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세자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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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때의 일이었다.
이춘복이란 자가 대역죄에 걸렸는데 이미 도망가고 없자 이름이 비슷한 이원복이란 자를 대신 잡았다.
이원복은 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역모를 꾸몄다며 거짓 자백을 했는데 지나가던 이항복이 한마디 했다.
“나도 이름이 비슷하니 나도 대역죄인인가. 저렇게 고문당하면 나라도 자백하겠는데.”
의금부 포졸들은 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범죄가 생기면 의금부나 포도청, 지방 관아의 병졸이 수사를 한다.
수사방법은 대개 고문이다.
생사람을 고문을 해 범죄자로 만드는 건 17세기나 20세기 경찰이나 똑같았다.
이랬던 사법제도가 바뀐다.
국가 기관에서만 할 수 있던 수사를 변호사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국가와 민간 두 군데에서 수사 할 수 있으니 현대 한국보단 발전한 형식이야. 솔직히 21세기를 생각해봐. 국회의원 아들이 음주운전을 해도 검사가 기소 없음으로 처리하면 사건 자체가 사라지잖아. 재벌 2세가 마약하고 강간해도 잘 아는 사법부에 전화한통만 하면 알아서 돈 나눠먹으며 범죄 자체를 없애니 마음 놓고 당당하게 죄지으며 살지.”
모현성의 말에 광해가 머리를 기울였다.
“똑같은 거 아니야? 나라랑 변호사 두 군데 다 돈을 주면 죄가 없어질 거 아냐.”
“검사조직은 단 하나의 철저한 상명하복 단체라서 윗선 한군데에만 돈을 주면 끝나지. 그런데 민간 변호사는 단체가 수없이 생길거야. 그러면 쇼부 칠 단체가 수없이 늘어나고 그 모두에 돈을 주다보면 포기하게 될 걸. 완벽하진 않아도 억울한 사건은 덜 발생할 거야.”
“모든 검사가 그런 건 아니잖아. 정의로운 검사도 있는데.”
“있지. 보다 못해 반기드는 검사도 분명 존재하지. 그런데 인생을 걸고 반기를 드는 건데 한 건으로 끝나지. 국회의원 아들 음주건을 덮지 않고 제대로 수사한다? 되겠지. 언론에 알리고 정식 수사해서 기소할 수 있지. 그 다음은? 지방 발령에 배당되는 사건은 없어지고 옷 벗고 나갈 때까지 손가락만 빨며 왕따당하는 거지. 그렇게 본보기를 보이며 길들이고 나면 말 잘 듣는 개만 성공해 위로 올라가는 거고.”
“음... 전에 이거 부작용이 크다고 하지 않았어?”
“권력자에겐 나쁜 제도지. 현재 권력은 우리가 갖고 있으니 우리한테 나쁜 거 맞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좀 더 발전한 체계가 맞지.”
“변호사의 장난은 어떻게 막을 건데?”
“무고죄 강화. 수사권을 주되 미리 수사범위를 정해 밀봉한 계획서를 내야 해. 상대가 증거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계획서를 내고 덮쳐. 그 후 밀봉한 계획서를 열어야지. 계획서 이상의 수사를 하거나,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식의 수사였다면 열 배의 무고죄를 적용해야지. 이 제도라면 정말 확신이 들 때만 수사권을 사용할 거야.”
“결국 안 쓰게 될 것 같은데.”
“정말 확실할 때만 쓰겠지. 진짜 저 새끼가 확실한 범인 맞는데 검사가 기소 없음 해서 지운 그런 당당한 범죄들, 그런 거 잡으라고 있는 제도야.
그리고 변호사가 범죄자를 옹호할 때도 위증죄가 붙어. 증거를 숨기고 죄를 깎으려다가 걸리면 추가된 수사비용을 변호사에게 물리지. 시발, 가해자의 증거은닉은 죄가 아니라는 게 말이 돼? 죄 지었으면 불리한 증언이라도 해야지. 싫으면 죄 짓지 말아야지. 이러면 알아서 변호사가 죄를 찾고 형량을 조정할 거야.”
“그럼 변호사가 의미 없는 거 아니야?”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맞아. 변호사는 있는 죄를 덮으라고 있는 직업이 아니라 억울하게 뒤집어쓰거나 법을 몰라 추가형별을 받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는 직업이야.”
