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자가 되다
순도 100% 픽션입니다
“세자 저하. 기침하셨습니까.”
묵직한 음성이 의식을 깨웠다.
눈을 뜬 사내는 주위를 둘러봤다.
나무창살에 창호지가 발라진 창문. 누런 벽지. 머리 쪽 벽엔 십장생이 그려진 병풍. 한켠엔 앉은뱅이책상.
두꺼운 솜이불이 바닥에 깔려 있고, 사내는 솜이불 위에 누워 화려한 봉황이 수놓아진 솜이불을 덮고 있었다.
사내가 머리를 긁적거릴 때 아까보다 큰 소리가 들려왔다.
“세자 저하. 문안 가셔야 하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구냐?”
“...... 박내관이옵니다.”
내관.
내시란 뜻인가.
남자는 말투를 바꿨다.
“들어오라.”
방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전통 한복을 입은 남자와 여자들이 우루루 들어왔다.
남자의 지휘 하에 여자 둘이 김이 살짝 올라오는 놋대야를 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 뒤로 다양한 의복을 들고 있는 여자들이 대기했다.
‘세자라...... 여긴 왕궁인가.’
남자는 눈치껏 따뜻한 물에 고양이 세수를 했다.
남자가 일어나자 여자 둘이 면포로 얼굴을 닦아주고 의복을 입혀주었다.
“문안드리러 가셔야 합니다.”
박내관이란 자가 조용히 재촉했는데 표정이 매우 난처해 보였다.
“앞장서라.”
지시를 받은 박내관이 안내하는 대로 따르자 뒤에 내시와 궁녀가 따랐다.
방 밖으로 나오자 살을 에이는 추위가 몸을 감쌌다.
한옥 건물이 줄지어 있는데 생각보다 작고 초라했다.
잠시 걷자 화려한 복장의 여인이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뒤에 궁녀들이 줄지어 서 있는데 남자를 보자 깊게 고개를 숙였다.
“기침하셨습니까?”
추위에 발갛게 볼이 달아오른 여인이 인사했다.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박내관을 봤다.
“이쪽입니다.”
박내관의 안내를 받아 작은 건물 몇 개를 지나치자 그나마 화려한 기와건물이 보였다.
건물 앞까지 가자 궁녀들이 커다란 상을 들고 와 앞에 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 탕, 죽, 10여 가지 반찬.
‘먹으라는 건가? 이 추위에? 야외에서? 서서?’
그렇다고 하기엔 수저가 반대쪽에 있다.
먹어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중년의 여성이 나와 밥과 반찬을 한 가닥씩 들어 올려 먹었다.
‘뭐하는 짓거리지?’
고문인가.
왜 난 여기에.
여성이 물러서고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자 박내관이 초조한 듯 물었다.
“시선 하셨습니까?”
박내관이 말했다.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했다.”
시선이 뭔지 모르겠다.
박내관이 고개를 깊이 숙이더니 건물 앞의 사내에게 눈짓을 했다.
건물 앞 늙은 사내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상 전하. 세자의 문안이옵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문이 살짝 열리고 나이 좀 있는 궁녀가 살짝 나왔다.
“문안은 됐다 하십니다. 수라를 올리라 하십니다.”
내시의 지시에 상을 들고 있던 궁녀들이 부랴부랴 움직였다.
스물에 가까운 궁녀들이 들어가니 건물 앞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사내는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었다.
강추위 속에 한참 서 있자 곁에 있던 여자가 조용히 말했다.
“상심이 크시겠지만, 이만 돌아가시지요.”
상심이 커야 하는 거였나?
사내는 잠시 고민하다가 박내관을 돌아봤다.
“방으로 안내하라.”
사내의 말에 여자가 말했다.
“저하. 세손의 문안을 받고 수라도 받아야지요.”
느낌상 이 여자는 이 몸의 아내다.
말조심해야 한다.
“몸이 좋지 않다. 방으로 돌아가겠다. 안내하라.”
침묵 속에 박내관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돌아온 사내는 홀로 남게 되자 몸을 얽매는 장포와 머리 감싸개를 내팽개쳤다.
‘시벌. 여긴 어디야! 분명 현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사내는 방문 앞에 서 있는 내시가 신경 쓰여서 소리도 못 지르고 속으로 욕을 했다.
고진우는 평범한 현대인이었다.
보통사람 하는 대로 살다가 35세에 퇴근길에 마주친 검은 구덩이에 빠져 이계로 갔다.
이계에서 루이 페르탄이라는 용병의 몸속으로 들어갔다.
루이 페르탄의 기억은 전혀 없었다. 몸만 차지했다.
이계에서 개고생하며 말을 배우고 용병으로 여기저기 따라 다니다가 몬스터와 맞닥들였고, 운 좋게 몬스터를 죽였다.
