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다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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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님을 뵙습니다.”
제물포에서 판옥선으로 갈아타 마포까지 올라오니 중전 유씨를 비롯한 모두가 마중 나와 있었다.
중전을 한번 안아주고, 세자 이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줬다.
뒤에 서 있던 애첩 예서와 소유키를 한번 안아주고 나니 병사들이 애완동물을 풀어줬다.
구름이, 비호, 맹호, 꽃순이.
송아지만큼 커진 짐승 넷이 달려와 광해의 다리에 몸을 비비며 그릉 거렸다.
광해가 마력을 주입하며 교육했기에 간단한 말귀를 알아듣고 야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궁에서 자유로이 뛰어다니다가 밥 때가 되면 수라간 앞으로 와 생고기를 얻어먹는 개냥이가 되었다.
“많이 컸군. 다들 들어가자.”
왕을 위해 준비된 가마에 올랐다.
가마 주위를 호위기마가 둘러쌌고, 그 뒤로 병사들이 두 줄을 길게 늘였다.
그 사이에 운구 되는 관들.
왕을 환영하러 나온 이들이 줄지은 관을 보고는 침묵했고, 조용히 행렬을 따랐다.
남산 종교행사장으로 가자 벌써 사만여명의 백성이 모여 있었다.
문무백관의 인사를 받은 후 광해는 바로 단상에 올랐다.
단상위엔 광해와 이백여개의 관만 올랐다.
“조선의 백성들이, 나의 백성들이 죽었다.”
조용해지는 광장.
광해는 그 한편을 보았다.
“서반아. 포두아. 화란. 영국. 사개국이 힘을 모아 기습했다. 나의 용맹한 병사들과 광해상회에서 일하던 일꾼들이 죽었다. 나하에 상품을 수송하던 이가상단 선원 수백 명이 죽었다.”
여기까지 말한 광해는 큰 피해를 본 이괄에게 한마디 하라고 돌아봤다.
중요한 순간인데 이괄은 육지멀미로 헤롱거리고 있다.
광해는 한심한 이괄을 힐끗 봤다가 말을 이었다.
“노량진 어학원. 잘 공부하고 있나?”
“예! 전하!”
한켠에 모여 있던 노량진 학생들이 소리쳤다.
“너희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가 서양의 오랑캐들과 전쟁을 하려면 그들의 언어가 필요하다. 너희는 지식으로 그들을 물리치는 선봉장이 된다. 열심히 공부해라.”
“예! 전하!”
서양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큰 소리로 대답하는 것과 달리 끌려나온 선생들은 안색이 푸르죽죽해졌다.
우치나에서 스카우트 돼 조선에 어학선생으로 온 그들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감금되었고, 선생의 신분에서 포로로 강등되었다.
이제 그들은 거꾸로 매달려 언어를 뽑아내는 노예가 된다.
어차피 지구 반바퀴를 돌아 선원생활을 하는 와중에 범죄와 원한을 산처럼 쌓은 자들이다.
필사적으로 언어를 가르친 후 마력을 바치고 죽는다.
“난 나의 백성이 죽은 원한을 잊지 않겠다. 서반아, 포도아, 화란, 영국, 사개국이 무조건 항복을 하는 순간까지 복수를 이어가겠다. 모두 오늘을 기억 하거라.”
영국은 합류하지 않았지만, 은근슬쩍 끼워 넣었다.
어차피 인류 역사에 해를 끼칠 국가니 예방차원에서 눌러줘야지.
이건 예방주사 같은 거다.
영국아, 불주사 한대 맞아라.
엄숙한 장례절차가 이어졌고, 모두 용산 인근에 마련된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국립묘지.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모병제를 유지하기위해 꼭 필요한 장치다.
“문제없지?”
백관을 모아놓고 물었다.
영의정을 시작으로 각자 업무보고를 하는데 막힘이 없다.
허균은 수십 개의 안건을 이야기하는데 모든 산업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딱 하나.
최명길이 머뭇거렸다.
“왜?”
“도저히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동남아에 보급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식량은 현지조달 하더라도 화약 등은 보급해야 하는데 해운이 부족합니다.”
애초에 원정 전에도 배가 부족했다.
