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가자
순도 100% 픽션입니다
남도포 만호 이준형은 이운룡의 명령을 가장 열심히 이행했다.
가장 열심히 노를 젓게 했고, 가장 빠르게 항해했다.
덕분에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공식적인 칭찬을 들었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
처남이자 부함장인 함영석이 한산도에서의 특별교육에서 1위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엄청난 상을 받게 되었다.
“길주에 가서 신형 전함을 인수받아라. 갈 때 이 물건들을 싣고 가고.”
이준형은 자신의 함대 다섯 척을 이끌고 길주로 가 신형함을 인수받았다.
“에게. 이게 뭐야?”
신형함에 대한 엄청난 기대감이 한순간 쪼그라들었다.
기존 판옥선에 나무 기둥 세 개를 추가해 삼각돛이 추가되었다.
돛대를 위해 기존 선장의 지휘부가 철거되어서 선장의 위엄은 오히려 줄어든 듯 한 모습이었다.
“이건 그냥 기둥만 추가한 것뿐인데.”
“매형. 그런 게 아니라우. 삼각돛이 있으면 역풍에서도 돛만으로 나갈 수 있는 동력을 얻은 것이지요. 캬. 드디어 우리도 대양으로 나갈 수 있게 되겠군요.”
“이번에 배운 항해술이라는 게 그거냐? 교육 1등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인수받은 선박에는 옮겨야 할 화물이 미리 실려 있었다.
덕분에 이준형의 병사들은 개인 짐만 옮겨 새 선체에 타면 되었다.
네 대의 선박엔 주먹만 한 둥근 포탄이 가득 실려 있었다.
대장선에는 화물이 거의 없었다. 화물 이래봤자 식자재만 조금 실려 있을 뿐이었다.
“이봐. 이 배에는 자재를 아직 못 실은 건가?”
“아닙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대장선에는 정부 고관이 몇 명 타게 됩니다. 그러니 그분들 잘 모시고 끼니마다 제대로 식사를 만들어 바치시면 됩니다.”
정부 고관이라...... 조정에서 높으신 문관이라도 타려나보다.
내심 아니꼬웠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부디 쓸데없는 참견만 안했으면 좋겠다.
출항준비를 끝내고 출발하기 직전에야 고관들이 왔다.
성인 남자 둘과 덜 큰 소년 하나. 세 명이 끝이다.
적당히 인사하고 머물 자리를 배정해주었다.
판옥선의 바닥 층인 1층은 창고자리다. 물보다 낮게 가라앉는 부분으로 그곳에 물과 식량, 짐을 쌓는다.
2층은 허리높이인데 노병의 층이다. 노병이 앉아서 대기하다가 지시를 받으면 구령에 맞춰 노를 젓는다.
3층은 포병의 자리인데 좌우 8문씩 달려있는 화포 열여섯 문을 다룬다.
그 위층이 갑판이다.
현재는 전시상황이 아니기에 3층이 가장 한산하다.
이준형은 3층 한쪽에 넓은 자리를 준비해 고관들이 쉴 수 있게 배정해줬다.
배가 출발하자 처남 함영석이 신이 나서 갑판병들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후미 돛을 펴라. 돛 줄을 3번 기둥에 묶고. 거기가 아니다. 여기가 삼번.”
삼각형 모양의 돛은 신기한 점이 있다. 분명 바람이 남에서 북으로 불고 있는데 바람의 힘으로 남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캬. 이거 아니겠습니까? 돛 짱짱한 거 봐라. 면포 열장을 겹쳐 석회칠 했다더니 절대 안 찢어지겠구먼.”
돛의 힘을 빌리자 노병들이 지치는 정도도 크게 줄어들었다.
지난 반 년 간 죽어라 노를 저었던 노병과 포병들은 어느새 근육이 터질 듯이 발달했고, 정예 노병이 되었다.
바람의 방향은 늘상 변한다.
한 방향으로 꾸준히 부는 바람은 없다.
바람이 변할 때마다 배가 나아가는 방향이 바뀌기에 그때그때 함영식이 삼각돛의 각도를 조절해줘야 한다.
노병만으로 저을 때보다 항해사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이거 기록 세우겠습니다. 이레면 한산도에 도착하겠습니다.”
“헐. 그렇게나 빠르게?”
“이 속도면 가능하지요. 아차 정오가 되었구나. 현 위치. 현 위치.”
신나게 떠들던 함영석은 고정시켜둔 나침반의 정남향에 태양이 올라서자 품에서 기물을 꺼냈다.
“그게 이번에 받은 거냐?”
“예. 1등해서 받았죠. 총 열다섯 명밖에 못 받은 기물입니다.”
“그래? 별로 대단해보이지도 않는데.”
“이것만 있으면 세계 어디를 가도 현재 위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좀 과장이 심한데.”
“과장이 아니라니까요 매형.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이거 하나 만드는 데 쌀 이천석이 들어간답니다.”
“헙! 그렇게나 비싸?”
