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범죄자에겐 선량한 이에게서 모은 세금을 한 푼도 쓰지 않는다
순도 100% 픽션입니다
제방 붕괴 후 나흘이 지나자 더 이상 마력을 뺏기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죽는 자가 없는 건지, 광해의 책임이 아니라는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800만에서 마력을 더 이상 뺏기지 않았다.
매일 낮에 30만 정도 마력이 들어온다.
광해의 건강을 비는 소망이 집행된 것이다.
정오에 광해의 건강을 기원하며 절하는 문화.
‘가만. 내가 아프면 이 마력이 안 들어오나.’
그럼 영영 마력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
감기라도 걸리기 전에 마력을 모아야겠다.
열흘 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책감이 사라지진 않았다.
그저 묻혔을 뿐이다.
“저... 전하. 덥지 않습니까?”
“더워. 그래도 어쩌겠나?”
얇은 면 옷을 입고 그 위에 은빛 천갑옷을 입었다.
아다만티움 실로 만든 갑옷.
마력이 없으니 갑옷을 입어야 한다.
무게는 대략 10kg.
그 위에 왕의 장포를 걸쳐 갑옷을 감췄다.
9월초에 접어들었지만 땀이 줄줄 난다.
“남산으로 가자.”
“예. 전하.”
성대한 행렬이 준비되었다.
내관과 궁녀에 지붕 있는 가마가 동원되었다.
호위병도 평소보다 세배나 늘었다.
몸조심해야 한다.
남산의 너른 공터는 주말엔 종교활동장으로 쓰인다.
이젠 마을마다 작은 교단이 세워졌지만, 남산 교단엔 여전히 4~5만 명씩 모인다.
평일엔 재판장으로 쓰인다.
판결을 받지 않은 범죄자가 묶이고 한성에서 노역하는 노역수가 잠을 자는 곳이다.
양반들의 판결은 끝났지만, 죄의 심판은 끝나지 않는다.
광해의 능력이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억울한 사연을 안은 이들이 한성으로 와 있다.
이초란과 법관들이 조사하고 해결할 수 있는 범죄는 해결했지만 증거가 없는 범죄자는 여전히 묶여 있다.
“이름 동출. 앙평에서 세 살 아이를 납치 감금했습니다. 다행히 아이는 살았습니다.”
이초란의 설명을 들으며 소망을 살펴봤다.
마력이 없어도 소망은 볼 수 있다.
“맞네. 그 외의 범죄는 안 보여.”
“예. 그런데 납치된 아이를 찾느라 병사와 마을 사람 천명을 동원했습니다. 오일 만에 이 자의 집에서 찾아냈죠. 첫날 이 자에게 물었을 때 대답했다면......”
“아하. 아이를 찾느라 비용이 들었으니 그것을 이 자가 내야 한다?”
“예. 지금까지는 이런 기만죄에 죄를 물렸습니다. 헌데 모현성 공의 말에 따르면 범죄자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아도 된다 했습니다. 법전은 그에 맞춰 만들어지고 있고요. 그래서 두 가지 법이 충돌합니다.”
모현성이 현대의 법전을 가져오진 않았다.
너무 두꺼워서 가져오지 못했다.
그저 기억나는 현대의 법을 띄엄띄엄 설명했을 뿐이다.
대략 얼개는 갖춰지고 있지만,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묵비권 얘기한 건가? 고문 수사를 없앴더니 그런 문제가 생기네. 그건 모현성이 틀린 거야. 범죄자가 불리한 증언을 안 해도 되지만 걸렸으면 거기에 죄를 추가 해. 거짓말한 죄. 수사에 들어간 모든 비용은 범죄자에 청구하고.
왜 선량한 백성들이 모아준 세금을 악랄한 범죄자 수사에 써야 하지? 범죄자의 수사에 쓰인 모든 비용은 범죄자에게 몰수하고 범죄자가 거짓증언을 하거나 증거를 감춰 수사기간이 길어져도 그 비용 모두 범죄자가 내도록 해.”
