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누가 도둑놈인지
순도 100% 픽션입니다
광해는 장갑을 끼려다가 멈췄다.
장갑의 철사는 살상에 최적화 되었지만, 마력을 써야 한다.
이 놈들은 마력을 쓰기도 아깝다.
광해는 바닥에서 나뭇가지 하나를 주웠다.
“뭐? 뭐냐? 다 내놓으면 살려주겠다니까. 이놈이. 저항할 생각이냐?”
빠악. 빠악. 빠악.
“아고고고.”
골통을 맞은 산적들이 허물어졌다.
“무릎 꿇고 손들어라. 셋 센다. 하나둘셋.”
빠악. 빠악.
“오고. 오고곡.”
“무릎 꿇고 손들어라.”
산적 일곱이 손을 번쩍 들었다.
넝마 같은 옷에 꼬질꼬질한 얼굴. 깡마른 몸과 홀쭉한 볼.
상상속의 산적과는 달랐다.
“뭐냐 니들.”
“크흠. 저희는 아랫마을에 사는 선량한 어민들이옵니다. 크헝.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 막막하여 지나는 객을 보고는 욕심을 참지 못하여 그만. 죄송합니다. 잠시 미쳤습니다. 저희가 원래 이렇지 않은데 집에 아그들이 섯이나 굶주려 울고 있어서 그만 잠시 미쳤습니다. 용서를. 제발 용서를 해 주십소.”
“선량한 어민들이라...”
그렇다고 하기엔 얽힌 소망이 이상하다.
“국왕이 천벌을 받아 죽길 바라고. 네놈에게 전답을 뺏겨 원한을 품은 이가 열명이 넘고, 네놈에게 죽은 이도 열 명이 넘는구나. 그런데 살려달라고?”
“아 아니? 착각하신 퀙.”
콰직.
광해는 산적이 떨어뜨린 도끼로 변명하려는 산적의 머리통을 내리찍었다.
“너도. 너도.”
다섯 명의 산적을 쪼갰다.
원한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놈들이다.
즉각 마력 칠만을 얻었다.
남은 건 원한이 없는 둘.
“얘기해봐라. 사연이 그럴싸하면 살려주마.”
함께 하던 동료들이 바로 곁에서 머리통이 쪼개져 뇌수를 뿜고 있다.
공포 속에 둘은 소리쳤다.
“아전입니다.”
“도망쳤어요.”
“살려주세요. 우린 아무것도 안했어요.”
“왕이 나쁜 놈이래요.”
“한 놈만 말해라. 너가 말해봐라. 횡설수설하면 죽이겠다.”
광해에게 지목받은 산적이 더듬더듬 말을 했다.
“제 이름은 추지음. 열여덟 살입니다. 이 친구는 저와 갑이고 장형체라고 합니다. 저희는 모두 창녕현 이방관속이었습니다. 왕의 조사대가 아전과 양반을 모두 죽인다 해서 도망쳤읍죠. 실제로 옆 고을 아전과 양반들이 잔뜩 한성으로 끌려갔다 합니다. 일단 도망쳤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저희만 이곳 고성으로 숨어들었죠. 그게 세 달 정도 전이었습니다.
산에서 칡뿌리 씹고, 밤이며 감이며 도토리 주워 먹다가 얼마 전 소식을 들었습니다. 양반들이 궐기한다고 상주로 모이라 하덥디다. 이제 겨울도 다가오고 이대론 얼어 죽겠다 싶어 상주로 가려는데 여비가 없습니다. 마침 나으리께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우두머리가 몹쓸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만. 모두 저놈 생각이지 우리는 말렸습니다.”
“지랄.”
광해의 냉소에 둘은 입을 다물었다.
산적.
백관의 전수조사가 아전들을 도망치게 만들었고, 그들이 산적이 되었다.
물론 나쁜 건 부정부패를 저지른 놈들이니 불쌍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보다 흥미 있는 얘기가 있다.
