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화냥년
순도 100% 픽션입니다
“너 고개를 들어봐라.”
젊은 여자를 지목했으나 엎드려 있으니 볼 수가 있나.
금군 하나가 가서 고개를 올렸다.
분명 어디서 본 얼굴인데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의 눈빛이 흔들린다.
저 여자도 나를 안다.
“너 어디서 나 보지 않았냐?”
“소... 소녀는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이다.
이 여자가 죽었으면 - 84214
원한이 달려있다. 한두 개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이 여자에게 죽었다.
‘내가 악당을 살려준 적이 있나? 운 좋게 난을 피한 양반가 여식인가.’
“남자. 이름이 뭐냐? 그리고 아내를 쫓아낸 명분은 뭐지?”
금군이 엎드려 있는 중년 양반의 고개를 들었다.
“소... 신은 차주 나씨 십일대 손 영천이라 하며 내자가 왜구에 더럽혀진데다 왜구의 씨까지 들고 와서 내보냈사옵니다. 사정이 딱해서 아이를 버리면 들이려 했으나 내자가 아이를 포기할 수 없다 하니 내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목소리에 힘이 없고, 눈도 풀려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병자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말에 한결 부끄러움이 없다.
“참 한심하군. 어이 젊은 놈. 넌 네 어미가 쫓겨났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느냐?”
젊은 놈이 고개를 든다.
“저 여자는 제 어미가 아닙니다.”
“아하. 첩의 자식?”
“아닙니다. 제 어머니는 정부인이 되었습니다.”
“첫 부인이 왜구에 끌려가고 네 어미가 정부인이 되었나보군. 이 여인의 자식은 없느냐?”
“둘 있었으나 모두 죽었습니다.”
대답은 또랑또랑 잘 한다.
그런데 눈이 살짝 풀려있다.
마치 뽕 맞은 듯한.
자백제에 취한 모습이다.
왜 이런 독을 썼을까?
“어? 너도 낯이 익다. 나 본적 있어?”
“종교집회 때 멀리서 몇 번 뵈었습니다.”
“아닌데. 이상한데. 두 형이라... 두 형이랑 닮았나...... 아.”
광해는 엎드린 여자에게 다가가 턱을 잡아들었다.
눈과 눈이 주먹하나 거리에서 마주쳤다.
“두 형의 이름을 말해봐라.”
여자의 눈이 흔들린다.
곁에서 남자가 대답했다.
“차주 나씨 십이대 손 인형, 인석 이옵니다.”
“아. 그렇군. 미아리고개.”
독 쓰던 악녀인가.
마킹 마법을 써서 언제든 알아볼 수 있었는데 마력이 사라지니 그것도 못 쓰게 되었다.
잊고 살았다.
침대 밑에 굴러간 백원짜리 동전 잊듯이.
기억을 떠올린 광해는 화들짝 놀라 잽싸게 물러섰다.
지금 용독술에 당하면 죽을 수도 있다.
“간삼. 이 여자를 포박하라.”
“예. 전하.”
“아니. 전하. 왜 저를.”
“첫째 아들을 독으로 죽이고, 둘째 아들을 홀려 달아나는 척 하다가 죽였다. 분명 내가 이 여자의 발등을 찍어 이 집에 넘겼는데 어째서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발등을 확인해 상처가 있는지부터 확인하라. 저 아비가 죽어가는 것과 아들의 상태가 이상한 것도 이 여자의 짓일 것이다. 고문을 허가할 테니 소상히 조사하라.”
“예. 전하.”
여기까지 말하자 조금 아쉬웠다.
분명 죽을 운명이었는데 살아서 집을 차지한 능력은 대단했다.
“독을 잘 쓴다. 조심하고 독술을 최대한 소상히 알아내라. 그리고 협조를 잘하면 살려줄 수도 있으니 폐인으로 만드는 고문은 하지 마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간삼의 손짓에 여자가 끌려갔다.
끌려가는 여자의 눈에 어렴풋한 희망이 감돌았다.
‘그래. 살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협조 하지.’
살려둘 생각은 없다.
직접 죽여 이 시대의 용독술을 강탈할 참이다.
“요녀는 처리했고...... 최명길. 환향녀 일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옳을까?”