“하지만 이 자는 재산이 부족합니다.”
“납치 감금이 몇 년 형이지?”
“노역 4년형입니다.”
“그 형벌이 끝나면 수사비용을 다 갚을 때까지 추가로 노역 시켜. 일을 시키지만, 그동안 우리가 관리하고 먹여주고 재워주니 하루 임금은 쌀 한줌으로 정하고.”
“얼핏 계산하면 대략 40년 걸릴 것 같습니다. 그럼 성실히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4년짜리 죄가 거짓말한 죄로 40년으로 늘었다.
“성실히 일하면 감형해줘야지. 그 정도 융통성은 발휘해. 성실하지 않으면 기한을 늘리고. 50년 넘으면 사형인거 알지?”
“알겠습니다.”
이초란은 필요한 대답만 듣고 그대로 판결했다.
표정은 얼음 그 자체다.
죄인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다음 죄인을 끌고 왔다.
“이름 유형신. 나이 일흔. 고아인 동녀 둘을 키우면서 추행했습니다.”
“맞네. 그 외에 죄는 없어.”
“예. 저희 조사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왜?”
“법제상으론 5년씩 두 명이니까 노역 10년 형입니다. 그런데 몸에 힘이 없어서 노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묶여있는 노인네를 보니 숟가락 들 힘도 없어 보였다.
“거참 노인네가 힘없으면 곱게 뒤질 것이지. 노역형을 시켜도 일을 못 할 거란 말이네.”
“예.”
“수감비용은 한 달에 쌀 두 석으로 계산해서 받아. 일 대신 내는 비용이고, 원래 죄는 그대로니 남산에 묶어놓고.”
“비용이 모자라면 어찌 합니까?”
“죽여.”
“안 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될 것입니다. 돈 많은 자들은 죄 짓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죄의 집행은 동일해야 합니다.”
이초란이 충돌하는 법조항을 곧장 꺼냈다.
확실히 많이 공부한 티가 난다.
“이초란. 상위법인 헌법에 넣어. 범죄자에겐 선량한 이에게서 모은 세금을 한 푼도 쓰지 않는다. 이게 가장 중요해. 모현성이 설명하지 않은 것 같은데, 모든 범죄에는 수사비용을 추가하고, 수감비용도 추가해. 노역으로 수감비용을 낼 수 없고 일가친지나 친우가 내 줄 수 없으면 죽여. 그게 상위법이야.”
왜 선량한 백성들에게 모은 세금을 범죄자 먹여주고 입혀주는데 사용하지?
그건 악법이다.
없애야 할 악법.
“안 됩니다. 분명 부작용이 등장할 것입니다. 억울한 피해자가 많이 생길 겁니다.”
“그래. 생길거야. 그러니 내가 필요하지. 법과 사례를 학교에서 교육하면 거짓말이 줄어들어 수사비용과 기간도 줄어들 거야. 그럼에도 이와 같은 상황이 생기고 죽여야 할 자가 생기면 일단 남산에 모아서 묶어둬. 최종적으로 죽일 지는 내가 판결한다.”
“알겠습니다. 전하.”
이초란과 승지가 열심히 필기하며 대답했다.
“덥군.”
호위병이 이중으로 넓게 경계를 서는 가운데 광해는 크고 아름다운 의자에 앉아 판결을 하고 있다.
광해의 한마디에 예서가 궁녀들을 손짓했다.
궁녀 넷이 거대한 부채를 들고 와 좌우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하렘국 황제 같을까봐 자제했는데 더워서 못 참겠다.
마력이 없어지니 불편하다.
다시는 나쁜 짓 하지 말아야지.
“후우...”
“광해님...”
광해가 한숨을 쉬자 예서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가장 큰 범죄자가 죄를 심판하는 게 웃겨서 한숨이 나왔다.
“괜찮아. 어이. 이초란. 내가 양민 수십만명을 죽였는데 내 죄는 어찌되나?”
“주상께서는 법 위의 존재입니다.”