“상주라... 거기 많이들 모였느냐?”
“예. 경상도의 양반들은 전부 모인다 하덥니다. 국왕이 모든 양반의 전 재산을 빼앗겠다는데 가만히 있을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전라도에선 전주에 모두 모인다 합니다. 모여서 한성으로 간다는데. 오늘만 해도 소식을 전하는 기수를 넷이나 봤습니다. 이곳 고성 구석에서 그 정도면 전국에 얼마나 많은 양반이 오가겠습니까? 나리께서도 상경하는 길 아닙니까?”
“하. 그렇지. 나도 상경하는 길이니라.”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너희 상주 가는 길이라 했지?”
“예.”
“같이 가자. 안내해라.”
“예?”
싫은 티 팍팍 내는 산적들.
“싫으면 죽으시던가. 산적 놈들 죽이면 나라에도 도움이 되고 백성들...”
“꼭 모시고 싶습니다.”
수하 두 명을 얻었다.
짐을 챙기랬더니 열여덟 동갑 둘은 시체에서 옷을 벗긴다.
“뭐하냐?”
“짐입니다. 이 옷이면 국밥을 열 그릇 넘게 먹을 수 있죠.”
머리가 쪼개져 피와 뇌수가 절절 묻은 옷을 주섬 주섬 챙기는 산적들.
이 시대 화폐를 잘 모르기에 광해는 그런가보다 하고 말았다.
“말은 없냐? 산적인데 산채에 금은보화 쌓아놓고 사는 거 아니야?”
“없는데요. 칡뿌리 씹어 먹고, 나뭇잎 덮고 살았읍죠. 사냥이라고는 새끼 꿩 한 마리 잡아본 게 다고. 크흐흑.”
아전으로 살다가 갑자기 자연인이 되니 고생이 많았나보다.
고성을 떠나 상주로 가는 길.
두 산적을 앞세우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니들 아전 생활 얼마나 했냐?”
“저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업을 이어받아 일 년 했고, 이 친구는 반년 했습니다.”
“그럼 돈 좀 모았겠네.”
강남서 일 년이면 아파트 한 채 산다고 했었나.
“에이. 그건 좀 올라갔을 때 하는 말입죠. 저희 같은 막내는 눈치껏 챙겨야 하는데 힘든 일만 하고 생기는 건 늙은 아전들이 다 챙겨가니 아무것도 못 구합니다. 일 년 동안 집에 쌓아둔 것만 축냈지 얻은 건 전혀 없습니다. 차라리 월봉을 주면 좋겠는데 그런 거 없이 알아서 챙기라니 굶어죽으란 말이죠. 집에 노모와 아내, 애가 셋인데 굶어죽기 직전이었습니다.”
“진짜 아무것도 못 챙기냐?”
“예. 윗선에서 일부러 막습니다. 일종의 신고식이나 관례 같은 거죠. 사실 윗선에서도 결탁한 양반들에게 뜯기고 나면 별로 남는 것도 없습니다.”
“결국 돌고 돌아 양반이 문제구나.”
“그렇죠. 뒷짐 지고 엣헴 거리면서 스승의 사당 건설이다 주희의 묘지 건립이다 뭐다 하면서 악착같이 쥐어짜고 문제 생기면 아전에게 다 뒤집어 씌워 죽이니 천하에 그런 날강도들...”
열여덟 살 아전 추지음은 불만을 토로하다가 뒤늦게 양반이 곁에 있음을 깨닫고 말을 줄였다.
“괜찮다. 내 집안은 부정부패를 전혀 안 저지르니 욕해도 된다. 천하의 날강도들!”
“우왓. 청백리 집안. 역시 처음 뵀을 때부터 범상치 않으시더니. 선비의 표상이십니다.”
“닥치고 더 말해봐라. 아전의 삶에 대해.”
“예......”
추지음은 꽤 말재주가 있는 이였다.
광해가 평소 만나기 힘든 부류기도 했고.
