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동방개척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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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헌은 대북파의 영수로 선조시절 관직이 좌의정까지 올랐으나 홍여순의 난에 연루되었고, 양반의 난에 적극 참여하였다.
구족이 멸족될 대역죄를 두 번이나 저질렀다.
그럼에도 살아난 건 누군가의 원한을 살만한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십년간 노역형을 선고받은 기자헌은 시키는 일을 했다.
도로를 깔고, 온돌집을 만들고, 저수지를 만들고, 논을 조성하고.
전국을 떠돌며 일했고, 일하다보니 깨우쳤다.
성리학의 죄. 변화되는 세상.
그가 그토록 찾던 진리가 세상에 있었다.
기자헌은 열심히 일했고, 불평을 갖고 있던 일족을 다독여 신법을 가르쳤다.
모범수로써 매년 형기가 줄어들어 6년 만에 노역형이 끝났다.
이제 자유다.
일반인이 된 기자헌은 함께 사면된 일족과 함께 강릉으로 돌아왔다.
드넓은 가문의 땅은 소작 붙어먹던 노비들이 나눠 갖고 있고, 가문의 대궐은 쪼개져 생전 처음 보는 인종들이 차지하고 있다.
“구름섬서 왔서. 안녕. 강하고 좋은 아침.”
“여기 살라던? 난 곰섬.”
혀 짧은 오랑캐의 말에 가문의 아이들이 울컥했다.
“무엄한 놈들.”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우리가 저들의 피를 빨아먹던 거였지. 이 집은 노비였던 이들이 권세가의 집에 살기 부담스러워 해서 흡수한 외인에게 집을 줬나보구나. 화내지 말거라.”
분개하는 일족을 다독이며 강릉 관아로 갔다.
관아 한켠 일자리관으로 가니 설명해주는 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읽고 설명해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마.”
기자헌의 인자한 말에 실망한 아이는 도로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기자헌은 넓은 벽에 붙어 있는 종이들을 하나씩 살펴봤다.
- 조선 내 이주 -
부부와 아이에게 가옥, 토지 반결 제공. 일인일 경우 토지 반결 이하.
올해 할당 7300가구
최저임금이 법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보장되고 있다.
토지를 신청하기만 하면 최소한 농지 반결과 살 곳을 주니 토지 반결을 농사짓는 수익이 최저임금이다.
기업들이나 부잣집에서 하인을 고용할 때도 이 가격이 기준이 된다.
이보다 적게 주면 아무도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니.
덕분에 조선 땅에 거지가 없어졌다.
땅을 받고도 놀다가 굶어죽는 자는 생겨도 대놓고 거지는 스님 말곤 없다.
“얘야. 조선 할당 7300가구라는데 우리가 함께 신청하면 한 곳에 모여 살 수 있느냐?”
아이에게 설탕으로 만든 사탕 하나를 주며 물어봤다.
“그건 안 돼요. 신청하고 나면 어디에 배정 받을 지는 누구도 모르고요 함께 살려고 청탁하면 큰 벌을 받아요.”
“그래. 그렇겠지.”
토지분배제도.
상업을 깔보던 고고한 학자가 실제로는 농장 대부분을 차지하던 예전보단 낫지만 문제가 있다.
새장가를 가 분가하는 어린 신랑에게 바로 옆집을 줄 수 없다.
토지가 전부 분배되었으니 분배할 토지가 있는 먼 곳에 가서 살아야 한다.
아내가 죽고 재혼하게 된 중년이 평생 살던 집을 떠나 생전 처음 보는 집에 살아야 한다.
잠깐 애를 봐줄 시어머니가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하고, 옆집에서 훔쳐가지 못하게 대문을 꽉 닫고 살아야 한다.
인간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
가족이 아무리 지긋지긋하다 떠들어도 따스한 가족의 정이 넘치는 집도 많다.