“모현성이 그랬다면?”
“그런 소식은 못 들었다만... 조사해보겠습니다. 판결은 아마도 구족의 사형과 전 재산 몰수입니다.”
“그래...... 그 대상이 명나라 양민이라면?”
“그럼 무죄입니다.”
“그렇군......”
이 법도 손봐야겠군.
확실히 법에 구멍이 숭숭 나 있다.
광해가 생각에 잠긴 사이 다음 범죄자가 끌려왔다.
“유지추. 15세. 남편을 목 졸라 죽인 혐의입니다. 정황은 확실한데 증거가 없습니다.”
증거 없는 범죄.
이것이야말로 광해가 맡아야 할 범죄다.
“남편의 이름이 철군산이야?”
“예. 맞습니다.”
소망을 보면 다 나온다.
죽은 철군산의 원한이 여자에게 붙어있다.
그런데 여자의 소망이 신기하다.
첫 경험을 하고 싶다 - 81664
“유지추. 대답 안 해도 되긴 한데 초야를 안 치렀나?”
광해의 질문에 죄인을 묶었던 병사가 입마개를 풀었다.
죄인의 얼토당토하지 않은 변명을 듣기 싫어서 광해 앞에 끌려온 범죄자는 모두 입마개를 한다.
광해의 물음에 유지추는 한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의 첩이 몇 명이지?”
“...넷이옵니다.”
“열다섯 살 부인을 들였는데 이미 첩이 넷이군. 이초란 조선은 일부일처제 아닌가? 왜 양반들은 부인을 여럿 두지?”
광해의 질문에 이초란의 말문이 막혔다.
이에 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나보다.
“그... 능력이 되니 여럿 거느렸고, 힘 있는 양반들 모두 그러니 관습처럼 굳어졌다 여겨집니다.”
“그렇군. 판결하지. 이 여자가 남편을 죽였다. 허나 무죄다. 여자를 여럿 들였다면 그들의 한을 다독일 의무가 있는데 남자는 그것을 실패했다. 이 외에도 남자가 바람피우면 여자가 죽일 권리가 있다. 청부살인은 안 되지만 직접 죽이면 무죄! 반대로 여자가 남편을 여럿 키우거나 바람을 피워도 죽여도 된다.”
약간 즉흥적인 결정.
아내가 가장 많은 광해가 적반하장의 판결을 내렸다.
‘죽이고 싶으면 죽이든가. 죽일 수나 있겠어?’
당연히 이초란의 반대가 나왔다.
“안 됩니다. 이를 핑계로 재산을 노린 살인이 날 것입니다.”
“그게 무서우면 여럿 들이지 않게 되겠지. 죽는 게 무서우면 바람피우지 말라고 그래.”
정작 여러 여자를 거느린 광해가 뻔뻔하게 말했다.
“이 여자에겐 수사비용만 받아라. 남편을 죽인 것은 무죄이니 죽은 양반의 재산 분배에 이 여자도 정부인으로 참여시키고.”
“알겠습니다.”
파격적인 범죄와 평이한 범죄가 줄을 이었다.
광해는 용상에 비스듬히 기대 죄를 판결했다.
하루 사이에 50만 마력을 추가로 얻었다.
원한과 한이 뒤섞인 범죄를 잡는 것이 마력을 가장 많이 얻는다.
판결을 진행하던 오후 즈음에 반가운 손님이 왔다.
“최명길이.”
“광해님을 뵙습니다. 한성에 들어가려다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습니다.”
왜소한 최명길이 인사를 올린다.
염소수염은 더 자라지 않는지 여전히 짧다.
“그래. 이초란. 오늘은 그만하지. 같이 궁으로 가자.”
“예. 전하.”
오늘 꼭 해야 할일 아니면 내일로 미룬다.
범죄자가 도망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대한 행차가 준비되고 최명길은 말을 타고 광해의 가마 곁에 붙었다.
“한산도는 어때?”
