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처벌
순도 100% 픽션입니다
“모현성.”
“예. 전하.”
공식적 자리인지라 모현성이 눈치껏 말을 높였다.
“입부. 평가 읊어봐.”
“예. 충무공이 가장 신뢰하는 부장 중 하나로 난중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름입니다. 충무공의 술친구였죠. 충무공이 지휘한 거의 모든 해전에 참전했고, 선봉장이자 돌격장으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충무공의 유언을 받아 노량해전을 마무리했으며 충무공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습니다.”
“충무공의 술친구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충무공 휘하 모든 장군들은 왜란 이후 견제 받긴 했습니다. 허나 입부는 뇌물 수수, 부정, 비리 등으로 탄핵받고 물러났습니다. 다른 장수들이 어이없는 일로 꼬투리를 잡힌 것과는 달랐죠.”
톡. 톡. 톡.
광해는 손가락으로 의자 팔걸이를 치며 생각에 잠겼다.
조선의 명장들.
전쟁을 혼자 할 수 도 없고, 그러기도 싫다.
모든 병사와 장군을 직접 키우고 교육할 수 없으니 일정부분 맡겨야 했다.
하지만 이리 되면 믿고 맡길 수가 없다.
“모현성. 훈련교본은 완성되었느냐?”
“기병교본, 육군교본, 해군교본 전부 완성되었습니다.”
“속성으로 급히 가르치면?”
“3개월이면 됩니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한산도에 육사와 해사를 만들어라. 모든 지휘관을 절반씩 불러 교대로 가르쳐라. 최소한 기본적인 실수는 하지 않도록 만들어라. 그 후 신입을 뽑아 가르치고.”
“명을 받들겠습니다. 전하.”
모현성이 깊게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광해는 묶여있는 입부를 봤다.
“네 죄가 무엇인지 알겠지?”
“명령불복종입니다.”
“왜 그랬지? 조선의 대전략을 충분히 듣고 이해했을 텐데.”
“어찌 왜구와 협상한단 말입니까? 조선을 침탈한 적은 전부 도륙해야 합니다.”
“후우.”
광해의 깊은 한숨에 제장들이 숨을 삼켰다.
톡. 톡. 톡.
광해가 긴 시간 침묵하면 손가락만 움직였다.
“난 그릇론이 싫다. 사람마다 애초에 정해진 그릇의 크기가 있다니. 이건 너무 귀족적이지 않느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평민이나 노비도 교육받고 활약한 기회를 받으면 큰일을 할 수 있고, 명문가의 자제일지라도 술 마시고 놀기만 했다면 능력이 형편없으리라 생각한다.”
광해는 말을 멈추고 장수들을 하나씩 봤다.
“충무공 휘하에서 무수한 전공을 세운 장수들. 너희를 믿어보려 했다. 왜구에 복수심도 있고, 충무공의 명을 받으며 배운 것도 많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믿고 맡겼다. 하지만 실망스럽군. 너무도 실망스럽다.”
광해가 쏘아보자 입부는 고개를 숙였다.
왕의 시선이 부담스럽겠지.
“난 그릇론이 싫다. 하지만 일부 인정해야겠구나. 입부 넌 돌격대장 감이다. 명령을 받아 위험한 전장으로 돌격하는 데엔 재주가 있지만, 부대를 지휘해서는 안 되는 돌격대장.”
공을 세웠으면 승급시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충성에 큰 문제가 생긴다.
문제는 승급시킨 이가 반드시 활약하는 건 아니다.
10년간 최고의 기술자로 활약한 이가 공장장이 되어 관리직을 맡게 되면 무조건 잘하는 건 아니다.
적성이라는 것이 있으니.
나폴레옹의 돌격대장이었던 조아킴 뮈라는 무수한 공적을 세워 나폴리왕까지 되었지만, 총대장을 맡은 전쟁에서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돌격대장으로 대활약한 입부.
허나 전장을 대국적으로 보는 데엔 문제가 있다.
돌격대장 이상의 권한을 주어선 안 된다.
이러면 써먹을 수가 없다.
