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고요한 바다
순도 100% 픽션입니다
기술 발전은 인류 전체에게는 축복이지만 일부에게는 저주가 된다.
사진기의 발명은 수많은 초상화가를 거지로 만들었고, 디지털 카메라의 발명은 세계적 기업 코닥과 후지를 몰락시켰다.
자동차의 등장은 마차꾼들을 시위현장으로 내몰았고, 공유차량의 등장은 택시기사들을 시위현장으로 끌어냈다.
철선의 발명은 배의 모든 것이 바뀌는 혁명이지만 범선을 몰락시킨다.
아직 철선의 존재를 숨기려고 태평양노선에서 수송용으로만 쓰지만 제조하는 범선의 숫자는 점차 줄이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를 가장 먼저 받은 건 광해함이다.
“내가 광해함의 선장인데.”
광해함의 선장 이준형.
“난 세계최고의 항해산데.”
광해함의 항해사 함영석.
둘은 씹다 만 껌이 되었다.
8000톤급 철선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느리고 작은 광해함을 탈 이유가 없어졌다.
수송용으로 쓰기엔 위장철선의 무게 때문에 속도가 느리고 마정석의 마력이 아깝다.
엔진을 달아 개조하기엔 비용이 아깝다.
그렇다고 해외로 돌리기엔 위장된 철선이고 마법진이 그려진 마정석 장치 때문에 투입하기도 애매하다.
그냥 광해함이라는 이름을 떼고 제물포 방어함으로 만들려니까 이준형이 강력하게 주장했다.
“전선으로 보내주십시오. 이천톤급이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직 퇴역할 시기는 안 됐습니다.”
그에 광해함은 비상시 자폭장치를 달고 전선에 나가게 되었다.
대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서 보급을 받은 후 파나마시티에 설치한 세발마을에서 추가보급을 받은 후 리마까지 내려가 이운룡의 함대와 합류했다.
리마의 스페인 함선을 쓸어버리고 스페인의 번성한 해안도시를 파괴한 함대는 남쪽으로 이동했다.
수송선과 합류해 보급을 받고 안타파카스타에 정착지를 건설했다.
항구 동쪽엔 사막이 있는데 이곳은 지구 전체에서 가장 건조한 아타카마 사막이다.
그리고 지구에서 초석이 가장 많은 지역이다.
노동자들이 항구를 건설하고 물이 없어서 고생하는 건 최명길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운룡의 함대는 전진을 이어갔다.
해안에 작게 만들어진 스페인의 정착지를 파괴하고 가끔 만나는 스페인 함선을 침몰시키다보니 적이 사라졌다.
드디어 소식이 퍼진 것이다.
남으로 내려가 폭풍 같은 파도가 멈추지 않는 마젤란 해협을 건너 대륙 동안을 따라 북상했다.
이후 만나는 스페인의 항구는 비어 있고, 거주자들은 어디론가 숨어 있었다.
함대는 차분히 스페인의 항구를 불태우며 북상했다.
1년 반.
조선을 떠난 지 1년 반 만에 함대는 파나마 동쪽에 도착했다.
훗날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는 곳으로 현재도 주요 수송로다.
스페인 본국의 보급품은 파나마의 대서양 연안도시 콜론에서 태평양 연안 파나마시티로 육로 수송 되서 마닐라와 페루로 향하고, 페루와 마닐라의 산물은 이곳을 통해 스페인으로 전달된다.
파나마의 태평양 방면을 점령하고 칸국의 세발마을을 건설한 육상 병력은 대서양 연안에 있는 콜론도 점령하고 모든 스페인 인을 몰아냈다.
해군이 없어 항구를 건설하지 못하고 있지만 보급품은 쌓아두고 있다.
남미대륙을 돈 이운룡의 함대가 9개월 만에 콜론에 도착했고, 육로를 통해 보급을 받았다.
식량과 특식을 보급 받고 화약과 화포알을 가득 실었다.
이제부터 진짜 적이 나타난다.