어린 시절 멱 감던 냇가, 아랫동네로 시집간 첫사랑, 첫 경험을 했던 물레방앗간, 함께 무우 서리를 하다가 같이 쳐 맞던 친우를 모두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야 한다.
이게 싫으면 좁은 집에서 가난하게 모여 살아야 하는데 실제로 그런 가난을 선택한 이도 꽤 많다.
기자헌도 노역을 해보니 알겠더라.
사람은 가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
일족과 함께 살기로 이미 대화도 다 되어 있다.
- 서북면 이주 -
부부와 아이에게 가옥, 토지 삼결 제공. 일인일 경우 토지 일결.
올해 할당 86000가구
- 곰섬 이주 -
부부와 아이에게 가옥, 토지 삼결 제공. 일인일 경우 토지 일결.
올해 할당 45300가구
- 구름표범섬 이주 -
부부와 아이에게 가옥, 토지 사결 제공. 일인일 경우 토지 일결.
올해 할당 90000가구
- 규슈 섬 이주 -
부부와 아이에게 가옥, 토지 삼결 제공. 일인일 경우 토지 일결.
올해 할당 150000가구
해외 이주는 토지를 많이 준다.
그래서 아예 해외 이주를 선택하는 이가 많다.
어차피 낯선 곳으로 갈 거 해외에서 돈을 모아 조선에 땅을 사서 돌아오는 걸 선택하는 것이다.
배급받은 땅끼리 금전을 얹어서 교환하는 건 국가에서도 인정하는 바니까.
이주자 받는 숫자만 봐도 해외 영토가 빠르게 늘고 있고, 그만큼 조선이 강해지고 있다.
광해의 능력에 탄복할수록 다른 길로 섰던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얘야. 해외 이주는 가족끼리 함께 살 수 있느냐?”
“예전에는 그랬는데 이제는 해외 이주여도 서로 떨어뜨려 논대요.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하나 되라는 취지와 혈연, 지연을 줄이기 위해서래요.”
농경 이주는 결국 함께 살 수 없는 건가.
기자헌은 옆칸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관령 목초밭 일꾼-
여름 가을 6개월 급료 월 은자 하나.
풀 베서 말리면 되는 간단한 일.
간단하긴 개뿔. 저게 얼마나 힘든데.
책만 읽던 성리학자 기자헌도 이제 세상을 안다.
-강릉 가죽신-
가죽봉제해서 신발 만드는 기업
00숙식제공00
가족같은 기업
배우면서 일하실 분
년 은자 하나
일 년에 은자 하나? 잘못 쓴 건가?
-돈 버실 분-
노인 아이 가능
농사하면서 부업 가능
집안일 하면서 가능
잘하면 금화 열개씩 버는 것도 가능
누구든 환영
고민하는 시간동안 당신의 수익이 줄고 있어여
...... 이건 뭘까.
온갖 사기와 고난이 숨겨져 있는 기업소개를 보다보니 놀라운 모집서가 보였다.
-동방개척단 모집-
광해산업 주관
배타고 동쪽으로 가서 지시하는 일 하면 됨
새로운 정착지 만드는 일
최초 5년간 월봉 은전 두개.
무상 의료혜택
5년 후 농경 선택 시 해당 지역에 토지 10결 보장
“얘야. 이거 나라에서 뽑는 거니?”
“아니요. 광해산업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어차피 광해님 기업이니까 나라에서 하는 건가?”
역시 나라에서 하는 건 통이 크구나.
동쪽 섬이면 곰섬 말하는 거겠지?
“얘야 이건 함께 살 수 있겠지?”
“농경지 이주 신청이 아니니까 함께 살 수 있겠죠.”
“5년 후 해당지역에 살아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자기가 만든 땅인데.”
드디어 가족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다 같이 모여 상의한 후 개척단 모집에 응하기로 했다.
며칠간 강릉에서 대기하자 남쪽에서 지원자가 모여 올라왔다.
안내인을 따라 북상해 함흥을 지나 청진까지 갔다.