그 순간 몬스터의 기술, 언어와 전투술을 배웠다.
훗날 만나게 된 대현자의 추측에 따르면 검은 구덩이는 이계를 침략했던 마왕이 소멸되면서 생긴 차원통로라 했다.
차원통로를 통과하며 죽은 마왕의 잔재, 기술 강탈의 권능을 얻었을 거라 추측했다.
기술 강탈 - 죽인 자의 기술을 뺏는다
마왕이 갖고 있던 권능이다.
그때부터 쭉쭉 성장했다.
용병이다 보니 인간과의 전쟁에도 참여해야 했기에 온갖 기술을 습득했다.
검술, 창술, 마법, 요리 등 세상의 모든 것을 강탈했다.
강해지니 욕심이 생겼고, 따르는 이를 챙겨주다 보니 신분이 높아졌다.
용병단장이 되었고, 영주가 되었고, 왕이 되었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로 살다보니 모든 나라를 정복했다.
마왕의 권능 하나로 모든 것을 갖게 되었다.
그 세상에 새로운 마왕이 강림했다.
삽시간에 세상의 절반이 쑥대밭이 되었다.
황제는 자신의 제국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마왕과의 힘겨운 승부.
황제는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싸웠고 승리했다.
마왕이 소멸된 자리에 검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아니 저것은?”
곁에 있던 대현자가 소리쳤다.
“예전 마왕이 소멸되었을 때도 저게 생겼습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본래 세계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 세계?
현대 한국?
황제 자리를 포기하면서까지 가야 하나?
“여기서 할 일도 없지 않습니까?”
모두 정복하긴 했지.
“벌레가 많아서 짜증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현대 서울엔 벌레가 거의 없긴 하지.
“라면이란 걸 먹고 싶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아. 라면.
꼬불꼬불 꼬불꼬불...
“차원 게이트가 닫히고 있습니다.”
카운트다운.
초조해진다.
“저기 못 들어가면 다신 못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에이. 썅. 나 돌아갈래. 간다. 잘 지내라.”
살살 긁는 대현자의 꼬득임에 황제는 충동적으로 게이트에 몸을 던졌다.
황제는 차원이동의 압력에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모든 걸 버리고 왔는데......
세자전하라니.
“에이 시펄!”
소리치고 보니 밖에서 움찔거리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자 저하. 어의를 부르오리까?”
“아니 됐다. 물러나 있거라.”
불편하군.
“흐으음.”
크게 숨을 들이켰다.
대기에 마력은 없다.
약간의 마력이라도 있으면 얼마든지 모을 수 있는데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몸은 또 바뀌었다.
세자라는 자의 몸으로 들어왔겠지.
일단 바지 속부터 확인해야만 하겠지.
루이 페르탄 때보단 약간 작아졌다.
본래 갖고 있던 장비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홉개의 아공간 반지가 사라진 게 특히 뼈아프다.
제국의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었는데.
역시 충동적인 차원이동을 하는 게 아니었어.
차원이동은 계획적으로.
‘아공간.’
다행히 영혼에 소속된 아공간은 열렸다.
몸은 바뀌었어도 영혼은 그대로라는 뜻이겠지.
영혼의 아공간을 열어보니 비상금으로 쓸 최상급 마정석 400개와 잡동사니 약간이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기에 귀중품을 넣어두는 건데.
아공간 반지의 용량이 크기에 대부분의 재산은 거기에 있었다.
갑옷과 무기는 모두 마법 아이템이다.
황제답게 최고급 마법진으로 도배된 위대한 무구.
문제는 마력이 없다는 것.
마력이 없으면 너무 무거워서 입을 수도 없다.
최상급 마정석.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100배 비싼 물건.
비상금으로 갖고 있었는데 이게 유일한 마력이다.
최상급 마정석을 꺼내 연결하면 마법을 쓸 수 있겠지.
대신 마법진을 그려야만 한다.
기술은?
기술을 하나하나 떠올려봤다.
이계의 언어, 몬스터의 언어, 각종 잡기술 전부 떠오른다.
몸에 익지 않아 약간 서툴겠지만, 기술은 그대로다.
마력만 있으면 모든 마법도 쓸 수 있다.
다음은 권능.
기술 강탈.
보통 현대인을 이계의 황제로 만들어준 위대한 권능.
그리고 새로운 권능이 있다.
소망집행.
얼마 전 마왕을 잡았을 때 강탈한 권능이군.
정신을 집중하자 권능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강렬한 소망을 계약 없이 이뤄주고 마력을 집행한다.
기술이 아닌 권능이다.
마왕의 권능인 기술 강탈과 같은 급의 권능이다.