“충무공은 간격을 철저히 유지했다 들었다. 조총의 사거리인 50보 이상. 그리고 천자총통의 사거리인 100보 이내. 거의 모든 전투에서 이 간격을 유지하며 싸웠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믿겨지지 않지만 충무공은 해냈다. 적에게 피해 받지 않으면서 아군만 공격할 수 있는 간격. 입부 넌 이 간격을 놓쳤다. 두 번째 충무공은 육상의 적과 다투지 않았다. 육상의 화포와 활은 함선보다 명중률이 높아 압도적으로 위협적이기 때문이지. 입부 넌 충무공의 선봉장으로 수많은 전장을 함께했으면서도 이런 기본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입부는 뭐라 항변하려는지 고개를 바싹 들었다가 광해의 무서운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입부 이순신. 네 죄는 간단하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죽지 않아도 될 아군을 죽였다. 명령불복종은 차후 문제다. 넌 살인죄다. 잠깐 사이에 천명도 넘는 아군 병사를 죽였다. 그 죗값은......”
죽이고 싶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충무공 휘하에서 싸우던 병사들은 대부분 퇴역했지만, 일부는 아직 남아 있다.
그들이 각 함선의 포군장과 노군장을 맡고 있다.
입부는 그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병사들의 사기를 생각하면 죽일 수 없다.
현 시대의 전술을 생각하면 입부의 전투가 틀렸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입부처럼 선두에서 목숨 내놓고 싸우는 장수는 존경받기 마련이니.
짜증난다.
“넌 앞으로 대장선에 갑판병으로 탄다. 복장과 관직은 그대로 하되, 갑판을 지키며 내 전쟁을 가만히 보기만 해라.”
“......예 전하.”
“이운룡. 좌군을 맡길 장수는 있느냐?”
“소신은 이완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완? 누군데?”
“충무공의 장조카입니다.”
“충무공의 이름값으로 맡길 거면 그만둬. 지금 입부에게 실망하고 자네들에게도 실망하기 직전이니까.”
광해의 시큰둥한 태도에 이운룡이 적극 나섰다.
“임란 내내 의병으로 종사하며 적극 참여했고, 스스로 규율과 전술을 잘 지켜 병사들의 신망도 높습니다. 충무공께서 상피제를 충실히 지켰기에 임란시의 공적을 평가받지 못했지만, 실제 활약상은 소신 못지않습니다. 충무공의 혈통을 조정에서 철저히 견제하기에 관직이 오르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군을 지휘할만한 인물입니다.”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적극 추천하는 폼이 정말 뛰어난 장수인 듯하다.
“그래. 이완에게 임시로 좌군을 맡겨보마.”
빈자리까지 정리한 광해가 천천히 일어섰다.
천인장 급 이상 장수가 전부 모여 있는 자리다.
광해는 장수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난 너희들의 능력을 모른다. 조정의 평가는 봤지만, 나라를 좀 먹던 성리학자들이 한 평가는 믿을 수 없지. 그래서 이번 원정에선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무거운 침묵에 빠지는 갑판.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나섰다. 너희 능력을 평가하기도 전에 저렇게 사고치는 이가 생겼구나.
알고 있겠지만, 난 신내림을 받았다. 조선 백성들의 원한이 하늘에 닿았고, 왜구에 복수하라는 힘을 받았다. 왜구를 상대로 난 무적이다. 왜적이 아무리 많고 전장이 아무리 불리해도 난 죽지 않는다. 내 강한 힘으로 너희를 보호하면서 너희가 능력을 펼칠 수 있게 기다려 줄 생각이었지만 지켜보자니 헛되이 목숨을 잃는 병사가 생길 것이기에 나섰다.”
파도소리조차 멈춘 것 같은 침묵이 돈다.
“신립은 소규모 부대로 정찰을 펼쳐 적을 살폈어야 했지만, 압도적으로 강한 적에게 예비대도 없이 모든 기병을 몰아쳤다가 전멸 당했지. 원균은 적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전력을 가졌지만, 적함 두 척의 야습에 겁먹고 도주해 조선 수군 전체를 잃었고. 용인전투에선 팔만명의 조선군이 왜구 천육백명의 기습에 도주하다가 전부대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이게 조선군이었다.”
