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인생이란
순도 100% 픽션입니다
예서가 전각 하나에 백관을 전부 모았다.
한성에 남아있는 백관은 총 일곱 명.
헐레벌떡 달려온 그들의 숨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광해가 왔다.
슥 둘러본 후 한명씩 물었다.
“이초란. 무슨 일을 하고 있지?”
“판결을 맡고 있습니다. 도성에 끌려온 죄인들 중 주상께서 알려주신 죄상을 파악하는 중으로 천이백명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팔백여명 남았습니다.”
정원군으로 인해 신세를 망쳤던 여인.
그 후 범죄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으며 범죄자나 가족이 애걸복걸해도 정확한 판결을 내려 냉면판관이란 별호를 얻었다.
“그래. 너는?”
“광해소망교 교단의 확장과 교리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내수사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각자 하는 일이 중요하다.
뺄 수 있는 인물이 한명밖에 없다.
“채유진은?”
“맡고 있는 일이 없습니다.”
채유진은 입술을 씹으며 말했다.
백관에 뒤늦게 참여한 채유진.
그녀와 함께 참여한 예서와 이초란이 상위권 성적을 거둔데 반해 그녀는 꼴찌를 했다.
모현성의 말로는 노력이 부족하진 않다고 한다. 딱히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라 한다.
다만 기초지식이 너무 부족하다.
궁에서 이것저것 보고 들은 예서나 양반가에서 기초학문을 배운 이초란과 달리 채유진은 평민의 집에서 아버지에 의해 갇혀 자랐다.
기초가 부족해 꼴등을 했고, 딱히 맡아 하는 일 없이 잔심부름을 해 왔다.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
단순한 소망. 전보다 강렬해졌다.
“경남 고성에서 윤춘이 죽었다.”
아......
넉달 가까이 함께 학습하고 열띤 토론을 한 이들이기에 서로서로 잘 알았다.
안타까운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죽은 원인은 모른다.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채유진. 네가 윤춘이 하던 일을 이어받아서 마무리해라.”
광해의 말에 채유진이 당황했다.
“예? 제가 그토록 큰 일을......”
“망칠 것 같다면 지금 말해라. 다른 사람 시키게.”
광해의 차가운 말에 채유진이 입술을 씹다가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하겠습니다. 이 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꼭 완수하겠습니다.”
소리쳤다.
“그렇게 기합 팍 넣을 필요는 없고. 이제 병사들도 익숙해졌을 테니 관리하고 정리만 하면 된다. 방법은 배웠지?”
“예!”
“그래. 떠날 준비해라.”
채유진이 행장을 준비하는 사이에 광해는 지도를 펴고 좌표를 가늠한 후 게이트 마법진을 그렸다.
예서에게 앞으로 며칠간 할 일을 전해주자 채유진이 옷 몇 벌을 싼 보퉁이를 들고 왔다.
“가자.”
광해는 채유진을 안았다.
“예? 꺄아아아악.”
풍덩.
바닷물을 말리고,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병사들을 보니 적의 습격은 아닌 듯 했다.
“주상 전하를 뵙습니다.”
광해에게 무술을 배운 수호군이 광해를 알아보고 엎드려 절했다.
“됐다. 다들 일어나라. 어찌된 일이냐?”
“이 마을 놈들이 아침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그 음식을 먹고 윤춘 감찰관과 병사 둘이 죽고, 세 명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환자들부터 보러가자 배를 움켜진 병사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설사를 하며 배를 잡고 뒹굴고 있었다.
환자부터 치료하고 보니 죽은 이들도 비슷한 모양새였다.
“먹었던 음식은 어디 있지?”
“이쪽입니다.”
밥과 국. 나물들과 닭. 커다란 해물탕 냄비.
광해는 하나하나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맑은 해물탕에 손을 넣자 안티포이즌이 작동했다.
해물탕 안에 든 오징어, 망둥어, 게 등을 꺼내 하나씩 손을 댔다.
다들 미약하게 독기를 뿜었는데 그 중 반쯤 잘린 문어에서 맹렬한 독기가 올라왔다.
“이게 독의 원인이었군. 대접한 농민들을 데려와라.”
“예. 전하.”
곧 십여 명의 백성들이 끌려왔는데 벌써 고문을 당한 것인지 여기저기 얻어맞은 흔적이 가득했다.
“아이고 나리. 진짜 아닙니다.”
“저희는 고마워서 대접한건디. 암살이라뇨.”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농민들.
광해는 저분으로 문어를 들어 보여줬다.
