모용황.
연나라를 세운 시조의 이름 아닌가.
두 번째 시조가 될 수도 있겠다.
상념에 잠겨있는데 이덕형이 가죽주머니를 상 위에 올린다.
“책을 필사하고 몰래 교육하려면 재물이 필요할 것이오. 광해님의 은혜 만 알이오. 그 역사책을 교육한다면 매년 만 알의 광해님의 은혜를 선물하겠소.”
‘아놔 저 이름 진짜.’
약을 먹을 때마다 은혜를 느끼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이름은 진짜 짜증이다.
광해의 생각과 상관없이 모용황이 반색했다.
“오오. 이것이 광해님의 은혜. 소문은 들었소. 쌀 열석에 팔리고, 모든 병을 치료하는 신의 약이라고.”
“그렇소. 신께서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광해님께 내린 보물이오. 그러니 충실히 따라주시오. 올바른 민족의 역사를 교육한다면 매년 만 알을 받게 될 것이오.”
어떻게 봐도 손해 볼 게 없다.
너무 좋은 조건이다.
모용황은 광해가 능력부터 마음 씀씀이까지 진정 신의 사자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가의 가주로써 민족의 앞날을 섣불리 정할 수 없었다.
모용황은 옆에서 술과 안주를 음미하고 있는 광해를 봤다.
“그럼 훗날엔 복속하고 밑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아무리 늦어도 십년이면 연나라가 생기겠지. 신의 뜻을 이행한다면 조선이 적대할 일은 없다. 욕심을 부려 타 민족을 공격하지 않으면 우린 평등한 동맹이 될 것이다.”
“동맹...입니까?”
“그렇다. 자유로이 오가고 자유로이 교역하는 동맹. 이것이 신의 뜻이다.”
그렇다면 안심이다.
어차피 10년 후 사람이 어찌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선비족의 역사를 ‘한글’로 가르치는 걸로 재물을 받는다.
재산이 늘고, 영향력도 늘어난다.
조선이 이간계를 써서 명과 싸우게 될 수도 있지만, 타민족도 동시에 발호한다면 이간계를 오히려 이용할 수도 있다.
모용황은 다양한 수를 계산해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했다.
“고맙습니다. 조선의 국왕이며 선비족의 은인이시여. 선비족을 대표해 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겠나이다.”
3년 6월 4일. 조선은 모용세가와 비밀 동맹을 맺었다.
살아남은 조선인은 60명이다.
이들을 모두 조선으로 이동시키기엔 마력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이덕형만 데려간다면 나머지는 다 죽을 것이다.
사실 죽어도 상관은 없지만 이건 충성심의 문제다.
이덕형을 써먹기 힘들어진다.
광해는 무산과 한성에 통신을 넣어 신석 소모를 줄이도록 시키고 하남성 정주를 향해 떠났다.
태원에서부터 거지가 따라 붙는다.
그들 또한 태원 산길에서 거지 구백명이 사라진 걸 눈치 챘을 테니 난리가 났을 거다.
정주로 가는 길에 거지를 볼 때마다 소망을 확인해 개방이라면 모조리 죽였다.
이덕형은 본래 약속된 호족들을 만나며 남진했다.
한 달 여 기간 동안 십여 명의 호족을 만나 역사서와 광해님의 은혜를 바탕으로 동맹을 맺었다.
그 와중에 오백여명의 거지에게 포위되었지만, 이번에도 광해에게 몰살되었다.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네.”
개방의 거지들은 이민족을 오랑캐라 부르며 한족을 위해 살지만, 그들 나름대로 의협을 행하는 선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그들이 죽으면서 엄청난 마력을 빼앗아갔다.
“짜증나는군. 개방이라고 함부로 죽이지도 못하고.”
짜증을 내는 사이 정주에 도착했다.
약속한 날짜에 정주 외각의 장원에 방문했다.
“주상전하. 이번에 만날 상대는 모용가처럼 힘이 강하옵니다. 송구하오나 함께하여 주시길 간청하옵니다.”
이덕형이 고개를 조아리며 부탁했다.
“알겠다. 가서 잔치음식이나 먹지 뭐.”
광해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에 대한 자료를 읽었다.
백련교. 명나라에게 탄압 당함.
‘뭐야? 이거 마교잖아.’
여긴 대체역사인가. 평행우주무협세계인가.
백련교 교주를 만나 마법쇼를 보여줘 턱이 빠지게 만들고,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한 후 본론을 말했다.
“원나라는 너희가 무너뜨렸다.”
모용세가와는 접근법이 다르다.
“백련교도가 안휘를 점령해 대운하를 끊었고, 덕분에 원나라의 숨통이 끊겼다. 남방의 쌀을 수송할 수 없기에 북부는 굶을 수밖에 없었고, 원나라는 너희와 사력을 다해 싸워야했지. 백련교는 안휘에서 몽골의 주력을 깨트렸고, 황하까지 점령해 북경의 원나라세력을 고사시켰다.”
이들은 한족이기에 민족자결주의를 쓸 수 없다.
“안휘와 하남에서 원나라세력과 맞서 싸우며 한족의 제국을 건설하고 있을 때 도적떼는 무얼 했는가. 장사성, 진우량, 주원장 모두 백련교도의 뒤에 숨어 강남의 양민을 약탈할 뿐이었다. 대의에 따라 원나라와 싸우던 백련교 교주 한산동은 장사성의 도적떼에 살해당했고, 어린 후계자 한림아는 부하였던 주원장에게 암살당했다. 그 결과 유리걸식하던 거지 주원장의 나라가 탄생했다.”