해적선을 나포해 수송선으로 쓰려 했는데 얻은 것 없이 오히려 보급라인만 길어졌다.
“동남아에서 배를 나포하면?”
“숙련된 선원이 부족합니다. 단순히 노저어서 갈 거리가 아니니 돛을 써야 하는데 그 인원이 없습니다. 교육하려면 1년 이상 걸립니다. 게다가 곧 겨울이 오니 이주철이 됩니다. 백성을 이주시킬 배조차 부족한데 동남아까지 보급할 수가 없습니다.”
“음.”
본래 계획대로 조선을 장악하고 5년 후 동남아로 진출했다면 문제없겠지만, 아직 2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잠시 고민하던 광해는 모현성과 눈이 마주쳤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눈을 반짝반짝 뜨며 고개를 내미는데 못생겼다.
“그래. 모두 수고했고, 허균과 최명길만 남아봐.”
넷만 남자 모현성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허허허. 소신의 심려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되었소. 광해소망교는 이제 다음 단계로 진입할 때가 되었소이다.”
“답만 말해라.”
“에이씨. 좀 받아주면 안 돼 형?”
“답만 말하라고.”
“알았어. 최명길. 수송라인에서 광해산업 수송선이 몇 척이지?”
모현성은 투덜거리면서 최명길에게 고개를 돌렸다.
“관선 이백 척 정도가 돌고 있습니다.”
“그 배 중 백 척을 빼면 동남아 보급선을 유지할 수 있지?”
“백삼십 척은 빼야 합니다.”
“그럼 칠십 척으로 광해산업 수송을 맡기면?”
“못 버팁니다. 면포는 무산에 쌓여 썩을 것이며 유리거울과 유리구슬은 태안에 쌓여 먼지를 맞을 것입니다. 소금도 마찬가지겠지요.”
면포나 종이, 철기구는 무산에서 생산되지만, 다른 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다.
태안과 삼척에 유리공장이 만들어졌고, 서해안 곳곳에 광해 소금이 있다.
남해안 여러 곳에 도자기 공장이 있고, 대구, 상주엔 대나무 공방이 있다.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건 아니고, 원료가 나는 곳에 공장을 세운 것뿐이다.
“그래. 그 해결책이 있다.”
“답만 말하라고.”
광해가 끼어들자 거창하게 폼을 잡던 모현성이 흘겨봤다.
“알았어. 답은 다단계. 네트워크 마케팅이야!”
“...... 이 빙신새끼가 뭐라는 거야.”
광해의 솔직한 말에 허균과 최명길은 아리송해졌다. 대체 뭐 길래?
“형. 다단계가 뭔지 알아?”
“옥장판, 정수기, 이 딴 거.”
“그거 말고 이미지.”
“나쁜거. 집안 말아먹는 거.”
“좀 더 자세히는 뭔지 모르지?”
“어.”
“현대인은 다단계가 뭔지 몰라. 배우지 못하고 듣지도 못해. 왜냐!”
“배우면 빠져드니까?”
“아니야. 종교계가 막아서야.”
“또 뭔 개소리냐.”
“개소리가 아니라 진짜야. 왜냐면 현대 유통과 종교활동을 섞은 게 다단계거든. 그래서 이걸 구체적으로 욕하려 하면 종교계가 하는 다단계 전도행위를 같이 욕하게 돼. 그래서 다단계를 배우지 못하고 그저 애매하게 나쁜 거라고만 알게 되는 거지.”
모현성의 확신에 찬 말투에 광해는 표정이 애매해졌다.
분명 개소리 같은데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옥장판이나 정수기, 비데 따위만 파는 건 악질 다단계야. 한탕 치고 빠지는 사기지. 그보다 소프트한 다단계는 다단계의 탈을 쓴 종교야. 사장님들을 모아놓고 교육을 가장한 신앙 활동을 하지.
사람 심리란 게 신기해서 이놈의 가좆같은 회사, 돈 때문에 죽지 못해 다닌다, 이러면서도 남이 자기 회사 욕하는 건 못 참아. 회사를 그렇게 욕하면서도 라이벌 회사와 비교하게 되면 우리 회사가 저새끼들보단 낫지, 이러거든.
욕하면서도 자기 회사에 충성심을 갖게 되는 거야. 이런 심리를 적극 활용하는 게 다단계야.
