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구름이 젖뗀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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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도 예비군 훈련을 하자고?”
“어. 당연하지.”
“야. 너 현대의 그 남녀혐오놀이 때문에 그러는 거야?”
광해가 모현성을 한심하게 보자 모현성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니야. 이거야말로 여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과 깡을 안겨주는 남녀평등을 위한 위대한 한 걸음이야.”
“그 말 자체가 나만 좆 될 수 없다, 여자도 좆 돼봐라 하는 심리 아니냐? 조선시대에 여자가 군대 가는 건 좀 오바 같은데.”
“형. 예비군이잖아. 예비군이 뭐야? 정규군이 박살나고 살기위해 급하게 모으는 게 예비군이잖아.”
“그렇지.”
“그런 상황이면 여자도 싸워야지. 맨몸으로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다가 강간당해 죽거나 끌려가는 것보단 허접한 훈련이라도 받아서 예비군으로 싸우는 게 낫지 않아? 진주성이나 행주산성에서도 급한 상황에선 여자도 싸웠잖아.”
“흐음.”
“그리고 고대 전투에서 여자가 빠진 이유가 뭔데? 창이나 방패, 활이 무거워 힘이 부족한 여자는 뒤에서 생산을 담당한 거잖아. 그럼 이제 바꿔도 돼지. 시대가 변했잖아.”
“시대?”
“총! 활을 당기는 건 힘이 강해야 하지만 총은 자리 잡고 쏘기만 해도 정규군 한 명 급의 활약을 할 수 있어. 꼭 남자만 해도 되는 게 아니야.”
“그래서 남자는 활, 여자는 총이냐?”
“어. 이게 예비군 교본의 기초가 될 거야.”
결국 모현성의 고집대로 이뤄졌고, 여자는 총술을 기초로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었다.
조선이 보유한 조총은 2만 5천 정. 오천정은 일본 원정군이 갖고 있고, 압록강 방위군이 오천정을 갖고 있다.
나머지 만오천정이 세 덩이로 나뉘어 농한기동안 전국을 돌며 예비군 훈련에 쓰였다.
“3열 종대 헤쳐모여!”
“악!”
“어쭈. 속도 봐라. 3열 횡대 헤쳐모여!”
“악!”
“걷지도 못하네. 애기냐? 뭐하냐? 기냐? 횡대 종대도 아직 모르나? 저기 소나무 찍고 온다. 선착순 두 명. 실시.”
“악!”
교관은 남자와 똑같이 여자를 굴렸고 멋모르고 불려온 여자들은 독기를 품게 되었다.
“총기 들어.”
“총기 들어!”
“쇠꼬챙이 청소.”
“쇠꼬챙이 청소!”
“젖은 천 청소.”
“젖은 천 청소!”
“마른 천 청소.”
“마른 천 청소!”
3단계에 걸쳐 총신 내부를 닦고.
“화약 넣어.”
“화약 넣어!”
화약을 넣는다.
이제 규격화가 끝나서 모든 화약은 정량을 한지로 감싸 배분한다.
“심지 꽂아.”
“심지 꽂아!”
“화약 다져.”
“화약 다져!”
“탄알 넣어.”
“탄알 넣어!”
“사수 전방 표적지 조준.”
“조준!”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여기서 조선은 2인 1조를 기본편제로 바꿨다.
어차피 재장전 시간이 1분 이상 걸린다.
그렇다면 한명은 장전만 하는 게 효율적이다.
총을 쏘는 사수와 탄약 넣는 부사수가 총 두정으로 각자 할 일을 하면 재장전 시간이 올라가고 명중률도 높아진다.
“부사수 점화.”
“점화!”
횃불을 든 부사수가 심지에 불을 붙였다.
파츠츠츳 타들어가는 동안 사수는 조준자세를 유지했다.
혼자 불을 붙이면 조준할 시간이 부족해 명중률이 떨어진다.
타타타타탕!
전열에서 요란한 폭음과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총구 내리고 화약 확인! 불발탄 손들어라!”
모든 훈련은 모현성이 짠 교본에 의해 이뤄졌다.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된 여자들은 ‘여자가 왜 이런 일을’ 이라는 이와, ‘쉬운데? 고작 이런 걸로 남자가 으스댄 거였어?’ ‘활보다 총이 쎈데?’ 하는 이들로 나뉘었다.
당연히 훈련 태도도 갈렸다.
전국 훈련장에서 특등사수들이 나왔고, 웬만한 징집 병보다 용감하고 장전이 빠른 여자들이 상을 받았다.
보고를 받고나니 버리기 아까워서 천명으로 구성된 여성조총부대가 탄생했다.
“내 오늘 특식을 만들어주지.”
캬하앙~
2월 28일.
2월의 마지막 날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이가 젖을 뗀 날이다.