조용히 뒤를 따르며 생각에 잠겨있던 최명길이 고개를 들었다.
“이 모두 왜적을 막지 못한 조정 신료의 부덕이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왜적을 막지 못해 이 사단이 일어났습니다. 끌려간 여인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비극이옵니다.”
스물세 살 최명길이 참담히 말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
모현성의 설명에 따르면 인조 후기 청나라에 끌려갔던 공녀들이 돌아오면서 환향녀 문제가 불거졌다.
정절을 잃은, 혹은 잃지 않았어도 의심만으로, 돌아온 여인들은 화냥년이라 손가락질 당하며 죽거나 이혼당해 쫓겨났다고 한다.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의식이 그러했는데 최명길만이 환향녀의 이혼을 금지시키고 차별을 반대하라 주장했다.
양반사회에서 고립될 각오를 하고 손해 보면서 옳은 소리를 한 것이다.
시대상황과 나이가 다르지만 젊은 최명길은 똑같은 소리를 했다.
똑똑한데 올곧은 사람이다.
“넌 인격적으로 훌륭하다.”
광해가 크게 칭찬했다.
“적어도 나보단 백배 나은 사람이다.”
약간의 자학이 담긴 칭찬이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어찌.”
“공치사 들으려고 한 말 아니다. 예서야.”
“예. 전하.”
“어찌하면 좋을까?”
광해의 말에 예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잠시 기다린 광해가 성큼성큼 걸어가 대청마루에 앉았다.
오래 걸릴 것 같다.
덥고, 갑옷이 무겁다.
“술상을 봐 와라. 오늘 끝내보자.”
술상 하나를 두고 최명길과 이초란, 예서가 앉았다.
남의 집에 당당히 앉아 한잔 들이킨 후 말했다.
“그 여인 말고도 많은 환향녀가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왜국에서 돌아올 것이다. 법제를 어떻게 정해야 할까?”
준비하고 있던 예서가 대답했다.
“광해님. 소첩은 얼마 전 적에게 납치당해 두 밤을 끌려 다녔습니다. 그날 전하께서 그러셨습니다. 괜찮아 네가 남의 애를 낳아도 본질만 변하지 않으면 돼. 그 말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하고 또 미안하고 그래서 더욱 근본을 지키고 싶어서......”
얜 또 왜 울먹이는 거야?
“요점만 말한다. 요점만.”
“적에게 끌려가며 느꼈을 공포와 고통을 남았던 이들도 알아야 합니다. 교육을 통해 충분히 알려야 합니다. 공감하게 된다면 절대 박대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당 훈장이 싸우는 애들한테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식이구나. 그런 무책임하고 대충 넘어가는 조치는 아무 쓰잘데기 없다. 나는 지금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을 법을 제정하라고 모았다.”
광해에게 들었던 달콤한 위로를 떠올리며 달달하게 젖은 예서가 깨갱 수그러들었다.
이초란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제 경험이 비슷했던 걸 떠올린다면 주위사람의 손가락질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시댁에 버림받고, 친가에서 자살당할 뻔 하고. 거기다 주위사람이 평생 손가락질하며 숙덕거릴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암담했습니다.”
정원군에게 강간당한 후 2차, 3차, 4차 피해로 모든 희망을 잃었던 이초란이 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겠지. 공포와 고통을 딛고 살려는데 주위사람은 오히려 상처를 후벼 파지. 사자성어로 주홍글씨라 하던가.”
“예? 그런 사자성어가 있습니까?”
광해의 무지에 최명길이 딴지를 걸었다.
“됐고. 그래서 어떡하지?”
“사형. 사형입니다. 여인을 끌고 간 왜구 사형. 돌아온 여인을 버린 시가와 친가 모두 사형. 손가락질한 주위사람 모두 사형. 사형만이 답입니다.”
어이. 너무 과격하잖아.
냉면판관이라는 별명답게 이초란은 표정하나 안 바꾸고 무서운 소리를 내뱉었다.
“본심을 법에 투과하지 마라. 최명길. 자네 생각은?”
“이혼을 금지시키고 쫓아내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최명길은 역사와 같은 답변을 내놨다.
