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이영덕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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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 낙오되었지만, 끝내 살아남아 가평까지 온 양반이 천명을 넘어선다.
그곳에서 사백 명 규모의 마적단과 마주쳤다.
해서여진 울라부 소속의 아탕족.
만주족에 부족이 박살나자 살기위해 조선 국경을 넘었고 이리저리 쫓기다가 가평 산간에 자리 잡았다.
조선군의 힘을 아는 아탕족은 조용히 사냥을 하고 춘천과 한성사이 교역로에서 약간의 식량만 갈취하며 얌전히 지냈다.
몇 차례 토벌이 왔지만, 그때마다 맞서지 않고 도망쳤고, 양민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았기에 관군도 검계 취급하며 무시하게 되었다.
아탕족 족장 아탕 이루치는 거지꼴로 달려온 양반들을 보자 일단 도주했다.
허나 말에게 마초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양반들마저 굶는 걸 보고는 조용히 접근했다.
“우리를 상국에 보내주시오. 그렇다면 귀하의 부족이 자리 잡도록 도와주겠소. 후에 만주족과 싸움이 벌어진다면 조선에서 최대한 지원하겠소.”
이귀는 자신들의 상황을 안다.
승마는 양반의 기본 교양이다.
활쏘기는 양반의 필수 덕목이다.
양반은 끼니를 거르지 않기에 덩치도 크고, 힘도 있다.
한성에서 말을 타고 도주에 성공한 이는 전부 양반이다.
그래서 다들 어느 정도 한다.
다만 말 위에서 화살을 쏘고 싸우는 건 다른 문제다.
그래서 아예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뒤늦게 하나둘 양반이 합류하니 기마의 숫자는 어느새 이천 명을 넘어섰다.
이정도면 가능성이 있다.
“다들 굶으셨고, 말도 굶었으니 가평을 쳐서 보급을 합시다. 그리하면 조선은 한성 쪽을 방어할 수밖에 없을게요. 그 후 철원을 거쳐 북으로 올라가 압록강을 넘읍시다. 기병 이천기가 돌진하면 준비 안 된 진은 피해 없이 돌파할 수 있소.”
밀주가 신중하듯 일족을 책임지는 아탕 이루치 또한 신중했다.
“그렇게 하시오. 어떻게든 상국에만 가면 되오.”
이귀의 머릿속엔 조선의 소식을 명나라에 알려 대의를 바로잡겠다는 생각뿐이다.
“눈이 엄청 많이 왔구나. 원래 눈이 이렇게 많은가?”
“소빙기잖아. 한번 내리면 안 녹으니 높이 쌓이지.”
광해와 모현성이 두런두런 이야기 하며 전진했다.
가평까지 가는 길에 말 한 마리 지나갈 정도만 눈이 치워졌고, 주위론 허벅지 깊이로 눈이 쌓여 있다.
“확실히 도로가 먼저야.”
“어. 올해는 함경도쪽부터 건설하고 내년부턴 전국으로 확대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인력은 충분하니까.”
양반들의 재산몰수로 올해 예산은 풍족하다 못해 넘쳐난다.
노역병과 그들의 돈으로 가도를 깔고 나라를 발전시킨다.
역시 개혁보단 혁명이 편해.
퀙. 퀙.
갑작스레 사람이 지나가자 꿩이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촤르륵.
20m 길이의 철사가 날아가 꿩의 심장을 꿰뚫었다.
“우윽. 그건 진짜 봐도 봐도.”
“좋지? 엄청 편해.”
“촉수 같애. 변태의 무기랄까.”
“야이씨. 뒤질래.”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왕이라면 키 만한 대검 들고 다 부숴버리겠다 이래야 하는 거 아냐? 촉수 같은 철사로 쇽, 쇽, 하면 폼이 안 나잖아.”
“이 새끼가.”
광해도 내심 그런 기분이 들었기에 기분이 안 좋았다.
“무엄하다. 사약을 내리겠다.”
광해와 모현성은 킬킬댈 때 밀주가 잽싸게 꿩의 피를 뺏다.
이괄과 임경업까지 다섯 명이 일행의 전부다.
멀리 가평 관아와 병영이 보인다.
주변의 가옥은 200여 채로 관아가 있는 마을치고 작았다.
“나름 평지가 넓은데도 작네.”
“겨울이 힘든 동네니까. 산에 호랑이도 많고.”
“아. 호랑이. 호랑이나 한 마리 잡아볼까?”
호랑이라는 말에 산을 둘러보는데 언덕 너머 멀리서 사람이 나타난다.
사람머리가 보이더니 말이 보이고 두두두두 진동이 느껴진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하나둘 떨어진다.
“적습이다. 밀주. 병영에 알려라. 되도록 방어 위주로 하도록.”
“예. 전하.”
