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노역형
순도 100% 픽션입니다
추지음과 박형체.
고성에서 광해를 습격했다가 살아남고 양반의 난에 합류해 한성까지 광해를 모셨다.
죄를 용서받지 못해 10년간의 노역형에 처해졌지만, 광해를 한성까지 모신점이 인정되었는지 고향인 창녕관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역을 하는 것은 똑같지만, 가족과 헤어진 다른 이들보단 훨씬 상황이 좋다.
그렇게 생각하고 왔지만......
연좌제로 구족이 전부 재산을 빼앗기고, 노역형을 받게 되었다.
집안이 몽땅 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원성과 손가락질이란......
자살하는 죄인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둘은 이를 악물고 일에 매달렸다.
창녕관아에서 10년간 봉사하면 죄가 씻겨 진다.
그 후 다시 출세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
창녕에 내려와서 하는 일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성들을 관리하는 일이다.
토지 분배와 몰수한 양반들의 재산 관리. 노예가 된 양반들에게 일을 주고 관리하는 일.
창녕과 함안을 총괄하는 백관 채유진을 모시던 병사 700명이 관아의 일을 함께 하기에 오히려 하는 일은 줄었다.
1월에 창녕에 내려와서 정신없이 일을 하는 와중에 육방관속 선발 시험에 대한 공고가 붙었다.
공고문을 붙이던 추지음은 애매한 문구에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나으리. 여기 이 문장. 신분에 상관없이 시험을 볼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자신과 같은 노역병을 총괄하는 훈련도감 출신 병사가 대답했다.
“말 그대로다. 양반도 시험 볼 수 있고, 노비도 볼 수 있으며, 향소부곡 천민도 시험을 볼 수 있다. 시험에 통과하면 똑같이 아전이 되어 봉록을 받을 수 있다.”
“헛. 그렇다면 저희도 볼 수 있습니까?”
“누구나 볼 수 있다. 다만 상황이 조금 다르다. 너희는 시험에 통과하면 아전 일을 하되 노역형을 받는 중이니 봉록을 받을 수 없다. 다만 노역형의 기간이 절반으로 줄고, 형이 끝난 후엔 그대로 아전 일을 한다. 노역형 중 승진할 수도 있으니 승진하면 형이 끝난 후 고관이 되겠지.”
희소식이다.
추지음은 당장 달려가 장형체에게 말을 전했다.
역모에 가담해 가족과 친척까지 연좌제로 잡혀 모든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죄를 갚을 길이 생겼다.
지금껏 해온 일이 아전 일인데 두 달 후 있을 시험에 통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시험에 통과해 빨리 노역형을 끝내고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
둘은 낮에 할 일을 끝낸 후 서원으로 갔다.
모든 서원은 몰수당했고, 그 중 열 군데가 학교로 쓰인다.
아이들을 위한 학교는 아직 준비중이고, 현재는 임시로 육방관속 시험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백관을 모시는 병사가 교대로 새벽부터 저녁까지 교육하는데 둘은 저녁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다.
자신들과 처지가 비슷한 갓 쓴 양반들과 평민, 노비, 천민까지 모여 교육을 들었다.
그래도 자신이 가장 유리하다.
추지음은 내심 미소지으며 첫 수업을 들었다.
“좌측산의 높이는 321보. 우측산의 높이는 612보. 두 산의 거리는 3419보다. 두 산 사이에 있는 평야의 넓이는 몇 결인가.”
??????
거대한 학습용 지도에 알 수 없는 기호가 잔뜩 적혀있다.
추지음과 장형체는 절망하며 서로를 봤다.
세상 쉬운 게 없더라.
그래도 주경야독하며 참가 신청서를 적어냈다.
이미 신청서가 수북히 쌓여 있다.
“여~~ 도전하려고? 이제 경쟁자네.”
“네?”
서원에서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병사가 웃으며 자신의 신청서를 냈다.
“설마. 나으리도 시험을 보십니까?”
“봐야지. 아무리 대접받아도 병사보단 관리가 낫지.”
맙소사. 누구나 볼 수 있다는 것이 선생도 참가한다는 뜻인가.
백관을 모시며 전국을 조사하고 한글과 산학을 배운 병사들이 경쟁자가 되었다.
세상에 쉬운 건 절대 없다.
2년 3월 34일.
육방관속 시험이 시작되었다.
농부 갑은 다음 70개 품목을 1년 수익으로 신고했다. 쌀 아홉석. 고사리 두근. 미꾸라지 일곱근. 쥐고기 다섯근....... 그렇다면 갑이 내야 하는 세금의 양은?
그림 상 토지의 면적을 구하여라.
다음 중 처벌 강도가 가장 큰 죄는?
자식이 장성하여 토지분배 신청할 때 해야 하는 절차를 나열하시오.
다음 중 광해님께서 들어줄 수 없는 소망은?
어렵다.
너무 어렵다.
대부분 소망교 교리를 기초로 알아야 하는 것을 묻는데 굉장히 꼬아 놨다.
자꾸 고개가 돌아간다.