스페인은 백삼십년 전에 등장했으며 그들의 힘은 주로 멕시코와 카리브 해 섬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이제부터는 적의 숫자가 아군보다 많다고 봐야 하고 화력의 우위도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남미 쪽 원주민은 전투가 시작되면 대부분 도망치지만, 이쪽 원주민은 카톨릭을 받아들인 이가 많아서 함께 싸울 수도 있다.
조심해야 한다.
콜론에 정박해 함대가 쉬는 동안 이운룡이 작전지도를 폈다.
“최소 한번은 크게 싸우게 되겠지. 적은 아마 멕시코에서 함대를 모으고 있을 거야.”
“예. 예상지점은 유카탄 반도의 메리다가 유력합니다.”
대답한 것은 함대의 군사 원숭환이었다.
“그렇지. 보급도 확실하고 육상병과 연계할 수 있으니. 그러므로 하바나를 먼저 친다. 섬들을 공격해 항구를 전부 불태우면 갇힌 스페인인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튀어나올 수밖에 없어.”
“훌륭하십니다.”
이운룡은 유능하다.
덕분에 군사 원숭환은 지금껏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하바나로 가니 적은 멀리 도망쳐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항구를 불태우고 동쪽으로 이동하며 주변 스페인 항구들을 전부 불태웠다.
그러기를 한 달여 아이티 섬 동쪽에서 적의 대함대를 만나게 되었다.
“적선발견! 적입니다!”
탐측 병의 고함에 장교 모두 선수에 매달렸다.
북쪽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적함이 백 척 가까이 보였다.
“많군. 미리 대기하고 있었나보군.”
멀리서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대충 천 톤급으로 보였다.
점차 거리가 좁혀지며 적의 모습이 소상히 보였다.
이천톤급 서너척과 천 톤급이 서른 척 가량이고 나머지는 오백 톤 미만의 작은 배들이다.
“음. 화력은 적이 강해 보이는데. 어떡하지?”
“지금부터 전열을 잡고 대응해야 합니다. 남풍이 강해 우리가 후퇴하려다간 의미 없이 포격을 받다가 전멸할 것입니다.”
원숭환이 대답했다.
그간 큰 전투가 없어 활약할 기회가 없었지만 함대의 군사이기에 적당히 존중받고 있다.
적은 역풍을 헤치고 남하하고 있고, 조선군은 순풍을 받고 있다.
지금 배를 돌려 남하하면?
함께 역풍을 받으면 작은 배가 빠르다.
적의 200~500톤급 함선에 무한 포격을 당하면 원균처럼 된다.
차라리 자리를 잡고 포격하는 게 낫다.
수없이 많은 해전을 거친 이운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전군 돛을 반 접고 동향으로 전열을 갖춰라.”
스물아홉 척의 이천톤급 함대가 한 줄로 선 후 일제히 동쪽을 바라봤다.
한 순간 바다위에 길이 4큰보의 성벽이 생겼다.
성벽위엔 무거운 대포가 가득하다.
이운룡의 함대는 배의 옆면에 강한 바람을 받아 북쪽으로 서서히 밀려갔고, 스페인군은 삼각돛으로 역풍을 헤치며 겨우겨우 기어왔다.
거리가 천보가 되었다.
“포격!”
콰콰콰쾅!
배 옆면 두 개 층에 설치된 광해일포 오십문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대포의 원리는 한순간 폭발력으로 쇠구슬을 날려 보내는 것.
쇠구슬이 받은 운동에너지만큼의 충격을 배도 똑같이 받는다.
끼이익. 끼이익.
배가 거칠게 흔들리고 단단히 짜여진 목재가 비명을 지른다.
충격으로 목재에 두껍게 바른 방수제가 찢어지고 바닷물이 새어 들어온다.
“재장전! 재장전하라! 수리병은 지하로 내려가라! 방수제를 발라라!”
칸국의 방수제는 한 번 더 진화했다.