얼마 전부터 요리사들이 곱게 간 고기를 먹던 새끼들이 이젠 호랑이 젖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한창 힘이 넘치고 가장 귀여운 나이.
짧은 다리로 방방 거리며 뛰노는 나이.
생후 두 달 된 표범과 새끼 호랑이 셋이 광해의 주위를 돌며 재롱을 부린다.
기분이 좋아서 특식을 만들어 모든 여인들에게 대접하려 한다.
이제는 표범 방에 모일 일도 줄었으니 미안해서 상을 준다.
그녀들의 마음은 안다. 소망도 보인다.
하지만 너무 많다.
한 여자를 행복하게 해주려면 그 여자에게 모든 걸 집중해야 한다.
어차피 그러면 나머지가 불행해진다.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
광해 본인의 행복을 우선한다.
소망이 크게 쌓였을 때 한 번씩 수확하는 걸로.
언제나 본인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
밀가루를 반죽해 면을 뽑아 튀기고 MSG 듬뿍 친 라면국물에 삶아 대령했다.
예전의 경험도 있으니 특별히 고추가루를 조금만 넣어 흰 국물 라면으로 만들었다.
“어때? 맛있지? 맛있지?”
면이 불기 전에 후루룩짭짭 들이킨 광해가 물었다.
답은 정해져있다.
“예. 마싯습니다.”
“너무너무 맛있습니다.”
활짝 웃으며 대답하는 후궁들.
연기 참 못한다.
‘그렇게 맛이 없나?’
광해는 슬퍼졌다.
현대인의 미각과 조선인의 미각은 다른 걸까?
왜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이것이 시대를 앞서나가는 예술가의 고충인 것일까?
“예서야. 네가 말해봐라. 최대한 솔직하게. 거짓말하면 혼난다.”
예서가 광해의 낙담한 표정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드러운 쌀국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쫄깃한 면이 맛있고, 국물도 진하고 시원하며 짭짤했습니다. 라면이라는 것은 맛있는 음식입니다.”
“솔직한 대답이야?”
“예. 전하.”
광해는 의아해졌다.
예서는 광해의 성격을 아니까 아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표정이 왜들 그러지? 엄청나게 실망한 표정인데?”
“광해님께서 특별식이라 하셨습니다. 굉장한 음식을 직접 접대해준다고 하셔서. 그런데 말씀 하신 거에 비하면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니. 이게 얼마나 위대한지 왜 모르는 거지? 자 봐봐. 이 가루. 이건 굉장히 쉽게 만들 수 있어. 그런데 이 가루를 넣으면 국물에 고기 맛이 배고 소금 없이도 짭짤함이 나오고 약간 달달한 깊은 맛이 나온다고. 혀의 모든 미각을 자극하는 감칠맛이 들어있어. 이 마법의 가루만 있으면 모든 게 가능해져. 그 깊은 맛을 못 느끼겠어?”
광해의 절규에 예서가 신중하게 국물을 먹어봤다.
잠시 고민하던 예서.
“확실히 고기를 넣지 않았는데 고기국물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치? 그렇지? 대단하지 않아?”
“하온데 왜 이 가루로 그 맛을 내야 하는 것이옵니까? 소뼈를 삼일 우려낸 국물이 훨씬 진한 풍미를 내는 것 같은데.”
어?
소뼈 국물?
설렁탕 국물?
......
광해는 멍하니 갈색 가루를 내려다보았다.
라면국물은 위대하다.
굉장히 싼 값에 고기 국물 맛을 내준다.
MSG는 광범위한 식재료에 들어 있고 고기에도 들어있다 한다.
그래서 고기국물 느낌이 나는 거고.
서민의 대표음식.
간편식의 대표주자.
라면.
“혼자 있고 싶구나. 모두 물러나라.”
광해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저... 전하.”
“물럿거라. 왕명이다. 혼자 있고 싶다.”
왕명이 떨어졌다.
특별식을 배워 조선 천지에 알릴 요리사들. 중전과 후궁들, 그를 모시는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두 멀어졌다.
그들의 눈엔 걱정이 가득하다.
왕이 비관, 좌절, 낙담하는 게 눈에 보인다.
광해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라면... 맛있지.”
싼값에 고기국물 맛을 내는 향신료.
힘든 현대생활의 좋은 친구였지.
“이계에 가서 고생할 때 가장 생각나는 친구였지.”
그 얼마나 먹고 싶었던가.
“세계를 정복해 황제가 되었고, 모든 걸 얻었어. 다만 한 가지, MSG 뽑아내는 법을 몰랐을 뿐.”
그래서 충동적으로 귀환했다.
라면이 먹고 싶어서.
“조선에 잘못 떨어져서 개고생하고 라면을 만들었는데...... 이건 서민의 음식이었구나.”
고기국물 맛을 내는 마법의 가루?
그냥 고기국물을 먹으면 되는 거였구나.
난 무엇을 위해.