“1기생들의 교육이 끝났고, 각자 부임지로 흩어졌습니다. 그 중 성적이 우수한 자들을 교관들으로 임명했고 추가 교육까지 마쳤습니다. 2기 생도의 입소식까지 보고 상경했습니다.”
모현성에게 인수인계를 받은 최명길은 육사, 해사의 기틀을 마련하고 돌아왔다.
“고생했네. 그런데 모현성은 무산에 있어. 몇 달 후 올 거야.”
“알겠습니다. 주상께서 지시하는 바를 행하겠습니다.”
“그래.”
둘이 대화하는 사이 가마는 숭례문을 통과했다.
북쪽으로 쭉 올라가다가 동쪽으로 꺾어 창덕궁으로 가게 될 것이다.
-화냥년이다 화냥년.
-죽어라. 화냥년.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어왔다.
“멈춰라.”
“예. 전하.”
스무 명의 가마꾼이 멈춰 섰다.
광해가 내리자 간삼의 지휘 하에 금군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중년 여성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간삼. 저 아이들과 여자를 데려와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곧장 말 탄 금군 다섯이 달려갔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데려오는 사이 문득 최명길이 생각났다.
“최명길. 화냥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송구하오나 화냥년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보아하니 죄인에게 부르는 욕 같은데.”
“화냥년은 아마도 환향녀(고향에 돌아온 여자)를 낮춰 부르는 듯하다.”
“환향녀... 환향녀... 헛. 그럼 왜구에게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란 말입니까?”
“아마 그렇겠지.”
대화하는 사이 여자와 아이들이 왔다.
병사에 둘러싸여 겁먹은 이들에게 광해가 물었다.
“너희는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엄마가 그랬어. 더러운 년이라고.”
“엄마가 접근하지 말라 했어요. 돌을 던지며 쫒아냈거든요.”
“옆집 아저씨도 침을 뱉고 꺼지라 해서. 우리한테도 돌 던져서 쫓아내라 그래서.”
그래. 그런 거지.
아이는 어른을 보며 배우는 거지.
“간삼.”
“예.”
“이 아이들은 풀어주고 아이들의 부모를 한 달 노역형에 처해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아이들을 보내고 여자를 바라봤다.
40대로 보이는데 얼굴과 옷이 더럽고 빼빼 말랐다. 품에는 갓 돌 지난 듯한 아기가 안겨 있었다.
“네 사연을 말해봐라.”
“저... 전하. 아기에게 미음을 좀...”
왕 앞에서도 아기가 먼저군.
모성애는 모든 것에 앞선다.
“예서야. 아기가 먹을 걸 찾아봐라. 너와 네 아기는 최대한 신경써주마 그러니 사연을 말해봐라.”
“예. 감사합니다. 전하. 감사합니다.”
“사연만.”
“예. 열 몇 해 전 왜구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러다 봄에 주상 전하의 은덕으로 풀려났습니다. 배가 부른 채로 지아비에게 돌아왔으나 아기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본가에 가려 했으나 감히 대역죄를 저질러 모두 노역수가 되었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아기라도 살려보려고 다시 지아비를 찾았으나 결국 이리 되었습니다.”
흔한 이야기인가.
슬픔이 흔한 세상에선 당연한 이야기.
“아기는 누구 아기인가.”
“제 아기입니다.”
“아비는?”
“...... 모릅니다.”
엄청난 한이 함축된 말이다.
여자는 마지막 말과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정리할 테니 진정하고. 우선 지아비란 자에게 가보자. 앞장서라.”
여자를 앞장세우고 시댁에 방문했다.
마흔칸 정도 되는 한성에서도 꽤 큰 집이었다.
“주상전하 행차요. 모두 나오시오.”
앞서간 금군이 상황을 정리했다.
노비 서른 가량과 양반 몇이 튀어나와 엎드렸다.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중년 양반과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청년, 그리고 비단옷을 입은 여자가 엎드렸다.
‘저 여자는?’
- 작가의말
누구~게?
줄이고 줄여서 6100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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