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산남대군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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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
광해의 큰아들 산남대군은 오전에 성균관 학당에서 수업을 받는다.
주로 농부의 아이들이 받는 수업이기에 약간 수준이 떨어지지만, 꾸준히 바뀌는 조선사회를 알기엔 학당이 가장 효과적이다.
산학은 학습용 주판을 써도 여전히 어렵고.
“저하. 꼭 이 음식을 먹어야 하옵니까?”
수업이 끝나고 학당에서 주는 식사를 하는데 옆에서 능양군이 투정처럼 말했다.
창덕궁 내원이 바로 뒤에 있으니 이곳에서 먹지 않고 창덕궁의 세자수라에서 먹어도 될 일이다.
“아바마마께서 이리하라 하심은 백성의 삶을 이해하란 뜻이겠지요. 그러하면 함께 먹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광해는 별 생각 없었지만, 산남대군은 그렇게 넘겨짚었다.
나물 서너 가지와 소금물에 절인 배추를 된장에 비빈 비빔밥.
주위 아이들은 산더미처럼 비벼 허겁지겁 먹고 있다.
세상이 바뀌었다지만 아직 하루 한 끼가 힘든 집안이 많다.
아이들을 학당으로 모으기 위해 점심에 밥을 주자 오히려 아침 저녁을 굶기는 집이 생겨나고 있다.
학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집안의 부족한 쌀은 동생들에게 양보하라는 뜻이다.
안타깝지만 여기까지가 한계다.
아바마마의 말로는 나라 전체가 잘 살게 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라 했다.
백성의 삶을 이해하라는 아바마마의 뜻을 받들어 산남대군 또한 맛없는, 하지만 아이들이 허겁지겁 맛있게 먹고 있는 밥을 열심히 먹었다.
덩달아 능양군과 능창군도 함께 먹어야 했다.
식사를 끝내고 산남대군이 종사관을 불렀다.
“오늘 일정은 어디입니까?”
“사간원입니다.”
산남대군의 종사관은 두 명으로 육방시험에 붙은 추자음과 장성체다.
광해와 인연이 있었던 둘은 노역형을 받게 되었지만, 그나마 편하고 미래도 밝은 일, 산남대군의 종사관 일을 보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노역형을 받고 있네. 이것도 아바마마의 뜻인가.’
두 종사관과 사촌형들 모두 노역형을 받는 중.
수호군 출신 금군위사 열 명만이 노역수가 아니다.
열두 살 산남대군은 이들을 자신이 교화시키라는 아바마마의 뜻인가 고민하며 길을 나섰다.
성균관에서 사간원으로 가는 길은 북적였고, 활기차보였다.
열 명의 위사를 이끌고 걷는 산남대군에게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인사를 올린다.
그들의 존중은 자신이 아닌 아바마마에 대한 존경이리라.
저 호의의 눈빛이 내게 오도록 더 열심히 해야 한다.
걷다보니 어른들 틈으로 아이들이 보인다.
웃으며 날뛰는 아이들과 물동이를 머리에 짊어진 아이들.
차이가 뭘까?
“잘사는 집과 못사는 집의 차이입니다. 저하.”
추자음은 잡다하게 아는 게 많다.
산남대군이 묻는 것에 최대한 대답하라는 임무를 받은 추자음은 세상일에 대한 질문에 열심히 대답하고, 모르는 것은 따로 조사해서라도 다음날 대답해준다.
“집안 마당에 우물이 있으면 물을 뜨러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우물을 파기는 힘듭니다. 힘 있는 양반가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낼 일이죠. 또한 땅을 판다고 항상 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죠. 집이 물가에 붙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집은 3년에 한번 오는 큰 장마에 쓸려 사라집니다. 집은 물가에서 멀리 떨어져 지을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물을 뜨며 다니는 건 너무해.”
“아비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어미도 집에서 일을 합니다. 베 짜는 일만해도 일 년 내내 해야 합니다. 양반집이라면 노비들이 하지만, 평민의 집에선 아이들이 물을 뜨러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전국 공통인거야?”
“예. 어디든 평민의 집이라면 아이가 물 뜨는 담당입니다. 무거운 항아리에 물을 채워 집안의 독을 채우는 일로 하루의 반절을 소모합니다.”
촌락마다 중심에 설치된 우물에서 물을 길어 집안의 독을 채우는 일은 아이의 몫.
아이들의 가느다란 팔다리로 물이 든 항아리를 이고 걷는 폼이 위태위태하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산남대군의 의문에 능창군이 대답했다.
“허대감의 계획에 상수도라는 게 있더군요. 십년 후부터 설치해서 삼십년 후에 끝낸다고 합니다.”
여러 관청을 돌며 다양한 서류를 읽은 능창군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천재다.