어차피 회사라는 게 제품값 전부를 먹을 수 없거든. 아이스크림을 예로 들면 공장 생산가격은 대충 100원 정도야. 이게 대형 집하장, 운송업자, 중간 도매상, 운송업자, 소매점, 순으로 넘어가면서 1500원이 돼. 유통과 마케팅 비용이 이렇게 크단 말이지.
다단계는 이 유통과 마케팅을 소비자한테 떠넘기는 거야. 다단계는 밑에 부하가 팔 수록 자기 이득이 늘게 되는 구조잖아. 회사에서 중간 도매상한테 넘기면 중간 도매상이 이득을 남겨서 소매업자한테 넘기는 거랑 똑같지.
남앙우유가 욕먹던 거 기억나? 도매상에게 유통기한 지난 물건을 억지로 밀어 넣고, 물건 값을 받았지. 도매상이 팔든, 폐기하든 피해는 신경 안 쓰고. 이게 다단계랑 무슨 차이가 있겠어. 오히려 다단계보다 나쁘지.”
“그러네. 그런데 왜 다단계지? 다른 회사들하고 똑같은데.”
“책임 지지 않지. 회사에선 직원 고용해서 마케팅을 시키고, 잘하면 성과금을 줘. 다단계는 물건 값을 받고 도매가로 넘겨준 후, 그 물건이 잘 팔려서 이윤을 많이 남기든 못 팔아서 재고가 쌓이든 신경 안 써. 다단계는 마케터가 고객인 셈이지. 그리고 경기가 어려워져 구조조정을 해야 한다면 일반 회사는 노동법 때문에 해고도 못해. 생월급 주면서 직원 노는 걸 구경하게 되지. 반면 다단계는 굶어 뒈지든 말든 신경 안 써.”
“결국 졸라 나쁜 게 맞네.”
“아니야. 확실한 장점이 있지. 충성도가 달라. 다단계의 교육이란 종교활동 이랬잖아. 판매원을 모아서 당신은 소중한 사장님입니다, 이렇게 자존감을 키워주고, 하나씩 앞에 나와 자기 경험담을 말하고 준비해온 반찬을 나눠먹으며 서로서로에게 존재감을 드러내.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가장한 야유회를 가고 사장님사장님하며 치켜세워주고. 종교행사를 그대로 따라하는 거야.”
“그게 의미가 있냐?”
“이러면 소속된 이들은 커뮤니티가 형성돼. 현실은 구질구질하지만 이곳에서는 자존감을 얻을 수 있고, 내가 대단하고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얻지. 종교와 똑같이 말이야.
전에 형이 말했지? 아무리 들어도 개소린데 그거에 속아 종교활동 하고 돈을 바치는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하지만 종교인들은 돈을 바치는 이상으로 정신적 만족감을 얻어.
그걸 판매에 적용한 게 다단계야. 종교에 빠지듯 다단계에 빠진 사람은 적극적 신자가 되지. 휴지? 어차피 사서 쓰는 거 내 회사 물건 쓰자. 치약, 비누, 쌀, 생수, 모두 마찬가지야. 어차피 소비하는 거 내 실적도 올리면서 사서 쓰자.
그래서 대형 다단계를 보면 세상 모든 물건을 팔아. 그 물건이 좋은 건 아니지. 타 회사의 싸구려 물건에 포장지만 바꿔서 내놓는 비싼 물건이니까. 사람들은 더 싸고 좋은 물건이 있다는 걸 알지만 다단계 신자는 그걸 쓰고, 적극 추천하고, 홍보해.”
“...... 그러니까 그걸 적용시키자고?”
“어. 원래 유통과 홍보를 신자에게 맡기는 게 다단계니까. 광해소망교에 유통을 맡기자.”
“배가 하는 걸 사람이 한다고? 그게 효과가 나겠어?”
“효율은 줄지. 하지만 손발이 부족하잖아. 처음엔 좀 고생해도 자리 잡으면 홍보와 유통에 엄청난 힘을 내게 되어 있어. 처음 광해소망교를 기획할 때부터 생각해왔지.
