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뭐
순도 100% 픽션입니다
“이 소는 제 소가 맞습니다.”
“아닙니다. 제 소입니다.”
농부 둘이 한우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싸운다.
용상에 비스듬히 앉은 광해가 따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초란. 조사한 내용은?”
“마을 사람들 말로도 모르겠답니다. 각자 소가 한 마리씩 있었고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합니다. 두 마리가 똑같이 생겨서 마을 사람들도 분간할 수 없다합니다.”
두 농부의 소망이 똑같다.
자기소를 되찾고 싶어 한다.
둘 다 진정으로 믿으니 소망집행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어이 농부들. 좌우로 50보씩 가서 소를 불러봐라.”
광해는 지혜로운 판결을 내렸다.
두 농부는 멀리 떨어져서 애타게 소를 불렀다.
“누렁아. 여기다. 누렁아~”
“꼴 먹자 꼴. 황각아. 콩 껍질 잔뜩 넣어줄게. 이리온. 황각아.”
두 농부의 애타는 외침 사이에 낀 한우는 소 닭 보듯 하다가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쩝쩝쩝쩝쩝쩝.
위에서 반죽되던 풀을 입으로 올려 광해를 보며 천천히 씹는다.
감히 왕의 얼굴을 보며 되새김질하다니.
“아오 짜증나. 내가 이런 것도 판결해야 해? 예서야. 오늘은 소고기 먹자. 저 소 사서 소 값을 절반씩 나눠줘라.”
음메~
보름간 출근했더니 애매한 판결은 전부 해결했다.
또 한동안 판결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겠다.
마력은 마이너스 900만에서 멈췄다.
판결과 소망교의 소망으로 채워 -100만까지 올렸는데 더 이상 판결할 게 없다.
소망교가 열심히 기도하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초란. 사건을 모아둬라. 난 한동안 나오지 않을 테니.”
“알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고맙다고 하는 이초란을 두고 떠났다.
궁에 가서 놀아야지.
이항복의 제자 김류는 남경에 왔다.
국왕에게 받은 광해님의 은혜로 고관들의 환심을 사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구하고 있었다.
묘족 역사서.
장족 역사서.
각 지방 군벌 평가서.
검은 돼지, 집오리, 알 많이 낳는 닭.
고구마, 고추, 감자, 호박, 토마토.
종자는 많이 구할수록 좋다고 했으니 돈 되는대로 사 모으고 있다.
벌써 두 차례나 고국으로 보냈다.
하지만 점점 불안해진다.
스승 이항복은 국왕과 대화한 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전해 듣기로는 조선과 대명 사이에 큰 마찰이 일어날 거라 했다.
몸조심하라던 스승의 당부.
“그런데 왜!”
북경에서 허가도 없이 남경으로 내려왔다.
언제든 잡혀 죽을 수 있는 죄다.
불안한 마음에 항상 주위 분위기를 살폈다.
북경에서 남경으로 도망치듯 내려온 후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은 적이 없다.
짐도 풀지 않았고, 말안장도 푼 적이 없다.
언제든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왜 분위기가 좋은데!”
남경의 콧대 높은 고관들이 김류 앞에서 살랑거린다.
어떻게든 광해님의 은혜 한 알을 얻기 위해 앞 다투어 호의를 베푼다.
그게 벌써 다섯 달 째.
“사람 피 말리게 하는 작전인가!”
설마 북경에서의 소식이 남경에 전해지지 않은 건가.
다섯 달이나 지났는데?
명나라 부패가 극에 달하고 나라꼴이 개판인건 알겠지만 설마 그 정도로 썩었을까.
설마......
불안함 속에 3차분의 수송을 준비하고 있다.
광해님의 은혜를 팔아 배를 구하고, 광해님의 은혜를 뇌물로 써서 상행을 허가받았다.
네 척의 배를 구해 조선에 없는 희귀품을 가득 실었다.
그런데.
“홍수입니다. 홍수.”
“엄청난 홍수가 났습니다. 참의 영감. 우리도 떠나지요.”
난데없이 양자강이 넘쳤다.
남경 시가의 절반이 물에 잠겼고, 백성들은 가재도구를 모두 버리고 친척집이나, 지붕으로 피난을 떠났다.
제자들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김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구하라 한 것을 다 구하지 못했다. 남아서 임무를 완수한다.”
김류는 남경을 떠나는 배를 아련히 바라보았다.
상선은 고향땅 동쪽으로 거침없이 떠나갔다.
“여어. 허균.”
“소신이 없는 사이 고생하셨다 들었습니다. 역시 제가 없으니 안 되겠죠?”
탄금대에 휴가를 떠났던 허균이 돌아왔다.
이매창, 유희경과 함께한 시인들의 나들이.
이매창과 함께 살고 싶다 - 94765
소망은 오히려 더 커졌다.
대체 이매창에게 어떤 매력이 있는지 모르겠군.
“방금 김류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3차 분이 왔고 전보다 세 배 많아졌습니다.”
