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혁명모의
순도 100% 픽션입니다
모현성과는 거의 매일 통신한다.
-그랬구나. 어쩔 수 없지. 백관들 전원한테 서신을 보내야겠네.
“어. 니가 해라.”
-알았어. 이런 건 최명길이 잘하지.
천재 최명길.
100명의 백관이 이동하는 경로를 수정하는 어려운 일.
머리 복잡한 일일수록 최명길에게 맡기면 된다.
수군의 수송이 대부분 두만강으로 와서 전국으로 퍼지니 배편에 파발을 보내면 될 일이다.
모현성과 긴 대화를 끝내고 밖으로 나왔다.
북경에서 한성까지 한순간 이동하는 신의 기적을 체험한 이항복과 이덕형이 아직 경악하고 있다.
“이원익은 아직인가?”
“예. 금방 올 것입니다.”
사표를 던지고 퇴청한 영의정이 잡혀왔다.
“주상 전하. 소신은 나이가 많아 국정에 방해가 되옵니다. 부디 쉬는 것을 허하여 주옵...”
“어. 안 돼. 안 죽어. 걱정 마. 궁 안에서 가마나 말 타고 다녀도 봐줄게. 도망칠 생각 마.”
나이는 많지만, 후에 인조반정이 이후로도 한참 사는 양반이다.
이원익의 사직서는 황희처럼 반려 당했다.
광해는 셋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으며 구체적 계획을 한참 설명했다.
얼개는 예전에 모현성과 짜 놓았다.
“혁명모의는 이것으로 끝내지. 수정할 것 있나?”
이덕형이 물었다.
“전하. 당파를 떠나 드리는 말이옵니다. 이이첨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어. 믿어. 속마음이 보이거든. 걱정마.”
“알겠습니다. 그러하다면 완벽합니다.”
이번엔 이원익이 나섰다.
“전하. 너무 과격합니다. 혁명에 조선의 거의 모든 양반이 연루될 것입니다.”
“그러라고 하는 거야.”
“그 과정에서 무고한 피가 흐를 것입니다.”
“무고한 피라...... 중간에 두 번의 기회가 있을 거야. 선을 넘지 않으면 살려주지.”
“수많은 가문이 무너질 것입니다. 국가가 마비될 수도 있습니다.”
“집을 새로 지을 때 먼지 좀 나는 건 어쩔 수 없지. 물 뿌리면서 최대한 먼지 덜 나게 할 뿐.”
“부디. 부디 목숨만은 보존해주길.”
“대역죈데? 명을 위해 조선의 국왕에게 역모를 꾸민 죄인들을 살려주라고?”
“허나 상황을 그리 몰아가는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궁지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내는 게 이치입니다.”
안타깝군.
오성과 한음이 북경에서 큰 세상을 보며 변화할 때 이원익은 조선에서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지키고 있다.
가슴속 깊이 박힌 고정관념. 상식. 인생관.
쉽게 못 고친다.
광해는 영의정에게 책 한권을 던졌다.
“영상은 이번 일에 발 들이지 말고, 지금까지처럼 중립만 취하도록. 그리고 그 책을 독파해. 혁명 이후의 세계를 보도록 해.”
안타깝지만 영의정은 빠진다.
다음날 이항복과 이덕형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조정에 있는 신료들 중 불만이 있는 자들을 조용히 만나 건실한 미래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상국에서 병사를 준비하고 있네. 엄청난 대군을 일으킬 모양일세.”
“조선의 국왕에 대한 응징이야. 그래서 빨리 돌아왔다네.”
“세 달 후면 의주에 당도할 듯 하네. 그 전에 방어준비를 마쳐야 할진데.”
“지방에서 병사를 다 모아서 올려야겠지.”
“조선을 빨리 바로잡아 상국의 분노를 풀어야 하는데.”
광해에게 불만이 있는 자들 위주로 만나며 소문을 퍼트렸다.
불만이 있는 자는 광해가 알려줬다.
불충한 소망을 가진 자들의 리스트는 예전부터 작성하고 있었다.
광해는 따로 이이첨을 불렀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갖추고 자리에 앉는 이이첨.
이이첨은 꽤 오래 지켜봤다.
홍여순의 난 이후 일부러 처벌을 맞기기도 했다.
거기서 중립적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이첨은 집안이 크게 몰락해 한미하고 제대로 된 스승도 없이 독학했다.
자수성가의 표본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가문과 스승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성리학 사회에서 이건 굉장한 약점이다.