광해는 임란 당시 가장 한심했던 전투들을 끄집어냈다.
“기본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싸워야 할 때, 물러나야 할 때, 버텨야 할 때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전투에서 피해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조선의 함선이 강하고, 왜구의 함선이 약하기 때문이다. 만약 적과 아군의 능력이 같았다면 아군은 패했을 것이다. 입부의 죄로 인해.”
입부는 아예 이마를 갑판에 붙이고 엎드려 있다.
“배우지 못했겠지. 성리학 따위를 배우고, 사서삼경을 공부해야 관직에 오를 수 있으니 전혀 쓸데없는 쓰레기 같은 걸 배우느라 군을 지휘하는데 소홀했겠지. 너희의 부족함을 탓하지 않으마. 다만 변화에 적응하라.
해군 사관학교, 육군 사관학교가 생기고 나면 많은 것이 바뀔 것이다. 기본을 익히고 진퇴와 지휘법을 배울 것이다. 지금처럼 수준이하의 지휘관은 절대 병사를 이끌지 못할 것이며 변화에 적응하고 능력을 펼친 이는 날아오를 것이다. 향후 죽으며 죽이는 전장은 없어진다. 나의 나라는 그리 된다. 그러니 열심히 익히고 적응하라. 알겠냐?”
“예. 전하.”
상사의 갈굼이 끝나가는 느낌이 들면 대답소리는 커진다.
이건 동서고금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똑같다.
장수들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운룡. 정리하고 다음 전투 준비해.”
“예. 전하.”
이운룡의 목소리도 우렁차다.
사흘 후 규슈 서쪽을 정리한 권준의 우군과 조선에 갔다 온 남이홍의 보급대가 왔다.
남이홍은 끌고 온 판옥선을 전부 두고 지금껏 나포한 일본군의 함선을 끌고 돌아갔다.
앞으로는 나포한 일본함으로 보급활동을 하게 될 것이다.
판옥선은 400척이 되었고 소모한 화약도 보충했다.
400척의 판옥선은 동쪽으로 전진했다.
목적지는 에도다.
예서는 하루하루 수척해졌다.
최명길을 따라다니며 무산에서 행하는 사업 모두를 배워야 했고, 새로운 지식들도 전수받아야 한다.
앞으로 진행될 사업도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
잠을 잘 시간조차 부족하다.
예서의 호위장이 된 이괄이 조심히 물었다.
“숙원 마마. 제가 도와드릴게 없습니까?”
이괄의 물음에 예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서는 거처를 나서 2구역 담장 안으로 홀로 들어갔다.
예서의 거처는 3구역.
3구역에서는 2구역의 일을 알아도 안 되고, 물어도 안 된다.
가족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2구역에서는 1구역의 일을 알면 안 되고.
이중 정보통제.
그로인해 이괄은 심한 박탈감을 느꼈다.
1,2구역 안에서 일하는 평민보다도 못하다는 박탈감.
예서의 거처엔 십여 명의 궁녀와 이십여 명의 호위병이 머무르고 있다.
예서가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할 일이 없어진다.
후에 한성으로 돌아갈 인원이기에 안으로 들어가는 게 허가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괄은 4월임에도 눈이 높이 쌓여있는 무산의 정경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할 일이 없다.
어린 임경업은 주상을 따라 왜구 원정을 나섰는데, 자신은 이 추운 곳에 남겨졌다.
활약할 일도, 할일도 없는 유배지에 남겨졌다.
가끔 자신을 보는 주상의 눈빛은 싸늘하기 그지없다.
신뢰받지 못한다.
대체 왜.
타그닥. 타그닥.
“7군 출격! 8군 대기하라.”
또 기마대가 출동한다.
초원기사단은 무려 이만 명까지 늘었다.
조선의 기병이 이만 명이나 된 적이 있던가.
