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연좌제
순도 100% 픽션입니다
우측에 시립해 있던 이초란이 낭랑하게 대답했다.
“구족까지 전 재산 몰수와 노역형 십년이옵니다. 하오나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백관에겐 특별히 정직과 청렴을 강조하면서 큰 대가와 가중처벌을 말씀하셨습니다.”
“가중처벌은 뭐라 말했지?”
“백관 임용 직전 말씀하신바 백관이 비리를 저지를 경우 구족까지 사형에 쳐하겠다 말씀하셨사옵니다.”
광해는 이초란의 말에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문무백관을 보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는 어찌하여 망하고 어떻게 국가가 교체되는가?”
“외적이나 백성의 반란으로 교체됩니다.”
건강한 노인 영의정 정인홍이 대답했다.
“맞다. 하지만 그 이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국가가 부패하고 약해져야 외적이 발호하고 백성이 반기를 든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최초 설계대로 운용된다면 외적은 감히 엄두를 못 낼 것이고, 백성은 아무 불만 없이 생계를 꾸릴 것이다.”
광해의 말에 정인홍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인네가 귀여운 맛이 있어.
“안다. 설계대로 되기도 힘들고 설계가 제대로 되기도 어렵지. 정도전이 꿈꾼 조선이 설계대로 되었다면 조정관료는 누더기를 입고 나랏일을 봐야 했고, 전국의 아전들은 나랏일을 하다가 모조리 굶어죽었겠지. 처음부터 세폐를 계산하지 못한 덧셈뺄셈도 못하는 설계였으니. 어쨌든 실수를 고치되 설계대로 따랐다면 조선은 강국이었을 것이고, 임란의 참화는 없었을 것이다.”
정인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 조식의 생각과 자신의 지식 또한 그러했고, 그런 나라를 만들려 노력했으니.
“나라의 설계를 어기는 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함부로 사람을 죽이거나 약탈하는 도적은 언제나 있었고, 야밤에 과부를 강간하는 범죄자는 언제나 존재했다. 내자나 자식을 구타해 죽이는 아비가 언제나 존재했고, 부모를 죽이는 패륜도 언제나 있었다. 조정에 세폐를 제대로 내지 않는 상인이 언제나 존재했고, 그런 상인에게 뒷돈을 받아 챙기는 관료도 언제나 있었다. 그럼 어떤 유형이 가장 쉽게 범죄를 저지르겠느냐?”
광해의 말에 한성판윤 허균이 대답했다.
“자식을 때리거나 죽이는 부모이옵니다. 효 사상에 입각해 부모를 막을 수도 주위에 알릴수도 없으니 그저 당할 수밖에 없으며 집안에서 일어난 일이니 조사하기도 힘듭니다.”
“어... 맞다......”
맞긴 한데 내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닌데.
하여튼 허균 저놈은.
연설스킬이 만렙이면 제대로 설득할 텐데 그런 거 없으니 즉흥적으로 말하다보면 가끔 핀트에서 벗어난다.
광해가 경험이 많다 해도 인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어느 유형이 가장 해악이 클까?”
“관료의 부패이옵니다.”
그래 허균. 봐준다.
“강도나 살인범은 도망 다닌다. 포졸 중엔 정의감 넘치는 이가 있기에 어떻게든 범죄자를 잡으려는 그들이 강도나 살인범을 쫓게 되고 범죄자는 숨어 다니게 된다. 잡히지 않기 위해 숨어 다니고 조심하다보니 이 자체로 약간이나마 범죄가 줄어든다. 나라에서 손을 놓으면 봄에 중들이 몰살된 것처럼 순식간에 사람이 몰살 되겠지만 어느 나라든 최소한의 치안은 유지하기에 그 나라가 유지되는 것이다.”
멕시코처럼 범죄자가 국가보다 강할 경우 큰 문제가 되겠지만, 그런 멕시코조차 마약조직이 지자체처럼 지방의 왕으로 군림하면서 최소한의 질서는 관리한다.
“상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해도 언제든 들켜 몰락할 위험이 있기에 정도껏 빼돌린다. 정도껏.”
눈감아주는 대가로 바치는 뒷돈이 세금으로 아끼는 양보다 적어야 한다. 그렇게 서로 윈윈하는 것이지 뺏기는 게 더 많으면 세금을 내고 만다.