임란 때의 활약으로 성장했고, 대북파에 동조하며 은근슬쩍 대북파로 분류되었지만, 조식의 제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대북파의 영수가 되기 위해선 집단 내부에 끝없이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모현성의 수첩에 의하면 인조반정의 원인이 된 간신이다.
수많은 무고를 통해 대북파가 아닌 모든 파를 전부 죽이려 혈안이 되었고, 폐모 살제 등을 주도했다.
나중에는 이이첨의 옥사에 지쳐서 인조반정의 고변이 들어왔을 때 광해군이 ‘또 이이첨의 모략이냐?’ 하며 무시해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다.
인조반정 이후 역사를 기록한 승자 서인에 의해 조선 역사상 최악의 간신으로 기록된 이.
그런데 역사를 기록한 서인조차 이이첨이 사치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이첨의 집을 몰수했더니 작은 집에 패물하나 없이 서책만 수백권 있었다더라.
애매한 평가다.
역사서는 곧이곧대로 읽지 말고 승자의 각색을 알아서 쳐내며 읽어야 한다.
이이첨에 의해 수많은 목숨을 잃은 서인과 남인 등의 분노를 생각하면 어느정도 안 좋게 각색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최소한의 사실이라면 이이첨이 자기 부귀영화를 위해 옥사를 일으키진 않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대북파와 왕권강화를 위함이었다면?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불안요소가 될 수 있는 영창과 인목왕후를 쳐내고, 그런 정책과 반하는 서인과 남인, 소북을 죽여 왔다면 말이 된다.
어쩌면 거두 정인홍이 살아 있어서 부귀를 탐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자기 명예욕만 넘치는 간신일 수도 있고, 자기 당파의 독점에 미친 살인마일수도 있다.
분명한 건 부정부패는 없었고, 그의 행위가 왕권강화를 지향했다는 것이다.
왕 입장에서는 충신이다.
국왕의 신임을 받는다 - 381145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기록 된다 - 99454
소망은 두개인데 참 웃긴다.
권력욕과 명예욕인가.
나빠 보이지 않는데, 두 소망이 극으로 치달으니 살인마에 간신이 된 건가.
성리학 사회의 분위기가 극으로 치달으며 자기파와 의견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모조리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악마가 된 것이다.
어쨌든 좋다.
편리한 간신이며 충신이다.
마음껏 날뛰지 못하게 적당히 조종만 해주면 된다.
“이이첨. 그대를 한참 지켜봤고,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부탁할 일이 있다.”
“그저 명만 내리시면 됩니다. 전하.”
“그래. 역모를 일으켜라.”
“예. 예?”
“조선 전국의 양반을 규합해 내게 반란을 일으키도록 조직하라.”
“아니되옵니다. 전하. 위험하옵니다. 현재 한성에는 병사가 천명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도 위태로운데 양반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주상의 안위가 걱정이옵니다.”
“이보게 이대감.”
“예. 전하.”
“알고 시키는데 당하겠나?”
아 그렇구나, 하는 표정으로 납득하는 이이첨.
광해는 오성과 한음에게 했던 말을 이이첨에게 전했다.
“지금 이항복은 서인을, 이덕형은 남인을 만나고 있네. 자네가 북인들을 만나보게. 내게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라네.”
반광해 리스트.
데스노트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셋은 한명씩 조용히 만났지만, 소문은 금세 한성 전체에 퍼졌다.
그리고 이항복은 후배의 초청을 받았다.
“김장생. 이귀. 반갑네.”
파주에 숨어있던 김장생의 초대를 받은 것이다.
“무탈하셨군요. 다행입니다.”
“무탈하긴. 내가 연경에 가서 얼마나 고생했는데. 주상의 책봉은 받아야겠는데, 상국에서는 서자에 서얼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니 내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굽히고 사죄하고 간곡히 부탁해 드디어 책봉을 받나 싶더니 조선에서 온 소식에 연경이 뒤집어지고. 세상에. 역법과 해금령 철폐라니. 재조지은을 잊은 패륜 아니던가.”
이항복은 우는 소리를 하며 은근슬쩍 광해에 반기를 드는 뉘앙스를 취했다.
“그...... 외람된 말이오만 혹시 제 제자들과 만나지 못하셨습니까? 조선의 상황을 알리려 북경에 사람을 보냈는데.”
김장생의 질문에 이항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네 제자들? 보름 전에 상국을 탈출해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군. 상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자네 제자들이 연경에 갔다면 억류되었을 가능성이 크네.”
“아. 제 제자들이 열흘 전에 갔으니 엇갈렸겠군요. 허허.”