뭔가 광해가 알던 변호사와 많이 달라졌다.
“...... 그래. 시행해라.”
전국 관아에 신법에 대한 방이 붙었고 종교활동과 학교에서 자세한 설명이 이뤄졌다.
첫 시험은 반년 후이며 시험에 참고할 법전과 예제가 관아로 배달되었다.
그리고 판사제도는 즉각 시행되었다.
6개월 후 공식 판사가 뽑히겠지만, 현재 판결을 맞고 있는 이들이 즉시 적용되었다.
“이초란. 의금부에 가서 죄인을 살핌. 허균을 만나 국정 논의, 모현성과 오찬을 하며 법제도 논의. 의금부에서 죄인을 살핌. 모현성, 허균과 저녁을 들며 제도 개혁 논의.”
이초란의 일거수일투족이 보고되었다.
보고서는 매일 아침 전날의 하루를 직접 작성하며 관아 한쪽에 공개된다.
누구나 가서 볼 수 있다.
판사가 하루를 적은 것 중에 범죄와 얽힌 이를 만나 부정한 대화를 하거나 누군가 만난 사실을 고의로 누락한다면 신고해 전 재산의 반을 받을 수 있다.
벌써 검계놈팽이들이 돈 냄새를 맡고 몰려와 판사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유 없는 삶. 대신 풍족한 삶.
“이초란. 모현성과 조찬하며 논의. 의금부. 모현성과... 모현성과......”
“좋아 보입니다.”
옆에 있던 예서가 말했다.
“응?”
“스승님과 이 판사. 두 분 요즘 보기 좋습니다.”
예서가 얼레리꼴레리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라? 이상하네. 모현성은 이초란을 죽이자고 했는데.”
“제도를 손볼 게 많아서 계속 같이 계시더군요. 헤헤헤. 전엔 최찬성도 있었지만, 동부원정 간 후 두 분만 같이 다니시니. 헤헤.”
모현성 이 놈.
자긴 주인공이라 강제고자라더니.
“요즘 모 별좌님 표정이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남자가 친구 얼굴 볼 일이 있긴 하나.
광해는 말을 하며 보고서를 다시 봤다.
한성 의금부 판사 이초란.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 매일매일이 적힌 보고서가 공개되어 있다.
누구나 볼 수 있다.
보는 것 만으로 그 사람의 하루를 유추할 수 있는 보고서.
과연 잘 될지 의문이다.
남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이들 몇은 벌써 사표를 던지고 떠났다.
“이런 문제가 있네.”
과연 프라이버시가 위인가, 아니면 판결의 공정성이 위인가.
이초란에겐 공정성이 최고지만 다른 이도 이럴지.
“적어도 발전하고는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현대 한국보단 낫겠지.
“아바마마. 동부원정을 가고 싶습니다.”
세자가 와 절을 하고 말했다.
옆에 있는 왕후가 놀라는 걸 보니 엄마도 몰랐던 것 같다.
“왜?”
“나라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한성에서 소자는 그저 왕의 아들일 뿐입니다. 일을 하려 해도 제 신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멀고 먼 동부원정을 가서 국가를 건설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음...... 동쪽 왕 하려고? 내가 오래 살아서 왕 못하니까?”
“아닙니다. 아바마마. 그곳은 아무것도 없기에 처음부터 만들어야 하며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들었습니다. 거기서 한 손이라도 보태고 싶습니다. 백성으로 위장해 가서 일만 하다가 오겠습니다.”
자기 나름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건가.
열여섯 살이면...... 살짝 늦은 중2병인가.
“안 돼. 거기 가뜩이나 할 일 많은데 세자가 가면 오히려 신경 쓰여서 걸리적 거려. 최명길 머리 터지게 하지 말고 여기서 얌전히 살아.”
중2병의 불타는 회오리를 챙겨주긴 싫다.
가뜩이나 일손 부족할 텐데 거기에 세자를 끼얹으면 최명길이 파업할 지도 모른다.
광해의 말에도 산남대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바마마. 신분을 숨기겠습니다. 아무도 세자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진정 돕기 위해 가는 것이옵니다. 농사꾼의 자식으로 칭하며 아무런 특권 없이 국가의 건설을 돕겠습니다. 누구든지 알아차리면 즉시 돌아와 벌을 받겠습니다.”