“하지만 관료가 부패하면 나라가 망한다. 혈연, 학연, 지연으로 얽히고설킨 관료가 부패하면 내가 즉위할 당시의 조선처럼 된다.”
관료의 반이 고개를 숙였고, 반이 떳떳하게 왕을 바라봤다.
기존관료와 신진관료의 차이.
“관료는 부패하기 쉽다. 범죄를 저질러도 잡혀가지 않기 때문이다. 윗놈부터 부패하니 아랫놈도 당당하게 비리를 저지른다. 비리의 결실을 위로 올리며 나눠먹으니 서로 아끼고 핥으며 보호해준다.”
수십억을 빼돌려도 생계형비리라고 풀어주는 다 같이 썩은 군 조직처럼.
“살인범이 용을 쓰면 백을 죽인다. 상인이 용을 쓰면 천을 굶긴다. 관료가 용을 쓰면 천만을 죽인다.”
현재 조선의 인구가 천만이다.
말기의 인구는 천사백만이고.
천사백만 인구를 가진 조선은 아무 힘도 못쓰고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그 근본원인은 모든 관료가 함께 썩은 성리학의 부정부패에 있다.
“내 그래서 관료의 급료를 올렸다. 조정대신이라는 직위만으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만들었다. 육방관속의 급료도 농부보다 좋게 만들었다.”
힘들게 법대공부하고 사법고시 통과하고 2년간 연수원 생활을 하고 3년간 군법무관 생활을 한 후 판사나 검사가 된 분들.
그들의 월급은 대기업 직원 수준이다.
이래선 안 된다.
이보다 열배 넘는 돈을 받아야 한다. 바늘구멍을 통과해 주요직책에 임명되었으면 거액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비리를 저지르지 않지.
그 힘든 과정을 거친 판검사가 대기업 직원 수준의 월급을 받으면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도 지금보다 열배의 돈을 받아야 한다.
“여기엔 유혹에 빠지기 쉽더라도 참고 급료만으로 즐겁게 생활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많은 돈을 받는 대신에 국가에 충성하고 비리를 저지르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 월급만으로 떵떵거리며 살라는 뜻이지. 왜냐? 관료야말로 큰 범죄를 저지르기 가장 쉽기 때문이다. 이는 나라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가장 믿었던 백관에게서 이런 범죄가 발생했구나.
판결하겠다. 공직특별가중처벌법이란, 같은 범죄가 발생해도 공직자는 더 엄한 처벌을 받는다는 뜻이다. 공직자가 비리를 저지를 경우 구족의 전 재산을 몰수하고 모조리 사형에 처한다. 공직자가 비리를 저지른 것을 신고한 자에게는 몰수한 재산의 절반을 줄 테니 열심히 증거를 모아라.”
국회의원은 열배 더 많은 봉급을 받아야 한다.
대신 터럭의 비리에도 사형을 집행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산다.
지하철계획을 통과시키는 일.
특정 기업에 국가지원이 들어가는 일.
특정 항구를 개발하는 일.
모두 부동산과 주식에서 수십억의 이득을 볼 수 있는 정보다.
그 모든 정보를 가장 먼저 얻고 예산을 집행하는 것이 국회의원이다.
그들이 부패하면 나라가 무너진다.
공직자는 가장 깨끗해야 하며 청결을 위해 돈을 더 줘야 한다.
대신 터럭의 비리도 저질러선 안 된다.
“끌고 가라.”
원유창은 자신이 불러온 가문의 비극에 혼절해버렸다.
덕분에 시끄러운 변명 따위 안 들어서 좋다.
7월엔 새벽 네 시에 하루가 시작되어 저녁 7시에 끝난다.
왕궁이니 비싼 초를 얼마든지 쓸 수 있지만, 굳이 침침한 등불을 켜봤자 시원찮다.
해가 지기 한 시간 전 일과를 끝낸 광해에게 박내관이 물었다.
“주상 전하. 수라는 어찌하실 런지요.”
“음... 추희랑 같이 먹지. 그쪽으로 준비하라.”
얼마 전 들어온 승은상궁 추희.
지금껏 본 조선인 중 가장 예쁘다.
예쁘니 궁에 밀어 넣은 것이겠지.