기마들은 천 단위로 나뉘어 북방을 누비고 다닌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뒤쳐져버렸다.
유배지에 남아 가라앉고 있다.
“후우.”
열세 살에 명천현감으로 여진족을 토벌했고, 열여덟 살에 정5품 태안군수직에 올랐는데, 지금은 종7품 금군호위가 되었다.
심지어 국왕의 호위도 아닌 후궁의 호위.
내가 왜 강등당해야 하는데!
“자자. 여기 땅을 걷어내고 돌을 깔아 도로를 만드는 겁니다. 오늘 안에 끝냅시다.”
도로를 건설하는 노역병들이 다가온다.
양반이었던 노역병과 그들을 지휘하는 평민.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
양반 중 얼굴을 아는 자를 마주치면 불편하기에 집으로 들어가려 했다.
‘어? 이영덕?’
국왕이 남자를 전부 강간할거라 소리치며 선동하던 자.
수염을 밀고, 얼굴에 화상을 입어서 인상이 바뀌었지만, 분명 그자다.
‘저자가 왜 노역병을 지휘하지?’
무언가 엄청난 걸 봐 버린 것 같은데.
- 작가의말
광해는 수호군과 초원기사단에 영향을 주었을 뿐 아직 나머지 병력은 기존 조선군입니다
입부와의 갈등은 단순히 입부가 이상한게 아니라 개인적인 장수성향이 부대에 투영되는 구시대 부대를 상징합니다
무관과 문관의 갈등도 슬쩍 보였고요
입부의 캐릭터는 돌격성향과 왜구에 맹렬한 복수심을 갖고 눈이 뒤집혀진 맹장으로 잡았습니다
개인적으로 뇌물이나 부패 비리를 싫어해서 낮게 잡은 면도 있고요
이운룡이나 권준도 탄핵받았지만 그 이유가 어머님 상이라던가 불효라던가 정말 어처구니없는 꼬투리를 잡힌데 비해 무의공 이순신은 실제로 부정부패를 저질렀죠
충무공의 선봉장이지만 딱히 훌륭한 인물이라 생각되지 않아요
물론 구시대의 장군으로는 상급입니다
원균이나 용인전투처럼 적을 보자마자 압도적 전력을 갖고도 일제히 도주하던 머저리들보다 천배 낫죠
목숨을 가리지 않고 선두에서 돌격하는 장군은 패할 전쟁도 이기고 무너지는 사기도 키워주죠
다만 모현성이 가져온 현대지식으로 지휘하게될 새로운 군대와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왕이 지켜보는데도 입부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 현대인의 시각엔 작위적으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과거엔 흔한 일이었습니다
울돌목에서도 충무공이 홀로 반나절을 버틴 것은 본래 작전이 아니라 충무공을 제외한 나머지 부하들이 참전하지 않고 구경해서 그랬지요
수차례 참전하라는 신호에도 무시하고 구경하다가 반나절간 대장선이 싸우는걸 보니까 해볼만하다 싶어서 뒤늦게 참전해서 대승을 이뤄냈죠
무려 충무공의 수하들이 말이죠
세키가하라에서도 영주별로 절반 이상은 구경만하다가 퇴각하거나 승세가 기운 후 참전해 공적을 올렸고 다른 나라의 전투도 부대별로 이해하지 못할 헛짓거리가 많았죠
입부의 이런 행동은 이 시대에 매우 흔한 일이었습니다
타 소설들 보면 성리학자는 쥐잡듯 잡으면서 군부는 시키면 제대로 하는 무적의 모습을 보여주는게 마음에 안들었거든요 고정관념이나 지식의 한계 등 갈등이 없을 수 없는데
광해가 나라를 잡았다 장군병사들이 와아아아 하며 말을 따랐고 현대적 전술을 이해해 무적의 부대가 되었다
라고 묘사하기엔 너무 챙피하고 블라블라블라
앞으로 입부를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거에요
사실 이런말 없이 즐겁게 호로록 진행되야 하는데 독자분들의 세계관과 충돌할 것 알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 하려고 변명부터 주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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