답안이 막힐 때마다 옆 사람 것을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타인의 답안지를 볼 경우 노역 1년형이다.
여기서 형이 추가되면 안 된다.
욕망을 억지로 누르며 시험을 마쳤다.
일어서려는데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날 수 없다.
답안은 절반도 제대로 쓰지 못 했다.
끔찍하다.
멀리 친우 장형체가 보인다.
그의 표정도 어둡다.
추지음은 슬픈 상상을 하게 되었다.
합격했다.
둘 다 합격했다.
그것도 꽤 높은 순위로 당당히 합격했다.
문제가 어려웠던 만큼 제대로 답을 쓴 이가 몇 없나보다.
“올해는 첫해이고, 공부할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러므로 올해 뽑힌 이들은 내년까지 1년만 보장된다. 다음해 시험이 5년보장 시험으로 진짜 시험이 될 것이다.”
그래도 좋다.
상위권으로 통과한 둘에게 선택권이 주어졌다.
중앙부처에서 중한 일을 할지, 고향에서 일할지.
당연히 중앙부처다.
친척들의 원성이 쏟아지는 이 고을을 떠나고 싶다.
나중에 금의환향해서 봉투 좀 뿌리며 보답해야지.
중앙부처를 선택하자 명령이 내려왔다.
“오일 후 진주에서 광해님께서 주관하시는 종교행사가 있다. 종교행사에 참여한 후 상을 모시고 상경하라.”
명령에 따라 짐을 챙겨 진주로 갔다.
“와아아~ 광해님~”
“왜구를 다 때려잡으셨대! 아아 광해님!”
“포로들을 다 구해오셨대!”
광해가 나타나자 엄청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붉은 장포를 휘날리는 광해의 뒤로 아직 어린 임경업과 궁녀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인 등이 따른다.
“광해님~”
불러봤으나 주위 목소리에 묻혀 닿지 않는다.
눈도장을 찍자.
어떻게든 왕께 잘 보여 출세해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추지음은 입에 손을 모아 소리쳤다.
“고진우~ 님~”
고진우. 광해의 현대 쩍 이름이며 원정군 총사령관의 가짜신분.
추지음은 많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이름을 불렀다.
과연 광해의 고개가 돌아간다.
무심히 고개 돌린 광해와 눈이 마주쳤다.
광해는 잠시 추지음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잊어버리셨다!’
저 표정은 모르는 사람 보는 표정이다.
고성에서 한성까지 한 달 가까이 모셨는데.
너무해.
곁에서 장형체가 위로한다.
“좌절감이 사내를 키우는 것이다.”
좌절이 좌절이지, 키우기는 개뿔.
왕의 어가는 차분히 북상하며 매일 종교활동을 했다.
왜란 포로 중 고향이 북쪽인 이들은 함께 하다가 경로에 맞춰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진다.
왕의 경로 근처에 있는 고을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매일 수만 명이 기적을 목도했다.
조선이 역동적으로 변하는 게 눈에 보인다.
전국에 교단이 들어서고 백만 노역수가 바삐 돌아다니며 조선을 바꾸고 있다.
최우선 과제가 도로 건설이기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부역자들은 매일 도로 건설에 차출되어 땅을 다지고 벽돌을 깔고 있다.
양반의 난 관련자 백만 명.
어차피 놀고먹는 이들 좀 빠진다고 나라가 문제될 건 없다.
공자왈 맹자왈 하며 양민의 피를 빨던 것들이 도로건설 노동을 하니 나라가 건강해진다.
그들이 신세한탄하며 코뚜레 뚫린 소처럼 끌려 다닐 때, 성실하고 진취적인 젊은이들은 자기 일을 하며 야간에 관료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여. 잘 지냈어?”
진주성 집회 후 20일 만에 한성에 도착했다.
2월에 한성을 떠났으니 근 넉 달 만이다.
“광해님을 뵙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박상전이 한성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박내관 뿐만 아니라 중전, 세자 등도 함께 나왔지만, 광해에게 가장 신뢰받는 인물은 박내관이다.
어가는 숭례문을 지나 동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응? 궁은 서쪽 아니야?”
“아. 동궐이 완성되어서 궁을 옮겼사옵니다. 혹여 행궁에 거하실 거면 행궁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아니. 됐다. 새집이 좋지.”
창덕궁이 드디어 완성되었구나.
“궁에 변한 건 없느냐?”
“그...... 대왕대비는 행궁에 남고자 하셔서 거처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인빈도 행궁에 남았습니다.”
“그래? 잘 됐네. 거기서 살고 싶으면 살라고 그래.”
원 역사에서 서궁에 유폐되는 소성대비.
광해는 따로 견제를 하지 않았지만, 소성대비 스스로 서궁에 남았다.
역사의 보이지 않는 복원력인건가.
정원군을 잃고, 그 아들 능양군이 양반의 난에 연루되어 크게 상심한 인빈도 서궁에 남았고.
“그리고 고양이들도 거처를 옮기려 하지 않습니다. 창덕궁 창고로 고양이들을 옮기려 했으나 행궁이 마음에 드는지 잡아와도 스스로 행궁으로 돌아갑니다.”