“그보다 자네들은 도성에서 뭘 한 건가. 이귀. 자네는 상국에 반하는 정책을 펼치는 건 두고만 본 건가?”
이항복이 이귀에게 대놓고 나무랬다.
이항복의 노선이 확실히 보이자 이귀는 속마음을 말했다.
“최선을 다해 바로잡고자 노력했습니다. 단체로 사직서도 쓰고, 홍 대감이 과감히 의거를 해 옳은 길로 인도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역모죄를 뒤집어썼습니다. 한성에서 죽은 이만 천명을 넘어갑니다.”
이귀는 세상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정을 다 아는 이항복은 그 꼴이 역겨웠지만 참고 말했다.
“허어. 그거 참. 고생했네. 고생했어.”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앞으로?”
“예. 왕이 군대를 장악하고 조선팔도를 들쑤시고 있습니다. 조선의 모든 성리학자를 무슨 도둑놈 취급하는데 청백리 양반들이 죄가 없으니 아무나 막 잡아들인다는 소문입니다. 성리학자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스승을 기리는 사원을 건립하고, 청백리에게 비를 세우는 걸 탈세로 기록하고 책임자를 묻는데 도망가지 않을 수 없죠.”
“그렇군. 생각해보니 내 가문과 처가, 외가, 스승의 가문도 위험하겠군. 은결이라니. 큰일이야. 멸족을 걱정해야겠어.”
“다행히 상국에서 거병하신다니 곧 바로잡아 주시겠지요.”
“그래. 그보다 말이야. 내 귀환 보고를 하며 주상과 독대를 했는데 주상께선 지방 양반과 아전을 모으실 생각일세.”
“예? 모으다니요.”
“지금 주상의 정책을 보면 아전과 양반을 적대하는 걸로 보이네. 지방을 수색하고 있는 조선군은 그대로 하던 일 하게 두고, 양반들을 전부 모아 전장에 투입하려는 걸로 보이네. 나가 싸우면 모든 죄를 사하여 주겠다는 뜻이지. 허나 우리가 바보인가. 속뜻이 딱 보이지 않는가? 공멸을 바라네. 껄끄러운 양반과 아전을 명군의 손으로 치우고, 약해진 명군을 막겠다는 뜻이겠지.”
“그렇군요.”
“주상께선 얼마 후 왕명을 내릴 걸세. 지방 양반과 아전은 전부 파주로 올라와 군대를 조직하라는 교지를 내릴 거란 말일세. 청야작전을 생각하는 듯 하네. 의주에서 개성까지 전부 비우고, 굶은 상국의 병사가 임진강을 건널 때 파주에서 막으실 생각이야.”
“큰일이군요. 정말.”
“그래. 큰일이야. 지방 양반이 전부 올라오면 십오만 명은 되겠지만, 제대로 훈련받지도 못한 양반들이 상국의 삼십만 대군을 막을 수 있겠는가. 한성에 병력 천명을 추가해도 아무 의미 없고. 주상께서 뜻을 꺾고 상국에 사죄해야할 터인데 그럴 기미가 안보이니 원. 큰일이야 큰일.”
이항복은 한참동안 불만을 토로하고 넋두리를 하고는 돌아갔다.
이항복이 돌아가자 이귀가 중얼거렸다.
“백사 어른도 근심이 많아 보입니다. 하긴. 정승생활을 오래 하신분이 사신사로 상국에 가 몇 개월을 허비했으니 답답하셨겠지요.”
“그보다 국왕의 뜻이 문제야. 정말 양반을 다 죽일 참이야.”
“그러게나 말입니다. 사실 은결을 조사하라며 따로 허균 같은 간신에게 일을 맡긴 것 자체가 저희를 믿지 않는걸 보여주는 것이지요. 양반과 아전에게 상국의 강병을 막으라니. 이건 다 죽으란 말이지요.”
“그래. 양반 십오만 명에 근위군 천명을 합쳐봤자 무얼 할 수 있겠나. 정작 훈련도감 등 정병들은 어사가 전부 이끌고 지방을 훑고 있으면서. 그들을 상경시키지 않는 걸 보면 성리학과 끝까지 해보자는 거지. 십오만...... 양반군 십오만 명 대 1000 명...... 이 정도면 가능할까?”
김장생이 말을 끌었다.
이귀는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았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발 없는 말이 빨리 퍼진다.
서인끼리, 북인끼리 조용히 대화하던 양반들은 이제 당파를 떠나 서로 의견을 합치기 시작했다.
각파의 영수인 이항복, 이덕형, 이이첨 등이 기름칠을 하자 연합은 매우 쉽게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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