돈 한 푼 없었는데 안내인이 식사를 책임져줘서 다행이었다.
5월 새벽바람이 좀 쌀쌀하긴 하지만 노역으로 단련된 몸은 그럭저럭 버텨주었다.
청진에 도착하니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 있다.
어마어마한 시설이 바닷가에 만들어져 있고 바다 위엔 동산만한 배들이 가득하다.
“와.”
“대단하네요.”
“이게 조선의 힘인가요.”
관북이 통제구역이라 남방 지역만 노역을 돌았던 기씨일족은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불과 칠년 사이에 나라가 이렇게나 바뀌다니.
최근 명과의 전쟁에도 승리해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고 하고.
광해의 발전을 가로막던 첫 번째 요소였던 기자헌은 부끄러움에 차마 바다를 볼 수 없었다.
“모입니다. 여기 모여요. 곧 행사를 한 후 잔치가 벌어질 겁니다. 배타기 전에 실컷 먹게 해 드릴 테니 우선 모여주세요.”
안내인이 간청하듯 소리치자 개척단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뿌우우우.
철그덕 철그덕. 칙칙. 치릭. 치릭. 치릭. 끼이이이이이.
성채가 다가온다.
수백보 길이의 성벽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다가왔다.
귀 아픈 쇳소리를 내며 멈춘 성채에선 병사들이 내리고 사람이 내렸다.
붉은 곤룡포를 입은 국왕이 보였다.
국왕은 뒤따라 내린 거대한 표범에 올라타고는 바닷가로 나아갔다.
위엄.
말보다 큰 표범에 탄 국왕에게선 나른한 위엄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기차에서 졸다가 나온 광해는 걷기도 귀찮아서 구름이를 타고 행사장으로 갔다.
종교행사장으로 쓰이는 단상에 오르자 도열한 병사들이 보였다.
일본 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이운룡과 정예 병사 일만 명.
개척단 수송상단 이천 명과 대표 이괄.
개척단 지원자 사천 명.
개척단의 대표 최명길.
슥 둘러보며 마법진을 그려 목소리를 키운 후 입을 열었다.
“지금은 실감이 가지 않겠지만, 너희가 동방을 개척하면 조선의 영토가 지금보다 백배 늘어나게 된다. 오늘의 너희는 역사에 기록될 거야.”
이 말은 최명길조차 실감 못할 것이다.
모현성과 광해만 안다.
“병사들은 열심히 싸우고, 개척단은 열심히 마을 만들고. 너무 고생하지는 말고. 거기 소 많으니까 마음껏 잡아먹어라. 서로 싸우지 말고. 어. 너희 할 말 없냐?”
“없습니다!”
“그래. 출발.”
잠이 덜 깬 광해의 연설이었다.
잔치가 준비되었는데......
출발은 내일인데......
왕이 가라면 가야지.
“승선하라!”
당황하는 사이 이운룡이 소리치자 병사들은 말도 못하고 배에 오르려 했다.
“전하 잔치가 준비되었습니다. 밥은 먹이고 보내야죠.”
“어. 맞다. 밥 먹고 가라.”
그나마 왕에게 말 붙일 수 있는 최명길 덕에 잔치가 예정대로 벌어졌다.
바닥에 열 몇 명 씩 둘러 안고 그 앞에 미리 삶아진 솥이 놓였다.
시범적으로 고추가루를 묻힌 김치와 전, 밑반찬들이 깔리고 막걸리통이 전해졌다.
광해는 따로 자리 잡지 않고 백성들처럼 바닥에 앉았다.
앞으로 고생하다보면 충성도가 팍팍 떨어질 텐데 이런 모습이라도 보여줘야지.
역시 광해님 하는 칭송이 작게 들려온다.
왕의 가족들이 앉아 식사하는 곳에 최명길이 다가왔다.
“왔냐? 한잔해라.”
“감사합니다. 전하.”
