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이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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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의 확답을 받은 광해는 백성들을 향해 섰다.
흔치않은 논쟁을 본 백성들은 흩어지지 않고 경청하고 있었다.
백성들 중엔 어려서부터 불교를 믿어온 신자가 많았고 그랬기에 이름 높은 대사들의 헛소리에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세금이란 무엇인가. 왜 세금을 내는가.”
“내라고 해서요.”
“안내면 경을 쳐서요.”
광해의 질문에 몇 몇 백성이 대답했다.
예전 같으면 맞아죽을 대답이지만, 세상이 변했다.
“그렇지. 재산을 빼앗기는 너희 입장에선 그게 생각될 수밖에. 이제 나라 입장에서 보자. 나라는 왜 세금을 걷을까?”
“......”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나라를 관리하고 백성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금액을 계산해 세금을 빼앗는다. 그렇게 모은 세금으로 왕의 생활을 책임지고 관리들의 봉록을 준다. 여기서 힘 있는 관리들이 부자가 되려고 세금을 더 걷고, 또 걷는다. 그래서 너희가 고생했고.”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 낸 세금을 생각하면 지난해까지의 세금은 너무 과했다.
“하지만 아예 안 걷으면 어찌될까? 너희는 좋겠지?”
“예에~~~”
좋단다.
“나라의 입장에서 아예 안 걷으면 왕도 굶주리고 관리도 굶주린다. 그리고 병사가 없어진다. 임진왜란 전 나라꼴이 개판이긴 했어도 육상병력 6만과 판옥선 200척을 건조 운용했었다. 비록 원균 같은 머저리가 말아먹긴 했어도 나름의 군대를 운용했었다. 헌데 이 병사들이 다 사라진다면 외적이 쳐들어와 너희를 다 죽였을 것이다.
딱히 외적만의 문제가 아니다. 병사가 없고 관아가 없어 도둑놈을 잡을 수 없다면 너희 생활이 어찌될 것 같으냐? 1년 내내 뼈 빠지게 농사지어 수확하는 것과 가을밤 이웃집에 잠입해 주인의 목을 긋고 수확물을 뺏는 것과 어느 것이 편할까?
관아에선 너희를 수탈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기능은 했다. 살인자를 잡고, 착호갑사가 호랑이를 물리치고, 왜구가 오면 한발 늦더라도 싸워줬다. 그게 너희가 조세를 내는 이유다.”
왜 세금을 내야 하는데?
나라에서 해준 게 뭔데?
이런 걸 한다.
“지금 너희가 낸 세금으로 전국에 도로를 깔고 있다. 저수지를 축조하고 벼밭을 논으로 바꾸고 있다. 겨울이건만 여름 홍수를 대비해 둑을 보강하고 있다. 너희 혼자는 할 수 없는 일을 나라에서 해주고 있다. 앞으로 너희는 더 많은 수확을 거둘 것이며 더 잘 살게 될 것이다. 세금을 걷지 못한다면 이 모든 일을 할 수 없다.”
전기가 연결되어 전기를 쓴다.
땅을 파 하수도를 연결하며 고압의 상수도가 들어오고 도시가스가 들어온다.
버스와 지하철이 다니고 망가진 도로가 복구된다.
이걸 개인이 혼자 꾸리려면 세금 이상의 비용을 내야 한다.
세금은 이런 다양한 일을 하며 지불한 금액 이상의 편의를 제공한다.
전체 평균이란 함정이 있지만.
이것이 종교계도 세금을 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 저기 스님들은 부처에게 귀이 하였기에 나의 백성이 아니라 한다. 난 어떻게든 안고 가려 했지만 끝내 나의 백성이 되길 거부하는 구나.”
광해는 스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그들을 종교행사장 위에 세웠고, 그들의 목소리를 백성들에게 들려주었고, 세금의 의의를 설명했다.
사색이 된 사명당을 제외하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평생 인도 교리만 읽으며 호위호식 해서 머리가 굳은 모양이다.
