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북방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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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여순의 난 때, 이귀는 왕이 있던 대전에 있지 아니하고 왕의 선위에 쓰일 도구를 챙기고 있었다.
덕분에 대신들의 발목이 잘릴 때 무사할 수 있었다.
밖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해 슬쩍 동정을 살피니 겁에 질린 문관들이 사방으로 도주하고 있다.
얼마 후 광해가 피에 묻은 갑옷을 입은 채 병사들을 이끌고 나왔다.
“이 분은 조선의 왕 광해님이다. 신하들의 반란은 실패했다.”
병사들의 외침에 모든 게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병사들의 배신으로 대신들이 전부 죽었을 것이다.
궐 밖의 백성들과 합류한다면 대세를 뒤집을 수 없게 된다.
이귀는 시선을 피해 북쪽으로 달렸다.
금남의 구역인 내전을 통과해 궁궐 북쪽으로 달려 궁을 빠져나갔다.
광해가 팔대문을 장악하기 전에 한성을 빠져나온 이귀는 그대로 마패를 사용해 철원까지 내달렸다.
철원부사 김장생.
율곡 이이의 제자 중 현재 가장 명성이 높은 이는 이항복이다.
그 다음으로 뽑히는 게 김장생과 이귀다.
특히 김장생은 송익필의 진전까지 이어 유교 예법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한직인 철원부사직을 하며 제자를 기르고 있는 김장생에게 지금껏 있었던 일을 고했다.
모든 설명을 들은 김장생이 말했다.
“그 자는 군주가 아니군. 상국에 대한 예를 저버린 파렴치한 자가 어찌 조선을 통치한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허나 의인의 거사는 실패했고 우매한 백성들은 그에게 현혹되고 있습니다.”
“끌어내려야 하네. 상국에서 소식을 듣기 전에 우리 선에서 갈아치워야 하네. 결코 상국에 죄를 지어선 안 돼.”
“어찌해야 합니까?”
“흐음......”
김장생은 장고를 거듭한 끝에 입을 열었다.
“내가 존경하며 모시는 분이 상국에 있다네. 서신을 보내 조선에서의 일을 전하겠네. 내 미리 사죄하고 바로잡는다면 상국의 화를 피할 수도 있을 걸세.”
이것이 네 달 전의 일이었다.
이날 집회에는 김장생과 이귀가 나와 있었다.
김장생은 자신이 초청한 명나라 사신들이 오자 몰래 만나 조선의 실정을 자세히 전했다.
이번에 왕에게 항의한다기에 둘은 위험한 곳까지 다가왔다.
최대한 멀리서 삿갓을 쓰고 있던 둘은 사신이 죽는 장면을 봤다.
“미쳤구나. 어찌 감히 천국의 사신을 해한단 말인가.”
“다른 사신들도 포박하고 있습니다.”
“안 된다. 이래선 아니 된다. 재조지은을 잊고 어찌 상국에 이빨을 드러내는가. 이는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를 해하는 것과 같은 패륜이다. 용서할 수 없는 죄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해주로 가세. 송상과 연락하겠네. 천자께 사람을 보내 죄를 고하고 상황을 전해야겠어. 천자께 조선 백성을 구해 달라 요청하세.”
왕의 무시무시한 능력을 본 이상 암살은 시도할 수 없다.
그저 천자께서 저 악마를 해치워주셔서 조선 백성에게 관용을 베풀길 기대야 한다.
둘은 말에 올라 북으로 달렸다.
“어쩌자고 죽이셨습니까?”
“내가 죽였냐? 신께서 벌하신 거야. 난 몰라.”
광해는 뻔뻔하게 발뺌했다.
“하아. 이제 어쩌실 것입니까? 분명 상국에서 병사를 보내 조선을 휩쓸 것입니다.”
“그거 큰일이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다른 사신들도 포박했는데 이들은 어쩌실 것입니까?”
“그건 자네들이 생각해야지.”
“예?”
왕의 뜬금없는 말에 이원익이 예를 내려놓고 반문했다.
“나라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을 찾아라. 전국의 모든 유생 중 가장 똑똑한 이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가장 좋은 해답을 얻을 수 있겠지. 난 자네들 모두의 집단지성을 믿네. 해답을 내놓으시게.”
난 놀러 간다.
사고 친 광해가 슬쩍 빠지려 하는데 이원익이 슬쩍 잡았다.
“전하 그리고 추가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사신들을 포박하고 보니 두 부류였습니다.”
“두 부류? 그걸 내가 알아야 하나?”
“예. 아셔야 합니다. 한 부류는 북경에서 왔고 한 부류는 요동 동쪽에서 왔습니다. 애신각라라고......”
이제껏 당당하던 이원익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애신각라......”
