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화학연구소
순도 100% 픽션입니다
“수고했어. 급한 대로 준비 잘했네.”
“여러모로 미흡했습니다. 말뚝도 급하게 깎아 부족했고, 적이 무산 서쪽을 공격했다면 피해도 컸을 것입니다.”
“누구라도 동쪽을 공격했을 거야. 선로의 의미를 모를 테니. 서른 명 희생으로 만 명을 잡았으니 이제 박정승도 명장이야.”
무산에 남아있던 박승종이 고개를 숙였다.
모현성은 박승종의 준비에 기관차만 끼얹었을 뿐이다.
“그래도 기관차로 싸우는 건 상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철 수레로 전쟁을 하실 생각을 하시다니.”
“엣헴. 처음 만들 때부터 다 계산하였소이다. 으허허헛.”
모현성의 헛소리 때문에 진지한 칭찬이 농담처럼 되었다.
“산에 올라간 놈들 억지로 추격하지 말고 멀리서 위치만 파악해. 연변이나 다른 개척마을이 기습당하지 않도록. 아마 창춘 쪽으로 후퇴하겠지만.”
“예. 전하.”
박승종에게 뒷일을 맞기고 나왔다.
멀리서 허준과 제자들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다.
생각해보니 박승종이 전투준비로 바빠서 허준이 통신을 넣었구나.
사실 급박한 전투였긴 했지.
“천과 끓여 식힌 물 가져와!”
“예.”
의원의 지시에 일꾼들이 수발을 든다.
“이건 사용한 거잖아.”
“깨끗한 천이 없던데요.”
“없어도 이걸 가져오면 어떡해. 사람 죽일 거냐?”
의원은 급한 대로 썼던 면포를 주정에 헹군 후 상처를 닦았다.
천과 물을 끓여 소독하고, 상처를 알콜로 닦은 후 알콜에 담갔던 바늘과 실로 꿰맨다.
“꼬맨다. 팔다리 꽉 잡아.”
으으으으윽!
마취제도 없다.
독한 술 조금 먹인 후 입에 헝겊을 물리고 생으로 꿰맨다.
외과적 처치는 아직은 이게 한계다.
도구를 삶고, 상처를 주정으로 소독하기.
이것만으로도 사망률은 절반이상 줄겠지.
맹장이 터져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참고 버텨내길 기도해야 하는 세상이다.
항문 치질이 터진 것만으로도 출혈로 죽는 세상.
명재상 류성룡도 치질로 죽었다고 하던데.
광해의 마법 외엔 거의 방법이 없다.
한 50년 쯤 고생하면 현대의학을 어느 정도 흉내 내겠지.
광해는 허준에게 다가갔다.
“허준. 도와줄까?”
“아닙니다. 전하. 중환자는 모두 처치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가벼운 환자마저 맡기긴 송구스럽습니다. 그리고 환자에게 미안하지만 제자들에도 새로운 이론을 접할 기회가 필요합니다.”
하긴 무산에 의원이 드글드글하니 환자볼 일이 오히려 부족하겠지.
“그래. 연구소로 가세.”
광해와 모현성은 허준의 연구소로 갔다.
화학연구소.
1구역 서쪽에 있다.
사용하기 더럽게 어려운 시멘트콘크리트로 크고 깔끔하게 지었다.
검은 연기 나는 공장단지에서 최대한 먼 곳이며 조경수와 산책로까지 갖춘 아름다운 정원도 조성했다.
중요한 일 하는데 이정도 환경은 만들어 줘야지.
“성과는 어때?”
“광해님의 세 번째 은혜를 완성했고, 하루 천 알씩 만들고 있습니다. 약효도 확인했고, 정확한 용법을 기록 중입니다.”
세 번째 은혜는 아스피린이다.
진통과 해열효과가 있는 이 약은 현대에 가장 많이 사용된다.
아스피린 계통은 매일 무려 1억 알씩 소비된다.
“써보니까 어때?”
“확실히 모든 병에 조금씩 차도를 보입니다.”
“그런데 좀 부족하지? 과연 그걸 먹고 신의 은혜를 떠올릴까?”
“누가 약을 받고 감히 은혜를 저버리겠나이까. 만백성이 기뻐할 것입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첫 번째처럼 기적을 느끼겠냐는 거지. 이것도 비싸게 팔 건데 과연 돈값 했다는 느낌을 받을까?”
“그... 그건.”
“부족하지. 그러니까 내 이름은 빼. 남발하면 약발 떨어진다.”
페니실린이나 괴혈병 치료제처럼 먹는 즉시 빼어난 효과를 보여야 사람들이 신앙을 갖지.
출혈을 지속시키는 단점도 있기에 광해란 이름이 들어가선 안 된다.
“이름은 허준 진통제로 하자.”
“아니옵니다. 이 약은 모공이 알려준 대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광해는 실험실을 둘러보고 있는 모현성을 힐끗 봤다.
쟤 밑천도 다 떨어졌다고 했지.
“그럼. 모현성 진통제로 하든가. 광해약품 진통제도 괜찮고.”
“알겠습니다. 모현성 진통제로 하겠습니다.”