“이건 누가 넣었지?”
“허엇. 그건 맹독문어입니다. 파란고리문어. 저희는 절대 건드리지도 않습니다. 어촌마을사람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아이들에게도 항상 가르치죠. 그걸 탕에 넣을 리 만무합니다.”
농민들이 절박하게 호소했다.
고의로 독문어를 넣고 광해의 눈을 속이는 거라면 역사상 최고의 연기자로 봐도 될 정도.
광해는 어민들의 말을 믿기로 했다.
광해는 병사들을 둘러봤다.
“누군가 독문어를 탕에 넣었다. 누구냐?”
과연 사건은 미궁속으로 빠지는 것인가.
그렇게 되기에는 광해의 능력이 너무 뛰어났다.
우선 죽은 이들부터 살폈다.
독살한 범인을 잡아줬으면 - 37665
죽기 직전 고통 속에 떠오른 소망.
그 소망이 연결된 이도 보인다.
사색이 된 병사 하나가 주춤 주춤 걸어 나왔다.
“저 저입니다요. 아침에 해변가에서 문어를 주웠기에 감사님께 진상했읍죠. 제가 아닙니다. 죽일 생각 없습니다요.”
이를 딱딱 떨어가면서 횡설수설 하는 병사.
결국 모든 게 실수였다.
광해는 윤춘을 봤다.
평민출신. 졸업시험 21위, 상위권.
전수조사를 끝낸 후 만주지역 자원 채굴전문가로 내정한 인물.
큰일 할 인물이 음식한번 잘못 먹고 죽었다.
입에 거품을 물고, 토사물이 옷을 뒤덮고 똥이 바지전체에 퍼진 채 굼벵이처럼 몸을 말고 죽은 모습.
“참 허무하구나. 사람 목숨이라는 게.”
이계에서도 느꼈지만, 사람 목숨은 참 허무하게 끊어진다.
너무도 많이 경험했기에 쉽게 마음을 주지 않고 계급으로, 효용으로 사람을 대하게된다.
“채유진. 장례해주고 훗날 가족에게 알려라.”
“예. 전하.”
광해는 구타당한 농민들을 불러와 일일이 치료해줬다.
“너희의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 선행의 결과가 이렇게 되어 안타깝구나. 몸은 치료했으나 정신적 충격은 남겠지. 다음해 가을에 쌀 세 석 씩을 주마. 그걸로 잊도록 해라.”
“괜찮습니다. 아니 감사합니다. 아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백성들이 황망히 절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현대 같으면 보상하라고 난리가 날 텐데 이 시대엔 보상하는 것만으로 이리 좋아한다.
아닌가.
현대에도 멀쩡한 사람 잡아서 고문해 살인자로 만들고 수십년씩 옥살이 시키는 걸 생각하면 현대나 지금이나 보상이라도 받으면 좋아하려나.
감격하는 백성들을 보내고 문어를 진상한 병사를 바라봤다.
사색이 되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젊은이.
“채유진. 어떻게 처벌해야 할까?”
“부... 분명 잘못은 있지만 고의가 아니었습니다. 용서해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이초란이라면?”
“...... 이판관이라면 사형을 언도했을 것입니다.”
애매하다.
법이란 항상 애매한 점을 포함하고 있다.
광해는 잠시 고민하고 판결을 내렸다.
“죄값을 계산하는 방향은 두 가지가 있다. 징벌적 판결과 교화적 판결. 죄의 무게를 계산해 판단하는 게 징벌적 판결이고, 앞으로 교육을 통해 옳게 변하도록 유도하는 게 교화적 판결이다. 나는 이초란에게 조선의 처벌 방향을 징벌적 판결로 내리도록 지시했다.”
채유진을 보며 말하자 그녀가 안쓰러운 얼굴로 병사를 바라봤다.
“그럼 사형입니까?”
“하지만 내가 직접 봤다. 이 병사는 사람을 죽였지만,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 내가 보증하마. 허나 아무 벌도 받지 않는다면 죽은 이의 가족에게 한이 쌓일 것이다. 그러니 벌을 주겠다. 너. 이름이 뭐냐?”
“백칠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열일곱입니다.”
백칠은 상주 출신이다.
지방군은 평소에 극소수만 운용되다가 관에서 징집명령이 떨어지면 군역 당사자가 모여 군역을 치른다.
당연히 무료봉사다.
백칠은 집안에서 한명 나오라는 지시에 다리 다친 형을 대신해 병역에 참가했다.