삐유우웅.
밀주는 곧장 효시를 쏘고는 병영으로 달렸다.
병영을 중심으로 네 방향에서 기마대가 나타났는데 각자 오백기다.
광해는 가까이에 나타난 적을 유심히 봤다.
선두의 백여 기는 활과 갑옷으로 제대로 무장했는데 뒤쪽은 갑옷도 없고, 무기랍시고 들고 있는 건 끝을 뾰족하게 깎은 나뭇가지가 고작이다.
“죽창도 아니고 참. 한심하군.”
병영으로 가는 길에 광해가 있었기에 기마대는 광해를 향해 곧장 들이쳤다.
“내 뒤에 숨어 있어라.”
광해는 왼손으로 빠르게 마법진을 그렸다.
한겨울. 허벅지 깊이까지 쌓인 눈.
가장 효율적인 마법은?
“죽여라. 전부 죽여라!”
“헉 저 복장은 국왕?”
“아 안돼. 피해야!”
“죽여!”
적의 고함 혹은 비명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광해는 마력을 일으켰다.
“돌개바람.”
작은 회오리바람 세 개가 생성되어 적을 향해 날아갔다.
눈을 한껏 머금은 회오리가 기마대를 감싸고 뱅뱅 돌았다.
차디찬 눈이 순식간에 전신을 얼린다.
놀란 말이 날뛰며 기수를 떨어뜨린다.
“정리하자.”
탈출하지 못하게 회오리바람을 조종해 적을 뭉쳐 놨다.
눈보라에 눈을 못 뜨고 삽시간에 떨어진 체온에 적이 오들오들 떨고 있다.
광해가 앞서 나가자 임경업과 이괄이 따랐다.
“항복하라.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리면 살려준다.”
광해가 외치자 이괄과 임경업이 반복해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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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개의 철사가 문어다리처럼 춤추며 적에게 하나씩 확실히 구멍을 만들어 준다.
광해가 적진을 관통하며 철사로 활을 들고 있는 적들의 눈을 찌르자 오백기는 삽시간에 와해되었다.
“도 도망쳐.”
“나는 항복할거야.”
“살려줘.”
백여 명은 말에서 뛰어내렸고 나머지는 사방으로 도주했다. 언 몸으로 느릿하게 도망치지만, 광해가 다 잡을 수는 없었다.
“와아아아.”
“죽여라.”
“약탈! 모두 약탈해라!”
관아 쪽 병영에선 전투가 시작되었다.
합류하고 싶은데 광해가 빠졌다가 항복한 백 명에게 모현성이 죽을 수도 있다.
“서로 서로 묶어줘라. 빠르게. 느리면 죽는다.”
항복한 자들에게 서로 묶으라 시키고 느린 놈 몇을 죽였다.
빠르게 포박해 뒷정리까지 해 준 후에야 달려갔다.
여진 기마 몇 백과 전투를 전혀 안 해본 양반들.
훈련도는 보병이 훨씬 높다.
하지만 보병들이 거침없이 밀리고 있었다.
“크윽. 막아.”
“창술을 기억해.”
“아아악. 이걸 어떻게 막아.”
기병의 가장 무서운 점은 말 그 자체다.
300~500kg의 거구.
사람 몸무게의 다섯 배 되는 괴물.
다리뼈는 인간 허벅지 두께고 넓은 가슴뼈는 정면에서 제대로 찌르지 않는 이상 뚫지 못한다.
말의 희생을 생각지 아니하고 정면에서 들이치면 말 자체의 무게가 보병에겐 악몽이 된다.
전투경험이 많은 여진기마는 보병 주위를 돌며 활을 쏘았지만, 전투경험이 없는 양반들은 전투의 흥분에 사로잡혀 무작정 돌진했다.
“밀집해!”
“창을 바닥에 고정시켜.”
푸욱.
가평에 배치된 관군은 수호군에게 7개월간 요동창술을 배웠다.
어느 정도 정예라 부를만하다.
밀주가 데려온 천명도 전투경험이 많다.
여기저기서 말의 가슴뼈를 관통하여 죽이는데 성공한다.
다만 그 뿐.
“으아악!”
창에 찔린 말이 보병 서넛을 덮치고 고통에 몸부림친다.
순수 몸무게로 압도하는 것이다.
말 한 마리 죽을 때마다 보병 열 몇이 부상당한다.
여기저기서 전열이 붕괴되고 있다.
이건 근원적 문제다.
기병을 상대로 보병의 전열이 붕괴되면 무의미하게 사냥당할 뿐이다.
“밀주!”
광해는 크게 소리치며 달려갔다.
분지지형의 바닥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주위는 산과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지금 가장 효율적인 마법은?
목적지는 병영 서쪽 언덕이다.