다른 사대부들이 모두 쫓아내는 상황에서 이런 주장도 비주류였지만.
실효는 없을 것이다.
“스승님, 그건 의미 없습니다.”
최명길을 스승이라 부르는 이초란이 반대했다.
“국가에서 억지로 데리고 살게 하면 가혹행위가 일어날 것입니다. 광에 가두고 밥을 주지 않고, 더럽다며 구타하겠지요. 그조차 귀찮으면 죽일 수도 있습니다. 집안의 명예 운운하며 죽이겠군요. 돌아온 여인들은...... 아마도 돌아온 후 더욱 고통 받을 것입니다.”
직접 당했던 이초란의 말이다.
최명길도 감히 반론을 내지 못했다.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더욱 고통 받는다라...... 성리학 참 대단해.”
“예. 성리학의 근본적 문제입니다. 여자를 도구와 장식품으로 쓰고 은장도와 열녀를 교육해 억눌렀습니다. 그러니 남자에게 당한 문제를 피해자인 여자에게 풀어버립니다.”
“상대 남자는 힘이 쎄고 자기 여자는 만만하니까. 약자를 괴롭히는 게 편하고 즐겁겠지. 인식을 바꾸려면 10년은 걸릴 텐데.”
답답해진 광해가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켰다.
예서가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전하. 돌아온 여인들에게 일정 재산을 주면 안 되겠습니까? 선왕의 잘못이라도 나라의 잘못으로 끌려갔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예서의 발언에 이초란이 고개를 저었다.
“괴롭히는 건 그대로일 겁니다. 숙원 마마. 세상은 그리 착하지 않습니다. 재산은 받되 여인은 천대할 것입니다. 어쩌면 재산만 챙기고 자살시킬지도 모르겠군요.”
이제 보니 이초란은 지극히 염세적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염세적이거나, 이게 현실이거나.
예서가 미간을 모으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답변을 내놓았다.
“그럼 선택하게 하지요. 집에 반길 이가 있어 돌아갈 이는 돌아가게 합니다. 쫓겨나 친가로 가게 되면 보상을 해 줍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이는 백관이 책임지지요. 친가에 갔다가 쫓겨나도 받아들이고요. 백관의 사업계획에 여인의 손이 필요한 일이 많습니다. 갈 곳 없는 이들에게 재산과 살 곳을 주고 백관 사업의 노동자로 고용합니다. 전처럼 살 순 없어도 생계 걱정은 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겁니다.”
예서의 제안에 둘은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순리에 맞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깨진 자기는 다시 못 붙입니다.”
“부작용은 가장 적겠군요. 어차피 고용할 일꾼이니 이들 먼저 고용하는 게 옳습니다.”
결론이 나왔다.
“예서의 의견대로 하자. 이 일은...... 최명길이 맡아서 하라. 환향녀는 삼남지방에 가장 많으니 지금 이순간도 고통 받고 있을 것이다. 공문을 최대한 빨리 보내 구하도록 하거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결론을 내고 나자 피로가 몰려온다.
법이라는 건 참 어렵다.
빨리 모현성에게 사법체계를 완성하라 시켜야지.
“이제 그 여인을 불러오라.”
금군 하나가 가서 아기에게 미음을 먹이던 여인을 불러왔다.
광해는 앞의 여인에게 물었다.
“그 아기는 왜구의 아기겠지?”
“제 아기입니다.”
“그래. 그 아기는 절대 포기할 수 없겠지?”
“예.”
모성애는 강하다.
“넌 아무런 죄가 없다. 죄라면 널 지키지 못한 이 나라와 이 나라의 지배자, 당시 왕이었던 선종의 죄다. 그리고 널 지키지 못한 네 남편과 아들들의 죄지. 여자를 소유물로 부려먹었으면서 이제와 이런 식으로 쫓아내는 건 인간 이하의 처사다.”
“아닙니다. 전하. 전하의 죄가 아닙니다.”
“너는 이 집에서 살 수 있다. 허나 우리가 떠난다면 괴롭힘은 여전하겠지. 네가 원한다면 적당한 식량과 살 곳을 주고 할일을 주어 생계를 보장해 주겠다.”
