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스님의 우울
순도 100% 픽션입니다
광해는 평소 시간이 나면 창고 근처 볕이 좋은 곳에 누워 고양이와 시간을 보냈다.
이제는 휴식하는 장소가 흥청의 표범방으로 바뀌었다.
광해의 눈치를 보며 중전과 후궁들이 모이고, 덩달아 모시는 상전을 따라온 궁녀들로 바글바글하다.
대비전의 사람들과 흥청의 기녀까지 모이니 동네 반상회장처럼 변해버렸다.
평소처럼 흥청에 들어선 광해는 자신을 따르는 궁녀 하나가 바뀐 것을 봤다.
승은을 받고 싶다 - 284552
저 정도 소망이 하루아침에 생길 리 없는데.
얼굴을 보니 처음 보는 궁녀다.
물론 광해는 자신을 모시는 궁녀 하나가 바뀐 것을 즉각 알아챌 만큼 세심한 남자가 아니다.
다만 눈에 띄게 예쁜 궁녀가 새로 나타난 건 즉시 보이는 어쩔 수 없는 남자다.
“박상전.”
“예. 전하.”
“쟨 뭐냐?”
“아. 추희군요. 얼마 전 평택의 백관 원유창이 보냈습니다. 주상을 모시고픈 마음이 갸륵해 올려 보냈다는군요.”
원유창.
기특한 놈.
생각해보니 최근 며칠 간 예서만 안았구나.
이 몸은 만백성에게 봉사하고 소망을 들어줘야 하는 운명인데.
“그래. 저 아이의 소망을 들어줘야겠구나.”
“예. 밤에 등촉을 밝히겠습니다.”
둘의 뒤에서 예서는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즈나. 즈나 보고 싶었사옵니다.”
소유키가 달려와 안겼다.
“그래 고생했다.”
얜 솔직해서 대하기 편하다.
뒤에선 모현성이 하고 싶은 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표정으로 꼰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래. 별 일은 없었지?”
“왜... 왜 통신이 안 되십니까?”
“응? 아 잊고 있었군.”
“하아. 진짜. 이단의 해적단과 전투가 있었습니다. 관선급 함선 30척과 싸워 적 오천을 무찔렀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자리를 옮겨 모현성과 독대했다.
“이단의 해적단이라고?”
“어. 모은 정보로는 관선급 해적선이 500척이야.”
“유명한 애들이냐?”
“중국 동남부 해안을 지배한다고 생각하면 돼. 이 세력을 정지룡이 먹고, 그 아들 정성공이 먹고, 후에 대만을 건국하는 세력이 돼.”
“음. 무시하면 안 되나?”
“이미 대만 기지를 털었으니 돈으로 무마할 수는 없지. 이놈들을 냅두면 대만에 세력을 확장하기 어려워.”
“싸워야겠네.”
“그렇지. 대해적단 이래봤자 관선급이야. 판옥선 상대로는 힘들지. 장강 하구부터 해안 따라 쭉 내려가면서 만나는 족족 조지면 돼. 그러면 중국 남부 해안을 장악할 수 있어. 어차피 지금 판옥선을 수송선으로 쓰고 있잖아. 그거 빼와서 이쪽으로 돌리면 딱이야.”
“판옥선이 확실히 오버스펙이군...... 간단한 전투면 니가 해라. 난 수도를 지키마.”
원정 떠나기 싫다.
내겐 자택경비원이라는 훌륭한 직업이 있다.
“저기요. 주상님아. 판옥선이 쎄긴 한데...... 평저선이라서 물살을 가를 수 없거든요.”
“뭔 소리를 하려고.”
“해류나 바람을 잘 못 타면 원하는 방향으로 못 가고 제멋대로 흘러가 버린다고. 그래서 평저선은 연근해에서만 쓸 수 있어. 게다가 풍랑에 홀랑 뒤집어지기도 하고. 벌써 풍랑에 아홉척이나 가라앉았잖아.”
“그래서?”
“바람을 잘 타면 좋은데 재수 없으면 대선단을 전부 잃을 수도 있다고.”
“야이. 샹.”
“일본의 판옥선을 대마도에 모아서 장강 하구, 후에 상하이가 되는 곳까지 가려면 대해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때는 꼭 형이 있어야 할 것 같사옵니다.”
“...... 그래 내가 언제는 편히 놀았냐? 믿고 맡길 놈이 없네.”
지금이라도 대현자 놈을 소환할까?
그놈을 어떻게 속여야 권속소환에 응하려나.
“남이흥의 수송선단을 일본 약탈군에 편입하고, 판옥선을 대마도로 모을게. 보급까지 대략 세 달은 걸릴 거야. 파발을 보내 일본해 전역의 판옥선에 연락을 보내 편제를 바꾸고 대마도로 모으는 시간이야.”
통신이 없으니 한번 모이는데 몇 달씩 걸린다.
“그래. 알아서 준비해라. 대전쟁을 앞뒀으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겠네.”