생선 부레와 나무 수액을 굳힌 게 아니라 석유 찌꺼기인 아스팔트와 고무를 섞은 방수제다.
끓여서 물이 새는 곳에 부으면 순식간에 굳으면서 새어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는다.
“발포!”
콰콰콰쾅!
끼이이이.
“젠장. 또 새잖아. 빨리 가져와.”
배 바닥에서 끓이다가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 갑판에서 끓여 가지고 내려온다.
거칠게 흔들리는 배에서 뜨거운 방수제를 서둘러 옮기다가 넘어지면 죽는 거다.
“그래서 이 플라스틱 통이 훌륭한 거지.”
“니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니? 빨리 가져오라우.”
방수제를 발라 물새는 곳을 막고, 또 다음 포격에 나무가 충격 받아 또 새고.
전투를 하면 배에 탄 모든 이가 힘들다.
바닥에서 고생하고 포수들이 미친 듯이 재장전을 하는 동안 이운룡은 차분히 전장을 바라봤다.
천보 거리에서 명중률은 10퍼 미만.
적선이 많은데도 이게 한계다.
그래도 좋다.
적은 아직 공격을 못하고 있고, 거북이처럼 기어오고 있다.
속도가 빠른 소선들이 좌우로 퍼져 포위하려 하지만 그들이 오기 전에 적 주력이 잡힐 것이다.
크고 강한 포탄은 적선에 맞으면 바닥까지 뚫고 지나갔고 벌써 십여척이 이동을 멈추고 흘러가고 있다.
900보.
800보.
700보.
700보 거리가 되자 천 톤급 함선들이 고개를 꺾었다. 적도 동쪽을 보며 전열을 갖춘다.
좌우로 접근한 소선들도 화포 사거리까지 왔다.
“좌우 각 다섯 척씩은 남북 전열을 갖춰라.”
이운룡의 명령에 깃발병이 어지러운 신호기를 올렸다.
하얀 화약연기가 가득한데 다행히 명령이 금방 전달되었다.
함대는 가운데가 긴 H 모양이 되어 삼면을 대비하게 되었다.
콰콰콰.
콰쾅.
콰콰쾅.
서로 이 악물고 쏘는 포격전이 시작되었다.
쇠구슬이 갑판을 쓸고 지나가고 옆면을 뚫고 내부를 쓸어버린 후 데구르르 구른다.
돛대가 화포에 맞아 살짝 쪼개지고 돛 줄이 끊어져 와르르 쏟아지기도 한다.
쇠구슬 하나가 지휘부 곁을 거친 굉음을 내며 지나쳐 바다에 빠져도 이운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안정적이고 우직한 지휘.
광해가 인정한 지휘관이며 군사로 딸려온 원숭환은 솔직히 할 일이 없었다.
“십사함 침몰! 침몰신호입니다.”
“양쪽함의 갑판병만 보내 사람만 챙겨라.”
“십구함도 침몰!”
“같다.”
목조선이 침몰하는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배가 좌우로 흔들릴 때 바다 속에 잠긴 부분이 가끔 드러나는데 하필 거기가 포탄에 맞아 터지면 바닷물을 감당할 수 없어 가라앉는다.
또는 옆면을 뚫고 들어온 포탄이 함 내 화약을 터트려 화재를 일으켜야 한다.
이것 이외에는 침몰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적의 행운에 두 척이 침몰했지만 이운룡은 담담했다.
적선의 피해는 서른 척이 넘어간다.
천 톤급 주력선의 피해도 열 척을 넘고 중간 중간 섞인 이천톤급 세척도 맥을 못 추고 있다.
두 대와 서른 대.
훌륭한 교환비로 우직하게 포격을 하니 적진에서 북소리가 들린다.
북소리에 시선을 집중하면 새로운 깃발이 올라가고 적이 일제히 북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추격한다.”
큰 전과는 추격전에서 나온다.
잘하면 적을 전멸시킬 수 있다.
도주하는 적의 뒤를 쫒아 칸국군도 북진했다.