“예. 그래서 말인데 매형. 우리 이거 팔아먹을 라요? 동래에서 왜구에게 팔고 대신 나무를 조각해 비슷한 걸로 갖고 다니면 안 들키지 말이지라.”
처남의 말에 이준형은 혹했다가 혹시나 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바로 뒤에 조정 고관이 똑 서있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건 그냥 웃자고 한말입니다. 참말입니다요. 팔아먹다니요. 그런 짓을 할리가 있겠습니까?”
이준형은 즉각 고개 숙여 변명했다. 이준형의 말에 말실수를 한 함영식이 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엎드렸다.
키 작고 못생긴 남자가 네이놈! 하면서 길길이 날뛰는데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가로막았다.
“생각쯤은 할 수도 있지. 실제로 그런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절대 그런 일 없을 테니 제발 이 일은 통제사께 비밀로 해 주심이.”
“통제사가 무서운가보군. 그래. 그러지 뭐. 그런데 그게 그렇게나 비싼 물건이냐? 어떻게 쓰는 건데.”
남자의 물음에 엎드려 있던 함영석이 조심히 일어섰다.
“옛. 사용법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 바닥선을 저 멀리 수평선과 맞춥니다. 그리고 윗선을 태양과 일치시킵니다. 그러면 두 선의 각도가 나옵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두 선을 일치시키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함영식은 여러차례 시도하고 수정하고 확인한 끝에 수평선과 태양의 각도를 구했다.
“신기하게도 현재 날짜와 시각을 알 수 있다면 태양의 높이는 언제나 정해진 높이에 있습니다. 그를 바탕으로 현재 위치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각도를 찾으면 현재 날짜에 맞춰 보정된 숫자를 더해줍니다. 이렇게 더하고 표를 찾으면 현재 저희가 있는 위도는.... 아 위도가 뭐냐면은.”
“위도가 뭔지는 안다.”
“그러시군요. 여기까지 했으면 현재 위도를 지도표를 통해 찾아야 합니다.”
함영식은 여기까지 설명을 하고 한참 끙끙거리며 계산을 했다. 그 후 품에서 작은 책자를 꺼내 한참 찾았다.
“찾았습니다. 2월 21일 현재 저희의 위치는 금강산 동쪽입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금강산이겠군요.”
“호오. 신기하구나.”
“그렇죠? 대단하죠? 육분의라는 물건으로 무산공 모현성이라는 현자께서 만드셨다는데, 이거 하나 만드는데 쌀 이천석이나 들어간답니다. 듣기로는 그분께서는 역사상 최고의 천재여서 모르는 게 없고, 모든 걸 다 해낼 수 있다 하시더군요.”
“대단하네.”
키 큰 사내는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옆을 바라봤다.
키 작고 못 생긴 남자는 왠지 쑥쓰러워 하며 고개를 돌렸다.
육분의.
배의 위도를 알게 해주는 물건으로 GPS 사용이 일반화된 21세기에도 항해사 자격증 시험에 반드시 포함된다.
GPS가 잡히지 않는 비상시엔 육분의를 사용해 위도를 알아내야 한다.
그 정도로 완성된 물건이고 유용한 물건이다.
당연히 모현성이 개발한 게 아니고 이미 수세기 전부터 사용되고 있다.
“낮엔 태양의 높이로 알아내고 밤엔 북극성의......”
“됐고, 부하에게 명해 술상을 차리라 해라. 심심하구나.”
“예? 예. 알겠습니다.”
대낮부터 술타령이라니.
함영석은 내심 툴툴거리며 포병 겸 식사담당 몇에게 지시해 수발을 들게 했다.
“그냥 마법으로 갈 걸 귀찮게.”
“에이. 이것도 로망이지. 배도 미리 타보고 적응해야지.”
“심심한데. 낚시나 할까?”
“가지고 왔어?”
“어 몇 개 만들었지.”
“에게. 장난감 같은데? 버틸 수 있겠어?”
“마법으로 강화했어. 낚시나 하자.”
바람이 바뀔 때마다 세심하게 돛의 위치를 조종해야 하는 함영식은 피곤해 죽겠는데, 배 후미에서 노닥거리는 고관들이 고까웠다.
항해사는 보통 세명이 타서 교대로 운용해야 하는데 현재 이 배는 자기 혼자 몰아야 한다.
선장인 매형은 잠깐 설명을 듣더니 질색하고는 도망갔고, 갑판병 몇을 뽑아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신도 교육에만 매진해서 네 달 만에야 이해했으니 병사들이 제몫을 하려면 최소 네 달은 혼자 고생해야 한다.
혼자 바람을 보고, 돛의 각도를 조정하고, 현 위치를 찾고, 해도와 비교해서 암초지대를 미리 피하고, 할 게 너무 많다.
“잡았다. 손맛 죽이네.”
“회 뜨자. 형 회 뜰 줄 알아?”
“내가 못하는 게 뭐냐? 방어쯤이야 간단하지.”
순식간에 큰 방어 한마리가 해체되어 근사한 회로 바뀌었다.
“캬. 오랜만에 회에 소주네. 와사비 없는 건 좀 아쉽다. 어이. 당번병. 간장 한 종지 가져와라.”