어차피 다음 단계로 갈 때도 됐잖아. 슬슬 자본주의를 심을 때니까 신자들한테 맡기자. 무산의 면포는 함흥까지만 옮겨주고 한 단계씩 넘길 때마다 수익을 보게 해. 가격은 당연히 시장에서 정할 테고. 태안의 유리도 신자들이 이동하면서 조금씩 수익을 보게 만들어. 남해의 자기도 알아서 내륙으로 가게하고. 우리는 각 지역의 광해상회마다 다른 매입가격을 정해 붙여놓기만 하면 돼. 큰 돈을 벌고 싶으면 스스로 멀리 이동할 테고 적은 돈으로 만족하면 집 근처만 왔다 갔다 하겠지.”
“결국 보부상을 양성한다는 거네.”
“그렇지. 하다보면 배로 수송하는 게 큰 이문이 남는 걸 깨닫게 될 테니 상단도 많아지고, 배를 모는 이도 많아지겠지. 지금이야 나라에서 돈을 주고 퀘스트 형식으로 일을 맞기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지. 스스로 옮기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시장가격이 형성되고 상업이 발전해.”
“그래. 이해했어. 그런데 그게 왜 다단계냐? 그냥 돈 벌 놈이 나서는 거 아니야?”
“아니지. 종교활동에서 판매원을 일으켜 세워 칭찬하는 걸 반복해. 그럼 사람들이 경쟁이 붙지. 즉, 상업정신을 심어 주는 거야. 그리고 다른 상단들도 상품을 내기 시작했잖아. 특히 대나무 바구니나 한지, 홍차 같은 건 이미 경쟁에서 밀리기 시작했어. 그런데 우리가 이러면 소망교 교인은 결국 우리 물건을 쓰게 될 테고, 경쟁에서 승리하게 돼.”
“야. 그러면 다른 애들 다 죽겠네?”
“적응 못하면 죽고, 살아남으려고 노력하면 더 싸게 더 좋게 만들겠지. 크크큭. 내가 다 가질 거야.”
“지금 버는 것도 다 못 써서 나라에 퍼주고 있으면서 욕심은 참.”
“어쨌든 경쟁이 심해지니 물건은 점점 더 좋아지겠지. 자본주의 순기능이 작용하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다단계를 만드는 게 아니야. 우린 생산 가격으로 물건을 내보내고 다단계식 신앙활동만 살짝 진행하면 알아서 생겨날 거야. 그 과정에서 유통이 발전하고.”
“음... 알았다. 왜 다단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통을 맡기는 건 찬성. 시행해.”
“어. 그러려면 선결할 문제가 있어. 소규모 거래가 활성화되려면...”
“화폐?”
“맞아. 은행부터 열어야지.”
“허균 준비 됐냐?”
지금껏 조용히 듣기만 하던 허균이 방긋 웃었다.
“전국 10개소에 완벽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 시행해.”
“옛! 전하.”
창덕궁 돈화문 옆에 새로운 건물이 건설되었다.
기와를 얹은 커다란 객청 뒤에 거대한 창고가 있고, 앞에는 알 수 없는 탑이 천에 가려져 있다.
탑은 H빔 형식의 쇠기둥을 세우고 바닥과 천장, 삼면을 철판으로 막았다.
정면은 만들기 더럽게 힘들고 비싼 평판유리를 붙였고, 그 앞에 철망을 이중 삼중으로 설치했다.
유리에 새가 부딪쳐 깨지는 걸 막기 위함이겠지.
쇠로 만든 높은 건물의 내부는 황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란 금이 아름다운 광채를 뽐내고 있다.
쇠 건축물 뒤 객청엔 광해은행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귀하디 귀한 백관이 무려 세 명이나 광해은행에 전속되어 오직 은행만 관리한다.
창덕궁 앞 광해은행을 가렸던 천이 걷혔다.
“대충 50톤 정도 되겠네. 엄청 많이 캤구나.”
와아아아.
광해가 감탄하듯 모여든 백성들이 입을 쩍 벌렸다.
단군력 3년 11월 1일.
광해은행이 문을 열었고, 시대가 전환된 날이다.
사람들은 황금의 광채에만 시선을 뺏기고 있지만 역사는 인류의 모든 삶을 바꾸게 되는 자본주의의 시작점이라고 기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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