조선의 실상을 들으며 걷다보니 뒤에서 말 한마리가 걸어왔다.
노비가 고삐를 잡고 경보하듯 걸었고, 말 위에는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양반 하나가 끄덕끄덕하며 다가왔다.
말위에 탄 자는 광해를 보았지만, 걷는 모습을 보고는 흥미를 잃었는지 무시했다.
양반은 옆집을 가더라도 말을 타고 가야 한다.
말이 달려서도 안 되고 노비가 반드시 끌어야 한다.
그게 양반의 체면이자 플렉스다.
아마 걷고 있는 광해가 참으로 우스워보였겠지.
상대를 스캔한 광해는 한발 앞서 걷는 추지음의 짐 꾸러미에서 피 묻은 도끼를 뽑았다.
“찾았다! 부모의 원수!”
“으 응?”
“너! 추미를 간살하고, 김첨지의 딸을 간살 했고, 유생원의 딸을 간살 했고. 어후. 전문 간살꾼이네.”
광해의 말에 양반과 노비가 눈에 띠게 당황했다.
“무.. 무슨 말이오. 그들이 없어진 건 나와 관계없소. 그보다 누가 부모의 원수란 말이오? 내가 죽인 이들보다 나이도 많아 보이는 헙.”
“문! 답! 무! 용!”
자백은 필요 없다.
자백을 바라는 소망이 없으니.
광해는 달려들어 앞을 가로막는 노비를 손으로 밀치고 얼굴을 찍었다.
콰직!
죽어 마땅한 놈이다.
퓨슈슛.
양반이 얼굴에 피를 뿜으며 말에서 떨어졌다.
갑작스런 일에 모두 굳어져 광해를 바라볼 때 광해는 노비에게 말했다.
“돌아가서 조사해봐라. 내가 죽인 사유가 맞는지.”
“맞습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제가 곁에서 묻었으니 알고 있었죠.”
노비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놈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 아니면 이놈을 버리고 내 몸종을 하던가.”
광해의 말에 노비는 바닥에 떨어진 양반을 주섬주섬 수습했다.
장포를 벗겨 얼굴을 덮은 노비가 시체를 말에 실으려 할 때 광해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이 말은 내 부모의 것. 내가 가져간다.”
말 때문에 죽인 건 아니지만, 나쁜 놈을 해치웠으니 이정도 쯤은 괜찮잖아.
이건 이를테면, 간살범을 잡은 날 위한 포상.
전리품이지.
노비는 광해의 말에 전혀 반발하지 않고 얼굴이 쪼개진 자신의 주인을 등에 들쳐 업었다.
그 진중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돌아가면 죽을 텐데? 죽지 않더라도 치도곤을 당할 텐데. 그냥 묻어버리고 내 밑에 있지? 어차피 죽어 마땅한 나쁜 놈이었잖아.”
“주인이었습니다. 모셔야죠. 본가로 가서 누구에게 죽었는지 말해도 됩니까?”
왜 죽음을 각오하지.
우직한 성품이 마음에 들지만, 그 우직함이 간살범에게 향하니 짜증이 난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나는 광...... 고진우. 고진우다. 당상관들 중엔 날 모르는 이가 없으니 알아서 찾아와라.”
못 찾아오면 마는 거고.
우직한 노비는 주인의 시체를 메고 왔던 방향으로 떠났고, 광해는 말에 올랐다.
“뭐하냐? 끌어라.”
“누가 도둑놈인지...”
“뭣이라?”
“아무것도 아닙니다!”
산적을 죽이더니 양반까지 함부로 죽이는 광해에게 쫄은 아전들이 달려와 말고삐를 잡았다.
아전이 끄는 말에 올라 유람을 떠났다.
북쪽으로 갈수록 산세는 험해지고, 단풍도 떨어져 앙상한 산이 반긴다.
주로 관아에서 관아로 이동했다.
관아마다 방이 붙어 있었는데 광해가 내려 보낸 방문은 전부 뜯겨 있었다.