예뻐도 권력욕이 넘쳐나면 짜증나겠지만, 다행히 성격도 얌전하다.
광해에게 전심을 쏟는 소유키처럼 사랑받고 싶은 마음만 가득하고 열과 성을 다해 노력한다.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마음에 든다.
예서와 소유키를 번갈아 찾다가 한 번씩은 추희를 찾고 있다.
광해가 추희의 처소로 앞장서서 걷는 데 박내관이 감히 막는다.
“저... 전하. 송구하오나.”
“왜?”
“추상궁은 의금부에 있사옵니다.”
광해의 발이 우뚝 멈춰졌다.
“이유는?”
박상전은 자신이 죄를 지은 것 마냥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원유창과 오촌간입니다. 시집을 갔으면 면제되겠지만, 아직 처녀인 관계로 처형자 명단에 올랐습니다. 이초란 의금부 판사에게 말했으나 전하께서 예외 없이 행하라 했다면서 소환했습니다.”
“후우.”
광해는 어둑해지고 있는 하늘을 봤다.
습기 가득한 공기는 아직 뜨겁고 눅눅해 숨 쉬는 것조차 불쾌하다.
”연좌제......”
연좌제가 좋지 않은, 전근대적 형벌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양반들을 줄줄이 엮기 편하고, 엄벌로 인해 자제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 유지했더니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후우.”
광해는 천천히 창덕궁을 빠져나왔다.
돈화문 앞 광장을 지나면 새로 만든 건물이 있다.
무려 백 명의 요리사가 경연을 해서 상위권 요리사만 채용한 창덕치킨.
광해가 요리법을 전수하면서 신의 음식이라 소문냈기에 값이 비싸더라도 찾는 이도 많다.
해가 지는 시간이기에 문 닫을 준비를 하던 창덕치킨이 부산해졌다.
갓 봉인을 해제한 나무통에서 맥주를 따르고 마법으로 차갑게 냉각시켜 벌컥벌컥 마셨다.
쪼르르륵.
벌컥벌컥.
마시다보니 요리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내놓은 치킨이 나왔지만, 광해는 맥주만 거듭해서 마셨다.
차게 식혔는데... 시원하지... 않다.
7월의 저녁은 덥다.
“연좌제......”
박내관도 임경업도 왕의 지시가 없으니 그저 뒤에 시립해 고개 숙이고 있었다.
탁탁탁탁탁.
20리터 맥주통 하나를 다 비우고 하나 더 개봉하는데 목탁소리가 다가온다.
“보시 좀 해 주시지요. 보살님.”
감히 왕에게 보시를 요구하는 이는 사명당이었다.
“먹어.”
사명당은 바닥에 먼지 나도록 털썩 앉더니 상 위의 치킨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 닭다리부터 뜯었다.
벌컥벌컥.
쩝쩝.
“스님이 고기 먹어도 되나?”
“보시 받은 건데 은혜롭게 받아야죠. 보살님. 계율을 들며 거절한다면 그거야말로 땡중인거죠. 부처의 자비로 보시 받아 얻어먹는 주제에 음식을 가린다는 게 얼마나 뻔뻔합니까?”
사명당은 태연히 손에 묻는 콩기름을 빨며 대답했다.
광해는 사명당의 표정을 보다가 맥주를 한잔 따라 건넸다.
벌컥벌컥.
쩝쩝.
광해는 맥주를 마시고 사명당은 맥주와 치킨을 먹는다.
말없는 대화가 길게 이어졌다.
사명당은 첫 점에 닭다리를 먹더니 마지막 조각으로 닭다리를 들었다.
이양반이 치킨 먹는 순서 좀 아네.
마지막 한 조각이라서 그런가.
대머리 노인이 슬쩍 고개를 들어 광해를 바라본다.
“나 주려고?”
“...... 원하신다면야.”
광해가 손을 휘휘 내젓자 사명당은 기쁘게 닭다리를 입에 가져갔다.
사명당에겐 아무런 소망도 없었다.
망해버린 불교에 대한 원망도, 자아 성찰도, 누굴 구하겠다는 꿈도 없다.
어른치고 1마력짜리 소망도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
“해탈했나?”
“모르겠습니다.”