“김류라고 했나. 일 잘하네. 다음 보급표하고 알약 보내줘라. 전처럼 이항복이 서신을 써서 잘 다독여주라 하고.”
“백사 대감은 지금 국경방비를 위해 의주에 가 있습니다.”
“음. 알아서 해.”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국의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엄청난 홍수가 낫다고 하는군요.”
허균의 말에 광해는 서신을 빼앗아 들었다.
황하 제방 무너져 하남, 호북, 안휘 등지가 물에 잠겼고, 이재민이 셀 수 없이 생겼다.
회하와 장강도 넘쳐 난리가 났다.
수백만 이재민을 감당하지 못해 매일매일 굶어죽는 이가 부지기수다.
김류의 서찰에 중국의 끔찍한 상황이 그려졌다.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수? 마력 뺏기는 건 보름전이 끝이었는데.’
1차 붕괴로 죽은 자들만 광해 탓이고 2차 피해는 광해의 탓이 아닌듯하다.
광해는 마력소모가 적은 걸 안도하다가 이런 자신이 끔찍히 역겨웠다.
“시발.”
잊자.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평생 사로잡힐 셈이냐.
잊는다.
“예? 아하. 명국 백성들의 고충을 걱정하시는군요. 역시 자애로우십니다.”
“시끄러. 보급 온 것은 농축산부에 보내라.”
“알겠습니다. 아차차. 광해농업과 광해축산업의 책임자 윤선도에게서 사직서가 왔습니다.”
똑똑하지만 약간씩 허술한 허균은 꼭 하나씩 잊어버린다.
글쟁이는 어쩔 수 없지.
곁에 윤선도나 심지원 같은 꼼꼼한 종사관이 필요하다.
“사직서?”
“예. 삼년상을 치러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한다더군요. 캬. 이친구도 참 명문입니다.”
“윤선도라...... 이 새끼 전에도 하기 싫다고 했잖아. 일하기 싫어서 뺑끼 쓰는 거 아니야?”
“저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알아봤는데 실제로 모친상을 당했습니다.”
“음.”
광해는 고민에 빠졌다.
기술 발전보다 법안 변화가 느리고, 법안 변화보다 관습 변화가 느리다.
기술이 발전해 사회가 변하면 과거의 법이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막게 된다.
이후 수많은 진통을 거친 후에야 법안이 기술발전을 따라간다.
새로운 법안이 나타나면 오래된 관습이 발목을 잡는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광해는 사회개혁을 했고, 유학의 해로움을 전국 학당을 통해 널리 알리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잔재가 남아있다.
한 번에 뿌리 뽑을 수 없다.
“억지로 윤선도를 앉힐 필요는 없지. 그 정도는 그냥 죽여도 상관없는 인재야. 하지만 이왕 개혁할 것 윤선도부터 시작하지. 허균. 유교의 악습인 삼년상을 금지하겠다.”
“예? 삼년상이 어찌 악습이온지.”
“그건 스스로 생각해봐. 지금 윤선도는 어디에 있지?”
“아직 오산의 광해농업에 있습니다.”
“명에서 온 보급품을 전달하는 겸 방문하겠다.”
“알겠습니다. 함대를 준비하겠습니다.”
배로?
운 없게 배가 뒤집어지면 꼼짝없이 죽는다.
마력이 없을 땐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
“육로로 가겠다. 준비하라.”
“예. 국가가 변하는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좋겠지요. 준비하겠습니다.”
다음날 성대한 행렬이 한성을 떠났다.
열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커다란 마차에 광해가 타고, 금군 백명과 훈련도감 병사 천명이 따랐다.
좌별장 이중로와 우별장 간삼이 모두 나서는 대규모 호위다.
거기에 궁녀와 내시, 가마꾼과 숙수, 악단 등이 포함되어 총 인원은 천오백 명 가까이 되었다.
광해는 넓은 마차에 예서와 허균, 최명길을 태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길을 떠났다.
“올해도 대풍입니다.”
“9월인데 벌써 알 수 있나?”
“알곡이 매달린걸 보면 알 수 있습죠. 광해비료를 뿌린 농경지는 알곡이 두 배 이상씩 영글었습니다. 이대로 가을걷이를 하면 전국에 풍년가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애석한 것은 비료를 뿌리지 않은 밭에선 예년정도란 것이지요. 내년엔 반드시 모든 밭에 뿌리도록 교육하겠습니다.”
식량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허균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취합해 벌써부터 풍년을 예보했다.
“그건 어렵다. 비료는 밭의 절반만 공급된다.”
“예? 어째서입니까? 뿌리기만 하면 알곡을 더 얻을 수 있는 신물이온데.”
“신물이라서 그렇다. 모든 밭에 뿌릴 양을 생산할 수 없다.”
“아. 그렇군요. 안타깝습니다.”
광해는 거짓말을 했다.
염초 생산을 약간 줄이면 비료를 무한정 공급할 수 있다.
하지만 모현성의 아이디어를 받아 비료를 일정량만 공급하기로 마음먹었다.