광해의 판결에 여인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까?”
“네가 원한다면 생계를 보장하겠다는 뜻이다.”
“허나 이 집과 노비들은 제 아버지께서 마련해 주신 집인데 떠나는 건 이상합니다.”
여자의 가문이 부자였나 보군.
기득권을 지키려 역모에 가담했다가 모두 뺏기고 노역수가 된 건가.
“그럼 저 자들은 아내를 쫓고 아내의 재산마저 빼앗은 것이군. 이초란. 어떻게 판결하지?”
“모현성 공의 설정에 없는 범죄입니다. 소녀가 독단한다면 사형을 판결하겠습니다.”
“그래. 금수보다 못한 짓을 했으니. 개새끼의 사형에 동의한다. 아들은 어미를 쫓아냈으니 사형. 집행하라.”
꼴도 보기 싫었는데 잘 됐군.
광해의 명령에 금군이 다가가 즉각 찔러버렸다.
그 모습에 여인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왜 우느냐? 죽이지 말았어야 했나?”
“아닙니다. 제 아들들이 생각나서. 참 착하고 올곧은 아이들이었는데 죽었다는 소식에. 아마 이 자들도 한손 거들었을 것입니다. 임란 전부터 둘째 부인에게 마음을 쏟아 제 아들들을 경시했으니......”
여자의 한 섞인 눈물에 광해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광해가 봤던 둘째는 멍청하지만 순수하고 선량했던 청년이었다.
당시 죽음을 방관했던 광해는 약간의 가책을 느꼈다.
“이 집과 딸린 재산은 너의 것이다. 누구라도 딴 소리를 하거든 내게 데려와라. 죽여주마.”
“예? 예.”
“이 집과 노비 서른 명이면 그간 고생한 보답으로 편히 살 수 있겠지. 응? 왜 노비가 서른씩이나 있지? 이봐 너희들.”
“예. 전하.”
노비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왜 여기 몰려 있지? 관아에 신청하면 살 집과 농사지을 땅을 줬을 텐데.”
광해의 물음에 노비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노비들끼리도 대표가 있을 것 아니냐? 당장 말해라. 안 그러면 다 죽여 버리겠다.”
광해의 말에 중년의 노비가 엎드려 대답했다.
“마님이 신청하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래? 토지를 전부 몰수해서 농사지을 땅도 없을 텐데. 너희 같은 이들에게 나눠주려고 땅을 몰수한 건데. 혹시 몰수되지 않은 땅이 있느냐?”
“전부 몰수 되었습니다. 그... 마님의 명으로 산속에 작은 밭을 몇 개 만들고 있었습니다.”
독 쓰는 여자 짓인가. 거참 대단하군.
살짝 둘러본 것만으로 할일이 고구마 덩굴처럼 줄줄이 나온다.
노비들에게 토지를 나눠주고 사유재산을 모으게 만든 후 안정적으로 노비해방을 하려했는데 첫 단계부터 진행되지 않고 있다.
공식 노비 백만, 비공식 노비 삼백만에 달하는 조선답다.
공노비는 다 몰수했지만, 여전히 사노비는 남아있다.
21세기에도 세상을 몰라 노예생활 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 시대는 얼마나 심할까.
한성에서도 이 모양이면 지방은 얼마나 심할까?
“최명길.”
“예. 전하.”
“돌구와 밀주에게 연락해라. 전국의 모든 노비들에게 소식을 전하라고. 올 겨울엔 모두 토지를 신청하게 해라.”
“양반들이 놔주지 않을 것입니다.”
“강제로 막으면 사형시켜. 이초란 이 또한 명문화해서 법으로 제정해라.”
“예. 전하.”
“노비가 필요하면 고용하라고 해. 노비들이 자기 땅을 받아 농사짓는 것 이상의 노임을 줘야 고용이 가능하겠지. 또한 노비의 농작물을 한 톨이라도 뺐지 못하게 하라. 뺐으면 구족의 재산을 몰수한다.”
“알겠습니다.”
법이 계속 추가되고 보안된다.
법이란 참 복잡하다.
- 작가의말
까도까도 또 까이는 우리 성리학자니뮤~
저 여자는 20편에 잠깐 등장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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