사명당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입안에 남은 부스러기와 기름기를 느끼는지 볼이 계속 움직인다.
“해탈했다 치고 묻지. 추희라는 궁녀가 있네. 내가 곧잘 안았고 마음에 드는 아이야. 그런데 연좌제에 연루되어 죽게 생겼네. 어찌해야 하겠나?”
“가슴속 신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보살님.”
“가슴속 신이라...... 신은 살려주라는데?”
“그럼 살려주십시오.”
“그러면 이미 연좌제에 연루되어 벌을 받고 있는 양반들이 억울하지 않겠나?”
“보살님은 이미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스스로 역적의 왕위에 오른 능양군도 살려두지 않았습니까? 예전 같으면 이미 죽었을 양반들이 어떻게든 살아 죗값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자비로운 생불 그 자체죠.”
“내가 자비롭다라...... 나 때문에 중이 만 명 이상 죽었는데 내가 자비롭나?”
세금을 거부한 스님사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에 침범해 세금을 훔쳐 먹는 타국인이라 죽여도 처벌을 안 하니 재물을 노린 살인이 꾸준히 이어졌다.
“재물을 모으던 땡중은 사라졌지만, 태초의 규율을 지킨 저 같은 고승들은 오히려 더욱 칭송받게 되었죠. 보살님은 불교계마저 정화하신 겁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탁탁탁탁탁탁.
사명당은 치킨 다 먹었다고 고승의 분위기를 뽐내며 목탁을 치고 있다.
그래봐야 방금 전 쩝쩝 거리던 이미지가 강하게 남아있다.
“변화에... 환영하나?”
“원래 불교는 끝없이 변하는 겁니다. 신라 초기 불상들은 편히 다리를 펴고 앉아계셨지만, 신라 후기부터는 가부좌라는 불편하고 요상한 자세를 틀고 계십니다. 몸에 채찍질하며 고행하던 붓다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편히 앉아 깨달음을 얻고 고행 따위 겨자씨다 이러셨는데 갑자기 가부좌라뇨. 공부해보니 신라 후기에 천축국에서 요가철학이라는게 유행했는데 그 영향으로 불상이 가부좌를 틀었다더이다.”
요가? 내가 아는 그 요가 맞나?
“생불이 나오면 그에 맞춰 불교가 변합니다. 붓다를 따르던 불교계가 미륵을 따라 바뀌고, 미륵을 따르던 불교계가 관세음을 추종하게 되었죠. 지금은 보살님이 생불이십니다. 생불은 해탈한 인물. 뜻대로 행하면 됩니다.”
“이봐...... 난 생불이 아니야. 난 훨씬 세속적이고 악랄해.”
“해탈. 열반. 자비.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해탈하셨고, 신께 힘을 받으셨습니다. 뜻대로 자비를 베풀며 살다가 열반에 이르면 됩니다.”
“허. 허허허.”
불교따위 안 믿는다. 그 어떤 종교도 안 믿는다.
그런데 이 숭려는 마음에 든다.
광해는 따뜻하게 데워진 맥주통을 차갑게 식혔다.
“한잔 더?”
“보시 받은 것을 감히 거절하면 지옥유황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사명당은 기꺼이 잔을 내밀었다.
- 작가의말
급료에 대한 건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일 뿐입니다
대기업 회장에게 갑질할 수 있고 마음먹으면 수천억의 예산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가 대기업 부장급 월급만 받으며 터럭의 부정도 저지르지 않기를 소망한다면
계속 소망하고 기대하며 살아도 됩니다
그저 개인적으로는
권력에 맞는 거액을 주되 터럭의 부정조차 저지르지 못하게 매우 강력한 가중처벌이 적용되어야 올바른 권력사용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할 따름입니다
만약 이런 주장을 펴는 당이 있다면 지지하겠지만 없어서 중립입니다
중립이라는 말을 거짓말로 생각하실까봐 사족을 달아봤습니다
이에 대한 정치댓글 금지!
전편 댓글을 보다가 느낀 건데요...
이거실화임? ㅇㅇ ㅅㅎ
원유창이 저지른 모든 범죄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대한민국의 세금과 평택시의 세금이 원균에게 투입되고 있죠...
원유창이 처벌받듯 현재 한국이 바뀌길 바라는 마음에 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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