모현성이 과거로 오면서 준비한 건 페니실린과 아스피린, 딱 두개다.
나머지는 현대인의 기초지식, 면역이나 세균, 소독 같은 기본적인 개념밖에 없다.
이제부턴 직접 연구해서 찾아내야 한다.
“연구는 어때?”
“아직은 물질을 분류하고 기록하는 단계입니다.”
그래. 1년 사이에 암 치료제를 개발하고 MRI 발명하길 바란 게 아니다.
화학연구소라 이름 붙였지만, 분자나 원소의 개념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단 실험 기구가 부족하다.
유리장인을 갈아 넣었지만, 아직은 100배율 현미경이 한계다.
정확한 용량의 실험관과 저울, 정확한 온도계까지만 개발되어 있다.
이걸로 무얼 하긴 어렵겠지.
광해는 실험실 한쪽의 서재로 갔다.
-버드나무의 잎과 줄기, 뿌리 실험의 결과.
-상한 물을 100배로 확대해서 발견한 작은 벌레의 모양과 성질.
-구정물을 숯으로 정수하는 효과.
조금씩 데이터가 쌓여간다.
하나씩 뒤적거리며 보고 있는데 모현성이 쿡쿡 찌른다.
감히 왕을.
“형. 이거 봐봐.”
주황색 염료 만드는 법.
파란색 염료 만드는 법.
“호오. 이거 팔리겠는데.”
꽤 저렴하게 염료 얻는 법이 적혀 있었다.
24색 크레파스나 36색 물감을 펑펑 쓰는 현대인은 실감하지 못하는데 이 시대엔 염료가 굉장히 비싸다.
주황색 염료 한주먹을 얻기 위해 남미무당벌레 십만 마리를 으깨서 정제하는 세상이고, 조선 국왕의 빨간색 염료 한 근이 면포 50포와 거래되는 세상이다.
“허준. 이거 누가 발견했지?”
“동쑥입니다.”
그게 누군데.
“데려 와봐.”
“예. 전하.”
잠시 후 발에 포승줄을 묶은 여자가 왔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아 독쓰는 년.”
죄짓고 잡혔으니 노역수다.
그나마 발에 형식적인 줄만 묶고 실험에는 차별 없이 참여했다.
“네가 발견한 이 방법들로 염료를 생산하마. 염료에 네 이름을 붙일 거고 수익 일부를 주마. 노역수고, 평생 화학연구소를 벗어나지 못할 처지인데 따로 바라는 게 있느냐?”
“없습니다. 그저 몸만 편하면 됩니다.”
이상한 쪽으로 발전한 소시오패스.
몸 편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데 죄책감이 없고, 몸이 편해지자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
잘 먹이기만 하면 되나.
“네가 생각하기에 또 쓸모 있는 물질이 있느냐?”
광해의 물음에 동쑥은 음... 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서재에서 보고서 하나를 뽑았다.
“이 물질을 삼나무 으깬 것에 섞는다면 종이가 좀 더 잘 휘고 쉽게 부스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권한이 없어서 제지 공장에서 실험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종이 첨가물까지.
기특하네.
“허준. 얘는 모범수야. 포승도 풀고 감시도 하지 마. 먹고 싶다는 거 입고 싶은 거, 원하는 거 다 해줘. 1구역에 좋은 집 하나 배정해주고. 결혼하겠다면 하라고 하고. 그저 1구역 밖으로 나가지만 못하게 해. 관리자한테 그렇게 전달해.”
“알겠습니다. 전하.”
지시하고 보니 동쑥이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허준에게 배운 똑똑한 의원들이 하지 못한 일을 본능으로 사는 소시오패스가 이뤄 내다니.
“아. 의원만 모아서 문젠가?”
옆에서 모현성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뭐가?”
“화학연구소잖아. 그런데 다들 약효를 찾는데 만 집중했어. 이 보고서를 봐봐. 약효가 없다는 게 확인되면 멈춰버리잖아.”
“...... 그렇군. 허준.”
“예. 전하.”
“화학연구소를 열 배로 늘린다. 철공, 목수, 종이, 칠기, 유리 등 모든 장인을 조금씩 모아 연구를 한다. 이건 단순히 약만 찾는 작업이 아니야. 세상 모든 것을 찾는 연구야. 사고에 한계를 두지마.”
“알겠습니다.”
“그리고 분야별로 연구소장을 따로 임명하고 허준은 다른 일 좀 해야겠어. 동의보감은 완성 됐어?”
“얼추 정리가 끝났는데 연구하다가 새로 알게 된 것을 추가하고 잘못된 것을 고치다보니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의학 대학을 열 개 만들 거야. 연구소 인원은 나가지 못하니까 외부의 제자들을 모아서 의학도를 키울 수 있게 준비해. 교육용으로 쓸 교제를 준비하고. 혹시 지식을 공짜로 나눠주는 게 아까우면 돈으로 보상하마.”
“아니옵니다. 의학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내놓겠습니다.”
현대에도 쥐꼬리만 한 지식가지고 10년 20년씩 도제를 노예로 부려먹는데 허준은 확실히 생각이 열려있다.