“어? 세 달이나 놀겠다고? 형 너무한 거 아니야?”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 넌 가서 일해라.”
오늘은 소유키를 위로해 줘야겠다.
추수가 끝난 시월부터 관아에 세무보고가 올라왔다.
“지가 대충 물고기 백근, 쌀 아홉 석 정도 벌었구먼요.”
“그 외엔 없나?”
“예. 고사리랑 미역, 참새 같은 건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하셔서.”
“그래. 해산물은 전부 면세고 쌀만 계산해서... 쌀 두석하고 열한두를 내라.”
보고를 받은 호방아전은 농부의 이름과 신고량, 세금을 적었다.
직접 신고하고 직접 납세하기.
지금 시대에 일일이 조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믿고 세금을 받을 수 밖에.
대신 안전장치로 상호감시체계를 만들었다.
-고의로 탈세한자는 삼족의 전 재산을 몰수당하며 탈세를 신고하면 신고자에게 몰수액의 절반을 준다-
관아 세무보고 자리에는 몇몇 인간들이 눈에 불을 켜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기만 하면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다.
시행 첫해여서 그런지 농부들은 기억을 짜내 최대한 성실하게 보고를 했다.
또 애매한 보고에는 신고가 들어오지 않았다.
탈세신고는 인간관계를 완전 단절하는 행위다.
애매한 양을 신고해 조사했다가 아닌 게 밝혀지면 마을 사람들의 손가락질에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다.
주로 놀고 먹고, 평판이 안 좋은 검계의 놈팽이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지만 탈세자를 쉽게 잡아내진 못했다.
건달들에겐 별 소득 없이 새해를 맞이했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는 고을 세금목록을 살펴보던 검계의 창한은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백관님. 채유진 백관님. 탈세자를 신고합니다.”
신나서 달려온 창한이를 보며 고성 함안의 백관 채유진이 이마를 짚었다.
벌써 몇 번의 허위신고인지.
허위 신고를 조사할 때마다 조사비용의 두 배를 물려왔지만 허위신고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 또 누가 탈세를 했느냐.”
“제가 알기로 구만리의 용화사에 중들이 백 명 넘게 살고 있습니다. 그놈들이 땅도 잔뜩 갖고 있고요. 헌데 세금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뭐. 중들은 원래 세금을 안 내지 않느냐.”
“에이. 광해님께서 선언하셨죠. 광해님도 세금을 내겠다고. 올해도 국가 전체 세금의 절반을 광해산업에서 내지 않습니까. 게다가 광해소망교에서도 기부 받은 목록을 전부 신고해 내지 않았습니까. 모두가 세를 내라 했는데 중놈들은 지들이 뭐라고 세금을 안 냅니까?”
현대에도 건달들이 오히려 관련법을 더 잘 안다.
협박을 하려면 그에 관한 법은 알아야 한다.
무식하고 나쁜 짓만 하는 놈이라 내심 무시하던 채유진은 검계의 놈팽이에게 오히려 한방 먹었다.
“그...... 그래. 네 말이 맞은 듯 하구나. 당장 조사해보겠다.”
“아싸. 그러면 몰수한 재산의 절반은 제 것이죠?”
“국가에서 판결이 나오면 창한이 네께 될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보아라.”
채유진은 절에 조사대를 보냄과 동시에 한성으로 파발마를 보냈다.
전국각지에서 비슷한 내용의 파발마가 한성으로 달렸다.
“예상보다 빠르네.”
“형. 칠레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1분 만에 지구반대편 대만의 와인업체가 상한가를 치는 게 주식이야. 돈 버는 데 전력을 쏟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 애초에 이리 될 줄 알았잖아.”
“그래. 알고 있었지만 너무 빨라서.”
양반의 재산은 빼앗았지만, 불교의 재산은 뺏지 못했다.
당시는 광해소망교가 퍼지기 전이었고, 불교를 믿는 신자가 많기 때문이다.
막무가내로 뺏으면 삼백만 불교도에게 반발이 생기니 정당한 명분이 생길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포고를 내려라. 국가의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세금을 신고하지 않은 이의 모든 재산을 뺏고 정해진 법에 따라 삼년간의 노역형에 처한다. 몰수한 절은 학교나 고아 시설로 쓰라.”
“예. 전하.”
당장 한성의 절부터 조사가 시작되었고, 파발마를 따라 전국으로 조사대가 퍼졌다.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절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럴 순 없소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어찌하여 우릴 핍박한단 말입니까.”
“사찰은 부처를 위한 공간이외다. 우리의 것이 아닌데 어찌하여 우리에게 세금을 물으신단 말이오.”
“대사님. 대사님께 갑시다.”
날벼락을 맞은 스님들은 가야산으로 모여들었다.
사명대사.
얼마 전 조선에 복귀한 사명당은 가야산의 암자에 기거하고 있었다.
중들이 몰려가 왕의 존경을 받는 사명당에게 왕을 설득해달라는 청탁을 했다.