광해는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는 척 했다.
아공간에서 몰래 모현성의 인물평을 꺼내 찾았다.
그러는 동안 이원익이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애신각라... 허허허. 한성에 온지 일주일이 되었다고?”
“예.”
“여진족 수장을 눈도 안 가리고 의주에서 한성까지 관도로 안내했어? 침투경로와 방어체계까지 전부 알려줬군. 나 이거 참.”
“변경에서 대명제국의 고관이라고만 보고하는 바람에......”
“한성에서 일주일동안 자유롭게 돌아다녔어? 아주 적에게 한성의 수비상태까지 전부 까발려 줬구만. 현재 훈련도감이 자리를 비워 수비병이 700명밖에 안 남은 것도 알려졌겠네. 기병을 들이쳐 3일 만에 한성에 침투해 왕의 목을 따고 여유 있게 돌아갈 수 있겠어.”
“그...... 예조에서 맡아서 했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예조 대신들이 북경의 대신들에 붙어 있어서.”
“참 한심하다 한심해. 공맹을 아무리 읽으면 뭐하나. 이런 기본적인 일조차 처리하지 못하는데.”
영의정 이원익은 자기 잘못도 아닌데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했다.
사실 왕의 말대로 잠재적인 적에게 이리 쉽게 정보를 넘겨준 것은 크나큰 실책이다.
당장 의주의 관원부터 줄줄이 목이 날아갈 심각한 일이다.
“불러와. 우선 단둘이 독대 좀 해야겠어.”
“전하. 위험합니다. 그 자는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무패의 장군이라 합니다.”
“어. 괜찮아. 내가 더 쎄. 독대할 일이 있으니, 통역 없이 들여보내고 전부 물러나게 해. 비변사 대신들은 북경 쪽 대책을 논의하고.”
“예. 전하.”
영의정 이원익은 누르하치를 불러온 후 전부 물러나게 했다.
누르하치는 얼굴이 길고 코가 길고 눈이 작은 말상이다.
키는 160이 안되어 보였고 어깨도 좁아 꽤나 약해 보였다.
위협적이지 않은.
보는 순간 느껴진 첫인상이다.
이 덕에 요령성의 지배자 이성량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그에게 지원을 받아 세력을 키울 수 있었겠지.
명나라의 지원을 받아 여진을 통일하고 그 힘으로 명나라를 무너뜨린 위대한 장군.
위협적이지 않은 외모마저 이용해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된 남자.
명나라를 무너뜨린다 – 2418805
가슴속에 불기둥을 품고 있다.
200만 넘는 소망은 처음 봤다.
위대한 남자.
이 키 작은 거인은 굉장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통역도 없이 들어온 누르하치는 잠시 고민하다가 북경어로 인사를 시작했다.
“반갑소. 대명제국의 좌도독 용호장군인 애신각라 라고 하오.”
“그냥 편하게 너희말로 해도 된다. 누르하치.”
광해의 입에서 나온 것은 건주여진어.
밀주가 이끄는 암살단을 죽였을 때 얻은 기술이다.
북경어도 아닌 건주여진어가 조선 국왕의 입에서 나오자 누르하치의 입이 딱 벌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잠시 사고가 멈춰버렸다.
누르하치가 대답하지 않자 광해가 천천히 일어서며 말했다.
“독대하자고 한 것은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몸을 세우고 경건한 표정을 갖추었다.
“조선을 대표하는 자로써 여진을 대표하는 자에게 사죄하겠네. 지난 수백 년간 조선이 행해온 여진족 민간인 집단 살해. 사죄하겠네. 미안하네.”
두 손을 옆구리에 붙이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진심을 다한 사죄.
십만이 안 되는 여진족에서 출발한 금나라는 강대하던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중원의 회하 이북을 전부 정복해 백여 년간 성세를 누렸다.
십만도 안 되는 여진족은 수백 배의 중원 인구를 압도했고, 이는 중원에 크나큰 공포를 안겨주었다.
후에 몽골을 무너뜨리고 성립된 명나라와 조선의 대여진 정책은 말살이었다.
여진족이 성장한다? 죽인다.
군역이 가능한 남자만 죽이는 게 아니다.
남녀노소 전부 학살한다.
포로도 필요 없다.
그냥 학살한다.
모현성의 인구론에 따르면 식량이 충분하면 인구는 금세 복구된다.
사람이 살만한 곳에 인구가 비면 척박한 곳에 살던 여진족이 와서 인구를 채운다.
몇 세대가 지나면 인구가 회복된다.
그러면 또 군대를 보내 집단학살이 벌어진다.
20세기 큰 문제가 되는 인종청소가 이 시대에 아무 죄의식 없이 자행된 것이다.