“형. 사람들은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인 줄 알아. 지금은 고마워하지만, 모두에게 분배하면 얼마 후 고마움이 사라질 거야.”
“그럼 마력만 잡아먹게 되는데.”
“그렇지. 그래서 조금 부족하게 공급해야 해. 그들의 소망이 닿아야 공급할 수 있다 교육하고 받고 싶다고 갈망하도록 만들어야지. 소망이 강한 자 위주로 보급하고.”
“야. 전국의 모든 농부를 만나서 확인해서 나눠주라고? 말이 되냐?”
“그게 가장 좋지만 불가능하지. 그러니 전국의 교단에 맡기자. 각 교단마다 인원을 정해서 가장 신실하게 종교활동을 한 순서대로 비료를 주자. 이래야 교단도 힘이 생기고, 종교활동도 강해지지.”
“좋은 생각 같군. 그렇게 해라.”
어차피 일은 모현성이 한다.
예전 생각을 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너른 평원엔 벼가 초록 잎사귀를 펼치고 있고, 그 사이 직선으로 뻗은 도로가 있다.
백만 노역수를 부려 만든 도로다.
땅을 깊게 파서 돌과 자갈을 채우고 그 위에 흙을 깔아 열심히 다진다. 그 위로 대충 구운 진흙벽돌을 촘촘하게 깔면 도로가 완성된다.
비가 올 때마다 땅이 패이고, 벽돌 사이로 뽑아도 뽑아도 잡초가 자란다.
10년 이상 유지보수를 반복해야 단단히 굳어 도로처럼 될 것이다.
그래도 발전하는 게 보인다.
조선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던 광해의 눈에 말을 타고 있는 임경업이 들어왔다.
왕의 근접 호위병으로 광해가 외출할 땐 곁을 지키고 평소엔 외궁 금군훈련장에서 단련을 한다.
임경업은 무소의 뿔처럼 돌진하는 습성이 있기에 죽어라 훈련을 거듭했고, 이젠 간삼과 크게 밀리지 않는 힘과 실력을 갖췄다.
역사 속 임경업은 별로지만, 이 임경업은 꽤 괜찮다.
단순하고 돌격성향이 강하지만, 머리도 꽤 똑똑하다.
똑똑한데 요령피우지 않으니 쑥쑥 성장하고 생각도 굵어졌다.
평소 같으면 사내대장부 어쩌고 하면서 주위를 휙휙 둘러보며 눈에 불을 켜고 호위했을 텐데 오늘따라 딴생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춘미와 혼약하고 싶다 - 98048
못 보던 소망이 생겨나있다.
‘춘미와 결혼시키면 저 마력을 얻는 건가. 춘미가 누구지.’
참 쉬운 소망이다.
그간 호위병으로 데리고 다니며 총애한 은혜를 마력으로 갚는구나.
그날 저녁. 수원부에 도착해 관아에 거처가 마련되었다.
예서의 지휘하에 궁녀와 내시들이 왕의 침실을 꾸밀 때 광해는 나무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혔다.
저쪽 나무 밑에 임경업이 멍하니 서서 침실을 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사내대장부는 매순간 수련을 멈추지 않습니다.’ 라며 합 하압 거릴 놈이 저러니 궁금하다.
“임경업. 이리와 봐라.”
왕이 부르자 임경업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무슨 고민 있느냐?”
“예. 그......”
망설이는 것도 낯설다.
이 단순한 놈이.
200명으로 심양을 정복해 청나라를 무너뜨리겠다 한 단순무식한 놈이 고민이란 걸 하다니.
잠시 고민하던 임경업이 눈을 부릅떴다.
결심했군.
이제 어떤 황당한 걸로 웃겨주려나.
“주상 전하. 아니 광해님께 소망교 교인으로서 묻겠습니다.”
“살살 물어라.”
“예? 아... 광해님. 제가 어떤 여인에게 마음이 빠졌습니다.”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라.”
그래야 마력을 얻지.
“그런데 그 여인은 다른 이의 여인이 될 처지입니다.”
생각보다 문제가 복잡했군.
“결혼 했어?”
“아닙니다.”
“그럼 문제없네. 당당하게 데려와. 너 왕의 호위잖아. 너보다 앞날 창창한 놈은 별로 없을걸. 그 여자도 네가 싫진 않겠지.”
겸사겸사 마력도 좀 넘겨주고.
“그래도 어찌......”
“야 생각해봐. 네가 좋아하는 그 여자가 다른 남자 품에 안기고, 다른 남자의 아기를 낳으면...”
임경업의 눈동자가 불타고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건! 참을 수 없습니다!”
“그치! 남자라면! 당당히! 도전해! 결투를 하든! 여자에게 선택하라 하든!”
“남자라면! 도전하겠습니다!”
“그래.”
예쁜 사랑 얻어서 마력 넘겨줘라.
“주상 전하! 춘미는 내 여자입니다. 손대지 마십시오! 결투를 신청합니다! 승자가 춘미를 얻는 것입니다!”
응?
잘못 들었나?
이 새끼 뭐라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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