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정신이 혼미해졌다.
순도 100% 픽션입니다
조선 역법에 따른 신년이 되었다.
이덕형과 일행은 중국을 떠돌며 전염병을 치료하고 봉사를 하다가 겨울이 되어 전염병이 잠잠해지자 남경에 입성했다.
김류와 일행이 나와 공손히 모셨다.
“명의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해.”
“예. 관아가 전혀 기능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구휼미가 오건만 모두 고관의 창고에 쌓일 뿐 정작 굶주린 백성에게 가는 건 얼마 없습니다. 본래 살던 고을로 돌아간 백성들은 모두 쓸려가고 터만 남은 집에서 한숨 쉬고 있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식량을 잃었고, 경작물도 쓸려가 가을걷이도 못했지.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가야할 구휼미는 가지 못하고. 천만 이재민이 모두 굶주리고 있어.”
남의 나라 백성이지만, 두 학자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넘친 토사로 대운하도 막혔습니다. 남방에서 올라가는 세운선이 운하를 사용하지 못하자 바다로 오르다가 대부분 침몰된다 합니다. 이제 슬슬 북경 쪽에서 식량부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침몰? 그것도 빼먹는 게야. 침몰했다 보고하고 자기 창고에 보관하는 거지.”
“허헛. 이 나라는 너무 썩었군요.”
“...... 조선도 그러했다네. 거의 모든 식량을 성리학자가 빼먹었지. 난 이 나라를 욕할 자격이 없다네.”
이덕형의 깊은 한숨에 김류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집안도 은결을 챙기다가 박살났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4차 수송분이 준비되었다며?”
“예. 행정이 마비되면서 예정보다 많이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구할 수 없었을 오랑캐의 역사서가 쌀 한 됫박에 팔리고 있습니다.”
“오랑캐라...... 그래.”
“그리고 한음 대감 마님. 부탁이 있습니다.”
“말해봐.”
김류는 말 대신 서신을 꺼냈다.
3차 수송선이 돌아올 때 그의 일가에서 몰래 보내온 조선의 소식이었다.
“김경징이...... 죽었다고?”
대마도에서 소유키를 강간하려다 죽은 김경징은 김류의 아들이었다.
“못난 자식이지만 제 아들입니다.”
“주상께서 개인적인 원한으로 죽인 건 아닐 게야.”
“압니다. 들려오는 소식만으로도 공명정대하신 분이라는 건 알 수 있습니다. 7명을 강간하고 죽였다는데 가문의 조사에 따르면 맞는 것 같다고 하더이다. 하오나 그래도 제 자식입니다.”
“... 어쩔 생각인가?”
“4차 수송에 제가 조선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에서 좀 쉬고 싶습니다.”
“...... 막을 수가 없구먼. 알겠네.”
“죄송합니다. 한음 대감마님.”
“이해하네.”
김류의 일행은 2년 전 북경에 파견된 이항복과 이덕형의 제자들이다.
이덕형이 한동안 명나라에 있을 테니 이들을 통솔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이덕형은 장강을 타고 떠나는 여섯 척의 수송선을 봤다.
돈으로 매수한 수송선은 이런저런 종자와 돼지, 염소, 양 등을 가득 실었다.
김류가 탄 선단은 이틀 후 바다에 다다랐다.
이제 닷새 지나면 한성에 도착한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
이 가까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2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다.
가문은 착복한 재산을 전부 빼앗기며 박살이 났지만, 김류가 세운 공으로 큰 재산을 받았다 한다.
무너진 가문이 김류 덕에 다시 선 것이다.
김류는 아들에 대한 생각, 가문에 대한 생각을 하며 고량주를 마셨다.
메에에에.
꿀꿀꿀꿀꿀꿀.
흔들리는 선체에 짐승들이 운다.
큰 바다의 파도가 거칠어지고 있다.
“짐승 우리가 단단히 메어졌는지 확인해봐라.”
“예. 아앗. 참의님.”
“왜?”
“해적. 해적입니다.”
일꾼이 소리 지르자 다들 남쪽을 봤다.
수송선보다 작고 날렵한 배 십여 척이 열심히 노를 저어 달려왔다.
사색이 된 선장이 돛을 조종해보지만 바람방향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해적선에게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
김류와 고용한 선원 전원이 해적에 사로잡혔다.
크허어엉.
원주민 마을 쪽에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놈입니다! 괴물이겠죠!”
신년맞이 떡국을 먹고 있던 임경업이 냅다 소리쳤다.
“그런 것 같구나. 산의 악마. 잡으러 가자.”