갑작스레 불려와 백관의 조사대에 합류했고, 한글과 산수를 배워 백성들을 조사하는 데 참여했다.
새로운 세상을 봤고, 왕이 바꿀 세상도 이해하게 되었다.
조사가 끝난 후 좋은 세상이 열리는 게 눈에 보이게 되었는데.
“향후 30년간 군에서 일하되 아무 봉급도 받지 못할 것이다. 나라를 지킴으로 네 실수로 죽은 동료들에게 속죄하라. 받아들이겠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하.”
백칠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죽을죄가 감해져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인지, 한순간 꼬여버린 인생이 서러워 흘리는 슬픔의 눈물인지는 모르겠다.
광해는 백칠에게서 눈을 떼 채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살짝 움츠러드는 채유진.
아직 사내가 무서운 모양이다.
그래도 스스로 이겨내야겠지.
미싱 공장이든 노가다 현장이든 시다바리가 더 힘들다.
여러 백관들에게 일이 몰릴 때마다 달려가 도왔고, 일이 끝나면 밤새 공부해 부족한 실력을 채웠다.
전보다 마른 몸과 진한 다크서클, 망가진 피부.
그동안 고생한 게 보이니 믿고 맡겨야지.
“이쪽은 윤춘과 함께 수학한 채유진 감찰관이다. 윤춘을 모시듯 돕거라. 여자 혼자 이곳에 남겨서 내 걱정이 많다. 그래서 특별히 신경 쓸 테니 무례를 범하지 말지어다. 알겠느냐?”
“예. 전하.”
병사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광해는 채유진을 봤다.
깡말랐는데 눈만은 빛나고 있다.
“고생한 거 안다. 보답 받아야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괴롭히거나 말 안 듣는 놈 있으면 이름 적어놔. 혼내주마.”
“알겠습니다.”
고개 숙인 채유진이 바로 병사들에게 조사를 시작하라 일렀다.
함께 교육받았는데 꼴찌하고 남들 다 중요한 일을 담당할 때 홀로 잡일만 하던 설움.
이제 좀 사라지겠지.
병사들에게 조사하라 지시하고 수호군을 불러 윤춘이 하던 일을 검토하는 모습이 꽤나 빠릿하다.
잘 하겠지.
어차피 단순 반복 작업이니까.
궁으로 돌아가려던 광해가 인상을 썼다.
마력이 부족하다.
한 달 전부터 흙가마솥을 다섯 개로 늘리자 매일 마력이 십만씩 빠졌다.
게이트 마법으로 무산에 한번 다녀오고 북경에도 다녀왔다.
올 때 이항복, 이덕형을 데려오니 북경 방문에만 백이십만 넘는 마력을 썼다.
이곳 고성에 올 때 채유진을 동반해서 육십만 마력이 빠졌다.
풍년이 들어 엄청난 마력이 들어와서 과소비 좀 한 것 같다.
이항복, 이덕형은 배타고 오라 할 걸.
현재 보유한 마력은 십일만.
매일 신도들이 광해의 건강을 기원하며 마력 일~이만을 주고, 이초란이 탐관오리를 사형시킬 때마다 풀린 원한이 들어오지만 한성까지 돌아가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음. 걸어갈까?”
플라이 마법을 써서 날아가는 방법도 있는데 플라이처럼 지속기능을 하는 마법은 몸에 마법진을 그려야 한다.
몸에 염동력과 치료 마법진 등을 새겼기에 남은 공간이 거의 없다.
신체강화나 공격마법 중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플라이를 새긴다면 남은 공간이 없어진다.
“음. 아무래도 신체강화가 낫겠지. 마법은 역시 물리마법이지.”
11월 초.
한켠엔 고성 앞바다가 있고, 한켠엔 단풍에 물든 산이 있다.
단풍놀이나 하며 슬슬 걸어가자.
가면서 민심도 살피고, 토속주도 마시고.
광해는 느긋하게 마음먹었다.
아공간에 곤룡포를 넣고 갓과 장포를 꺼내 양반의 복장으로 바꿔 입었다.
알록달록한 단풍을 보며 느긋이 북상했다.
“무협지에선 꼭 이럴 때 산적들이 나타나던데. 산적들한테 말 좀 뺏으면 좋겠는데.”
광해는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조선에 산적이라니.
“게 섯거라! 가진 거 다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산적 일곱명이 나타났다!
이거 무협지였냐.
- 작가의말
지속형 마법은 쓰기 힘들어요
나름의 밸런스패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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