“그러게. 와사비가 있으면 두 배 맛있을 텐데. 어이 경업이. 한 점 할래? 이리 와서 좀 먹어라.”
키 큰 남자는 난간에 두 팔을 걸치고 있는 소년을 불렀다.
“감사합니 우우욱.”
“어이 너 괜찮냐? 멀미약 좀 줄까?”
“괜찮습니다. 사내대장부는 멀미 따 위우우우욱.”
괜찮다면야 안 준다.
멀미약인척 마법을 쓰려했는데 마력이 아깝고.
함영석이 고생하는 내내 정부고관들은 놀았다.
창술연습을 한답시고 늘어뜨린 돛 줄을 치우게 하고 연습하더니, 돛대에 해먹이라는 그물을 설치해 낮잠을 잔다.
2월 칼바람에 춥지도 않은지 얇은 옷만 입고도 잘도 잔다.
멀미로 고생하던 소년은 뒤늦게 낚시에 빠졌는지, 하루죙일 낚시로 고기를 연신 낚아 올리고 있다.
병사들이야 별미를 먹게 되니 좋아하지만 함영석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지들만 양반인가. 나도 명문중의 명문 강릉함씨 22대손 함영석인데.
“비키슈. 돛을 펴야 하오.”
“사각돛을 편다고? 역풍인데.”
이 인간 항해술을 아는 놈이었군.
뜨끔한 함영석이 되레 소리를 높였다.
“새로 받은 돛이니 한번 펴봐야 하지 않겠소? 병사들 훈련도 해야 하고. 지금 연습하지 않았다가 전시상황에서 문제가 생기면 큰일 아니우?”
못생긴 남자가 길길이 날뛰려는 걸 키 큰 남자가 막았다.
“어... 어. 그래라. 열심히 해.”
해먹에서 자던 양반들을 깨워 내쫓았더니 별말 없이 배 후미로 가서 술판을 벌인다.
그것도 그것대로 짜증이다.
“창고의 자재를 모두 꺼내 말려라. 오늘처럼 날씨가 좋을 때 말려야 도구가 상하지 않는다! 일광건조 실시.”
창고의 짐을 전부 꺼냈다.
2월 강추위에 별 효과는 없을 것 같지만, 일단 시킨다.
결국 누울 자리가 없어진 양반들은 피식 웃고는 3층 포실로 들어갔다.
“이봐 처남. 고관들이라는데 괜히 시비 걸지 마.”
“병사들 고생하는데 노는 꼴이 아니꼽지 않습니까?”
정작 병사들은 쓸데없는 짓을 벌여 고생시키는 함영석을 저주하고 있다.
“지들만 양반인가. 우리도 전주이씨에 강릉함씨외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암말 못하는 거 보지 않았습니까? 말만 고관이지 별거 아닐 겁니다.”
“그래도 조심해. 괜히 적을 만들 필요는 없어.”
“예. 그러죠.”
함영석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함영석의 괴롭힘 속에 배는 한산도에 도착했다.
한산도는 무거운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판옥선, 판옥선, 판옥선.
언뜻 보이는 숫자만 이백 척이 넘는다.
좁은 바다 전체가 판옥선으로 가득하다.
태어나서 이토록 많은 함선을 한 번에 본 것은 처음이었다.
“이쪽에 대. 포탄 가져왔지? 전부 하역한다!”
육지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다.
여기저기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병사가 있다.
숯을 깨 가루로 만드는 병사. 유황과 염초를 배합해 기름종이로 싸는 병사. 식량을 분배하는 병사. 포탄을 나누는 병사.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지정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정신없이 지시받은 일을 하기를 3일.
전군이 총 집합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는 조선 수군 사만명과 경상우군 전라좌군 일만 명, 총 오만 명이 모여 있다. 나는 조선의 부원수로써 왜구 정벌에 나선다. 출전에 앞서 소개할 분이 있다.”
단상에 선 이운룡이 무겁게 선언했다. 그리곤 자리를 비켜줬다.
부함장으로서 두 번째 줄에 서 있던 함영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운룡의 뒤를 이어 나온 남자는 자신의 배에 탔던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던가.
남자가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목소리가 커서 오만 명이 전부 들을 수 있었다.
“알고 있겠지만, 임진왜란은 끝나지 않았다. 왜구의 사절이 한성에 와서 화친을 간청하고 있지만 내가 싫다고 했다. 나는 전주이씨의 종묘를 지키는 자로서 임란을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다.”
전주이씨의 종묘를 지키는 자?
그게 무슨 뜻이지? 왠지 알 것 같긴 한데...
“우리는 동쪽으로 간다. 가서 끌려간 백성을 구출하고 우리가 당한 것의 백배를 돌려주겠다. 나 조선의 국왕 광해이자 징벌군 총사령관 고진우가 명한다. 출진이다. 가자. 왜놈의 땅으로.”
쏴아아.
함영석이 먼저 가버렸다.
- 작가의말
가질 수 없는 강릉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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