이상하다. 이게 권능 급이 되는 건가?
마족에게 마력은 모든 것이다.
마력이 곧 힘이며 위상이고 계급이다.
마족이 성장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수련이나 전투를 통해 강해지거나 계약을 통해 마력을 갈취하기.
마족의 계약은 공정하기로 유명해서 계약을 통해 계약자의 소원을 성취시켜 주고 계약에 정해진 영혼의 힘이나 마력을 얻어낸다.
계약을 할 때 말장난을 할 수는 있어도 계약 그 자체는 솔직하게 이루어진다.
그래서 위대한 마족이 하찮은 인간에게 저자세로 계약해달라고 매달리곤 한다.
이 권능은 계약이라는 중간단계 없이 마음대로 소망을 해소해주고 마력을 갈취한다.
어찌 보면 허접하겠지만, 생각하기에 따라 최강의 권능이 될 수도 있다.
이계에 침입한 마왕의 별명은 고문의 여왕이었다.
사로잡힌 인간을 그냥 죽이지 않고, 온갖 고문을 행한 후 죽이는 악취미를 가진 적.
덕분에 인간들이 죽을 힘을 다해 싸웠었지.
소망집행을 확인한 사내는 마왕의 별명이 이해가 되었다.
포로를 고문하며 제발 죽여 달라는 소망이 무르익었을 때 포로를 죽여 마력을 갈취했군.
또 현 시대에 마력을 얻을 길이 생긴 것을 느꼈다.
사람들의 소망을 이루어줘서 마력을 얻어낸다.
마력을 얻어내는 유일한 길이다.
“박내관. 밖에 있는가?”
“예. 저하.”
“들어와봐라.”
방 밖에 대기하던 박내관이 들어왔다.
사내는 30대로 보이는 그를 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소망집행.’
집중하자 소망이 느껴진다.
성행위라는 걸 해보고 싶다 - 91569
박내관과 결혼하고 싶다 - 197
박내관이 성공하길 바란다 - 866
박내관에게 은혜를 갚고 싶다 - 84
박내관이 상전이 되길 바란다 - 347
다양한 소망이 느껴진다.
박내관이 바라는 소망과 박내관과 얽힌 소망이 동시다발적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박내관의 소망이 참.
이토록 가슴 아린 소망이 있을까?
“크흑.”
“저... 저하? 많이 편찮으십니까? 제가 어의를.”
“아니다. 잠시 슬픈 소망이 떠올라서. 큭. 나가봐라.”
소망을 이뤄주면 상대의 동의 없이 마력을 집행해 가져온다.
따로 설명은 없지만 알 수 있었다.
톡톡톡톡톡.
남자는 방바닥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생각에 잠겼다.
일반인의 몸.
일만 마력이 담겨있는 최상급 마정석 400개.
기술 강탈.
소망 집행.
각종 마법.
세자라는 신분.
역사는 잘 모르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고려시대 아니면 조선시대다.
처음 이계에 떨어졌을 때처럼 생존을 걱정해야 한다.
소망집행으로 마력을 모아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이 최우선이다.
“박내관. 들어와봐라.”
“예. 저하.”
박내관이 조신히 들어와 상체를 다소곳이 굽혔다.
30대 초반.
160 살짝 넘는 키에 날렵한 몸매.
운동을 많이 했는지 근육이 잘 발달되어 있다.
수염이 없고, 이목구비가 뚜렷해 현대적 기준으론 잘 생긴 얼굴이다.
그래봤자 고자지만.
“박내관. 자네가 날 몇 년간 모셨지?”
“아홉 살에 궁에 들어온 후 쭉 모셨으니 열다섯 해가 넘었습니다.”
20대구나.
이 시대엔 얼굴이 빨리 늙나보다.
“내 자네를 믿고 나만의 비밀을 말해주겠네. 비밀을 지켜줄 수 있겠는가?”
“염려 마십시오.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대답이 즉각 돌아왔다.
이 시대에 적응하려면 누군가 필요하다.
박내관의 성품은 잘 모르지만 일단 믿기로 했다.
배신의 기미가 보인다면 그때 죽이면 된다.
“지난밤에 난 기억을 잃었다네.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
떠억!
박내관의 입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어서 어의를 불러서.....”
호들갑 떠는 박내관을 묵직한 목소리로 멈춰 세웠다.
“대신 신내림을 받았다네.”
손에 쥔 마정석에서 마력이 빠져나가 바닥에 그려둔 마법진을 통해 불덩이가 생겨났다.
뜨어억.
박내관의 입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 작가의말
오늘만 세편 올립니다
글 쓰면서 과연 누구의 몸에 빙의했을까? 궁금하겠지? 키득키득 요랬는데......
제목이 스포.... orz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