적선 중 돛이 멀쩡한 배는 빠르게 도주하고 돛이 찢어진 배는 하나 둘 낙오된다.
칸국군도 돛이 찢어진 배는 느리게 올라가지만 멀쩡한 배는 금방 적을 따라잡는다.
근거리에서 옆면을 잡고.
쾅!
적선이 하나둘 침묵한다.
스무 척이 가라앉았고, 쉰 척이 바다위에 둥둥 떠 구조를 기다린다.
범선간의 추격전은 매우 느긋한데 그래서 더 긴박하다.
바람을 타는 항해사의 역량에 따라 아주 약간씩 속도의 차이가 나는데 그 속도를 기준으로 조금씩조금씩 따라잡아 침묵시킨다.
적이 흩어지면 적당히 잡고 멈추겠는데 적은 똘똘 뭉쳐 북동쪽으로 도주했다.
무려 사흘간 추격을 멈추지 않고 한척씩 따라잡아 스무 척을 피해 없이 잡았고, 대부분은 소선보다 속도가 느린 천 톤급 대형 선박이다.
“멈춰야 합니다!”
바람이 약해져서 해도를 보던 원숭환이 갑자기 소리쳤다.
“응?”
“이곳은 침묵의 바다입니다. 제가 해도 보는 게 늦어서 죄송합니다. 멈추고 돌아가야 합니다.”
밤새 추격하고 적선을 하나씩 따라잡아 침묵시키다보니 집중력이 깨졌다.
“바람이 없으면 적이나 우리나 공평하지 않나?”
“아닙니다. 적에겐 작은 배가 있습니다. 그 배에 노가 있다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 전군 정선. 세발마을로 돌아간다.”
명령이 떨어졌고, 북소리가 울리고 깃발이 올라갔다.
다른 배들도 북을 울리며 같은 기를 올렸다.
배들이 돛을 꺾어 배의 방향을 돌리며 남쪽으로 향하려는데.
바람이 죽어있다.
어느 샌가 바람 없는 곳까지 온 것이다.
남풍의 관성으로 움직이던 함선은 관성에 의해 서서히 밀려 올라갔다.
침묵의 바다.
적함대가 돌아섰고, 포구에서 장대만한 노가 등장했다.
“속았군.”
서쪽에서 새로운 함대가 나타났다.
200톤 이하 소형 함선들이 노를 저으며 백 척 이상 등장했다.
“적의 작전이었어. 내해에서 운행하는 수송용 평저선까지 전부 동원했군. 천 톤급 대형함선을 먹이로 줄 생각을 하다니.”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적 지휘관이 대담한 거다. 이정도면 거의 모든 함선을 동원한 듯 허이. 나도 알고 있었는데 잊었으니 됐네.”
침묵의 바다.
바람이 불지 않는 바다.
아무것도 모르고 진입한 배들은 바람이 멈춰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바다 위를 떠돌다 사라졌다.
차라리 역풍이면 몸 비틀어서 움직일 텐데 바람이 없으면 아예 방법이 없다.
모든 사람이 뼈만 남아 죽거나 목숨 걸고 소선으로 옮겨 타고 떠나 유령선만 남게 되는 곳.
이곳은 배의 무덤이며 악마의 바다로도 불리고 버뮤다 삼각지대 전설에도 포함되는 사르가소 해다.
“군사가 눈치 챘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원숭환이 고개 숙여 사죄했다.
“많이 미안한가?”
“예. 군사로써 소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책임을 지시게.”
이운룡이 단검 하나를 건넸다.
“헉. 그...... 배를 갈라 죽으란 말씀이십니까?”
겁먹은 원숭환이 슬픈 눈망울로 글썽였다.
- 작가의말
아이티섬 동쪽에서 삼일간 열심히 항해한다고 해서 바람없는 사르가소해에 도착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에... 그러니까... 이건 소설적 과장 허풍 해학 유머 같은 겁니다
Commen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