고양이를 배 위에 올리고 쉬는 걸 좋아하는 광해를 생각해 고양이까지 관리하는 박상전이었다.
박상전은 왕의 고양이들이 자꾸 행궁으로 돌아가 버리니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아. 그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마법진의 퍼퓸에 이끌리는 거니 가서 퍼퓸의 흔적을 지우면 될 일이다.
사정을 모르는 박내관은 언젠가 예서가 느꼈던 대로 왕이 참 냉정하다고 느꼈다.
박내관과 한성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받은 후 뒤에 따라오고 있는 세자를 봤다.
‘광해군’의 유일한 아들인 산남대군 이질.
“질아. 잘 지냈느냐?”
“예. 아버님. 시험 삼아 본 관속시험에서 43점이나 받았습니다. 당장 관속으로 일해도 될 점수라고 합니다.”
열한 살 이질이 의젓하게, 하지만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잘했네. 시동들은 어때? 사람 없을 때 괴롭히거나 때리지 않고?”
광해의 물음에 이질은 자신의 뒤에 있는 시동 둘을 봤다.
“아닙니다. 잘 놀아주고 되게 재밌습니다. 되게 좋습니다. 함께 공부하고 시험도 함께 봤는데 종이 형은 50점을 넘겼고, 전이는 무려 62점을 받았습니다.”
산남대군은 자신의 시동들을 자랑했다.
그 말에 광해가 깜짝 놀랐다.
“전이가 몇 살이지? 어리지 않나?”
“열 살이옵니다. 전하.”
이전이 고개 숙이며 대답했다.
“와. 열 살에 62점이라. 시험이 어려웠다고 들었는데. 종이도 고작 열세 살이고.”
광해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능양군 이종. 능창군 이전.
양반의 난에 주도적 역할을 한 능양군 때문에 능창군까지 연좌제에 걸려버렸다.
정인홍을 비롯한 대신들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했지만, 역모죄는 10년 노역형으로 못 박았다.
역모죄 외에 다른 죄가 없으니 잠시 왕위에 올랐던 능양군 또한 노역형으로 끝난다.
광해는 둘을 산남대군에게 붙여줬다.
나이가 비슷하니 함께 놀라는 의미로.
함께 공부하라 시켰지만, 이정도로 잘 볼 줄은 몰랐다.
특히 열 살 능창군이 놀랍다.
원 역사에서 재주가 뛰어나 현공자라 불렸고, 광해군이 그 재주를 견제해 역모를 뒤집어씌워 열다섯 살에 죽였다더니.
“너희 성적이 그렇게 좋으면 관리가 되지 그러냐?”
“주상께서 시동으로 명하였으니 시동 역을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능양군이 차분히 대답했다.
능창군도 그렇고 능양군도 재주가 좋다.
선조의 개노답 삼형제인 정원군에게 이런 아들들이 나온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됐다. 원한다면 셋 다 관리 일을 해도 좋다.”
광해의 말에 시동 둘의 표정은 펴졌지만, 산남대군은 미간을 모았다.
“주상 전하. 송구하오나 세자로서 배워야 할 일과 해야 할 일들이 있는지라.”
제사 알기를 개떡으로 아는 광해를 대신해 산남대군이 전주 이씨 제례 대부분을 주관하고 있다.
“겸업하는 거지. 다른 이들도 자기 할일 다 하면서 그런 미신까지 챙긴다. 그리고 세자의 일은 배우지 않아도 된다. 전에 말했듯이 난 백년 안에 죽을 가능성이 아예 없으니 네 앞길은 알아서 찾아가야 한다.”
너 왕 못 돼.
광해의 잔인한 선언에 산남대군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럼 관료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꼭 하고 싶습니다.”
얘 이해 못한 거 같은데?
“왕이 못 된다고. 나보다 네가 먼저 죽어서. 그게 기쁘냐.”
“아버님께서 건강이 만수무강하시다니 어찌 슬프겠습니까. 또한 굴러온 자리가 아닌 스스로 일을 찾아 이름을 빛낼 수 있으니 그 또한 기쁘지 않겠습니까.”
누구 자식인지 참 교육 잘 받았다.
유교는 문제점이 많지만, 장점도 분명 있다.
“알았다. 승지. 승지 있느냐?”
“예. 전하.”
왕명을 받는 승지 이지안이 달려 나왔다.
“이들 셋 다 시험에 통과했으니 관속 일을 시켜라. 나이가 어리니 되도록 편한 일을 맡기도록.”
내친김에 셋 다 관료로 등용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똑똑한 아이 셋이 일제히 감사를 표했다.
표정을 보니 내심은 셋 다 다른 듯 하지만.
- 작가의말
정치이념으로 유교는 문제가 참 많지만
도덕으로써 유교는 장점이 꽤 많습니다
단점도 꽤 있지만 역사속 세계가 하던 꼴을 보면 유교는 분명 최상위 도덕이라 생각합니다
성리학은 모든 종교가 그렇듯 노답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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