“십년. 더 빨리는 안 되는 거야?”
“상세 계획을 보긴 했는데...... 그 십년마저도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기술입니다.”
“음. 아바마마라면 해내실 거야. 신의 힘을 받으셨으니......”
산남대군은 물동이를 이고 가는 아이에게 시선을 줬다.
십년만 참으렴. 아. 그땐 어른이 되어 있겠네. 넌 고생해도 네 자식은 그 힘든 일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거리를 구경하며 사간원에 도착했다.
대사간 이상의가 마중을 나왔다.
“견학 오신다 들었습니다. 저하.”
“견학이 아니오. 소신은 아바마마를 도와 ‘일’을 하러 온 것이오.”
산남대군이 의젓하게 대답했다.
“허허. 알겠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준비해두었습니다.”
산남대군은 이상의를 따라가며 물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지방에서 올라온 상소를 분류하는 일입니다. 관원들이 한차례 분류했으나 한번 훑어보시고 상께 올릴 지 반려할 지 결정해 주십시오.”
대사간이 안내한 자리엔 상소문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산남대군은 능창군, 능양군을 양쪽에 앉히고 하나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동궐에서 최근 빙우유란 것을 즐긴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소는 농사를 돕는 고마운 보물이온데 귀한 소가 송아지에게 줄 우유를 상께서 가로챔은 도리가 아니오며......
엄청나게 긴 문장의 개소리다.
산남대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이스크림, 빙우유를 먹는 걸로도 상소가 올라오는구나. 아바마마께서 성리학을 멀리하심엔 이유가 있었어.”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능양군, 능창군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상소는 대부분 징징거림이었다.
살기 어렵다.
도와달라.
잘 살게 해 달라.
열녀문을 만들어 달라.
사문의 서원을 돌려 달라.
주상의 시간을 빼앗을만한 가치 있는 상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겹지만 세자라는 신분에 걸맞게 열심히 읽었다.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심장에 총 한 방, 머리에 총 두 방을 맞고 죽었는데 군 조사에 따르면 자살이라고 합니다. 억울합니다. 어찌 머리와 심장에 총알 세 방을 쏘고 자살 할 수 있겠습니까. 광해님이시어. 제 아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
“어? 이상하다. 이쪽에는 반려된 상소를 모았다고 했는데. 정언. 이 상소는 왜 반려된 겁니까?”
대사간은 일을 하러 갔고 세자의 의문에 대답하기 위해 남은 사간원 정언이 대답했다.
“그 상소는 평택현에서 올라온 상소입니다. 모현성공의 제자이자 백관인 원유창 공께서 직접 판결한 사건이오니 이치에 맞게 판결했을 것입니다.”
현재 백관의 권세는 의정부를 능가한다.
긴 시간 준비해 전국조사를 성공시켰고, 지방관과 각 분야의 장을 맡아 조선을 개혁하고 있다.
양반의 난으로 양반이 몰락하고, 성리학이 부정당함으로 살아남은 양반들조차 움추린 이때 백관에게 대항할 자는 거의 없다.
홍여순의 난 때 형조판서였다가 겨우 살아남은 대사간 이상의는 저자세로 시키는 일만 하고 있으니 그 제자들인 사간원 관료들이 감히 백관의 일에 딴지를 걸지 못했다.
“음. 그런가요. 제가 알 수 없는 깊은 뜻이 있나보군요.”
열두 살 산남대군은 이런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모현성 아저씨의 제자인 백관이라면 이치에 맞게 판결했겠지 하고 넘어갈 따름이다.
또 한참 상소를 뒤적이는데 이상한 상소가 눈에 띄었다.
산남대군은 상소를 읽고 능양군, 능창군과 돌려본 후 반려되어선 안 될 상소라는 결론을 내렸다.
“혹시 이것도 평택현에서 올라온 상소입니까?”
“그렇습니다. 저하.”
이건 틀림없이 잘못되었다.
산남대군은 두개의 서신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주상전하를 뵙겠습니다. 전갈을 넣어주시지요.”
금군위사 한명이 달려갔고, 그 뒤를 산남대군의 일행이 걸어갔다.
7월초 볕 좋은 날이다.
3일째 내리던 장마가 잠시 멈추며 따뜻한 햇살이 대지에 퍼지고, 시끄러운 매미는 아직 땅속에 박혀있는 평화로운 날이다.
광해는 수라간 창고 옆 풀밭에 누웠다.
요즘 자주 찾는 궁녀 추희의 허벅지를 베고 옆에 앉은 예서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구름이 점프.”
광해에게서 약간의 마력이 빠져나가 구름이에게 들어갔다.
진돗개만큼 커진 구름이가 광해의 의지를 이해하고 훌쩍 뛰었다.