광해가 그릇을 놓고 일어나자 다들 벌떡 일어났다.
부대는 원주민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주둔했기 때문에 달려가는 사이 상황이 끝나 있었다.
“내 아이. 내 아이가!”
“산의 악마는 저리로 갔어!”
광해는 원주민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달렸다.
간삼과 임경업 둘만 따라오게 시켰다.
“어쭈 빨리 안 뛰지? 감히 왕보다 느려?”
흔적을 찾은 이상 저 놈은 죽은 목숨이다.
광해는 산의 악마보다 부하들에게 더 신경을 썼다.
“커헉. 커헉. 속이 부대껴.”
“흐억. 흐억. 헉 헉 헉. 흐억.”
감히 라면을 맛없다고 한 벌이다.
전날 먹은 매운 음식에 하루 종일 피똥을 싼 간삼과 임경업은 평소보다 못 달렸다.
마을을 지나 남쪽 산으로 진입했다.
저 멀리 희끗희끗 움직이는 물체가 보인다.
속도는 성인이 달리는 정도.
“느리네. 니들 평소 속도로만 달려도 잡을 수 있겠어. 달려라. 따라잡는다.”
심한 경사만 아니라면 말이다.
“어쭈. 거리가 벌어진다. 똑바로 안 뛰나? 저 놈을 놓치면 사람이 죽을 텐데 잡기 싫으냐?”
“흐억. 흐억. 흐억. 흐억.”
“우우웨엑.”
임경업이 토를 하자 광해는 장난을 멈췄다.
임경업 때문은 아니고 저 멀리 달려가는 괴물의 입에 물려있는 사람을 본 것이다.
‘아이가 물려갔다고 했나.’
아이가 물려 죽었다고 슬퍼할 성격은 아니지만, 아직 살아있다면 못 본 척 무시할 악마는 아니다.
“먼저 간다.”
광해가 신체강화 마법을 켜 속도를 올렸다.
나무와 수풀이 우거진 경사로의 바위를 뛰어넘으며 쫓자 금세 따라잡았다.
산의 악마는 호랑이처럼 생겼다.
호랑이 비슷한 외형에 얼굴은 좀 더 날렵하다.
털은 연한 주황색 베이스에 검은 원 무늬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호랑이는 아니고. 뭐지. 시라소리? 표범? 잘 모르겠군.”
사람만한 이 짐승은 비쩍 말라 갈비뼈윤곽이 드러나고 배는 등가죽에 붙어 있었다.
입에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물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총을 아공간에 넣었다.
물고 있는 아이가 살아 있다면 총으로 쏴선 안 된다.
총에 맞은 순간 강하게 깨물 수도 있으니.
100보, 50보, 10보.
거리가 좁혀지자 짐승은 물고 있던 아이를 놓고 그대로 도망갔다.
“기다렸다.”
슈슈슝.
광해의 손에서 철사가 날아가 짐승의 심장을 뚫었다.
그 순간.
절망으로 물든 짐승의 소망이 보였다.
자식이 건강하게 장성하기를 - 74055
“짐승의 소망? 허참. 그런 것도 가능해?”
동물들도 생각은 하겠지. 동물도 학습이란 걸 하니까.
그런데 소망으로 구체화된 건 처음 봤다.
죽음을 직감하고 죽는 순간 자식의 미래를 소망하다니.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성애는 참 위대한 것 같다.
아이는 등과 배에 이빨구멍이 나서 피가 약간 흐르고 있었다.
치료해주려다가 며칠 정도는 죽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이는 마을에 가서 부모 앞에서 치료해줘야겠다.
그래야 고마움을 느끼겠지.
어차피 마력 쓰는 거 이정도 이득은 챙겨도 괜찮잖아.
광해는 아이의 괴로움을 곧장 없애줄 만큼 착하진 않다.
“헉. 허억. 헉. 헉.”
간삼이 먼저 도착했다.
“간삼아. 임경업 오면 아이를 마을로 옮겨라.”
“헉. 허억. 헉.”
이것은 대답인가, 꼰티인가.
광해는 간삼에게 아이를 맡기고 짐승의 흔적을 추적했다.
발자국과 채취 등을 추적하며 조금 걷자 허리 높이만한 동굴이 나왔다.
몸을 굽히고 들어가자 죽은 시체가 보였다.
늙은 숫놈.
비쩍 말라 있고, 어깨 쪽 긴 상처가 곪아서 썩고 있었다.
“수컷이 먼저 죽었고,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아까 그 암컷이 직접 사냥에 나섰군. 그놈도 꽤 늙었던데. 나이 들어 힘이 빠졌으니 사람을 공격했겠지.”