사명당은 눈을 감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후우. 주상의 말씀에 잘못된 점이 없소.”
“허나 지나칩니다.”
“우리가 임란 때 스스로 죽창을 깎아 왜구와 싸운 공도 있지 않소이까? 이럴 수 없소이다.”
“차라리 우리가 뭉친다면.”
“허엇. 망언하지 마시오.”
사명당은 나서기 싫었지만, 스님들이 위험한 생각을 할까봐 총대를 매야 했다.
가야산을 떠난 사명당은 각 종파의 장들과 함께 한성으로 올랐다.
불심으로 대동단결.
종파와 계파를 떠난 모든 스님이 하나 된 화합의 장이었다.
2월 초. 스님들이 한성에서 광해에게 알현을 요청하고 사흘이 지났다.
단군역법에 따르면 오늘은 일요일.
종교활동이 있는 날이다.
광해는 사명당과 고승들을 남산으로 불렀다.
백성들 앞에서 공개토론을 할 생각이다.
양반들에게 그러했듯이.
“영광 영광 광해 전하~”
높고 넓은 단상 한쪽에 고승들을 위한 의자를 가져다 놨다.
스님 일부는 의자에 앉고 일부는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와아 광해님~”
다들 눈을 감고 염주를 굴렸다.
“기적이야.”
“치료되었다. 어머니의 병이. 흐흐흑.”
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종교활동이 진행되고 백성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염불소리는 같이 커졌다.
한성단주의 지휘하에 모든 종교활동이 끝난 후 광해가 단상 위에 섰다.
“불교도들아. 나와서 말해보아라. 중은 어째서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는 지 설파하고 그게 옳다면 너희의 죄를 사하며 지금까지처럼 세를 받지 않겠다.”
스님들의 시선은 한곳으로 모였지만, 사명당은 눈을 감고 염불을 외우는 채였다.
왕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스님 하나가 나서서 말을 했다.
“중이란 본래 모든 것을 버렸으며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습니다. 부모와 이름마저 버렸는데 무엇을 소유할 것이며 소유한 게 없는데 어느 것을 지불하겠사옵니까.”
“나무 아미타불.”
개소리에 추임새 넣는 중들.
광해는 피식 웃었다.
“즉, 절은 너희의 것이 아니란 말인데, 절을 몰수하려니 어째서 너희가 저항하지?”
“절은 부처께 바친 신당이오며 부처가 백성을 구제하는 통로이며 모든 보살님들의 거처이옵니다. 저흰 그저 지킬 따름이옵니다.”
성리학도 그렇지만 모든 종교가 다 짜증이 난다.
앞으로 만날 기독교와 이슬람, 힌두교와 토속신앙까지 전부 이러겠지.
“입에 발린 말은 됐고 다른 이유는 없느냐?”
각종파의 거인들이 저마다 교리를 들고 나와 설파하는데, 광해 입장에선 개소리였다.
너무 개소리여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광해는 각지의 백관이 보내온 청원서를 꺼냈다.
“피난을 갔다 돌아오니 전답이 절 앞으로 되어 있더라. 항의하니 맞아죽을 뻔했다. 절에서 백일기도를 드린 아내가 임심해서 돌아오더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준다 해서 전 재산을 바쳤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재산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이거 너무 많은데? 이것도 부처의 뜻인가?”
모든 스님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사명당이 눈을 떴다.
“차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오나 부처를 팔고 다닌 개인의 일탈이며 진짜 중은 그러지 않았으리라 믿사옵니다.”
쟤도 참 속상하겠지.
사명당의 비참한 표정을 보며 광해가 마무리했다.
“세 가지 길을 주마. 하나. 탈세를 인정해 전 재산을 몰수하고 3년간 노역형을 치른 후 나라의 정책에 따라 산다. 둘. 부처의 무소유를 인정해 모든 소유를 부정하고 구걸로 산다. 물론 구걸로 기부 받은 물품에 대해서 정해진 세를 낸다. 셋. 부모와 자식, 이름마저 버렸으니 국가도 버리고 산다.”
중에게 억지로 백성이 되어 농사지으라 해봤자 의미도 없고 제대로 일하지도 않을 것이다.
과도한 세를 피하기 위해, 혹은 군역과 요역을 피하기 위해 중이 된 자도 많고, 주인을 죽인 노비 등 도망자들도 많다.
광해는 되도록 간편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사명당이 입을 열었다.
“본래 중의 의미를 찾겠습니다. 두번째...”
명망 높은 사명대사의 입을 선종의 큰 스님이 막았다.
“세번째. 세번째를 택하면 탈세의 혐의가 없어지는지요?”
“그렇지.”
“그렇다면 세번째를 선택하겠습니다.”
모든 스님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입이 막힌 사명당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 작가의말
백화가 넘도록 성리학을 양파까듯 깠지만
그럼에도 성리학이 가장 도덕적이었다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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