중2병 확장판인가.
“세자비는? 신혼인데 놓고 갈 거야?”
“함께 가기로 동의했습니다.”
“걔가 할 수 있겠어. 명문 박씨 집안 규슈가 거기 가서 다른 아낙들처럼 고된 일 할 수 있겠어? 욕 한번 먹어본 적 없는 니들이 거기서 욕먹고 채찍 맞아가며 일하는 걸 참을 수 있겠어?”
채찍까진 때리지 않아도 일 못하면 갈군다.
“동의했습니다. 참고 일할 겁니다.”
광해는 산남대군의 굳건한 눈을 바라봤다.
이거 억지로 막으면 애가 삐뚤어져서 가출하거나 연산군처럼 된다.
가서 고생하다가 중2병 낫게 되면 오겠지.
“그래. 가라. 가되 누구라도 네가 세자임을 알게 되면 돌아와야 한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 니 종사관들도 데려가라. 말 잘해놓고.”
몰래 보내되 술 먹고 시비 거는 놈팽이에게 칼 찔려 죽으면 안 되니까 최소한의 호위는 붙여야지.
능양군과 능창군, 아전 두놈.
고생하다보면 이 중 하나가 입 잘못 놀려서 소문이 퍼지겠지.
산남대군의 중2병 덕에 애꿎은 네 가족이 개척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왕후는 더없이 슬픈 눈을 하고 산남대군이 나간 방문을 보다가 혼잣말 하듯 읊조렸다.
“저도 동부 원정대에 합류하겠습니다.”
나가려던 광해는 왕후를 잠시 보다가 다시 앉았다.
“박상전! 술상 봐와라.”
“예. 전하.”
문 밖에서 박내관이 대답하고 광해는 왕후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쇼윈도부부.
아침에 세자 문안을 받을 때나 국가 행사 때만 함께하는 부부.
광해가 이 몸을 차지한 후 한 번도 안지 않은 여자.
왕후의 몸은 더없이 편할지라도 행복하진 않겠지.
그렇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난데없이 광해군의 몸을 차지한 광해에게 이 여자는 생판 남이다.
전혀 모르는 애 딸린 유부녀.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인간도 있겠지만 광해는 아니다.
그냥 모른 척 안아주면?
여자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왕후만 안아줘야 한다.
다른 여자를 안는다는 것 자체도 그녀에겐 스트레스니까.
그럼 다른 후궁들은?
복잡하니까 그냥 나쁜 놈이 되련다.
어차피 난 나쁜 놈이다.
내 마음이 원하는 여자를 안으련다.
술상이 들어오고 광해는 왕후에게 술을 따라줬다.
왕후는 광해의 눈빛을 보고는 조용히 받아 마셨다.
한 순배, 두 순배, 세 순배.
“난 나를 위해 살아.”
네 순배. 다섯 순배.
차라리 모르는 여자가 낫지, 광해에게 중전은 아는 여자다.
친구의 아내처럼 보인다.
친구의 아이를 낳은 중년 여성.
전혀 끌리지 않는다.
안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미안하지만...... 내가 사랑해 줄 일을 영원히 없을 거야.”
여섯 순배, 일곱 순배.
함께 늙어간다면......
예서와 함께 늙어갈 것이다.
소유키도 후보지만, 중전은 아니다.
“대신 중전의 자유를 내가 억압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여덟 순배, 아홉 순배.
아무 말 없이 주는 대로 받아 마신 중전이 어지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중전은 하고 싶은 것 뭐든 해도 돼. 반인륜적인 일만 아니면 내가 막는 일은 없을 거야.”
열 순배.
앉은 채로 고개 숙인 중전을 안아 요 위에 눕혀 줬다.
눈감고 있는 중전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광해는 조용히 방을 나서며 중전이 동부원정대에 합류하는 것을 알렸다.
세자와 국모가 궁을 떠난다.
왕이 오죽 못났으면 가족에게 버림받았냐는 소문이 돌 까봐 걱정했는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뭐? 이! 개새끼야!”
모현성이 욕설을 하며 이이첨의 얼굴을 발로 차 버렸다.
- 작가의말
그냥 제가 상상한 사법개혁의 방향입니다
공산주의처럼 현실화 될 수 없는 헛소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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