광해의 마법에 마음이 격동했던 백련교교주는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원과 싸우지도 않던 주원장이 나라를 세웠으니 어찌 제대로 돌아갈까. 천하가 양민의 피와 눈물로 가득 찼고, 그 한이 하늘까지 닿았다. 신의 분노로 정주 동쪽 제방이 무너졌고, 명나라는 크게 금이 갔다. 또한 신께서 말씀하시니 명나라 한족은 진정한 주인을 찾으라 하신다. 그게 너다.”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
백련교 교주 한세창은 스물다섯 살 젊은 청년이었다.
모용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구워삶기 편했다.
“원나라를 무너뜨린 백련교를 배신하고 그 세력을 삼켰으니 등 뒤가 서늘하겠지. 주원장은 백련교를 마교라 부르며 학살했고, 그 잔인한 역사는 이백년이 넘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역사를 바로 잡으라. 백련교의 공을 역사에게 인정받고 너희 교세를 펼쳐라. 이것이 신의 뜻이다.”
“...... 안 됩니다. 그리하면 선량한 교도들의 희생이 클 것입니다.”
“원 말기 백성의 고난. 그때와 지금 어느 때 백성이 더 힘들까? 정당한 주인으로써 백성의 고통을 덜어줘라.”
“...... 그래도 안 됩니다. 지금 명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원 말기와 비교하면 백련교의 교세는 크게 줄어들었다.
지금 맞부딪치라는 것은 자살하란 소리다.
“조만간 조선과 명의 전쟁이 있을 것이다. 신의 분노로 인해 홍수가 낫고 뒤이어 하북 쪽에 지독한 가뭄이 올 것이다. 이 모든 혼란 속에 교세를 세우고 확장하라. 네가 원하는 순간 명의 황제가 죽을 것이다. 그 순간 봉기하라. 신이 함께 할 지어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한세창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애매해졌다.
“그... 신이라는 분께서는 무생노모와 어떤 관계입니까?”
미리 백련교에 관한 조사자료를 읽어서 다행이다.
무생노모는 백련교에서 믿는 신의 이름이다.
교주로써 자신의 종교에 대한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겠지.
“신은 전지전능하며 유일무이하다. 그런 신이 둘 이상 존재할 수 있겠는가? 다만 신도가 신의 거대함을 다 담지 못하기에 그저 기적의 일각을 보고 형태를 달리 믿을 뿐이다.”
위안을 얻은 것인가.
한세창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날을 준비하겠습니다.”
“맡기겠다. 재물을 지원하도록 하겠다.”
광해가 실제 기적을 보여줬으니 신이 실존한다는 증거를 찾았을까.
아니면 신도는 신을 믿되 지도자는 신을 안 믿는다는 말처럼 이용해먹을 생각을 꾸미고 있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조선도 백련교를 이용해먹을 생각이니.
백련교는 원나라 시대 한족 중심주의 애국심을 기반으로 한 비밀결사로 성장했고, 청나라 시대에도 수많은 반란을 일으킨 한족중심 종교다.
광해에게 있어 백련교나 개방이나 똑같다.
한 배에 탈 수 없다.
정주에서 개봉으로 흐르던 황하줄기는 대홍수의 여파로 남쪽으로 꺾였다.
정주에서 배를 준비한 광해는 바뀐 황하줄기를 통해 조선으로 향했다.
“저... 주상 전하.”
배에 오르자 이덕형이 조심스레 말했다.
“어. 말해.”
“진로를 약간만 돌아가면 꽤 까다로운 단체 하나를 더 포섭할 수 있사옵니다.”
“강해?”
“예. 호북 무한 인근에 무당파라는 무장군벌이 있습니다. 이들은 원나라 때 황제의 총애를 받아 융성했는데 그 덕에 명나라의 견제를 받아 세가 많이 줄었습니다. 불만이 많은 이들이니 쉽게 포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헐.
그 무당파인가.
어디 한번 무당파를 보러 무한에......
“안 돼. 절대 건드리지 마. 무한 근처에도 가지 말고 그놈들도 거기서 나올 생각 말라고 해.”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다.
무당파는 포섭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배는 그대로 동진했다.
개방에선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 했지만, 강에서 광해의 마법을 이길 방법은 없었다.
광해는 정주를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조선땅으로 복귀했다.
태원에서 정주로, 정주에서 회하를 통해 조선으로.
두 달여 긴 여행을 했지만, 재미없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유치원생 데리고 소풍가면 즐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시커먼 사내놈들 보호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니다보니 여행의 즐거움은 없었다.
너무 고생했다.
“즈나~~”
소유키가 달려와 안긴다.
“무탈하셔서 다행입니다.”
예서가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는 곁에 바싹 붙어 얼굴을 올려다본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얼마 전 승은 상궁이 된...... 얘 이름이 뭐더라.
조선여자 중에 가장 예쁘고 가장 젊은 여자를 보며 이름을 떠올리려 하는데 무릎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이제 제법 큰 표범이 다가와 다리에 허리를 비빈다.
“구름이 많이 컸네.”
구름이는 말을 알아듣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볼을 비볐다.
역시 집이 가장 좋다.
- 작가의말
백련교는 실존단체입니다
토속신앙 바탕의 한족제일주의 단체고 청나라를 무너뜨린 의화단 운동의 주축이 됩니다
오히려 김용의 무협지에서 이슬람교 영향을 받은 마교로 묘사해 역사 사실이 왜곡된 단체입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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