“바바바!”
두발로 일어서 앞발로 맹펀치 30연타를 날리는 구름이.
“잘했어. 이리와.”
구름이가 훌쩍 뛰어와 광해의 배위에 올라와 식빵이 되었다.
테이밍 마법은 의지의 전달이다.
주인의 생각을 마력으로 전달해 반복하다보면 마력 없이도 명령어만으로 이해하게 된다.
구름이와 놀이반 훈련반으로 테이밍을 했다.
“상 줘야지. 뭐 먹을래?”
뭐 먹을래 라는 의지를 반복해서 받았던 구름이는 그 단어의 소리를 이해한다.
구름이는 눈을 반짝이며 앞발바닥을 들어 세상 맛있는 것처럼 핥았다.
구름의의 동작에 담긴 의미를 광해가 알아들었다.
“예서야. 아이스크림 먹자. 구름이가 먹고 싶단다. 너희도 같이 먹을 거지?”
“감사합니다. 전하. 준비하겠습니다.”
예서가 일어나 수라간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기계를 갖고 나왔다.
신석만 교체하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아이스크림 기계.
잠시 후 흰색의 아이스크림이 한 접시씩 돌려졌고, 구름이를 포함해 모두가 즐길 때 위사 한명이 다가왔다.
아이스크림을 먹던 박내관에게 1차로 용건을 전하고, 광해에게 올 수 있었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어. 용건은?”
“산남대군이 면담을 청하옵니다.”
“그래. 이리 데려와.”
위사는 대답하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예서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수라간에 가서 아이스크림 재료를 추가로 가져왔고, 기계에서 냉각되는 사이 아이들이 단체로 왔다.
“여~ 아들.”
다시 추희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광해는 누운 채로 세자를 맞이했다.
“주상전하를 뵙습니다.”
“됐고. 와서 한 접시씩 해.”
예서가 아이스크림을 뽑아 아이들과 그 종사관, 위사들에게까지 한 접시씩 돌렸다.
7월초의 무더위에 흘린 땀을 식히며 잠시 단맛의 기쁨을 만끽한 산남대군이 서찰 두개를 꺼냈다.
“이해할 수 없는 상소가 사간원에서 반려되고 있기에 찾아왔습니다. 소자는 이 상소가 어째서 반려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제 열두 살인 주제에 너무 애늙은이 같단 말이야.
귀찮게 안하는 건 좋은데 귀여운 맛이 없어.
내 자식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광해군’의 몸을 빼앗은 처지기에 내 자식이라 생각하고 되도록 편한 삶을 안겨줄 생각이기에 광해는 속으로 툴툴대며 서신을 읽었다.
“이런 상소가 반려되고 있다고? 이유는?”
“백관의 판결이기에 옳은 결정일 거라 하였습니다.”
“사간원이라...... 사간원이 하는 일이...... 언론, 감찰이었나. 왕을 견제하고 신하의 독주를 견제하고 목이 달아나더라도 바른 소리하라는......”
조정 조직에서 쓸데없는 관직의 절반 이상을 없애버렸지만, 사간원은 의미가 있으니 남겨 놨다.
그런데 기능이 마비되어 있다.
“사간원은 누가 맡고 있지?”
예서가 곧장 대답했다.
“이상의입니다. ...... 승지 이지안의 아버지입니다.”
아까부터 얼굴이 사색이 된 승지가 보인다.
광해가 왕이 된 순간 사관직에 있다가 온갖 고생을 했던 이지안.
오히려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광해의 힘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양반의 난 때 부화뇌동하려는 집안을 말려 꼭꼭 숨었고 덕분에 재편된 조정에서 가문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이후로도 왕을 따라다니며 필사를 하게 되었고, 승지로 승진했다.
광해 또한 필기속도가 우수한 이지안이 승지로 따라다니며 왕명을 기록하는데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런데 니 아비가 또 똥을 쌌네.”
“송구하옵니다. 전하.”
“됐어. 음...... 평택현의 백관놈을 소환하고 이 상소를 올린 이들도 데려와라. 이들이 자살당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파발을 보내. 말달려 오면 사흘이면 충분하겠지? 사흘 후 집합할 수 있는 모든 관료를 모아라. 내 의지를 알려야겠어.”
“명을 받드옵니다. 전하.”
승지 이지안과 관료 몇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왕명을 받았는데 걸어가면 광해에게 혼난다.
분위기가 무거워지자 안건을 가져온 산남대군이 불안해했다.
광해는 아들에게 웃어줬다.
“질아. 잘했다. 훌륭한 판단이었다. 큰 상을 내리마.”
“고맙습니다. 아바마마.”
대화가 시작된 내내 추희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던 광해는 추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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