스물여덟 나이에 쉰처럼 늙어버린 최명길의 표정이 밝다.
“너 놀러가는 거 아니야. 또 하나의 조선을 만드는 일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지금 조선보다 백배 큰 규모로.”
“괜찮습니다. 여기만 하겠습니까?”
“하긴. 너라면 잘 할 거다. 몸에 조금만 상처가 나도 구하러 갈 테니까 즉사 하지만 마라.”
“예. 전하.”
최명길과 덕담을 나누고 한잔을 마셨다.
조선이 진행한 개혁을 가장 잘 아는 건 모현성과 최명길이다.
모현성이 갈 수 없으니 최명길이 가야 한다.
최명길이라면 잘 하겠지.
순서가 정해져있는지 이운룡과 이시언 등 지휘관이 교대로 와서 마시고 간다.
“원숭환.”
“예. 전하.”
“군사이되 아직 신뢰받지 못하는 건 알지?”
“알고 있습니다. 전하.”
원숭환은 모현성에게 교육받다가 한산도에서 기초교육을 받은 후 개떡이 밑에서 1년 있었다.
이번에 동방원정군 참모로 가는 게 첫 관직생활이다.
“신뢰 못 받는 건 당연한 거고 무시되더라도 넌 꾸준히 옳은 조언을 해. 이운룡이 널 믿게 만드는 것도 네 능력이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원숭환을 보내고 나니 이괄이 다가왔다.
“저도 한잔 주십시오. 전하.”
“어.”
“믿고 맡겨주신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항해를 앞둔 이괄의 표정이 밝다.
“이제 멀미 안하냐?”
“예. 완전히 적응 했습니다.”
“하긴. 사람이라면 삼년 넘게 멀미하는 것도 이상하지. 모현성. 얘 이제 멀미 안한단다.”
“어. 그럼 안 되는데. 얘만 베링해로 보낼까. 아니다. 북극점 찍고 오래야겠다. 북극, 남극, 히말라야 정상.”
이괄은 모현성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랐지만 왠지 오한이 돌았다.
역사 속 이괄이 싫어서 자꾸 항해를 시켰더니 명성이 계속 오른다.
광해와 모현성이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다.
이런 놈은 매장시켜야 하는데.
“거기 다 찍으면 역사에 길이길이 기억될 텐데?”
“아씨. 그것도 싫은데. 에이 몰라. 그래도 보낼래.”
“야. 이괄. 마셔.”
광해는 이괄을 술로 괴롭히려고 아공간에서 독주를 꺼냈다.
“헛. 어주를! 저에게만 특별히! 감사합니다!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괄이 크게 소리치며 엎드려 술을 받았다.
주위에 앉아있던 고위급들의 얼굴에 서운함이 묻어났다.
아씨. 이게 아닌데.
결국 독한 술을 계속 꺼냈고, 가볍게 마시려던 잔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다음날 조선의 대함대가 청진을 출발했다.
2000톤급 갤리온 스물여섯 척.
1000톤급 수군과 수송선 스물두 척.
광해조선에서 만든 선박 대부분이 여기 포함되었다.
사람과 물자를 가득채운 함대가 광해에게 군례를 올리며 돛을 폈다.
함대는 편서풍을 받아 동쪽으로 쭉쭉 나아갔다.
- 작가의말
기자헌은
선조시절 40대 나이에 좌의정을 했고
영의정 유영경의 영창옹립을 대놓고 반대했고
광해군의 폐모살제를 적극 반대해 영의정에서 쫓겨나 유배를 갔고
인조의 반정을 비판해 끌려왔으며
이괄의 난에 놀란 서인에게 일족전원이 재판없이 살해당했습니다
성리학자라는 한계가 있지만 권력에 굽히지 않고 옳은 말을 하던 사람이었죠
원균의 100000000배 정치군인 이괄의 10000배 정도 훌륭한 사람이었는데...
님아 그배를 타지 마오 그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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