정신없이 활을 날리며 전투하던 밀주는 광해의 손짓을 이해했다.
“뭉쳐. 똘똘 뭉쳐라. 검계 니들도 뭉쳐! 잠깐만 버티면 된다. 주상의 명이다!”
보병들이 막무가내로 뭉쳤다.
벌써 절반 가까이 무력화되었고, 성급하게 뭉쳤기에 제대로 진형도 짜지 못했다.
이영덕은 신이 났다.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해 봤는데 자신이 전투체질임을 깨달았다.
적을 무려 셋이나 죽였다.
정신없이 돌격하다보니 적이 말에 밀려 넘어져 밟힌다.
상대가 절망하고 도주하자 자신의 힘에 대한 자긍심이 솟아난다.
“크하하하. 죽여라! 전부 죽이고 뚫어라.”
언제부턴가 이영덕은 양반들의 주요인물이 되어 있었다.
과거시험에 계속 떨어지고 음서로 관직도 못 받아 양반사회에서 멀어졌던 인생이 요 몇 달 사이 확 바뀌었다.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좋다.
“다시 돌격하자! 따라와아~”
이영덕이 지시하면 양반들이 따라온다. 말을 달리면 보병들이 이리저리 밀리다가 말에 밟혀 죽는다.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재차 돌격을 하려는데 보병들이 마구 뭉친다.
“... 잠깐만 버티면 된다. 주상의 명이다!”
적장의 목소리가 들린다.
보병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리는데 그 눈에 희망이 차오르고 있다.
이영덕은 보병들의 시선을 따라갔다.
광해.
붉은 곤룡포를 입은 광해가 서쪽 언덕에 서 있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인물.
“도 도망쳐!”
“무슨 말이오? 승리한 전장에서 도망치다니.”
“도망쳐야해. 살고 싶으면 도망쳐!”
이영덕은 동쪽으로 무작정 말을 달렸다.
그를 따르던 양반들이 혀를 찰 때.
구구구궁.
지면이 흔들렸다.
두어 차례 지면이 흔들리고 멈췄다.
쏴아아아.
싸리비로 마당을 쓰는 소리가 들려온다.
“으아아아”
“도망쳐!”
북쪽과 서쪽 산에 쌓여있던 눈이 낮은 곳을 향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전투는 끝났다.
눈사태를 본 순간 기병은 도주했고, 보병의 속도로는 쫓아갈 수 없었다.
자신들도 휩쓸리지 않도록 몸을 보해야 했다.
눈사태가 끝난 후 눈에 파묻힌 적을 포박할 뿐이었다.
절반가량이 탈출했다.
가장 먼저 도망친 이영덕은 어느새 양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전투의 흥분에 미친 듯이 싸운 점도 그렇고 눈사태를 예견하고 미리 도망가라 외친 게 도움이 되었다.
이영덕은 이귀와 함께 양반들을 이끌었고, 험한 산세를 헤매며 북쪽으로 이동했다.
말은 마초를 먹지 못해 하나 둘 굶어죽었고, 죽은 말을 잡아먹으며 버텼다.
힘겹게 산을 타고 이동하다가 함흥에 이르렀다.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평지로 내려왔다.
처음 방문한 함흥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이보슈. 뭔 일 있는감?”
“함흥 영흥의 모든 인구가 삼남지방으로 이동 중이요. 주상께서 삼남지방 양반의 집으로 우릴 이주시켜 주시겠다 하요.”
대답하는 평민의 목소리에 기쁨이 묻어 있다.
정신없이 짐을 꾸려 이주하는 백성들.
그 빈자리는 광해소망교 광신도들이 차지했다.
영광 영광 광해 전하~
여기저기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광해의 뜻에 따라 추운 곳으로 이주한 교인들 또한 기쁨이 넘쳤다.
“배식 받으시오. 모두 모이시오.”
함경도 인구가 떠나고 소망교 교인이 들어오고 조정에서 배식을 한다.
이영덕과 양반들은 대담하게 교인들 틈에 섞여 배식을 받았다.
굶주린 그들은 모험을 해야만 했다.
“댁들은 어디서 왔소. 난 광주부에서 왔는데.”
“난 제물포에서 왔소.”
“난 연천.”
모여든 백성들은 제각기 온 곳이 달랐다.
서로 서로 이웃을 모르는 상황.
“섞입시다.”
“섞이다니. 우린 상국에 가서 조선의 참담한 상황을 알려야 하오.”
이영덕과 이귀의 의견이 충돌했다.
어느새 이영덕은 당상관 이귀와 언쟁할 정도로 성장했다.
“모두 갈 필요 있소? 한두 명만 보내 서신을 전하면 돼지.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하오.”
이영덕의 제안이 통했다.
양반들은 양민들 틈에 섞여 함흥에 녹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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