야생동물은 사람을 잘 공격하지 않는다.
특히 사람이 모여 사는 마을을 습격하는 일은 드물다.
사람이 야생짐승을 무서워하는 만큼 짐승도 사람을 무서워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은 사람고기 맛을 알아버린 놈이거나 몸이 느려져서 잽싼 먹이를 잡을 수 없게 된 놈뿐이다.
“미양~”
숫놈을 살피는데 안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안쪽을 보니 갓 태어난 새끼가 있었다.
발바닥만한 크기에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새끼가 몸에 비해 큰 머리를 휘청거리며 어미를 찾고 있었다.
화아아아아아~
노랫소리가 들린다.
이 노래는...... 성가?
저 아이는.
“미야~”
쿵.
심장을 얻어맞았다.
저렇게 귀여운 생물이 있다니.
새끼고양이보다 마흔 배 큰데 새끼고양이보다 마흔 배 귀엽다.
“먀아아아아~”
“그래. 어미괴물아. 니 소망 접수했다.”
7만 마력은 소중하니까.
광해는 새끼괴물을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예서야. 예서 여기 있느냐?”
“예? 광해님?”
내궁에 있는 광해산업 집무실에 있던 예서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통신했을 때만해도 저 멀리 남쪽 섬에 있던 국왕이 갑자기 뿅 나타났다.
광해가 한 순간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면 보충하기 힘든 신력을 매우 많이 소모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광해가 지난 몇 년 간 순간이동을 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순간이동? 큰일 났습니까? 어디? 무슨 이...”
“고양이 젖. 갓 새끼 낳은 고양이를 구해와라.”
“예? 고양이는 갑자기 왜?”
광해는 품에 안고 있던 새끼를 내밀었다.
“꺄아아아. 예뻐!”
순간적으로 손을 뻗어 안으려는 예서. 광해는 휙 숨겼다.
“......”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
먀앙~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어색함이 잠에서 깬 새끼의 울음에 깨졌다.
“너 고양이 싫어하지 않았어?”
“예.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왜?”
“글쎄요. 이건 고양이가 아니군요. 다른 생명체입니다. 팔이 절로 뻗어지는...... 그런데 고양이 어미보다 큰데 젖어미가 되겠습니까?”
“그렇군. 최대한 많이 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많이. 그런데 남쪽 섬에 계시지 않았사옵니까? 이렇게 오신 연유가 혹시 이 새끼 때문이옵니까?”
듣기로 신력 소모가 크다 하셨는데...... 라고 중얼거리는 예서.
광해는 예서의 말에 이성을 약간 되찾았다.
“그...... 생물은 멸종 위기종이다. 전 세계에 그놈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 꼭 살려야 한다. 그러니 고양이 젖어미를 최대한 구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하온데 남쪽섬은?”
“남쪽섬에서 할 일은 끝났다.”
모현성에게 통신 넣어서 정리하고 오라하지 뭐.
어차피 대만섬에서 할 일은 끝났고, 다음 일정은 복귀였으니.
무언가 할 일을 놓친 게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잊자.
예서가 나가 궁녀와 내시들에게 창고와 한성의 젖고양이를 잡아오라 명할 때 광해는 모현성에게 통신을 걸었다.
-뭐? 한성? 왜? 큰일났어?
너무 귀여워서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고 해야 하나.
“...... 큰일이야 났지. 거기 알아서 마무리하고 광해함을 타고 돌아와라.”
-뭐? 왜? 왜? 무슨 일인데?
“시끄럽고, 대만에서 일 정리하고 오라고.”
통신을 끊었다.
모현성이 재차 연결하자 아예 연결을 끊어버렸다.
별일이야 있겠어.
예서가 가까운 내성에서 젖어미 세 마리를 잡아왔다.
눈도 못 뜬 새끼괴물이 쪽 빨자 순식간에 쪼그라드는 고양이 젖.
세 마리로는 택도 없다.
광해가 품에 안고 젖을 주는 것을 보던 예서가 입을 열었다.
“내궁에 갔는데 소유키와 모현성공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 남쪽 섬에 놓고 왔어. 곧 올 거야.”
“그.... 그렇습니까?”
어쭈 왜 웃는데?
예서에게 새롭지도 않은 소망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우리 예서. 많이 야해졌네.”
“에에에?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 그럼 다른 후궁에게 갈까?”
“저... 전하. 보고 싶었사옵니다.”
“흠 그렇지? 밤에 진지한 대화를 해 보자고.”
미야앙~
새끼 괴물이 울부짖었다.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