“저... 저희를 죽일 셈입니까?”
저딴 소리나 하는 걸 보면.
“아니다. 다만 내 백성이 아니니 내 백성이 낸 세금의 혜택을 받을 수 없겠지. 백성들아 듣거라. 나의 백성이 누군가에게 재산을 빼앗긴다면 난 내 백성을 도울 것이다. 허나 내 땅 안에서 내 백성이 아닌 누군가가 재산을 빼앗긴다면 나라는 도울 의무가 없다. 백성들에게 모은 세금을 남의 백성을 위해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 마찬가지로 남의 백성이 내 땅 안에 무단 침입해 있다가 내 백성에게 죽는다면 그 또한 무시할 생각이다.”
무시무시한 선포.
중이 재산을 빼앗기고 살해를 당해도 나라에선 돕지 않는다.
중을 죽이고 약탈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
이제 재산을 가진 중은 맛있는 먹이감이 되었다.
“헉.”
“이럴 순 없소이다.”
“말도 안 되오! 부처의 자비를 생각해 주시오.”
“지옥유황불에 떨어질 말을!”
멍청한 소리 하고 있네.
“부처께 말하라. 부처께 더 빠르게 귀이하게 되었으니 기뻐함이 옳지 않느냐? 나무아미타불 해라.”
불교의 재산을 뺏는 건 쉽다.
훈련된 병사를 보내면 끝이다.
다만 수백만 백성들이 긴 세월 불교를 의지해 왔다.
나라에서 몰수한다면 종교탄압으로 비춰져 전국의 불교도가 뭉쳐 반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건 백성 개인의 일탈로 만들어야 한다.
욕심 많은 누군가가 알아서 하겠지.
사실 안보군이 이미 사찰 약탈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임무 중엔 비밀공작도 포함되어 있으니.
여기에 검계라던가 최씨상단 등 반(半)정부군이 끼어들겠지.
“허균!”
“예. 전하.”
가까이에서 듣고 있던 허균이 벌떡 일어났다.
“내 말의 의미를 알겠지? 포고령을 작성해 전국 관아에 알려 감시하라.”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몰수한 재산은 나라에서 관리하며 정해진 가치에 따라 재산을 줄 터이니 파괴하지 말고 불 지르지 말라고 해. 괜히 문화재 박살나면 죽여 버리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성리학자이자 양명학자이며 불교 사상에도 심취한 허균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안에 포고령이 전국으로 퍼질 것이다.
“소승은 이만.”
“두고 보시오. 구천지옥에 떨어질 것이오.”
“급하다 급해.”
각 종파의 고승들이 부랴부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빨리 사찰로 돌아가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이놈! 내 땅을 빼앗아간 놈이 어딜 도망치려고!”
농민 하나가 달려들어 스님 한명을 잡았다.
집회장 주위에 있는 병사들은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퍽퍽퍽!
“내 땅 돌려내. 내 땅! 내 땅을 빼앗아놓고.”
곧 몇 몇 백성이 슬금슬금 이동했다.
그들 눈엔 달리고 있는 고승들이 보물을 가진 황금고블린으로 보일 것이다.
“잡아라!”
“놓치지 마!”
“주상의 은혜를 공으로 얻어먹는 놈들!”
“네놈들 때문에 우리의 세가 과중된 거였어!”
황금고블린을 추격하는 초보모험가들의 왁자지껄한 사냥.
더 이상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광해는 떠나려다가 여전히 남아있는 사명당을 봤다.
“안 가냐?”
“지킬게 없는데 어딜 가겠습니까.”
사태가 일어나자 유정스님은 되레 평온한 신색을 되찾았다.
“서운하냐? 임란에서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이런 대접을 받으니.”