몽골 초원과 달리 여진족이 사는 곳은 척박하고 초원도 부족하다.
그래서 유목만으로 먹고 살 수 없다.
소규모 유목을 하고, 소규모 농업을 하고, 소규모 수렵을 하고, 소규모 어업을 하고, 대규모 약탈을 하고, 빌고 빌어서 식량을 교역하고, 생존을 위한 모든 짓을 해야 겨우 먹고 산다.
농업을 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거기 모여들 수밖에 없고,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기도 힘들다.
즉, 학살하기 딱 편한 민족인 것이다.
이렇게 죽일 거면 차라리 통치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여진족이 사는 곳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이 불가능한 곳이다.
얼음이 얼지 않는 시기가 일 년에 5개월이 채 되지 않아 농사가 어렵다.
점령하고 통치하면 유지를 위해 식량을 보내줘야 한다.
그래서 손해 보며 통치하는 대신 인종청소를 선택한 것이다.
인간의 잔인함은 끝이 없으니.
여진족이 늘면 대량 학살을 하고 또 늘면 대량 학살을 한다.
명나라와 조선이 수백 년간 해온 짓이다.
이괄이 열세 살에 지휘한 노토부락 토벌전이 바로 그러한 예다.
광해는 이 점을 사죄했다.
정중히 고개 숙인 광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선 국왕의 사죄를 받은 누르하치는 가슴 속 한이 조금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명과 조선에 당해온 민족의 한을 조선의 국왕이 알아준다는 것이 고마웠다.
하지만 자신은 여진의 대표.
단순히 사죄만 받는 걸로 끝낼 순 없다.
“그렇다면 무산에서 잡힌 우리 포로를 풀어주게나.”
“아니. 사죄는 사죄고 포로는 포로지. 학살을 자행한건 선대의 잘못이라 내가 사죄는 하되 책임질 생각은 없어. 딱히 범죄라는 죄의식도 없었을 테고. 너희도 조선에 침략해 약탈하고, 살인 강간하고, 나쁜 짓 많이 했잖아. 나의 사죄는 앞으론 이런 일이 없을 거란 약속일 뿐, 보상을 해줄 생각은 없어.”
광해는 충분히 뻔뻔했다.
보상 안 해줄 건데 지들이 어쩔 거야.
광해는 인조처럼 청나라에 발릴 자신이 없었다.
하물며 현재의 여진족쯤은 마음만 먹으면 1년 안에 무너뜨릴 수 있다.
“우리는 포로로 잡힌 만주족 포로의 귀환을 원한다. 무엇을 내놓아야 하지?”
누르하치가 조심스레 물어봤다.
“음. 만추라이 중 군역 가능한 이는 10만이 안 될 거야. 그 10만을 상시 병력으로 돌리면 부족이 무너질 테니 평소에 운용하는 병력은 2만이 한계일 테고.”
광해는 모현성에게 배운 여진족 규모를 말했다.
누르하치는 무표정했지만, 내심 정확한 수치에 놀랐다.
“그 중 무산에 침입한 5천 병력이 녹았지. 도주에 성공한 숫자는 300명밖에 안 되니 완벽한 전멸이지.”
사망자와 포로를 헤아려보면 생존자 숫자를 알아내는 건 쉬운 일이다.
“포로는 1300명 정도야. 이 중 잘란을 비롯한 지휘관 포로는 없어. 니루 몇 명은 잡았지만, 잘란들은 전부 전사했더군. 총 지휘관이었던 구사는 돌아갔지?”
광해의 기습적인 질문에 누르하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쓴 웃음을 지었다.
적에게 귀한 정보를 공짜로 안겨주었다.
머리와 수염이 전부 불타고, 온몸이 새빨갛게 익고 수포가 올라온 채 실려 온 자신의 둘째아들 다이샨.
만주족 전 병력의 1/4인 구사 하나가 통째로 증발한 대패.
분노한 누르하치는 전투과정을 자세히 들었고, 완벽한 함정에 공포를 느꼈다.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던 누르하치.
그랬기에 더더욱 함정의 치밀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르하치는 본능적으로 조선이 자신의 큰 적이 될 것을 느꼈고, 직접 알아보기 위해 몸소 행차했다.
그리고 광해를 직접 만나자 더 큰 공포를 얻었다.
기적을 행하는 치료술.
건주여진 언어를 공부한 천재성.
적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대범함.
사죄하되 보상은 거절하는 뻔뻔함.
그리고 북방 동토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정보력.
이 자는 적으로 돌리면 너무 위험하다.
- 작가의말
역사를 공정하게 보고 그 후 평가해보면 우리나라 꽤 괜찮은 축에 속합니다
그러니 공정하게 보는 것을 거부하지 말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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