이런 성격이니 당시 세계최고의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세상에 내놨지.
의원 밑에서 십년씩 노예생활을 하며 겨우 하나씩 배웠을 지식을 동의보감은 책 한권으로 모두 알려줬고, 향후 백년간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허준은 저작권료 한 푼 못 받았지만.
“그래. 수고하고.”
허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화학연구소를 떠났다.
무산을 총괄하는 백관을 만나 화학연구소 확장을 지시하고 공장까지 둘러보니 할 일이 끝났다.
“이제 돌아갈까? 아 또 여름이잖아.”
곧 장마가 시작될 거고 찌는 듯한 무더위가 덮치겠지.
“더우니까 여기 있자. 굳이 갈 필요 없잖아. 국정이야 허균에게 지시하면 되는 거고. 형이 반드시 한성에 있어야 할 건 아니잖아. 원래 여름이나 겨울용 피서궁이 있는 나라는 많았어.”
“하긴. 그러네. 나 너무 열심히 일했으니 쉰다. 전쟁 때문에 마력도 바닥났고.”
형이 열심히 일하긴 뭘, 내가 다했구마, 하는 모현성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광해님~
광해의 통신을 받은 예서의 말 끝에 하트가 매달린 것 같다.
“나 무산에서 여름 보내고 한성에는 9월에 돌아갈 거다.”
-앗. 아아.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예서의 목소리가 비 맞은 새끼고양이마냥 처량해졌다.
“그러니까 너도 와라. 소유키랑 구름이 남매 다 데리고. 통신실은 허균에게 맡겨.”
-아앗. 알겠습니다. 광해님. 빨리 가겠습니다.
얘 연극시키면 잘하겠는데.
“천천히 와도 된다.”
-아. 최명길 찬성도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데.
예서가 휴식이 필요하다 할 정도면 얼마나 피폐한 걸까.
너무 최명길만 갈아 넣었나.
“데려와. 어차피 계획 짜고 지시하는 건 여기서 서신으로 해도 되니까.”
휴가 와서도 갈리는 건 똑같지.
이후 며칠간 놀았다.
두만강변에는 백성 사천명이 붙어 도축을 하고 있다.
이번 전투로 획득한 군마가 구천 두다.
죽은 말이 이천여 마리, 다리가 다쳐서 도축을 기다리는 말이 칠백여 마리다.
죽은 말부터 해체해서 뼈 따로 내장 따로 모아 삶고, 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훈연한다.
한 마리 당 고기가 200kg씩 나오니 말고기만으로도 가을까지 먹을 수 있다.
말뼈 국물도 소뼈보단 못해도 꽤나 진하고.
한쪽에선 말가죽을 펼쳐 오줌 물에 절이며 가공하고 있다.
처음 해보는 백성들은 얼굴에 천을 두른 채로 구역질을 하고 있다.
이제 백정의 노고를 알게 되었을 테니 전처럼 차별하진 않겠지.
도축하는 위치보다 상류에는 두만강철교 건설이 한창이다.
국가 최우선 과제.
전쟁으로 잠깐 멈춘 것 말고는 계속 이어가야 한다.
청진 쪽과 연변 쪽 노선을 동시에 건설하고 있다.
교각 자리 주변에 흙을 쌓아 물을 막고, 강바닥에 거대한 바위가 나올 때까지 파낸 후 화약으로 폭파시켜 구멍을 내고, 가루 낸 석회석과 모래를 반죽해 넣고 어설픈 철근, 쇠기둥을 꽂는다.
나무로 틀을 짜 세우고 시멘트를 붓고 철근을 세우고.
기둥이 높아져 발 디딜 곳이 없어지면 흙을 쌓아 설 자리를 만들고.
체험 극한 노가다의 현장.
1차 시도 때도 같은 과정을 거쳤는데 기차의 수백 톤 하중을 못 버텨 무너졌다고 했지.
모현성과 광해가 재료공학이나 건축물리를 알지 못하니 실패를 쌓아가며 발전하는 중이다.
“철교 하나 세우는 데 1년 걸리겠네.”
“기관차 만드는 것보다 선로 만드는 게 어려워. 원래 다리 만드는 게 힘들지. 그나마 여긴 가까워서 1년이지 먼 곳은 재료 옮기는 것부터가 문제야. 선로 깔며 전진하는 수밖에 없어.”
기차에 선로를 싣고 이동해 자재를 내려 선로를 연장한다.
기차가 아니면 기다란 쇳덩이 선로를 옮길 방법이 없다.
사람이 앞서나가며 땅을 다지지만 결국은 기차가 옮겨가며 깔아야 한다.
“우선 청진까지만 연결하면 숨통은 트일 거고. 대륙횡단 철도가 완성되면 세계통일이 끝나지.”
“대륙횡단 계획이 몇 년이었지?”
“일단 50년.”
“졸라 오래 걸리네. 그때까지 죽지마라.”
너 죽으면 나 안 할 거다.
귀찮게 세계통일은 왜 해.
- 작가의말
동의보감 찬양은 앞에서 말했던 거 같지만......
찾다가 포기. 그냥 두번 읽으셍쇼
대단한거니까 두번 감탄하셍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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