“...... 대왕 명종께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줄여주셨고, 저희는 예전의 성세를 약간이나마 되찾았습니다. 양반이 몰락하는 것을 봤으면 자중해야 할 텐데 오히려 양반의 빈자리를 먹으려 욕심 부렸더군요. 마치 고려시대 불교처럼. 인간의 욕심이 끝없음은 아오나 인간이면서 부처를 자처했으니 벌을 받는 거겠지요. 탐욕의 죄를 지은 자는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진짜 구도자만 남으면 불교는 더욱 번성하리라 믿습니다.”
역시 이름만 고승인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한잔하러 갈 건데 같이 가세.”
“감사히 받겠나이다.”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광해의 뒤를 유정스님이 따랐다.
파면당한 이괄은 고성으로 돌아왔다.
납치된 예서는 구출되었으나 사건의 무게를 생각하면 파면으로 끝난 게 용한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며 아비 팔아먹은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걱정을 많이 했으나 오히려 환영받고 가주로 인정받았다.
가문이 양반의 난으로 처벌을 받았으나 먼저 항복한 이괄의 공으로 재산을 어느 정도 보전해줬고, 노역수들도 고향에서 저수지 축조에 동원되는 걸로 끝났다.
온 가족이 뿔뿔히 흩어져 북쪽과 바다건너로 동원된 다른 가문과는 달랐다.
이 모든 게 이괄의 공이다.
양반의 난에 참여했음에도 여전히 세가를 이루었기에 몰락한 다른 양반가의 빈자리를 차지하며 가문의 힘은 예전보다 오히려 높아졌다.
그리고 이괄은 가주로써 새로운 세상에 적응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주상. 주상께서 좋아하시는 것은......”
새로운 세상은 예전 어느 시대와 비교할 수 없는 왕권강화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괄은 광해의 눈에 들어야 했다.
매일 관아에 들러 새로 선포되는 정책을 읽고 공부하던 어느 날, 왕의 등을 지킬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치킨 먹고 싶다. 나도. 어? 형도? 만들까? 지금 밀가루가 없는데. 아까비. 닭에 밀가루 입혀서 콩기름에 튀겨낸 치킨. 아아아. 먹고 싶다. 맥주부터 만들까? 만들자. 그건 간단하지. 치맥 대신 굽닭맥. 치킨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신분을 초월한 광해와 모현성의 대화.
무산에서 둘이 생각 없이 하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치킨! 그게 뭔지 몰라도 만들고 만다!”
명문중의 명문인 고성이가 사암공파 가주의 기행이 시작되었다.
닭.
밀가루.
콩기름.
튀겨낸.
몇 안 되는 키워드만으로 치킨이란 걸 창조해야 한다.
닭이 가장 싸고, 콩기름은 그나마 감당할 만 하고, 상국에서 수입해야 하는 밀가루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그래도 만들어야 한다.
숨겨놓은 은자로 재료를 사고 콩기름을 짜고 주방 이모를 모아 온갖 요리를 해보며 치킨이라는 것을 재현하던 어느 날.
이괄은 예비군 통지서를 받았다.
-고성과 함안의 남자 백성은 1월 첫주에 함안 관아에 모여 보름간 예비군 훈련을 받으라. 노숙해도 안 죽도록 최대한 옷을 껴입고 올 것이며 활과 화살이 있다면 챙겨오라.
-고성과 함안의 여자 백성은 1월 셋째주에 함안 관아에 모여 보름간 예비군 훈련을 받으라. 노숙해도 안 죽도록 최대한 옷을 껴입고 올 것이다. 모든 참가자는 쌀 한 말을 받는다.
바뀐 정책 중 하나다.
군역이 없어지고 대신 예비군 훈련이라는 게 생겼다.
노숙해야 한다는 것을 빼면 놀고 먹는 농한기에 식사제공을 하고 보름 노역으로 쌀 한말을 받는 건 꽤 큰 혜택이다.
아직 비누도 보급하지 못하는 형편에 각 지역마다 대규모 인원을 수용할 막사를 짓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예비군 제도가 통지 된 지난 6월에 가가호호 활과 화살을 만들 것을 권장했으며 예비군 훈련에서 특등사수는 큰 상을 받을 것이라 공고했다.