양력을 표기한 달력도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대신 광해의 죄를 기록한 양반들의 성토문이 걸려 있었다.
내륙 쪽은 백관이 한차례 휩쓸어 조사한 후 경로를 따라 해안으로 떠났고, 그 과정에서 탐관오리는 진작에 도주했다.
관아는 거의 다 마비되어 이동하는 양반들의 여관처럼 되었다.
저마다 어디의 누구입네 어디의 무슨 가문입네 하며 객청을 징발해 마음대로 숙식을 해결하고 떠났다.
광해도 그들과 섞여 북쪽으로 올라갔다.
양반의 무리는 점점 늘어났고, 모이면 모일수록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게 열흘.
상주에 도착했다.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따서 경상도.
상주는 경상감영이 존재하는 군사, 행정 중심지이며, 조령과 낙동강이 동시에 통하는 물류의 중심지로 자체 농지도 넓다.
상주에 만 명 가까운 무리가 모였다.
양반과 양반을 모시는 노비. 양반을 적극 따르는 평민.
묵을 곳이 없어지자 양반들은 백성들의 집을 징발해 숙소로 썼다.
“나중에 우리 가문에 와서 청구하라. 보상하마.”
보상을 받을 수 있을 지는 둘째 치고, 평민이 멀고 먼 해안까지 가서 청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다.
광해는 그런 모습에 혀를 쯧쯧 차며 똑같이 집 하나를 빌렸다.
11월 칼바람이 산맥을 타고 흐른다.
집을 빼앗긴 양민들이 이웃의 집에 꽁기꽁기 뭉쳐 추위에 떠는데 양반들이 계속 늘어난다.
경주 안동 대구에서 양반들이 몰려와 상주에 모인 인원만 이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사람이 많아지면 목소리가 커지는 법이고,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면 목소리 큰 이가 이기는 법이다.
“북방의 병사를 막으면 죄를 없애 준다니 막아야 하지 않겠소?”
“죄라니! 임란 때 군호가 불탄 게 어찌 우리 잘못이란 말이오.”
“옳소. 군호가 없어 놀며 먹는 백성들을 데려다 사당 짓고, 서원 짓고 했으니 오히려 칭찬 받을 일이지요.”
“우리가 우리를 위해 한 거요? 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한거 아니겠소.”
“상국에 저항하라니! 상국이 죄를 물으면 얌전히 죗값을 치러야 하지 않겠소? 국왕의 정책이 잘못된 것이오.”
“한자를 금지하다니. 이토록 간악한 악법이 어디 있습니까?”
“맞소. 우리가 뭉치면 됩니다. 한성, 나아가 경기지역에 병사가 천명도 없다지 않소.”
다양한 의견은 강경한 목소리에 눌린다.
점차 양반들의 의견을 강경책으로 정리되었다.
광해는 상주목을 돌아다니며 거리를 살폈다.
낙동강을 타고 올라온 산물이 이곳에서 하선해 보부상을 통해 충청도 전라도로 퍼져나간다.
물류의 중심지이기에 여기저기 주막도 많았다.
광해는 그 중 낙서 같은 표식을 찾아내 들어갔다.
양반들의 단체방문에 주막은 때 아닌 호황을 타고 있었다.
광해는 시끄러운 사람을 뚫고 들어갔다.
“네 번째 주방장을 보고 싶다. 특식이 맛있더구나.”
“예. 밤에 뵙겠다 하네요.”
암호가 제대로 먹힌다.
밀주가 벌써 여기까지 장악했구나.
밤까지 기다려야 하니 술이나 시키려는데 저 멀리서 재밌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 모여들면 거기서 튀어나오고 싶어 하는 관심종자가 있기 마련이다.
“국왕은 남색을 좋아하오. 국왕을 그냥 두면 모든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강간할 것이오.”
광해는 참신한 헛소리에 다가갔다.
어그로가 제대로 끌렸는지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 작가의말
누구게요?
맞추면 칭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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