왜 난 여기에.
왜.
난 서민 입맛이었구나.
진실은 잔혹하다.
서민입맛을 위해 통일제국을 버리다니.
......
주루룩.
광해는 아공간에 곱게 간직했던 MSG를 바닥에 흘려버렸다.
발로 비비고.
작은 토네이도를 일으켜 저 하늘로 날려 보냈다.
굿바이.
찌질 했던 내 서민 미각아.
광해가 좌절하는 것을 멀리서 보며 걱정하는 차에 수라간 담당 내시가 입을 열었다.
“숙원 마마. 어제 고성의 백관 채유진이 진상품을 보냈는데, 그 음식이 광해님과 모현성공이 꿈에도 그리던 치킨이라는 것이랍니다.”
치킨.
예서도 들어봤다.
그립다고 하셨었지.
분위기를 돌릴 좋은 기회다.
“그... 그렇습니까? 어디 있습니까?”
“수라간 창고에 있사옵니다. 서신에 따르면 콩기름으로 살짝 튀겨서 진상하면 된다 합니다.”
“빨리 튀겨 주시지요. 빨리. 주상의 슬픔이 가시도록.”
상선은 부리나케 달려갔고, 예서는 한성관아에서 일하고 있던 모현성을 불렀다.
잠시 후 상선이 나인들과 달려왔고, 예서는 모현성과 함께 광해에게 다가갔다.
광해는 평소처럼 바닥에 누워 구름이를 만지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제국이... 내가 왜 제국을...”
정말 슬퍼 보였다.
“전하. 고성에서 치킨이라는 진상품이 올라왔습니다. 드셔보시겠습니까?”
“치킨! 치킨이라 했느냐?”
“예. 서신에 따르면 고성의 이괄공이 만들어 올렸다 하옵니다.”
“이괄?”
광해의 인상이 찌푸려졌고, 반대로 모현성의 표정이 펴졌다.
“것 봐. 죽이는 게 답이 아니래두. 살려 놓으니까 이런 선물을 주네. 그야말로 서프라이즈.”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치킨을 아는 거지?”
“흐음. 글쎄. 어쨌든 먹어보면 알겠지. 형 먼저 먹으면 독이 있어도 안전할 거 아니야.”
감히 왕에게 기미를 시키는 모현성.
“그래. 먹어보자.”
조마조마하게 보고 있던 상선이 상을 들고 다가왔다.
대나무 소쿠리 위에 덮인 대나무 뚜껑을 벗겨내자, 명태전 모양의 작은 전이 있었다.
“시발 아니잖아.”
“음. 그래도 맛이 같다면......”
모현성이 수습하려 하자 광해가 하나를 입에 넣어보았다.
안티포이즌이 작동하지 않는 걸 보니 독은 없었다.
“음. 맛은... 맛은 있긴 한데. 음. 그래도 이건.”
뒤이어 하나 집어먹어본 모현성이 눈을 감고 평가했다.
“닭살을 얇게 저미어 간장으로 양념했네. 그 후 밀가루를 입혀 굽듯이 튀긴 듯. 적당히 맛있는데. 역시 닭은 위대...”
“시발 그냥 닭전이잖아!”
“맛있긴 한데...”
“이게 치킨이라고? 치킨이 이렇다고? 이건 치킨에 대한 모욕이다!”
와장창!
분노한 광해가 상을 뒤집었다.
“감히 닭전에 치킨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붙인 이괄놈에게 곤장 100대를 치라.”
“예. 전하.”
멀리서 지켜보던 승지 이지안이 잽싸게 왕명을 출납했다.
곁에서 보고 있던 모현성도 고개를 저었다.
“이건... 막을 수 없군.”
적당히 살살 치라고 따로 명을 보내야지.
곤장 백대를 FM대로 맞으면 죽는다.
“상선. 수라간에 닭하고 밀가루랑 콩 있지?”
“예. 전부 있습니다.”
“따라와. 치킨 만드는 법을 알려주지! 아예 제조법을 공개하마. 세 달 후 천하제일 치킨인을 뽑겠다. 내 전용 치킨 요리사를 만들어야지.”
“형. 아예 창덕궁 앞에 호프집을 만들지?”
“좋네. 창덕치킨. 세 달 후 요리사를 뽑겠다. 우선 상선이 요리법을 배워서 전국에 퍼트려라.”
“알겠습니다. 전하.”
라면으로 시작해 이괄의 닭전으로 넘어간 행사는 창덕치킨 창업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 저녁식사는 치킨시식으로 대체되었고, 이번엔 모든 여인들에게 진심어린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광해의 기분이 조금 풀렸다.
미야아아앙.
참고로 오늘은 구름이가 젖 뗀 기념일이다.
아기 구름표범 구름이는 바닥에 흩날린 닭전을 호랑이 형제들과 함께 맛있게 주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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