이괄은 솜옷을 있는 힘껏 껴입고 가문의 장정들과 함께 함안으로 갔다.
훈련은 별거 없었다.
제식. 제식. 제식이다.
모이고 줄맞추고 걷고.
뛰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
멀리 해쳐 모였다가 횡대로 모이고 종대로 모이고.
걷고 뛰고 걷는 게 끝이다.
짜증나는 훈련에 사방의 백성들이 툴툴거렸지만 이괄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13살에 명천현감으로 전장에 뛰어들고 18살에 태안군수로 감영의 병사를 이끌어본 이괄은 이것이 백성들의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가장 효율적인 훈련이라 느꼈다.
어차피 복잡한 전술 따위 가르칠 수도 없다.
그저 단체로 걷는 법이라도 가르치는 게 한계다.
중간 중간 활 만들기와 관리법, 화살 만들기, 활쏘기 등이 이어졌다.
왜적의 입장에선 약탈하러 왔더니 뜬금없이 2만 궁수 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전처럼 백~이백 단위의 왜구가 온다면 송송 털릴 것이다.
이 훈련을 임란 전에 했다면......
고려 때부터 사백년간 왜구에 털렸는데 그때부터 훈련해왔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이괄은 고개를 흔들었다.
국가는 외적의 침입보다 백성의 반란을 천 배 더 경계했다.
백성이 모여 훈련하면 바로 역모로 몰아 몰살시켰으니.
보름간 군대 밥 먹고 지겨운 제식훈련을 했고, 마지막 궁술대회에서 11위를 차지했다.
1위가 쌀 열석을 받고 8위가 쌀 한석을 받는 것을 구경한 이괄은 부대가 해산하자마자 군수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시오. 전 태안군수이며 고성이가 사암공파 가주 이괄이외다.”
“그런데?”
거창한 소개에도 백관 채유진은 별 감흥 없이 대답했다.
지역 양반의 청탁을 수없이 받은 채유진에게 이괄 같은 건 이제 지겹다.
그리고 왕의 직속신하라는 명성을 얻고 있는 백관은 이괄이 보기에도 굉장히 높아 보였다.
자신도 저렇게 높이 갈수 있었는데. 그놈의 이영덕에게 말려들면서. 흑.
“주상 전하께 진상할 음식이 있소이다.”
이괄이 바구니를 내밀었지만, 채유진은 차가웠다.
“직접 보내. 한성으로 직접.”
“주상과 모현성공이 꿈에도 그리는 음식이오. 치킨이라고 두 분이 꼭 드시고 싶어 하는 음식이오. 주상의 명으로 가문에 묶여있어 올라갈 수 없으니 귀공께서 파발마로 올려주시오. 겨울이니 상하지 않을 테고 동궁 수라간에서 콩기름으로 한번 튀겨서 진상하면 될 것이오.”
“흐음. 꿈에도 그리는?”
“그렇소. 치킨이라 하오. 두 분께 나중에라도 여쭤보시오. 내 말이 거짓이라면 목을 내놓아도 좋소.”
“주상께서 꿈에도 그리는... 치킨? 음. 알겠다. 올리도록 하지.”
“잘 생각 하셨소. 공께서도 큰 상을 받을 것이오.”
닭 500마리를 잡아 해볼 수 있는 모든 요리를 시험했다.
그 결과 충격적으로 맛있는 닭튀김요리가 나왔다.
이것은 치킨임이 분명하다.
이로써 다시 중앙 관료가 될 수 있겠지.
이괄은 행복한 꿈을 꾸었다.
- 작가의말
종교인이
세금으로 운용되는 버스,지하철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세금으로 유지 보수되는 도로를 밟지 않는다면
가스 전기 상수도 하수도 등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경찰의 치안 서비스를 받지 않는다면
범죄를 당해도 판검사의 사법권에 보호받지 않겠다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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